12인의 노한 사람들 (12 Angry Men, 1957)
감독 : 시드니 루멧
주연 : 헨리 폰다(데이비스)
담백한 50년대 영화의 매력
법은 재미없다. 완고하고 딱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헐리웃 식 법정 영화는 법 이외의 부산물에 집중한다. 사라진 증인, 번복되는 증언, 변호사나 검사를 음해하는 세력 등, 관객을 끌어들이는 온갖 흥밋거리들은 법정의 외부에 있다. 음해 세력은 가능한 한 거대해야 하고, 주인공이나 그를 도울 증인들에게 닥치는 사건들은 관객을 놀라게 할 만큼 드라마틱해야 한다. 간혹 법정 내에서 긴장감 있는 재판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위에 언급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을 때 얻어지는 보너스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그러한 볼거리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어쩌면 현란한 부산물들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그런 것들을 이미 질릴 만큼 맛 본 관객들에게는 신선하게 다가올 것이다.
영화는 대부분 배심원 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배심원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빈번히 사용되는 롱테이크와 클로즈업은 관객들로 하여금 때로는 외부에서 객관적 시선으로 상황과 사람을 관찰하게끔 유도하고, 때로는 고도로 집중된 시선으로 인물의 미세한 심리 변화에 몰입하게 한다. 관객은 풀어가는 방식에 따라 이 지루한 소재도 놀랄 만큼 흥미진진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문제는 창의력이다.
빈민가의 한 소년이 부친을 살해한 일급 살인범으로 체포되어 법정에 선다. 증인은 3명. 한 명은 맞은 편 건물에 홀로 살고 있는 삼십대 후반의 여성으로, 범인이 부친을 나이프로 찌르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증언하였다. 다른 한 명은 범인이 살고 있는 주택의 아래층에 사는 팔십 대 독거노인. ‘죽여 버릴 거야!’라는 소년의 외침과 더불어 천장이 흔들릴 만큼의 ‘쿵’소리를 듣고 뛰쳐나가 보니, 막 층계를 내려가 출입구로 도주하는 범인을 목격했다고 증언하였다. 현장에서는 부친의 가슴에 꽂혀 있는 나이프도 그대로 발견되었으며, 근처 상점의 직원은 살해현장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은 나이프를 소년에게 팔았다고 증언하였다. 증인과 증언, 물증이 결정적인데다, 범인은 평소 부친에게 심한 학대를 받았었다는 정황까지. 여러모로 봐도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시나리오다.
배심원들은 재판 과정에서 들은 증언과 진술과 자신의 상식, 편견을 바탕으로 한 피상적 판단을 통해 내심 소년을 유죄로 단정 지어 놓고 배심원실로 들어온다. 그들 앞에 나열된 모든 증거들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이렇게 명백한 사건에 따로 시간을 들여 회의를 거쳐야 한다는 사실조차 시간 낭비로 느끼고, 바로 유무죄 여부를 투표로 결정하기로 한다. 사람들은 만장일치로 유죄 판결이 날 것이라 생각했지만 물론 상황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데이비스(헨리 폰다)라는 단 한 사람이 무죄에 투표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짜증을 낸다. 데이비스가 그렇게 한 이유는 그의 말을 빌자면 단 한 가지다. ‘나까지 유죄로 투표하면 소년은 곧 죽게 될 것이 아니요.’
데이비스역의 헨리폰다
소년의 알리바이는 허약하다. 그는 아버지가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겁에 질려 집을 뛰쳐나왔고, 극장에서 영화를 본 후 새벽에야 집에 돌아왔다고 했지만 자신이 본 영화 제목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데이비스는 증언들의 틈새에 어떤 모순점이 있음을 희미하게 느낀다. 그리고 그의 용기 있는(!) 발언은 나른한 배심원 실에 불편한 파동을 일으킨다. 왜 용기 있는 발언인지는 영화를 보면 알 것이다. 덥고 습기 찬 날씨에 당장이라도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자신을 노려보는데, 아주 미약한 모순점만 가지고 그들을 몇 시간 붙잡아 놓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12인의 친절하고, 무기력한 사람들
배심원들은 저마다 다양한 직업과 나이, 환경을 가진 백인 남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비교적 젊은 사내에서 노인, 빈민가 출신에서부터 중산층 출신까지 당시 미국이 ‘보통 사람’이라 생각했던 인물들의 전형이다.(물론 흑인이나 여성은 배제되어 있다.) 이들이 재판장을 벗어나 배심원실로 들어오는 모습은 하나 같이 무겁고 쳐져 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더위에 축 늘어진 어깨, 사건과는 상관없는 잡담이나 하찮은 농담 따먹기를 하는 사내, 모자를 벗어 얼굴에 대고 부치면서 작동하지 않는 선풍기를 불평하는 남자, 피곤에 지친 노인 등, 이들의 표정과 행동, 말투에는 삶에 대한 무기력함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서 조심스럽게 매너를 지킨다. 미소를 띠며 첫 인사를 하고, 명함을 주고받으며 상냥하게 자기소개를 한다. 12인의 무기력한 사람들이자, 친절한 사람들이다. 이 무기력함과 어색한 상냥함은 영화 초반의 배심원 실을 지배하는 분위기다. 그것은‘법’이라는 단어가 주는 딱딱함에 대한 무기력함이며, 더 나아가 완고한 미국 사회에 대한 무기력함이다.
하지만 이 한여름의 무기력한 나른함은 데이비스라는 한 사람에 의해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그는 완고한 증거들에 하나씩 의문을 던진다. 첫 시작은 ‘단어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했는가?’다. 배심원들은‘빈민가’,‘불량소년’,‘학대’등 법정 안에서 사용되었던 단어가 부지불식간에 자신들의 판단에 미친 영향이 생각했던 것보다 예상외로 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 곳에서 자란 녀석들은 뿌리부터가 잘못된 거야. 폭력적이고 멍청하지. 우리말도 제대로 모를 걸?’이라는 한 사람의 경멸 섞인 말에 배심원 중 한 명이 자신 또한 ‘빈민가’출신이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당신은 그 녀석과 다르지 않소?’라는 말에 ‘무엇이 다르죠?’라고 반문하는 사내. 사람들은 침묵한다.
힘없어 보이는 이 노인은 그러나 내면에 칼처럼 예리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사실’일 것이라 생각했던 모든 것들에 조금씩 틈이 생기기 시작한다. 폴은 집요하게 그 빈틈을 파고든다. 영화의 핵심은 바로 이 과정이다. 중구난방으로 이어지는 열렬한 대화와 팽팽한 긴장감의 와중에 배심원들은 한 사람씩 자신의 독특한 개성을 드러낸다. 백발의 노인은 자신의 정체성을‘이제는 아무도 조언을 구하지 않는 퇴물이 된 인간’으로 정의 내린다. 배심원 1,2,3일 뿐이었던 사람들은 빈민가 출신의 사연 많은 사내로, 결벽증에 완벽주의자로, 아들에게서 버림받은 아버지로, 언어에 집착하는 학자로 형상화된다.
무기력하고 상냥한 소시민의 눈빛은 분노와 혼란, 충격으로 빛나고 질서 잡혀 있던 표정은 흐트러지며 몸짓은 점점 커진다. 상냥한 대화는 거칠어지고 불친절해지며 직선적이 된다. 말다툼은 서로를 향한 분노로 번진다. 대화의 과정 동안 사람들은 자신과 타인 사이에 놓인 ‘차이’와 편견의 골을 발견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평등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배심원제도’가 골 깊은 불평등과 서로를 향한 경멸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한 사내가 데이비스를 앞에 두고 살인을 재현해보는 장면에서 칼을 든 채 데이비스를 노려보는 사내의 눈빛은 살의마저 담고 있어 영화 속 인물들과 관객을 긴장시킨다. 팽팽한 긴장감과 뒤틀린 블랙유머가 스며있는 인상적인 장면이다.
이제 하나의 고유한 개성을 가지게 된 인물들은 증거와 판결 사이에 숨겨져 있던 ‘과정’이 하나 둘 씩 드러나면서 자신의 과거가 그것에 결부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사건에 대해 전혀 ‘의외의 사실’들이 튀어나오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전혀 상상치 못한 스스로의 얼굴이 튀어나온다. 폴이 유죄를 선언함으로써 화를 내기 ‘시작’했던 사람들은 각자가 내린 판단의 근거를 파헤쳐 가는 과정을 통해 단단한 가면 속에 숨기고 있던 자신의 콤플렉스와 상처, 수치와 분노를 어쩔 수 없이 드러내게 된다. 그 성난 감정들은 당시 미국의 시민들이 지니고 있던 분노 그 자체다.
영화 속 토론 과정은 그 자체로 예술가의 창작 행위를 떠올리게 한다. 창작은 죽어있는 언어와 인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은폐되어 있던 과거를 캐내고 그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시켜 같이 호흡하며, 상상력을 통해 진부하고 단단해진 언어를 창조적으로 해체시킨다. 영화는 이를 통해 ‘법’에도 예술가가 가진 창조적 마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무미건조 해 보이던 12명의 사내들이 점차 숨겨진 성격과 과거와 상처를 드러내면서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과정은 ‘보통사람’보다 드라마틱한 존재가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명백하지만 미심쩍은 결말
앞에서도 언급했듯 폴은 ‘나까지 유죄에 투표하면 소년은 사형당할 것이므로’무죄를 선언했다. 영화는 유죄를 주장하던 단 한 사람마저 기어코 굴복시키고 끝난다. 여기에 또 하나의 폭력성이 있다. 평등의 기치를 내건 ‘만장일치’의 폭력이다. 화면은 비좁은 배심원 실을 벗어나 법원의 외관을 비춘다. 배심원들이 차례로 떠나고, 데이비스와 노인이 밖에서 인사를 나누며, 마지막까지 유죄를 주장했던 중년의 사내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다분히 이상적이고 완벽한 엔딩이다.
하지만 영화는 소년의 유무죄 여부를 알려주지 않는다. 여전히 배심원들이 틀렸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진실이 드러났다면, 이 영화가 내린 결론은 깔끔하게 이분법 화 되었을 것이다. 영화는 배심원제도의 가장 모범적인 모델을 제시하는 답안이자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평등의 이념, 법제도, 그리고 휴머니즘을 찬양하는 도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명백한 결론을 아슬 하게 피해간다. (물론 여전히 그러한 역할을 훌륭히 시행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방향을 바꾼 적의의 시선
만장일치로 무죄가 선언되는 장면을 다시 돌이켜 보자. 그것은 통쾌하긴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미심쩍고 씁쓸하다. 의견을 바꾼 사람들 중에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판단을 바꾼 사람도 있지만, 다분히 수동적으로, 다수가 가진 파워의 무게에 휩쓸려 처음의 의견을 뒤집어 버린 사람도 있다. 애초부터 사건에 별다른 생각이 없던 야구애호가는 그저‘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니까’자신도 따라서 생각을 바꾼다.
공격받는 야구애호가씨.
마지막 남은 유죄 투표자
물론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과정’그 자체이며, 데이비스가 처음 이야기했던 타인에 대한 동감과 연민(sympathy)의 가치는 눈부시다. 인간애에 입각한 토론의 성과는 놀라울 정도다. 하지만 처음 데이비스에게 화를 내고 그를 공격했던 ‘다수’들이 끝에 가서는 마지막 남은 유죄 투표자 한 사람을 향해 ‘다수의 파워’를 다시 그대로 재현하는 광경이 주는 아이러니함은 새디스트적 흥분과 씁쓸한 여운을 동시에 남긴다. 소수를 향한 그 적대적 눈빛들은 약자를 향한 인간의 본질적 폭력성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결국 분노는 사라지지 않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