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머리 _ 181.8×227.3cm, Oil on Canvas, 2013 |
페인팅으로 돌아오기까지 공성훈은 예술적 실험을 거듭하며 문제제기를 하는 설치미술가였다. 그가 처음 내놓은 작업은 창문 가리개인 블라인드로 만든 키네틱 작품이었다. 블라인드에 색색의 형광 페인트를 칠하고 뒷면에는 알루미늄 테이프를 붙여 반사효과를 주면서 모터를 달아 움직이게 했다. 이를 통해 빛과 형태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미대에 진학한 후 ‘미술이 할 수 있는 일이 뭔가?’라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무거운 현실에 비해 미술은 무력해 보였죠. 그런데도 미술을 가지고 너무 많은, 과장된 말을 하는 것 같았어요. 아무 내용이나 주장 없이 그저 보는 게 다인 작품을 하자는 생각으로 블라인드 작업을 했습니다. 사실은 술을 진탕 마시고 선배 작업실에서 눈을 떴던 아침, 블라인드 사이로 비춰 들어오는 햇빛을 보면서 착안한 작품이었죠.”
작품 <흰 머리>의 한 부분. 붓터치가 그대로 보인다. |
인간과 예술에 대해 애매하고 추상적인 말로 끝도 없이 토론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던 그는 군 제대 후 엉뚱하게도 서울산업대(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전자공학과에 편입했다.
“미대에 다닐 때는 발이 지상에서 30cm쯤 떠서 다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졸업하고 나니 허망했습니다. 화가가 되려고 하는데 어디에 발을 디디고 서야 할지 막막했거든요. 뭔가 분명하고 구체적인 것에서 다시 시작해보고 싶었습니다.”
절벽(담배 피우는 남자) _ 181.8×227.3cm, Oil on Canvas, 2013 |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은 전혀 달랐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이고 정확했다. 수학 등 정답이 있는 공부를 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는 과 수석으로 졸업했고, 외국계 회사로부터 취업의뢰를 받기도 했다. 전자공학을 공부했지만, 그 후로도 그의 작업에는 하이테크 기술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는 세상을 향해 묻고 또 물었다.
전광판 밑에 뚫려 있는 구멍에 입장료를 넣으면 ‘지금 보신 것이 과연 예술일까요?’라는 메시지가 전광판에 보이고, 관람객의 대답에 따라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는 〈예술은 비싸다-입장료 받기〉, 담배자판기에 담배 대신 작품을 넣어 판매한 〈자판기로 작품 팔기〉 프로젝트를 통해 그는 관람객의 참여를 유도하면서 현대미술과 미술시장을 풍자했다.
소나무숲 _ 181.8×227.3cm, Oil on Canvas, 2013 |
카메라 내부로 들어온 것 같은 효과를 주는 방과 거울로 둘러싸인 방에서 색다른 체험을 하게 하면서 관람객에게 ‘리얼리티란 무엇인가’라고 묻고, 미대 입시를 위해 수련해야 하는 석고 소묘를 대형 작품으로 만들어 ‘석고 소묘가 작품이 되지 않는다면, 미대에 가기 위해 왜 그렇게 수없이 그려야 하는가?’라며 우리나라 미술교육에 문제를 제기했다. 현대미술에 끊임없이 딴지를 걸던 그는 1996년 풍경화를 들고 나타났다. 거리를 두고 보면 잘 그린 산수화인데, 가까이에 가서 보면 먼지와 죽은 벌레, 머리카락 등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더러운 그림’이었다.
“마니프서울국제아트페어에 출품할 작품을 구상하다 ‘이런 그림도 팔릴 수 있을까?’ 시험해보고 싶었습니다. 내 방에서 청소기로 빨아들인 먼지에 살충제를 뿌린 후 접착제로 개어 캔버스에 발랐죠. 머리카락, 털, 그리고 피부에서 떨어져 나온 각질과 비듬 등 내 몸에서 나온 분신을 캔버스에 붙여놓은 셈이죠.”
흐린 하늘 _ 181.8×227.3cm, Oil on Canvas, 2013 |
그는 이후 자신의 몸을 다지류(多肢類) 곤충으로 변신시켰다. 자신의 사진을 담은 수십 대의 슬라이드 프로젝터가 차례로 작동하게 해 자신을 팔과 다리가 여럿 달린 곤충으로 보이게 한 것이다.
“그때 살던 갈현동 집에 돈벌레가 많이 들어왔어요. 나는 다리가 두 개뿐인데도 꼬이고 부딪치고 넘어지는데, 그놈들은 어떻게 일사분란하게 착착 움직이는지 정말 감탄스러웠죠.”
폭포 _ 181.8×227.3cm, Oil on Canvas, 2013 |
슬라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변신한 그의 모습은 그러나 자유롭게 움직이는 곤충이 아니라 핀에 꽂힌 채 버둥거리는 벌레에 가까웠다. 현실에 붙들려 있는 우리의 모습이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1998년, 그는 미술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인 오일 페인팅으로 돌아왔다. 개념적인 설치작업, 멀티슬라이드 프로젝션 등을 통해 재기발랄을 자랑하던 그로서는 놀라운 변신이었다. 현대미술시장에서 ‘회화의 종말’이라는 구호가 널리 울려 퍼지던 때, 그는 이를 거슬러 회화로 돌아왔다. 그를 그림으로 데려온 것은 ‘개’였다.
“벽제에 있는 집에서 용인까지 출퇴근하던 시절, 새벽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당에서 키우는 개와 눈이 마주쳤어요. 한 분이 보신탕용으로 팔기 위해 키우던 개들이었는데, 6개월 동안 묶여 지내다 팔려나갈 운명이었죠. 사진이나 다른 미디어로 이 개를 보여줄 수가 없었습니다.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죠. 내 손으로 직접, 정성껏 그려주고 싶었습니다.”
개 _ 112.1×145.2cm, Oil on Canvas, 1998 |
외환위기로 모두가 어렵던 시절, 묶여 있다 죽음을 당하는 개는 우울한 현실에 대한 은유였을까? 검정과 붉은색 두 가지 색조로만 그려진 화면에서 헤드라이트 불빛에 고개를 돌린 개의 모습은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는 듯 보인다. 이후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도시 근교의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을 그리던 그는 자연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웅장한 자연과 마주한 인간의 모습은 독일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작품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가 그리는 자연은 그런데 원래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다. 그의 심상(心象)이 반영된 자연이고, 오늘의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인간을 보여주는 자연이다. 전국에서 촬영한 사진을 보면서 작업을 하는데, 그림을 그릴 때는 광선도 색감도 구도도 바뀌어 사진 그대로는 아니다.
“2007년, 연구년을 맞아 캐나다에서 8개월 정도 지냈습니다. 그곳 풍경은 멋진데 내 풍경 같지가 않아 그림이 도저히 그려지지 않더라고요. 작가는 우리 시대 현실에 대해 느끼는 것들을 발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자연을 그리고 있는 그가 왜 번잡한 속세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상가 건물에 작업실을 두고 있는지 수수께끼가 풀리는 느낌이다.
공성훈 1987년 서울대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1991년 서울산업대 전자공학과 졸업 1994년 서울대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1991년 ‘Blind-work’, 1993년 ‘완벽한 리얼리티, 완벽한 평면성을 위한 프로젝트’, 1997년 ‘발버둥’, 2000년 ‘개’, 2001년 ‘벽제의 밤’, 2007년 ‘교외, 여가’, 2008년 ‘근린자연’, 2009 ‘겨울풍경’, 2011년 ‘말 못 할 속사정’, 2012년 ‘파도’ 등 개인전과 단체전 참여 다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미술은행 등 작품 소장. 성균관대 예술학부 미술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