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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德께서는 東學의 道人인가? 天道敎의 敎人인가?(8-2)
김정인이 2009년에 한울아카데미에서 간행된『천도교 근대 민족운동 연구』의 4부ㆍ천도교의 친일화와 친일활동/P.275. 에서 일제하에서의 천도교의 동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34년 천도교 신파가 친일화를 선언할 무렵, 일제 당국이 불교·기독교·신도만을 종교로 인정하던 기존 방침을 변경하여 천도교를 포함한 4대 종교를 공인하고 나머지 종교단체는 합동 또는 해소시키려고 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었다. 이에 고무된 천도교 신파는 공인종교로 승인할 것을 요구하는 건의안을 당국에 제출했다. 그런데 이 시기 일제의 종교정책은 1935년에 입안된 심전개발정책에 근거해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심전개발의 목표는 ‘국체관념(國體觀念)을 명징(明徵)하는 것, 경신숭조(敬神崇祖)의 사상 및 신앙심을 함양하는 것, 보은·감사·자립의 정신을 양성하는 것’에 있었으며, 구체적으로는 종교와 교육 방면의 정신교화 방안이 마련되어 시행되고 있었다. 종교의 경우는 “천황은 국가의 지배자·통솔자이며 국민전체의 종가존장(宗家尊長)이며 신격화된 신이다”라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입각해 신도를 다른 모든 종교의 상위 체계에 놓는다는 것을 전제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방침이 마련되었다. 신도에 대한 신앙을 국민적 의무로 규정하고 다른 종교를 갖는다 하더라도 신도 신앙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1936년 8월 [개정신사규칙]을 공포하고 1면 1신사주의에 입각해 신사를 건립했다.
이러한 심전개발정책에 맞추어 일제 당국은 1935년부터 ‘불교의 부흥을 중심으로 한 종교통제’를 계획했다. 그리고 ‘종교부흥운동의 중심적 종교로 불교, 기독교, 신도, 천도교 등의 4대 종교를 인정하고 그 외의 종교 유사 단체는 근사한 것으로부터 합동시키는 한편 보천교 및 기타 민심의 미혹을 끼치는 단체는 엄중히 취체한다.’는 원칙을 수립했다. 1936년부터는 공인종교의 통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본격적인 ‘유사 종교’에 대한 탄압이 단행되어 보천교· 무극교· 강증산교· 동화교 등이 강제해산 당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공인종교의 경우도 전시체제하에서 일제의 시책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 즉 친일화되지 않으면 존립조차 어려웠다. 특히 종교는 정신교화의 측면에서 전쟁동원을 위한 정신무장에 솔선수범해야 하는 임무를 강요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제의 압력에 의해 종교별로 친일을 표방하는 통합기구가 속속 결성되었다. 조선불교31본산주지회(1937), 조선유림연합회(1937), 조선기독교연합회(1938), 조선유도연합회(1939), 천도교총부(1940) 등이 그것이다.
-中略- 일제 당국은 천도교를 끝내 종교로 승인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천도교의 친일협력활동에 대해서도 상시적으로 감시하고 간섭하고 때로는 탄압했다. 천도교의 모든 행사는 그것이 친일활동이라 할지라도 사전 승인과 사후 보고가 따랐다. 시국강연은 물론 지방순회강연의 경우 사전에 내용과 일정을 조선총독부 경무국 및 종로경찰서 고등계 등에 제출하여 허가를 받아야 함은 물론, 사후에도 상세한 상황 보고를 해야 했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하고 여비를 제공하는 최린의 시국강연 원고도 사전 검열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천도교연맹이사장회의도 조선총독부 경무국과의 사전 협의가 있어야 개최 가능했다. 그뿐만 아니라 천도교에서 발행하는 공문·기도문 등의 문건 및 ≪신인간≫ 등의 출판물은 반드시 사전 검열을 거쳐 배포되었다. 그야말로 검열의 일상화였다. 일제 당국은 천도교단의 현황과 운영 전반에 대해서도 일상적으로 감시하고 간섭했다. 종로경찰서 고등계는 수시로 형사를 파견해 사찰함은 물론 교단 간부들의 신분조사서나 교황(敎況) 전반에 대한 조사보고서 등을 요구했다. 게다가 천도교당과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을 징발해 종로구청 호적과와 군피복공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처럼 천도교는 전 교단을 총동원하여 친일협력체제를 구축하고 일제 당국의 시책에 적극 호응했지만 전시체제하의 식민지민이라는 현실적 제약 때문에 일제의 감시와 탄압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천도교청년당 간부로 치안유지법 위반의 경력을 갖고 있는 이근섭, 조기간, 김명희, 백중빈, 길윤기 등은 보호관찰대상으로 분류되어 경성보호관찰소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다.
-中略- 한편 이종린의 주도하에 천도교 구파가 1940년 신구합동에 응하자 이를 반대하던 구파 측 호남 일부 세력이 연월성미를 천도교총부에 상납하지 않고 임실을 중심으로 자치제를 실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1937년부터 모색되던 신구파합동이 구파 지도자인 박인호와 김재계가 사망한 바로 그 달인 1940년 4월을 전후한 시기에 성사된 점으로 미루어볼 때, ‘천도교구파불온계획음모사건’의 주역인 두 사람이 친일노선에 반대했을 가능성도 높다. 이종린과 함께 친일대오에 참여한 구파 지도자들 중에도 친일이 전면화되어 갈수록 점차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 있었다. 가령 1943년 8월 [천도교교약]의 개정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개정을 하면 이제는 ‘천도교회는 황국의 도에 즉하고 입교(立敎)의 본의(本義)에 기(基)해서 민중을 교화하여서 황운(皇運)을 부익(扶翼)함’이라는 조항을 삽입해야 한다는 말을 전해들은 구파 지도자 최준모, 한순회, 정환석 등은 그것이 ‘천도교 정신에 위배된다’면서 반대했다고 한다.
천도교 지도자 중에도 은둔이나 회피를 통해 천도교단의 친일에 동참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구파 지도자 중 조선공산당 출신의 노동운동가였던 박래원은 1937년 4월까지도 천도교청년회 중앙위원으로 활동했으나, 신구파합동 이후 활동은 전혀 알 수 없다. 신파의 경우, ‘오심당사건’으로 곤혹을 치른 김기전은 1941년 이후 수행에 관한 글을 종종 ≪신인간≫에 발표했지만, 친일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신념이 굳은’ 그는 신병을 핑계로 천도교 수련원인 우이동 봉황각에서 교회의 상담역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해방 후 곧바로 활동을 재개한다. 1945년 10월 천도교 청우당 부활 전당대회에서 위원장으로 취임하고 발행 겸 편집인의 자격으로 ≪개벽≫을 복간했다. 친일 행적이 뚜렷하지 않았으므로 활동 재개에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았던 것 같다. 한편 육임파의 오영창이 일부 지도자가 이탈하는 사태에도 불구하고 끝내 합동을 거부한 것도 신구파의 친일노선에 대한 거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권동진, 오세창의 경우도 해방 이후 곧바로 활동을 재개하면서 친일 행적으로 궁지에 몰린 최린에게 은퇴를 강권했던 것으로 보아 소극적 친일로 일관한 듯하다. 이러한 친일의 대세 속에 저항의 기류가 잔존하는 형세는 곧 맞게 될 해방 정국에서 분열과 갈등의 불씨가 되고 말았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註 00 ; 김정인 『천도교 근대 민족운동 연구』 한울아카데미 2009.
김정인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인문대학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마쳤다. 현재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천도교 민족운동을 비롯해 근대 민족 운동사를 연구해왔으며, 최근에는 근대 초등 교육과 현대 대학 교육 등 교육사 관련 분야와 한·중·일 간의 역사 대화, 그리고 동 아시아사에 관심을 갖고 있다.
대표 논저로는 「일제 강점기 천도교단의 민족운동 연구」, 「민족해방투쟁을 가늠하는 두 잣대: 독립운동사와 민족해방운동사」, 「동아시아 공동 역사 교재 개발, 그 경험의 공유와 도약을 위한 모색」, 우리 민족의 걸어온 길, 개벽에 비친 식민지 조선의 얼굴(공저), 동아시아에서 역사인식의 국경 넘기(공저), 우리 학문 속의 미국(공저), 사회를 보는 새로운 눈(공저) 등이 있다.
『천도교 근대 민족운동 연구』목차
서론
1부ㆍ천도교의 문명개화노선과 3·1운동
1장 천도교의 창건과 정치노선
2장 대한제국기 정치세력화와 정치 투쟁
3장 천도교의 성장과 3·1운동
2부ㆍ천도교의 노선 갈등과 분화
1장 근대화 노선을 둘러싼 갈등과 분화
2장 민족운동 노선을 둘러싼 갈등과 분화
3부ㆍ천도교 계파의 노선과 민족통일전선운동
1장 천도교 혁신파와 고려혁명당
2장 천도교 신파와 조선 농민사
3장 천도교 구파와 신간회
4부ㆍ천도교의 친일화와 친일활동
1장 천도교 신파의 민족진영 이탈과 친일논리
2장 천도교의 통합과 친일협력활동
결론
일본의 식민지 시대에 이렇게 극악한 일본의 천도교에 대한 감시 검열을 통한 탄압에서 겨우 연명해온 교단의 명맥은 또다시 행방과 6.25동란으로 인한 고초를 겪게 된다.
윤승용은 불교평론(43호/2010. 06)이 마련한 특집에서 ‘한국전쟁과 종교지형의 변화’란 글에서 6.25동란으로 인한 종교지형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前略 - 한 사회의 종교지형의 변화는 ①각 종교의 내적인 역량 ②사회구조적 변화 ③종교시장의 변화 등이 추동한다. 여기서 각 종교의 내적인 역량이라면 인적 물적 자원과 교리의 재해석 능력을 의미한다. 교리의 재해석 능력에는 각 종교의 이데올로기적 시선도 포함된다. 그리고 해당사회 전반의 변화를 추동하는 전쟁과 같은 대형 사건은 대체로 종교적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데, 이때 전쟁의 성격에 따라 사회구조가 변화되고, 그 변화의 방향에 따라 신앙 대중이 요구하는 신앙적 성향도 달라진다. 이렇게 종교시장의 변화는 사회구조의 변화를 기본적으로는 반영하는 것이지만 예외적으로 시민사회가 발전하지 못한 곳에서는 국가의 종교시장 개입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한국전쟁 당시 종교지형의 변화는 각 종교가 가지고 있던 내적 역량도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국가권력의 종교시장 개입과 한국전쟁으로 야기된 종교시장의 변화가 중요한 함수가 된다. 그래서 이 글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종교지형의 변화와 그 특성을 종교시장을 중심으로 추적해 보기로 한다. 구체적으로 분단국가 건설과정에서 정치권력이 종교시장에 개입함으로써 의도적으로 형성한 종교시장의 변화와 한국전쟁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난 종교시장의 변화, 이 두 가지의 변화가 이전의 종교지형을 바꾸어 놓은 원인이자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한국전쟁 전후에 나타나는 종교시장의 변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당시의 종교지형의 형태와 그 특성을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中略- 1945년 크리스마스를 국경일로 지정한 점, 기독교계의 요구를 수용해 형목 제도를 만들어 형무소 교화 사업을 전담하게 한 점, 1947년 국영 성격을 가진 서울중앙방송을 통하여 선교 방송을 하도록 한 점, 일요일의 공휴일화를 추진한 점 등이다. 이들은 명백히 한국 문화적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의도된 기독교 편향의 종교 정책에서 파생된 것이고, 나아가 국내 종교 세력 중에서 기독교, 특히 개신교 세력을 의도적으로 육성하였음을 잘 보여 준다. 반면에 식민지 권력의 도구였던 불교의 사찰령이나 포교 규칙 철폐에 대한 불교 측의 요구는 묵살하고, 일본 종교 단체가 남겨 놓은 적산자산의 처리 과정에서도 기독교에 재산권을 불하한 것과는 달리 재산관리권만 넘긴 것 등에서 그 편향성을 읽을 수 있다. 한편, 전통종교들과 민족종교들이 지니고 있었던 강한 민족주의 성향과 해방 이후 좌우대립과 분단정부 수립에 대한 갈등은 미군정 당국으로 하여금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통제하고 국가권력에 종속되도록 하였다.
-中略- 요컨대, 미군정이 기독교를 ‘준(準)국가종교’로 우대한 종교 정책, 종교의 재건 과정에서 종교계 분열과 좌절을 가져다준 일제 잔재 청산, 미군정에 이어 친미반공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킨 분단정부 수립 과정, 사찰의 물적 토대인 농지를 농민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과 일본 종교가 남겨 놓은 적산자산의 처리 문제 등이 해방 정국에서 종교시장에 영향을 미쳤던 중요한 사건들이다. 이들 중에 미군정의 종교 정책을 제외한 다른 것은 전쟁 도중 또는 한국전쟁 이후에도 한국의 종교시장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中略- 전쟁이 야기한 이 같은 생활상의 변화는 전통종교 문화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그 전달 기능마저 기대하기 힘들게 하였다. 이런 전통문화의 공백은 전통에서부터 자유로운 보다 도시적이고 개인적인 새로운 문화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 농민과 제대군인들이 대거 도시로 몰려들었으며, 여기에 월남 피난민 인구까지 유입되어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종교시장 때문에 종교성은 다소 미약했으나 전통적인 공동체의 유지와 사회 개혁적 성향이 강했던 유교나 민족종교는 전쟁으로 야기된 사회구조의 변화와 친미반공 일변도의 사회에서 이미 신앙의 설득력이 매우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中略-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까지 남한의 종교들은 친미반공이라는 시민종교와 더불어 종교시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제도적인 기성 종교들은 모두 정치화의 단계를 넘어 스스로 이데올로기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해방 당시 한국의 종교들은 좌익에서 중도를 거쳐 극우에까지 다양한 이데올로기 스펙트럼이 있었다. 그와 함께 민족에 관련한 시선도 종교에 따라 각기 입장이 달랐다.
당시 대부분의 종교는 이러한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이데올로기 입지에 따라 자신의 운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앞서 언급했지만 단독정부 수립 과정은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특정 종교를 지원하거나 배제하는 과정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기존의 복합적인 현실을 무시한 채 이념만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종교를 비롯한 사회 전 영역에서 희비가 엇갈리는 경우가 많았다. 친일과 반일이 뒤집히고, 민족과 반민족이 뒤집히고, 민중과 반민중이 뒤집히는 등 어이없는 결과가 나타나곤 했다.
-中略- 또한 민족통일의 이해와 민중의 이해를 동시에 담보한 민족종교는 종교에 따라 또는 종교 내부의 파벌에 따라 이데올로기 성향에 다양한 편차가 있었지만 민족통일에 대해서는 입장이 확고했다. 특히, 천도교는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좌측에 가까운 중도였으며, 대종교는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우파에 가까운 입장이었으나 역시 통일 민족의 이해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中略- 그리고 이전까지 한국종교들은 대체로 남성 중심과 농촌형 종교들이었다. 그런데 전쟁 이후로는 여성 중심, 도시형 종교들이 종교시장을 주도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이전의 종교시장을 지배한 종교들은 불교와 유교와 같이 신분의식이 남아 가부장적인 문화 전통에 근거하는 전통종교이거나 민족적 해방을 추구하는 사회성이 강한 대종교나 천도교 등의 민족종교들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이 같은 가부장적인 종교나 민족적인 성향이 강한 종교들이 크게 쇠퇴하고 보다 개인적이고 핵가족적이고 여성형의 종교나 도시 유랑민의 생활을 감싸고 포옹하는 도시형 종교들로 채워가게 된다.
-中略- 해방 이후 15년 동안 연평균 25% 이상의 성장을 보여 주었다. 또한 내분을 겪지 않고 일사분란하게 분단국가 수립을 지지하며,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던 천주교도 해방 이후 급속한 교세 성장을 이룬다. 해방 당시 북한 교인 5만3천 명 정도의 신자를 잃었음에도 남한의 천주교회는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해방 당시 남북을 합친 교세를 만회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 말에는 연평균 16.5% 속도로 고속 성장하여1960년에는 신자 수가 45만을 넘어섰다. 이런 급속한 성장은 기독교 선교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선교드라마를 남한에서 연출한 것이다.
반면, 불교와 유교는 교세가 급격하게 감소했다. 불교는 1952년 250만으로 집계되었으나 1960년에는 불교 인구가 120만 명 정도로 크게 반감하였다. 그리고 유교는 해방 이후 계속 감소하여 1959년 유도화총본부에서 회원등록제를 실시했을 때 30만에 불과하였다. 또한 천도교는 해방 당시 신자의 70∼80%가 북한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분단으로 말미암아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천도교 신자들은 대체로 농민들이었기 때문에 월남한 신도도 많지 않았다. 북한 정권과의 갈등을 일으킨 일부 지도층들을 중심으로 월남했기 때문에 신도 수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한국전쟁 이후 천도교 교세는 50만 명 이하로 축소되었다.
-中略- 이처럼 당시 전통종교나 민족종교는 모두 교세의 감소 내지 정체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후에도 불교와 유교, 그리고 천도교는 자체 분열에 때문에 사회의 변화에도 시선을 외부로 돌릴 여유가 없었다.
-中略- 이같이 국가권력이 종교시장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여 이전에는 신흥 종교 수준이나 다름이 없었던 개신교가 해방 정국부터 사회적 헤게모니를 가진 종교로 완전히 ‘준국가종교’로 재형성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전쟁이후 학교, 병원, 구호단체 등의 각종 기독교기관에서 생계기반까지 제공받는 기회도 가지게 되었다. 전래 이후 한동안 개신교는 문화적인 이질성 때문에 민중의 종교적 감수성 때문에 한계를 절감하던 기독교가 좌우대립 속에서 탁월한 우익의 상징으로 등장하여 사회 정치적인 힘을 통해서 교세를 팽창해 갈 수 있었다.
해방 당시 6대 종교로 대표되었던 한국 종교지형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개신교와 천주교 등 기독교는 비약적인 성장, 불교와 유교 등 전통종교는 분열과 침체, 천도교와 대종교 등 민족종교는 쇠퇴라는 종교지형으로 큰 변화를 보였다. 전쟁이후 유교와 천도교, 대종교가 6대 종교의 종교지형에서 주도권을 상실하고 개신교와 천주교, 불교만 남아 주도권을 다투게 된다. 이같이 한국전쟁은 한국종교사에서도 급격한 변동을 초래한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의 한국 종교지형에서 보이는 많은 특징들은 이때 형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우리는 이 시기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에 답을 할 사람은 없다. 많은 교단의 지도자들이 아무 말도 없이 환원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 시대마다 간여했던 지금에 남아있는 중견 교역자 이상의 지도자들도 반성하거나 당당하게 답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교단사로 본다면 단절되고 묵살된 시간이었다고 평가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의 천도교가 빨리 해야 할 일은, 넓고 깊다는 該博한 지식과 열악한 현실에서 수운심법으로 생존경쟁의 환경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로, 혁명에 가까운 혁신을 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와 실천궁행의 선행이 천도교인에게 주어진 숙명과 같은 시대적 소명이며 신앙이어야 하는 것이다. 기도를 바탕으로 수도수련에 전념하는 교인들은, 치열한 생존경쟁을 하고 있는 현실로부터 자신이 선택하는 자의에 의해서 스스로 도피하여 삶의 공간과 시간에서 격리시켰거나 소속된 종교집단이나 조직으로부터 강요까지는 아니지만 실천궁행해야 할 필수적인 의무로서 수도수련을 하게 되므로 타의에 의한 현실도피가 된 셈이다. 현실적인 삶의 공간과 시간에서 격리되었다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무시간대로 흐르는 시간을 초월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현실도피는 현실에 적응이 쉽지 않다는 전제가 있다. 그래서 그들은 치열한 현실이 과거와 미래에 연결되어 있다는 진실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예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들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시간을 초월하여, 단절된 채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공존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가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미래도 모르고 없는 것이 된다. 현실이라는 시간에서 탈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이 ‘東學으로 回歸’라는 자기도 가는 곳을 모르는 방향을 잃어버린 同歸一體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各知不移를 해야 할 사람들이 ‘東學으로 回歸’를 했다는 것은, 무지로 인하여 잘잘못을 가리지 못하고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莫知所向之地) 스스로 옮겼다는 것(無知自移)이다.
수운은 「論學文」에서 동학이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은 문답으로 설명하고 있다.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제자가 질문하기를 「도가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그 이름을 서학이라고 부릅니까.」
수운이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내 역시 동방에서 태어나서 동방에서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라 할 수 있으나 학인 즉 동학이라 한다. 하물며 땅이 동서로 나뉘었으니 서를 어찌 동이라 말하며 동을 어찌 서라고 말하겠는가. 공자는 노나라에 태어나시어 추나라에서 도를 폈기 때문에 추로에서 일어난 도학의 학문이 이 세상에 전해 온 것이거늘 우리 도는 이 땅에서 받아 이 땅에서 폈으니 어찌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겠는가.」/曰同道言之則 名其西學也 曰不然 吾亦生於東 受於東 道雖天道 學則東學 況地分東西 西何謂東 東何謂西 孔子生於魯 風於鄒 鄒魯之風 傳遺於斯世 吾道受於斯布於斯 豈可謂以西名之者乎 ⑩
註 00 ; 鄒魯之風 - 공자와 맹자의 도학의 학풍. 또는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
이 글에서 천도라는 것은 유학사상에서 핵심적인 용어로 천리 천명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후대로 내려오면서 19세기 중엽의 실학자인 최한기는 천도는 인도라고 해석하고 이해했다.
‘만약 천도는 곧 인도요, 인도는 곧 천도라고 하면서도 대기의 범위에 어긋나는 지의 여부를 고려하지 않고 오직 심기를 좇아 학문을 말하게 되면, 인정이 있는 이들이 화답하여 응함이야 있겠지만, 천하인이 모두 기꺼운 마음으로 복종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니, 이렇게 되면 이것은 곧 ‘동당의 학’이지 ‘천인의 학’이 아니다.’/若謂天道卽人道 人道卽天道 不顧大氣範圍有違無違 惟從心氣而說學, 豈無人情之同類和應, 難期天下人共悅服, 其實, 乃人類之中, 同黨之學, 非天人之學. /氣學 序 중에서 PP.41-42.
또 최한기는 천과 인이 둘이 아니므로 천기(天氣)와 인기(人氣)도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인(天人)이 본래 둘이 아니니 기(氣)를 보지 못하는 자는 사람에게 있는 형체 때문에 곧 하늘과 간격이 있어서 하나가 되기 힘들다. -중략- 대저 하늘은 대기(大氣)다. 대기가 사람의 몸 가운데를 뚫고 피부사이에 스며 두루 퍼지고 한서조습(寒暑燥濕)이 안팎으로 교감하여 생을 이루니, 비록 잠시라도 막히어 끊어지면 생을 얻지 못한다. 이것은 곧 기로써 생명을 삼는 것이다. 천기와 인기는 둘로 나뉠 수 없으니, 기를 들어 말한다면 천인이 일치하고, 형체를 들어 말한다면 대소(大小)의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미 기에서 얻음이 있다면, 비록 천인이 둘이 되더라도 사람이 하늘을 섬기는 데에는 가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天人本無二, 而不見氣者, 以人有形體, 與天便激, 難得爲一也. -中略- 夫天卽大氣也 大氣透徹人身之中 漬洽皮膚之間 寒暑燥濕 內外交感而爲生 須須臾間隙絶 不得生 爲乃以氣爲命 以氣爲生 天氣人氣, 不可分二, 擧氣以言, 則天人一致, 擧形以言, 則大小有分 旣有得於氣 則雖天人爲二 以人事天 亦無不可./氣學 2-114. PP.317-318.
註 00 ; 한서조습(寒暑燥濕) - 천도에는 사시(四時)와 오행(五行)이 있어 춘하추동의 사계의 특성인 生長收藏하여 寒暑燥濕風이 생겨난다.(天有四時五行하야 以生長收藏하야 以生寒暑燥濕風하며/陰陽應象大論篇 第五 第四節.) 라 말하고 있는데 생장수장은 만물이 태어나서 자란 결실을 거두어서 깊이 간직한다는 뜻으로 변함없고 끝없이 이어오는 자연의 질서를 의미한다. 한서조습풍은 건조하고 축축하며, 추위와 더위 그리고 바람이 일어나는 4계의 자연질서를 의미하므로 생장수장과 같은 의미이다. 이 말은 비가 오고, 해가 뜨고, 바람이 불고, 춥고 덥고, 건조하고 습한 것, 혹은 그러한 현상을 일으키는 미소한 존재를 말한다.(雨暘風雨寒暑燥濕) 는 의미를 가진 어구와 같이 사용된다./ 각종 언어사전과 관련 자료들에서 발췌하여 재정리함.
이 글에서 최한기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천도가 대기 즉 우주의 기 또는 천지의 기의 범위에 어긋나는지 아닌지를 파악하여 말해야 천인의 학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함부로 말하는 한 무리들의 학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한기는 앞뒤의 문장에서 한울과 사람의 학문과 인도의 가르침(天人之學 人天之敎)이 기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했고, 사람마음의 기가 곧바로 천기에 통한다.(人心之氣直通天氣) 고 하였다. 모든 것은 기의 운화(運化)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과 인이 둘이 아니므로 천기와 인기도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한기(1803∼1877)는 수운(1824-1864)과 동시에 산 사람이지만, 혜강은 서울에서, 수운은 경주에서 각자의 학문을 궁구(窮究)하였으나 서로의 교류가 없었고 서로간의 법설이나 저작물을 읽은 바가 없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도 천도와 인도에 대한 도학적 탐구방법은 달랐지만 같은 주제를 다루었다는 것은 사실이라 할 수 있다.
註 00 ; 惠岡 崔漢綺(1803∼1877) - 최한기의 독자적인 학문인 '氣學'의 사유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도 이러한 하늘과 사람의 연관에 대한 본원적 구조를 구명하는데 놓여있다. 기학은 19세기 한 조선인의 과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우주론이다. 그는 자신의 철학관련 저술인 『推測錄』, 『神氣通』, 『氣學』, 『人政』등의 전편에서 '天과 人', '天道와 人道'에 대한 사유를 펼치고 있다.
註 00 ; 혜강 최한기와 수운 최제우가 정립한 학문인 기학과 동학의 동이(同異).
상기 논문은 서세동점의 격변기였던 조선조 후기인 19세기에 이 땅에 살다 간 두 명의 기철학자인 혜강 최한기와 수운 최제우가 정립한 학문인 기학과 동학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그 기관을 비교, 고찰하고자 하였다. 연구 결과, 기학과 동학은 형성배경이 상이할 뿐 아니라 특히 서학에 대한 관점도 서로 다름이 확인되었다. 기학이 주공․공자의 유학에 바탕을 두면서도 탈주자학적이었다면, 동학은 우리의 고유사상인 단군신선사상과 화랑풍류도에 바탕하면서도 주자학적인 사유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양명학[심학]과 유사성을 보이는 측면도 발견되었다. 두 학문의 기관을 비교해 본 결과, 기학의 경우는 신기와 활동운화가 모두 유으로 파악되는 자연적인 생명천의 성격을 지니는데 비해서, 동학의 경우는 지기와 조화 가운데 지기는 유형이지만 조화는 무형이유적이므로 인격천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는 차이점이 있었다. 나아가 기학이 식자층을 겨냥하여 정연한 사유체계를 제시하려고 하였던데 비해서 동학은 민중층을 염두에 둔 관계로 종교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는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따라서 기학이 추측을 강조하는데 비해 동학은 한울님에 대한 믿음(성․경․신)을 강조하였다. 기학이 물질과 정신을 아우르려는 의식을 분명히 갖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의 욕구를 긍정하는 실학적인 특징을 지니는데 비해서 동학은 여전히 금욕을 강조하고 물질적인 풍요로움 보다는 정신적인 안정과 안심입명을 구한다는 측면에서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다고 하겠다.
기학의 경우, 변통과 기화에 의거한 사회개혁을 주장하는데 비해서 동학은 개벽과 조화에 의거한 사회변혁을 주창하였다. 따라서 전자가 상당히 점진적인데 비해서 후자는 상당히 급진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孫炳旭의「氣學과 東學의 氣觀에 관한 비교 고찰」 논문 요약에서.
유학사상의 중심에 서 있는 공자는 군자가 시대적 상황에 처신함에 있어 君子而時中이란 말을 강조했다. 이는 시대정신과 상황에 따라 군자도 변해야 한다는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있다. 이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하여 『中庸』 第二篇에 나오는 다음의 문장을 살펴보기로 하자.
仲尼 曰. 君子之 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 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中庸』 第二篇 君子와 中庸.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가 중용을 지키려는 것은, 군자로서의 생각과 언행을 그가 처한 상황에서 때를 가장 잘 맞추어가는 일이고, 소인이 생각하는 중용이란 인간적인 예절(체면, 예의, 염치 등)을 벗어나서 아무 때나 아무데서나 거리낌 없이 자신의 처지와 이익만을 따라 사는 것이다/이 글에서 時中은 隨時處中이고, 處中의 中은 中正之道(치우침이 없는 도법)를 의미한다. 또 無忌憚이란 어렵게 여겨 거리끼는 것(마음가짐과 언행을 조심하는 것) 이 없다는 것으로, 인간적인 도리가 없다는 뜻이라 할 수 있다./오암.
註 00 ; 隨時處中 -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맞다드리게 되는 시대적 환경에서, 그 때와 상황에 맞춰서 치우침이 없이 가장 적절한 도리를 가려서 행하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隨時處中을 유학사상에서 일부는 ‘때에 따라 權道를 행하라’ 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때의 權道란 상황에 맞게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다.
權(저울)의 眞理는 항변성(恒變性/changeability), 상황성(常況性/situationality), 동적 평형성(動的平衡性/dynamic equilibrium)을 배재할 수 없다. 현실은 부단히 변하고 流動的으로 변화무쌍하므로, 한 가지 원칙만으로 온갖 일들을 다 적절하게 처리할 수는 없다. 상황에 대응하여 사물의 輕重을 헤아리고, 그에 따라 時宜適切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義에 합치되게 하는 것을 權道라 하기도 하고 隨時處中이라 하기도 한다. 공자의 이러한 隨時處中은 오늘날 상황적응이론(狀況適應理論/contingency theory)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이 어느 한 가지로 고착돼 있지 않고 상황에 따라 적절히 조정해 최적의 해법을 찾는다는 것이다./ 천도교의 用時用活과 같은 의미이다./각종 어학사전과 관련 자료들에서 발췌하여 재정리.
註 00 ; 상황적응질서(contingency laws) - 상황 적응이론은 權道 또는 隨時處中과 같은 것으로 그 시대의 시대정신으로 인하여 생성된 사회현상에도 자연의 운행질서가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물은 언제 어디서나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것과 같은 보편적 질서(universal law)와 ‘물살은 협곡에서는 빨라지고 강폭이 넓어지면 느려진다.’는 상황 적응질서(contingency laws)가 사회현상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각종 어학사전과 관련 자료들에서 발췌하여 재정리.
위에서 공자가 군자는 시대적 상황에 처신함에 있어 君子而時中이란 말을 강조한 것을 실천하기 위해선 먼저 각자가 급변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과 사조 또는 조류를 정확히 이해해야 대처할 수 있는 데, 급변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과 사조 또는 조류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언어(글이나 말)들의 참 뜻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先人의 지혜와 충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일본의 속담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진 眼光이 紙背徹이란 말이 있다. 안광지배철(眼光紙背徹)란 ‘눈빛이 종이의 뒤까지 꿰뚫어본다’는 뜻으로, 독서의 이해력이 날카롭고 깊음을 이르는 말로, 작가나 화자의 문장과 말의 의도를 통틀어 꿰뚫어 본다는 것이다. 의미상 眼光紙背徹과 같은 의미를 가진 글로는, 後漢 말기 동우(董遇)라는 사람의 고사에서 비롯된 독서백편 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책을 백번 반복해서 읽다보면 그 뜻을 저절로 알게 된다.’ 는 뜻이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는 선지자적 인물은, 시대정신과 펼쳐진 상황을 꿰뚫어 보는 예리한 감각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광범위하고 깊은 해박한 지식 즉 수많은 책의 숙독과 광범위한 견문을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그 시대가 형성해가고 있는 만사만물의 들어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까지 통틀어 꿰뚫어 보는 혜안(慧眼)을 갖추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내가 생존하고 있는 한 시대를 의미있게 산다는 것은,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현실 속에 숨겨진 또 다른 실제의 모습이라는 메타포(metaphor) 를 공유하는 증강현실(增强現實)을 이용하여 현실의 이면에 숨겨진 의미, 즉 그 이면에 담겨진 진의를 읽어내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것을 당면하고 있는 현실 또는 상황을 기술한 문장 또는 작가의 숨겨진 의도의 이면을 읽는다.(Read the hidden side of a sentence or composition) 라고 한다.
註 00 ; 증강현실(增强現實/Augmented Reality) - 스마트폰, 태블릿PC 또는 안경 형태 등의 기기를 통해 보이는 이미지에 부가 정보를 실시간으로 덧붙여 향상된 현실을 보여주는 기술로. 현실에 존재하는 이미지 또는 영상에 가상 이미지 또는 영상을 겹쳐 하나의 영상으로 보여주므로 현실감이 뛰어나고 편리하다. 또한 감성적 측면의 만족도가 높기 때문에 방송은 물론 게임, 교육, 오락, 쇼핑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이 가능하다.
註 00 ; 메타포(metaphor) - 어원적으로는 전이(轉移)의 뜻이며 ‘숨겨서 비유하는 수사법’이라는 뜻이다. 사물의 본뜻을 숨기고 주로 보조관념들만을 간단하게 제시한다. 문학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로, 행동, 개념, 물체 등이 지닌 특성을 그것과는 다르거나 상관없는 말로 대체하여, 간접적이며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것. /類似語로는 隱喩 또는 暗喩/어학사전에서 재정리.
2.천도교의 종교적 목적
남조선신앙(南朝鮮信仰)에 대한 학계의 정의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 민중들 사이에 널리 퍼졌던 이상세계를 대망하는 민간신앙이라 하였다. 이러한 남조선신앙의 핵심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원망이 투영된 지복(至福)의 낙원경(樂園境)이 한반도 남쪽 어디에 있을 것이라고 믿는 신앙이다. 정감록신앙과 함께 조선 후기 민중저항운동과 민중종교운동에 이상사회 청사진을 제공했다. 다음 백과사전에서의 남조선신앙에 대한 설명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남조선신앙은 인간정신에 잠재하는 낙원추구의 보편적인 원망이라는 점과 공간적인 이상향이라는 점에서 여타의 종교에서 보는 바와 다를 것이 없다. 어느 민족이나 그 민족 나름의 낙원경의 이상사회를 가지고 있다. 일반 사회과학에서는 유토피아로 알려져 있고, 불교에서는 서방정토라는 불국토관념이 있으며,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의 지상의 나라가 있다. 또한 도교에서는 시공을 초월한 낙원인 신선세계가 있다. 남조선신앙 역시 이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민간에서 유통·전래되어온 관념 또는 사상이기 때문에 모든 민중사상이 그러하듯 현실에 그대로 적용될 만한 세련되고 완결된 상징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즉 이러한 한국적 유토피아 사상으로서의 남조선신앙은 구체적으로 현실성 있는 이상향을 추구하려는 논리구조가 미숙하였다.
현실에서 강력한 추진력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인격적 존재를 표상한다든지 누가·언제·어디에 이러한 낙토(樂土)를 실현한다는 등 현실감각을 부여할 수 있는 기제가 필요하다. 시간적·공간적으로 구체화되지 못한 이상향에 대한 대망으로서의 남조선신앙이 구체화된 것은 정감록신앙과 결부되면서부터였다. 정감록신앙은 삼절운수설· 계룡산천도설· 정성진인출현설로 요약할 수 있으며, 그 형성시기가 대체로 조선 후기라는 점에서 남조선신앙과 일치한다. 양 자가 다 같이 미래국토의 대망신앙이라는 점에서 민중의식의 미분화된 관념의 복합이라고 볼 수 있다.
정감록신앙이 널리 퍼졌던 때가 병자호란 이후라고 볼 때 이 십승지지(십승지지에는 북쪽의 피난처가 없고 남쪽에만 있다. 그래서 남조선신앙이라 한다.-오암)가 북쪽에서 밀려오는 병화를 피하는 데 가장 알맞은 장소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조선신앙은 당초에 현실적 질곡, 무엇보다도 병화에 대한 소극적인 대처로서의 보신책이 점차 낙원동경의 사상과 결부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남조선신앙이 민중의 마음속에 표류하는 미래 이상국토의 소박한 대망사상이라면, 정감록신앙은 적어도 이것을 바탕으로 한 참위설·풍수설 등에 의하여 논리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초역사적인 원초의 소박한 관념이 정감록신앙의 참위설·풍수설·진인출현설과 결부되면서 역사적인 모습으로 구체화하여 조선 후기의 민중운동과 결부되었다.
同德께서는 東學의 道人인가? 天道敎의 敎人인가?(8-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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