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 세력과 5.18 광주(상)
"무장군인, 시위대 충돌 참극 반드시 막았어야..."
<사진설명>
계엄군은 무차별적으로 연행해온 젊은이들을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
1980년 정월 초하루, 새해인사차 방문온 전두환 소장(보안사령관 겸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에게 '쓴소리'를 했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12·12 사태에 대한 이해를 구하려고 온 모양인데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79년 12월12일 밤에 발생한 12·12 사태는 전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내 강경소장파가 상관(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고 군을 장악한 군사반란이다. 전 소장은 "정 총장이 10·26 사태에 관련된 혐의가 있기 때문에 연행조사가 불가피했다"고 변명했지만 설득력이 없었다.
전 소장 측근인 모 대령이 가끔 집무실에 들렀다. 난 그를 볼 때마다 "결국 당신들이 정권을 장악하겠다는 말 아니냐?"면서 나무랐다. 그는 매번 손사래를 치며 부인했다. 언젠가 "정권장악 수순이다", "절대 그렇지 않다"고 설왕설래하고 있을 때, 그가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면서 울기까지 한 일이 있다.
유신정권 붕괴 후 찾아온 '서울의 봄'은 혼란스러웠다. 신군부 세력은 군을 장악한 후 정치 진출의 발판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김대중씨, 김영삼씨 같은 야당 지도자들은 당장 내일 대통령이 될 사람처럼 행동하면서 다퉜다. 그때 야당 지도자들이 합심해서 민주세력을 결집시켰다면 군사독재정권은 분명 연장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무렵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과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최 권한대행은 중심을 잡고 위기를 헤쳐나가야 할 장본인이었다. 내색은 안해도 책임감 때문에 무척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분은 "내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느냐"라는 식으로 얘기했다. 나는 '아! 이건(신세타령) 아닌데…'라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신군부는 정국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민주인사들을 무차별 연행 구금하기 시작했다. 정국 주도권이 12·12 사태를 주도한 정치장교들에게 거의 넘어갔다.
그러나 '서울의 봄'을 짓밟는 데 대한 국민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학원가를 중심으로 계엄철폐 요구시위가 거세게 일어났다. 5월15일 대학생 10만명이 서울역 광장에 모여 시위를 벌이고, 16일에는 학생시민 3만명이 광주 도청 앞에서 횃불시위를 벌였다. 급기야 정부 당국은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18일은 마침 서울에서 주교회의 상임위원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오후에 도착하신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님 표정이 무척 어두웠다.
"오전에 금남로 교구청에서 내려다보니까 계엄군이 시위 학생들을 마구 짓밟더라고요. 내가 그 옆에 있었더라면 뜯어 말리기라도 했을 텐데. 무슨 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요."
윤 대주교님은 학생들이 곤봉으로 두들겨 맞아 피를 흘리는 광경을 보고도 '사마리아인의 사랑'(루가 10, 25-37)을 실천하지 못한 데 대해 괴로워하고 계셨다. 그러나 TV 뉴스를 봐도 광주 얘기는 한 마디도 없었다. 그날 오전에 윤 대주교님이 목격한 광경이 6·25 이후 민족 최대 비극인 '5월 광주'의 서곡임을 누가 알았겠는가.
이튿날부터 심상찮은 얘기가 들려왔다. 군인들은 시위학생들을 곤봉으로 내리치고, 군화발로 짓이겼다. 연행자들을 마구잡이로 트럭에 실어 어디론가 데려갔다. 군인들이 대검을 휘둘러 사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도시 전체에 긴장감이 감돌고, 시민들의 분노는 폭발 직전이었다.
언론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광주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상황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사태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전두환 소장에게 달려갔다. 그는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시각각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리는 모양이었다. 내가 얘기를 할라고 하면 전화기가 울리고, 잠시 중단됐다가 다시 얘기를 꺼내면 또 전화기가 울려대고…. 그렇게 30분쯤 흘렀을까. 전 소장은 전화를 끊더니 "미안합니다. 지금 광주에서 내란이 일어났습니다. 육군본부에 가봐야 합니다"라며 뛰쳐나갔다.
마침내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21일 "계엄군은 자위권을 발동할 수도 있다"는 요지의 경고문을 발표했다. 무력진압이 초읽기에 들어간 듯했다. 막아야 했다. 무장 군인과 시위대가 충돌하는 참극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머뭇거릴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그 순간 문뜩 위컴 한미연합사 사령관이 떠올랐다. 신군부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일 리는 만무하고 위컴 사령관이라면 그들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위컴 사령관에게 연락할 방법을 찾느라 미군 군종신부에게 몇차례 전화했으나 연결되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마냥 전화를 기다릴 수 없었다. 주한 교황대사관으로 갔다. 교황대사 안젤로니 대주교에게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와 위컴 사령관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글라이스틴 대사와도 불통이었다. 한시간 가까이 전화기를 붙들고 있던 교황대사도 답답한지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웠다.
내가 집적 접촉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그는 직접 찾아오겠다고 했다. 이 계엄사령관은 온화한 인상이었다.
"무력진압은 대규모 유혈사태를 불러오고, 광주 시민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깁니다. 시위대와 대화를 해보는 게 우선 아닙니까?"
"추기경님 말씀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혼란이 광주에서 남쪽으로 번지면 문제가 없지만 위로 올라오면 더 심각한 사태가 발생합니다."
"사태는 신군부가 정권을 차지하려고 한 데서 빚어진 일 아닙니까?"
"제가 계엄사령관으로 있는 한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다른 장성들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다른 장성이라뇨? 전두환을 두고 하시는 말씀인가요? 제가 그 사람 속을 들어가 보지 않았으니 어떻다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난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았는데 계엄사령관이 먼저 전 소장 얘길 꺼냈다. 전 소장이 군부에서도 실세임을 눈치챘다. 광주 상황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혼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