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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교령이 내리면 도청 앞으로
증 언 자 : 윤목현(남)
생년월일 : 1956. 3. 7(당시 나이 24세)
직 업 : 대학생(현재 기자)
조사일시 : 1989. 6
개 요
1980년 당시 자연대 학생회장으로 학생들을 이끌고 활동하던 중 5월 17일 1차 예비검속에 걸려 보안대로 잡혀감.
복학 후 공부에만 열중하고
나의 아버님은 일반공무원이셨다. 나는 부농 집안의 2남 6녀 중 여섯째로 해남에서 태어났다. 광주 북중학교를 졸업하고 동신고를 졸업했다.
1977년 군에 입대하여 1979년 10월에 제대, 1980년초 복학을 하여 조용히 공부만 하고 있었다. 다만 고등학교 시절 친하게 지냈던 송선태를 통해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에 관한 이야기와 당시 학내의 분위기 등을 듣고 있어 대강 짐작만 하고 있었다.
복학을 한 후에도 사회과학과 접할 기회가 없었고 취직이라는 관문과 군시절을 바로 지낸 사람으로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여 그룹스터디를 했다. 전공 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현역들에 비해 굉장히 뒤떨어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학내문제가 자주 거론되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대중의 확고한 기반을 다져놓고 그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평소 나의 지론이 있기도 했지만 전공공부에만 치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학교가 술렁거리고 민청학련과 6·3(한일 국교정상화 반대시위) 선배들이 복학하게 되면서 어용교수 문제가 거론되었다.
1975년 당시 총학생회 체제에서 1975년 9월 학도호국단 체제로 바뀌어 1980년 역시 학도호국단 체제가 계속되었다.
1980년 3월 자주적 총학생회를 건설하자는 문제들이 적극적으로 쏟아져나오면서 선거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자연대에서는 학생회장 후보가 두 명이 나왔다는 말을 들었지만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연대 학생회장으로 당선
3월 한 달이 거의 다 갈 무렵 3월 30일 화학과 후배와 서클 후배 몇 명이 나를 찾아왔다. 31일이 후보자 등록 마감일임을 이야기하고 나에게 후보로 나설 것을 권했다. 그와 동시에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친구들도 역시 내게 자연대 학생회장 출마를 권했다. 박관현 후보 참모진들이 각 단과대학 후보들과 연계를 갖고 일을 추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현재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계획하고 있으므로 할 수 없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3월 31일 후배들은 사진만 하나 붙여서 등록을 한 후 "선배님, 후보등록을 마쳤습니다" 하고 그날 오후 내게 찾아와서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무척 난감했다. 선거일이 4월 9일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싶었다. 그런데 후보등록이 끝났다니!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다라고 생각되었다. 받아들여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별로 싫은 마음도 없었다.
후배들 역시 무척 열심히 뛰어주었고 박관현을 중심으로 참모진들이 자연대 단과대학에 대하여 굉장히 많은 배려를 해주는 것 같았다. 사전에 협의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무척 잘해 주었다.
유세가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첫 유세에서는 마음껏 재량을 발휘하지 못 했다. 두번째 유세에서는 상당한 자신감과 함께 만족스러웠다. 나는 조직도 없고 기간이 워낙 짧았기 때문에 마음이 불안하기도 했는데 내가 당선이 되었다. 기왕 당선되었으니까 민주화를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마음의 각오를 했다.
어용교수 문제에 대한 시국토론회
4월 19일 대강당에서 총학생회 출범식을 갖고 학생회 운영은 운영위원회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운영위원회는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이 참석하여 10명이 회의를 주도적으로 토론하고 심의하여 결정해 나갔다. 나중에 서클연합회 회장이 추가되어 11명이 되었다.
3월 27일 전남대 복적생 일동으로 어용교수 백서가 나왔다. 당시 나는 교수를 제자의 손으로 처벌한다는 것이 우려되었는데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된 후에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교수가 지성인의 최첨단을 걸으면서 가장 모범되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오히려 교수들에게서 학생들은 더 큰 배반감을 느꼈다.
복학생 중심으로 이루어진 문제는 학생회가 구성되면서 총학생회로 넘어오게 되었다. 총학생회에서는 아주 많은 논의들을 거쳐 각 단과대학별로 어용교수백서에 관한 입장을 2차 발표를 하자고 결정을 내렸다. 어용교수 명단에는 송광은, 박하일 사범대 교수, 정정희 교수, 교무과장 등이 포함되었다.
어용교수 백서문제는 주로 인문대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처음에는 어용교수 퇴진문제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던 학생들은 교수와 학생들간에 분열되는 것을 외부에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굉장히 많은 학생들이 여러 차례 토론을 거쳐 밀어붙였다.
당시에는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각 단과대학의 특성을 배려하여 독자적인 방식으로 운영해 나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인문사회대 교수들은 대부분 어용교수 문제에 연루되었다.
1980년 4월 11일 상과대학에서 병영집체훈련 거부투쟁에서 시작한 병영집체훈련 거부투쟁은 학우들의 협조 아래 강력하게 벌여 나갔다. 학우들 모두가 총력을 기울여 이 문제만큼은 꼭 해결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자연대에서 독자적으로 추진했던 것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기간이 워낙 짧았기 때문에 별로 한 일이 없었다. 어용교수는 물러날 것을 촉구하며 4월 29일 전남대학교 본부에서 단식농성에 돌입하고, 5월 1일까지 3일간 철야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인문대 학생들이 열심히 데모에 참여하였고 싸움은 공대, 농대 학생들이 아주 치열하게 했다. 3일간의 단식투쟁에서 자연대 학우들의 숫자가 70여 명으로 가장 많이 참여했다.
학내투쟁에서 학외투쟁으로 방향을 바꾸어 사회민주화 투쟁을 위한 비상 학생 총회가 설정되었다. 그 기간을 5월 4일부터 5월 16일까지로 잡고 각 단과대학별로 일정을 잡자고 하였다. 5월 4일 법과대학을 필두로 각 단과대학별로 시국대토론회를 갖기로 하였다. 각 단과대학에 대한 총학생회의 지원은 별로 없었다.
당시 부분적으로 대의원 총회가 소집되어 의장 추부길을 중심으로 이끌어 나갔고 각 단과대학별로도 학생회장이 운영하였다. 역시 기간이 매우 짧았기 때문에 제대로 자기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시국 대토론회는 단과대학별로 시간을 주어 학장과 과장급 교수들에게도 통고를 하여 과 단위의 시국토론회를 가졌다. 과에서 끝나면 단과대학 학생들 모두가 모여 토론회를 갖도록 했다. 당시 학우들은 굉장히 적극적으로 나서서 학생회에 열심히 따라주었다. 평상시 수업 참석률이 70퍼센트였다고 하는데 학생회 주최 행사에는 80퍼센트가 넘게 참여하였다고 했다.
자연대 시국 대토론회
자연대에서는 자연대 운영위를 거쳐 자연대의 여러 가지 특성을 고려하여 5월 14일 대강당 앞에서 실시하였다. 같은 날 4개 단과대학이 동시에 개최하였다. 대강당 안에서는 사범대학이, 공과대학 앞에서는 공대가, 인사대 등나무 앞에서는 인사대가 각각 진행하였다.
5월 15일부터 16일 양일간에 걸쳐 가두시위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3개 단과대학이 정문 돌파를 시도했다. 자연대는 후문에서 시위를 하기로 했다. 이때는 모두 싸우기 위한 것보다는 15일을 대비해 구호만 외치고 들어오려고 했다.
경과보고 등을 끝내고 나는 자연대 학우들을 이끌고 후문으로 나갔다. 후문에서 5미터밖으로 상당한 숫자의 전경들이 보였다. 학우들에게 후문 미처 못 가서 앉으라고 지시하자 학우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때 경찰은 최루탄을 꽂은 채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학우들에게서 조금 떨어져 전경들 가까이에 다가가 크게 외쳤다.
"나는 약속을 지킨다. 우리는 오늘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그렇게 알고 학생대표인 나를 믿고 우리 시야에서만 사라져주시오"
고 말했다. 중대장으로 보이는 사람과 약속하고 악수를 나눈 뒤돌아서서 다시 학우들에게 왔다.
나는 학우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주는 민주경찰들이 여러분을 더 이상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지금부터 철수를 시작한답니다"
하고 말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두 함성과 박수를 치며 열광했다.
후문 돌파 시도
바로 그때 지휘자가 전경들에게 "뒤로 돌아" 하고 외쳤다. "앞으로 가", "제자 리에 서" 하고 그대로 서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 기가 막히고 나를 따른 학생들에게 속만 보이는 격이 되어버렸다. 학생들 역시 경찰들의 행위를 보고 흥분했다. 일부 학생들은 전경들을 향해 돌을 던지기도 하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생들은 학생대표인 나를 믿고 나 역시 전경들을 믿었는데,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나 역시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이 사기꾼들, 맛 좀 봐라.'
학생들의 돌이 날아들고 학우들이 제자리에서 일어서자 경찰들 사이로 페퍼포그 차가 나서더니 순식간에 "다다다 다다다" 하고 쏘아댔다. 나를 향하여 사과탄이 4개 날아왔다. 나는 재빨리 "후퇴" 하고 소리를 지르고 뛰었다. 가정관리과 학생 한 명이 사과탄에 맞았다. 모두들 심한 배신감과 함께 너무나 분해서 싸울 것을 종용했다.
학우들은 다시 자연대 벤치 앞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학우들에게 소리쳤다.
"지금부터 투쟁을 하겠습니다. 자연대 학우들은 모두 모여 내 지시에 따라 주기 바랍니다."
바로 그 순간 군시절에 익혀둔 작전상황 계획방법이 떠올랐다. 군대시절에 연대 지휘자 훈련에 참가하게 되면서 군작전 개념이 내 머릿속에 박혀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싸움은 확실한 승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단호하게 마음먹고 투쟁에 임하여 힘을 결집해야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다.
남자학생들 각각 조를 편성하여 조직적으로 움직이도록 하고, 여학생들은 한쪽에서 구호를 크게 외치도록 지시했다. 남학우들은 순식간에 돌을 주워 전경들을 향해 공격했고 일부는 체육관 옆 후문을 넘어 전경들을 상대하게 했다. 여학생들은 돌을 주워오고 남학생들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또 일부 학우들은 페퍼포그 차를 맡아 열심히 싸웠다.
결국 전경들은 결집된 학우들의 힘에 밀리기 시작했다. 자연대 학우들은 어마어마한 군 병력을 까부수고 철조망을 넘어 교문 밖으로 진출했다. 평화시장 부근까지 가서도 전경들과 학우들은 치열하게 싸웠다.
나는 학우들을 향해 손짓을 하며 외쳤다.
"도강(군대용어로 강을 건너라는 말)."
우리 학우들은 '우'하는 함성을 지르며 후문 부근 천변강을 건너뛰기 시작했다.
평화시장 부근에서 싸우던 학우들도 전경들을 물리쳤다. 갑자기 전남대 후문 도로는 해방구가 되어버렸다.
5월 14일 도청 앞 점거
서방을 지나 광고 앞을 통과하여 금남로로 들어섰다. 광주은행사거리를 지나 자연대 학우들은 최초로 도청 앞을 점거했다. 30분 정도를 뛰어서 도청 앞을 점거하고 있자 농대 학우 일부가 도청 앞으로 왔다. 김양래가 이끈 농악반을 중심으로 농대 쪽문을 빠져나와 광주역 앞을 지나왔다고 했다.
도청 분수대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고 있는데 안병화 도경국장과 경찰서장이 나와서 해산할 것을 요구했다. 이때 전남대 김동원 교수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일단 협상을 해라."
나는 김동원 교수의 말을 듣고 함께 협상을 하러 도경국장을 만나러 갔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보자 화가 치솟았다. 그들을 향해 서슴없이 욕을 퍼부었다.
"이런 씹어먹을 자식들. 모두 죽여버리겠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김동원 교수가 나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나이도 드신 분들에게 그렇게 상스럽게 말하면 되겠는가. 좋게 이야기를 해도 되잖아."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좋게 얘기하겠습니다. 우선 나의 요구조건은 연행된 학생 15명을 석방해 주시오. 그 후에 모든 협상에 응하겠습니다. 우리 학우들이 석방되지 않고는 결코 협상에 응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자 형사들은 여러 차례 연락하여 보더니 서부경찰서에 7명, 광주경찰서에 4명이 연행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광주경찰서는 가까웠으므로 내가 직접 가서 확인서를 쓰고 도청 앞으로 데리고 왔다.
나는 분수대 위로 올라가 학우들에게 곧 그 사실을 알렸다.
"우리의 학우들이 이곳으로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모든 학우들이 우뢰와 같은 함성을 지르고 열렬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약 20여 분이 지나자 서부경찰서에 연행된 학생들 7명이 도청 앞으로 왔다. 모여 있던 학우들은 잡혀간 숫자가 더 된다고 하여 확인해 본 결과 그 숫자가 틀림없다고 하였다.
"학우 여러분, 일단 나를 믿으시오. 7명이 분명한 숫자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제 우리의 학우들이 모두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도청 앞에 온 지 1시간 정도가 지나자 전남대 정문에서 시위을 하던 학생들과 박관현 회장이 왔다. 도청 앞 광장이 점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뛰어온 것이었다.
민족민주화 대성회를 개최하다
그렇게 도청 앞을 점거하고 나자 예정되어 있던 15일의 도청 앞 집회를 하루 앞당겨 14일부터 열기로 하고 민족민주화대성회를 개최하였다. 나는 서클연합회 회장인 문석환 씨에게 마이크를 넘겨주고 일부 학생회장단 멤버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집회가 시작되었다.
사회는 문석환 씨가 보고 김양래 씨와 한상석 씨가 한마디씩 하기도 했다. 집회가 끝나고 도청 앞에 모인 학우들은 각각 코스를 나누어 가두행진을 벌였다.
자연대 학우들은 전일빌딩 앞을 지나 광주경찰서 앞으로 갔다. 학우들은 광주경찰서를 향해 일제히 구호를 외쳤다. 민주경찰 봉급을 올려줄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장동 로터리를 지나 검찰청으로 향했다. 검찰청에 가보니 경찰도 보이지 않고 우리를 저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이곳이 바로 유신 앞잡이 짓을 한 곳입니다" 선언하고 검찰청 안으로 들어갔다. 학우들은 모두 두들겨부숴 버려야 한다고 아우성을 치기도 했다. 이곳에서 한동안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시위를 하다가 검찰청을 나왔다.
다시 출발하여 산수오거리를 지나 서방을 거쳐서 학교로 들어왔다.
학교로 들어온 우리는 다시 비상 운영위원회를 실시하고, 15일 민족민주화대성회를 강행할 것을 다짐했다. 논의의 내용은 다음날 15일 오후 2시 도청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광주지역 학생회장들의 회의를 소집하자고 하였다. 광주지역 대학 모두가 협의를 하도록 하자고 했다.
이 무렵 별동대가 조직되었는데 별동대 대장은 권향년 씨가 맡았다. 그들은 모두 300-400여 명이었는데 주로 밤새 횃불을 만들고 지키는 일을 했다. 나는 그 일을 직접 담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 운영위를 꾸려가면서 학생회 간부들 간에는 의견충돌이라는 것은 거의 없었고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준비하면서도 엄숙하고 적극적인 분위기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휴교령이 내리면 도청 앞으로
5월 15일 도청 앞 집회가 끝나고 학교로 들어가는 밤에는 비가 내렸다. 전교생 모두가 쏟아지는 비를 맞고 학교 안까지 행진을 했다. 모두들 민주화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숙연한 모습이었다.
5월 16일 전국 총학생회장단 회의가 있었는데 운영위에서는 그 회의의 내용만 보고받았고 별로 관여하지는 않았다. 박용성 씨와 이청조 씨가 활동을 주도적으로 해나갔다.
각 단과대학에서는 16일부터 총학생회 주최로 모여서 각각 코스를 나누어 활동 할 것을 운영위원회의 결정하에 논의하였다. 자연대는 주로 서방을 통해서 나가고 광주역을 거쳐 학교로 들어왔다.
5월 16일 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이날 박관현 회장은 사전에 운영위에서 통과된 사실을 연설하는 도중 모든 학우들과 광주시민들에게 알렸다. 만약에 휴교조치가 떨어지면 전남지역 학우들은 모두 도청 앞으로 모이라는 내용을 선포했다.
경찰들의 저지 없이 이루어진 이날 행사는 횃불 행진과 화형식을 끝으로 집회를 마무리하고 17일부터는 전국의 상황을 어느 정도 지켜보고 나서 다음 행동을 하자고 했다.
일정이 그렇게 되자 나는 바로 자연대 벽보판에 학우들에게 알리는 방을 붙였다.
"다음주부터는 중간고사를 실시하겠으니 학업에 열중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일단의 민주화운동이 끝났으니 다시 학생의 본분으로 돌아가 중간고사를 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요."
예비검속에 걸려
17일 하루를 쉬고 이날 밤 학교에서 걸어나오는 길에 예비검속을 당했다. 14일 집회 이후 나도 1차 예비검속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이전부터 형사들이 집 주변과 나를 미행하고 다닌 것을 알게 되었다.
학교 앞에서 잡힌 나는 보안대로 끌려갔다. 막 들어가자 처음 온 인사로 가랑이 사이에 몽둥이를 끼우고 무릎을 꿇게 한 후 허벅지를 사정없이 두들겨팼다. 그것도 부족하여 군화발로 밟아 다리는 마비상태가 되어버렸는지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뒤에야 보안대 지하실로 들어가 본격적인 조사를 받게 되었다. 나는 내가 입만 벌려도 잡히지 않은 우리의 동료들이 전국 수배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들겨맞더라도 말을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각오했다.
"14일부터 집회는 누가 주도를 했냐?"
"누가 경과보고를 했냐?"
"누가 유인물을 만들어 누가 배포를 하였냐?"
등을 물었지만 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일체 언급하기를 거부하자, 그들은 기술적으로 때리는 것도 아니고 얻어맞고 죽어버려라 하는 식으로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형사들의 수사의 초점은 5월 14일 집회 민족민주화대성회와 관련된 사람들을 찾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수사받는 과정에서 내가 느끼기에 형사들은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무렵 합수단이 구성되었는데 합수단 역시 군인 위주로 형성되어서 굉장히 많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오히려 보안대 형사들에게 눌리는 것 같았고, 경찰 수준에서는 알 것 같은 것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중요하지도 않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 몰라서 물어볼 때는 우습기까지 했다.
보안대 지하실에서 며칠 두들겨맞는 도중 조선대학교 유소영 여학우가 보안대로 잡혀 들어왔다. 유소영은 간첩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지하실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히 그 소리는 유소영이 고문에 못 이겨 비명을 지른 것이라고 판단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나를 취조하고 있던 형사에게 달려들어 머리로 헤딩을 하듯 박아버렸다.
그때의 나의 심정으로는 너 죽고 나 죽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 뒤 나는 그 형사에게 초주검되도록 두들겨맞았다. 뿐만 아니라 물고문도 많이 당했다.
동해바다에 빠뜨려도 끄덕없다
5월 19, 20일 무렵 밖에서 "와와" 하는 함성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시민들과 학생들이 들고일어났는가 보다고 판단하고 기뻐했다. 그러다가도 형사들의 기세가 너무나 당당하여 나는 어느새 기가 죽어 실망하기도 했다.
며칠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나를 포함하여 17여 명이 상무대 영창으로 수감되었다. 어느 날 상무대 영창 부근 아주 아까운 곳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그럴 때는 학생과 광주시민이 하나가 되어 뒤집어버리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마음 속으로 빌기도 했다.
5·18 상황에 대해서는 수사관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대강 눈치를 채고 있었다. 수사관들은 우리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이렇게 난리를 피워 우리를 괴롭히니까 동해 바다에 빠뜨려 죽여야겠다."
"나는 고향이 해남이어서 수영을 아주 잘하기 때문에 걱정없소."
나는 초연해져 그렇게 대꾸하기도 했다.
"저 새끼는 그렇게 죽이면 안 되겠어."
상무대로 이감된 후, 27일 이후로 잡혀온 동지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 동지들과는 우리들 나름대로 만든 수화를 통하여 이야기했다. 주로 현재는 어떤 내용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해도 어느 대목은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일러주기도 했다. 그러면 모두들 알아들었다.
꼭 우리들끼리 이야기해야 할 때에는 담배 등으로 간수를 매수하여 우리 방에서 필요없는 사람을 다른 방으로 보내고 다른 방에 있는 우리 일행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시간이 차차 흐르자 민청 선배들은 대부분 훈방으로 나갔고 우리는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과 앞뒤 상황을 맞추어보고는 되도록이면 빨리 일을 종결시키려고 했다.
방황의 시간을 마감하고
나는 1980년 10월 25일 1차 석방대상에 포함되어 징역4년 구형에 집행유예 3년을 받고 나왔다.
1980년 이전만 하더라도 과학자가 꿈이었는데 5·18항쟁으로 꿈은 산산이 조각나고 취직도 못 하고 할 일이 없어 암담하기만 했다. 민주화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 같았다.
무슨 일이든지 해야 했지만 너무나 암담하여 한동안 술로 나날을 보냈다. 술을 먹으면 나는 전경들을 향해 욕을 퍼붓고 아무거나 깨부수는 등 1년 정도를 술로 허송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던 중 회사에 들어갔다. 얼마 동안을 회사에서 일하다가 재야 운동세력에 간접적인 관여를 하기 시작했다.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가 만들어질 무렵 거기에 참여하기도 했다.
1984년 복학을 하여 1985년 후학기에 졸업을 했다. 1980년 후학기를 학점 추가로 인정을 받은 때문이었다. 졸업하고 나서 박관현 묘 이장 등 10월제를 주도적으로 준비하면서 묘 이장까지 나서서 열심히 했다. 1980년 총학생회 동지회에서 총지휘을 하였다.
그 후 언론사 주관지에서 일을 하기도 하고 국민운동본부와 5월 광주민중항쟁동지회에도 관여하기도 했다.
1988년 12월 무등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기자(도청 출입)로 일하고 있다. (조사.정리 안은정)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