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죽을 때는 귀를 두고 가고 싶다고 말하는 시인
전쟁 후 폐허의 도시에서 마음 붙일 것은 음악뿐이었다는 황동규 시인은 작곡을 전공하고 싶었답니다. 지상의 소리와 천상의 소리를 합친 것이 음악이라면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음악이겠지요. 저는 한때 사람에게 가장 큰 축복 중 하나는 음악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신의 선물 중 으뜸이 음악이라고 저도 우기고는 했거든요. 황동규 시인은 죽을 때는 귀를 두고 가고 싶다고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참 멋지지요. 귀를 놓고 가고 싶다는 발상이나 표현이. 과연 시인이구나 싶습니다. 시인은 어느 한구석이 비어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제 생각에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대신 감성은 듬뿍 가지고 사는 불구를 즐기는 사람이란 생각을 하고는 합니다. 천상과 지상의 소리가 만나 엮어내는 음악은 사람을 환상으로 안내하고는 합니다. 많은 문화예술 분야 중 가장 빛나는 분야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황동규 시인은 아직도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시인입니다. 황동규 시인의 발언을 보면 시인이기보다는 철학자처럼 느껴집니다. 한 번 새겨 보실랍니까.
인간의 내부는 원래 사람의 성聖과 속俗이 힘겹게 만나는 장소이고 표면은 성과 속이 따로 노는 곳이 아니겠는가. 따로 노는 게 편하다면, 편하지 않게 살고 싶다.
성과 속이 전쟁과 평화를 번갈아가며 벌이는 사람 내부의 속사정을 다스리는 일이 인생이겠지요. 황동규 시인의 특별함은 다음 발언에 있습니다. <따로 노는 게 편하다면, 편하지 않게 살고 싶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스러움만을 가지고 살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속물적인 욕망만을 가지고 살고 싶지도 않다고 하고 있습니다. 성과 속이 버무려진 삶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지요. 성과 속은 대결구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한쪽을 가지는 순간 반대편의 것은 없어야 하는 게지요. 성과 속을 넘다 들며 살아가는 사람의 살아가는 모습에 매력을 가진 듯합니다. 황동규 시인의 발언을 한 번 더 살펴볼까요.
부끄러움에서 나는 자신이 인간임을 확인했고, 살아가는 일의 살만함을 깨닫곤 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한자리에서 발언한 내용은 아니지만 동렬에 놓았습니다. 정체성이나 가치관이란 것이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고 모든 발언은 정체성과 가치관의 산물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거든요. <부끄러움>은 반성일 수도 있고, 후회일 수도 있습니다. 까짓 거 아무 쪽이면 어떻습니까. 깨달음을 향해 놓인 다리라면 고마운 게지요. 부끄러움은 성과 속 중에서 속 쪽에 기울어져 있거나 엉거주춤한 중간지대에 머물러 있을 때 생기지요. 신기하게도 인간임을 확인했고, 살아가는 일의 살만 함을 깨달은 것이 부끄러움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있은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하는데 그 역시 부끄러움에서 배워왔는지도 모릅니다. 시는 시인의 마음의 투영이지요. 시인의 마음의 거울인 셈입니다. 숨기기에는 시인의 마음의 언어들로 직조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결국, 시 생산지의 원료는 시인의 언어요, 인생관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황동규 시인이 단편소설 <소나기>를 쓴 황순원 작가의 아들인 것은 알고 계시지요. 헌데 황동규 시인의 장녀 황시내 씨도 산문집 <황금 물고기>를 냈으니 3대가 글을 쓰는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제 <조그만 사랑 노래>를 살펴볼까요. 맛깔스러운 시지요. 우선 언어의 맛이 느껴지는 부분을 살펴보지요. <늘 그대 뒤를 따르던 / 길 문득 사라지고 /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운율이 알사탕이 입안에서 구르듯 달콤하지 않나요. 하지만 분위기는 저녁 어스름 같지요. 운율과 분위기의 이중주가 썩 잘 어울리는 걸 체험하실 수가 있습니다. 언어의 미학을 잘 살려서 그렇습니다.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있다.>는 표현, 재미있지요. <추위 환한 저녁 하늘>이란 표현에서는 아하, 하고 탄성이 나옵니다. 박하사탕을 우직 깨물었을 때의 느낌이랄까요. 이 짧은 시 속에서 이것들 말고도 더 있습니다.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눈이 내리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동선을 <찬찬히 깨어진 금>이라고 표현한 것이나 떠다니는 눈송이의 모습을 <눈뜨고 떨며>라는 표현으로 쓴 것도 기발합니다. 황동규 시인의 말처럼 노력한 것에 비해 소득이 적은 것이 시지요. 하지만 시의 매력은 사람을 감성을 확장시켜주는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꿈꿀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시지요. 황동규 시인의 시세계를 이문재 시인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황동규의 시에서는 건초냄새가 풍긴다. 그러나 저 바싹 말라있는 언어들은 정지해있지 않다. 저 마른 이미지들은 일상적 공간에 놓여있는 자잘한 소품들의 손을 잡고, 생/‘나’의 안팎에서 무겁도록 가볍고, 또 아득할 정도로 깊어서, 생의 갈구와 그 못미침을 눈부신 속도로 그려낸다. ‘마른 우물’에서 길어 올려진 저 건조함들은 그러나, 촉촉한 습기와 환하고 은은한 빛을 바라 마지않는 것이어서 죽음의 국면을 넘어서고 있다.
동의하십니까, 아니면 말고요. 느낌이 다 같으면 그것도 별로 재미없는 일이지요. 저마다의 가슴에 저마다의 빛깔로 꽃을 피우고 사는 것이 사람이잖아요. 자신이 빚은 마음의 빛깔로 시를 감상하면 되는 게지요. 작은 키에 얼굴과 몸집이 비교적 큰 황동규 시인은 인물은 없는 분이시지요. 이웃집 마음씨 좋은 아저씨나 할아버지 같은 풍모를 품기지요. 하지만 황동규 시인의 글은 품격과 기품이 있습니다. 황동규 시의 매력에 대해 저 개인적으로는 동거와 독거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대중과의 동거와 고독한 독거의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대중성이 있는 듯하면서도 독립적인 철학으로서의 고독의 냄새가 납니다. 철학적인 발걸음과 쉽게 다가서는 언어의 절제가 그러한 면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모든 문화예술은 독자에 의해서 완성된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시인은 사람이지요. 시인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완성을 꿈꾸기도 하고 미완성을 즐기기도 하는 존재지요. 결국 사람이란 이름을 가진 부조리한 사람이 만든 시는 미완성 상태로 시인에 의해 완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전문적인 작가의 손에 의해 마무리되었다고 해도 완성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미완의 존재인 사람은 감성과 이성으로 완성을 향하여 도전하지만 시가 시인에 의해서 완성되지는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부조리한 영혼이 만든 작품은 부조리하게 마무리되게 되어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완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시인이 순간의 영감에 의해 작품에 도전합니다. 잘 만들고 싶다는 욕망도 가담합니다. 그럼에도 완성도는 정점에 이르지 못합니다. 시도 마찬가지로 미완성 상태로 태어나 독자를 만나 완성된다고 저는 우기고 있습니다. 독자는 미완성된 시를 자신의 인생과 상황으로 끌어안아 감동하는 게지요. 바로 이 순간이 시가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작품이라고 해도 독자를 움직일 수 없는, 다시 말해 감동시킬 수 없는 시는 시로서 미완성 상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작품이 독자를 만나 완성되는 순간은 감동의 오로라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독자의 인생과 만나 새로운 작품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자에 의해 완성되는 작품은 독자에 따라 완성의 정점이 달라지지요. 감동의 오로라가 사람마다 다르지요. 미완성 작품은 이렇게 독자를 만나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이런 말을 합니다. 독자가 없는 작품은 작품이 아니다, 라고 말입니다. 한 편의 시를 한 사람이 평생을 읽을 수도 있고, 한 편의 시를 많은 사람이 한 번을 읽고 내던질 수도 있습니다. 일기마저도 독자를 의식하고 적습니다. 자신이 독자이기도 하고, 또 다른 독자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문화 예술에서 독자는 문학이 완성으로 가는 다리이며 그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는 작품이랄 수 없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사담이 길면 재미가 없어지는 것인 줄 알면서도 제 이야기에 들떠 있었나봅니다. 황동규 시인은 한국인의 애송시 <즐거운 편지>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
이 시는 황동규 시인이 1956년 고등학교 3학년 때 연상의 여인을 흠모하며 쓴 시라고 합니다. 김소월, 만해, 미당이 여성적인 연시에 대한 시선을 뒤집어 황동규 시인은 남성적인 시를 쓰고 싶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즐거운 편지>는 황동규 시인이 1958년 ‘현대문학’에 발표한 등단작이기도 합니다.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과 ‘편지’ 등에서 낭송 되어 뜨거운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시에서 동기를 얻었다는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의 원 제목도 <즐거운 편지>였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쓴 글이 대표작이 되었고, 등단 작품이 되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시인은 공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 곳에서 보게 됩니다. 저는 이런 말을 종종하고는 합니다. 시인이 타고나는 것이라면 대학에 국문학과나 문예 창작과가 필요 없다고요. 그리고 시인이 공부를 해서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무학으로 대가가 된 시인들을 설명할 수가 없다고요. 시인은 타고난 자질에다 노력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황동규 시인의 대표작이 된 작품이 고등학교 3학년 때라는 것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어찌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즐거운 편지>가 황동규 시인의 대표작이 된 것은 대중에 의해서였지요. 영화에서 알려지면서 대중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시의 미덕은 사랑에 대한 견고한 바라봄에 있습니다. 십대의 어린 나이로서는 성숙한 사랑에 대한 자세와 기다림에 대한 시선에 있습니다. 쓸쓸함이 배경에 담기고 있습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불태우는 것이 아닌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에 있다고 어린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황동규 시인은 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습니다. 한 시인의 주된 삶은 시를 쓰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인생 50년을 바쳐서 시를 썼겠지요. 시를 써서 얻은 것은 시집 몇 권이 전부겠지요. 시집을 놓고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시 작업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해야 하는지 막막해 집니다. 한 시인의 일생이 준 아름다운 발자국이야 곱게 생겼다 지워지겠지만 시는 기다림처럼 남겠지요. 아름다운 시인 하나를 만나는 일은 향기로운 일임이 틀림없습니다.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황동규의 ‘풍장’ 부분>
어쩌면 가장 황동규 시인다운 시인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바람과 놀게 해달라는 주문까지 하고 있습니다. 철학자다운 풍모의 시를 쓰는 황동규 시인의 시력이 벌써 50년을 넘고 있습니다. 황동규 시인은 등단 50주년 기념 산문집을 내놓았습니다. 요란하고 번잡한 게 체질에 안 맞는 그가 시끌벅적한 기념행사 대신 택한 방식입니다. 시집이 아니라 산문집인 이유를 서문에 적고 있습니다.
시는 등을 잘 보이지 않지만 산문은 곧잘 뒷모습까지 내놓는다. 산문은 시인의 전신全身이다.
최대 노력으로 최소 만족을 얻는, 그 바보스런 매력 때문에 나는 문학을 한다는 황동규 시인. 기억력은 현저히 줄었어도 상상력은 더 끓고 있음을 느낀다는 시인은 시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