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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번역문
卷 第三 >제3 흥법(興法第三) >원종흥법 염촉멸신(原宗興法 厭髑滅身) >법흥왕과 진흥왕이 출가한 것에 대한 논(614년 (음))
법흥왕과 진흥왕이 출가한 것에 대한 논 ( 614년 (음) )
전왕(前王)의 성은 김(金)씨인데, 출가하여 법운(法雲)이라고 했고, 자는 법공(法空)이다. ≪승전≫과 여러 설에서는 역시 왕비도 출가하여 이름을 법운이라고 하였고, 또 진흥왕도 법운이라고 했고, 진흥왕의 비도 법운이라고 했다고 하니 의심스럽고 혼동된 것이 매우 많다.
≪책부원귀(冊府元龜)≫註 101101 송(宋) 나라 왕흠약(王欽若) 등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역대 정치에 관한 사적을 모은 책으로 1천 권으로 되어 있다.닫기에는 “[법흥왕의] 성은 모(募)이고, 이름은 진(秦)이라고 하였다. 처음 역사를 일으켰던 을묘년에 왕비도 또한 영흥사(永興寺)를 세우고 사씨(史氏)註 102102 모록(毛祿)의 매(妹)이다닫기의 유풍을 사모하여 왕과 함께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법명을 묘법(妙法)이라고 하고 또한 영흥사에 살더니, 몇 해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국사(國史)註 103103 ≪삼국사기≫를 가리킨다.닫기≫에는 “건복(建福)註 104104 신라 제 26대 진평왕 6년에 연호를 건복이라 고쳤는데 건복 31년은 진평왕 36년인 서기 614년이다.닫기 31년에 영흥사의 소상이 저절로 무너지더니 얼마 후 진흥왕비인 비구니가 죽었다”고 하였다.
살펴보면, 진흥왕은 법흥왕의 조카이고, [그의] 비는 사도부인 박씨(思刀夫人朴氏)이니 모량리(牟梁里) 영실(英失) 각간註 105105 신라의 경위(京位) 17관등 중 최상의 관등인 이벌찬(伊伐湌)의 다른 명칭으로 이벌간(伊伐干), 우벌찬(于伐湌), 각찬(角湌), 서발한(舒發翰), 서벌감(舒伐邯)이라고도 한다. 각간이라는 관등이 생기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1 지마이사금(祇摩尼師今)조에 기록되어 있다. 진골(眞骨)만이 오를 수 있는 관등으로 중대에 이르러 그 위에 대각간·태대각간 등의 상위 관등을 두어 김유신처럼 국가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주기도 하였다(서의식, 「신라 상대(上代) ‘간(干)’층의 형성·분화와 중위제(重位制)」, 서울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94| 김철준, 「고구려 신라 관계조직의 성립과정」, ≪한국고대사회연구≫, 지식산업사, 1975).닫기의 딸이다. 역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지만 영흥사의 창건주는 아니다. 아마도 진(眞)자를 법(法)자로 써야 할 것 같다. [이는] 법흥왕의 비 파조부인(巴刁夫人)이 여승이 되었다가 죽은 것을 말하니, [그가] 곧 절을 짓고 불상을 세운 주인이기 때문이다. 법흥과 진흥 두 왕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한 것을 역사에 쓰지 않은 것은 세상을 다스리는 교훈이 아니어서였을까?
註 101
송(宋) 나라 왕흠약(王欽若) 등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역대 정치에 관한 사적을 모은 책으로 1천 권으로 되어 있다.
註 102
모록(毛祿)의 매(妹)이다
註 103
≪삼국사기≫를 가리킨다.
註 104
신라 제 26대 진평왕 6년에 연호를 건복이라 고쳤는데 건복 31년은 진평왕 36년인 서기 614년이다.
註 105
신라의 경위(京位) 17관등 중 최상의 관등인 이벌찬(伊伐湌)의 다른 명칭으로 이벌간(伊伐干), 우벌찬(于伐湌), 각찬(角湌), 서발한(舒發翰), 서벌감(舒伐邯)이라고도 한다. 각간이라는 관등이 생기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1 지마이사금(祇摩尼師今)조에 기록되어 있다. 진골(眞骨)만이 오를 수 있는 관등으로 중대에 이르러 그 위에 대각간·태대각간 등의 상위 관등을 두어 김유신처럼 국가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주기도 하였다(서의식, 「신라 상대(上代) ‘간(干)’층의 형성·분화와 중위제(重位制)」, 서울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94| 김철준, 「고구려 신라 관계조직의 성립과정」, ≪한국고대사회연구≫, 지식산업사, 1975).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생활
정치>왕실>국왕>신상
색인어
이름 : 법운,법공,진,사씨,묘법,진흥왕비,진흥왕,법흥왕,사도부인 박씨,영실,법흥왕,파조부인
지명 : 모량리
卷 第三 >제3 흥법(興法第三) >원종흥법 염촉멸신(原宗興法 厭髑滅身) >대통사가 세워지다(527년 (음))
대통사가 세워지다 ( 527년 (음) )
또 대통(大通)註 106106 양 무제의 연호인데 원년은 서기 527년에 해당한다.닫기 원년 정미(丁未)에는 양제(梁帝)를 위하여 웅천주(熊川州)에 절을 짓고 이름을 대통사(大通寺)註 107107 대통사에 대해서는 그 위치가 확실하지 않지만, 공주시 반죽동(班竹洞) 일대에서 ‘大通’銘'기와가 출토되고 당간지주와 석조 등이 남아 있어 반죽동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공주대학교박물관, ≪대통사지≫, 2000, 10~11쪽).닫기라고 하였다. 웅천(熊川)은 곧 공주(公州)인데, 당시는 신라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정미년은 아닌 것 같다. 곧 중대통(中大通)註 108108 중국 양(梁) 무제(武帝)의 연호 529년~534년에 사용하였다.닫기 원년 기유(己酉)(529년)년에 세운 것이다. 흥륜사를 처음 세우던 정미년(527년)에는 미처 다른 곳에 절을 세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註 106
양 무제의 연호인데 원년은 서기 527년에 해당한다.
註 107
대통사에 대해서는 그 위치가 확실하지 않지만, 공주시 반죽동(班竹洞) 일대에서 ‘大通’銘'기와가 출토되고 당간지주와 석조 등이 남아 있어 반죽동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공주대학교박물관, ≪대통사지≫, 2000, 10~11쪽).
註 108
중국 양(梁) 무제(武帝)의 연호 529년~534년에 사용하였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사원·단월
색인어
이름 : 양제
지명 : 웅천주
卷 第三 >제3 흥법(興法第三) >원종흥법 염촉멸신(原宗興法 厭髑滅身) >찬하여 말하다
찬하여 말하다
찬하여 말한다.
거룩한 지혜는 만세를 꾀하나니
구구한 여론은 가을날 터럭 같은 것일 뿐
법륜(法輪)이 금륜(金輪)을 쫓아 구르니
태평세월에 불일(佛日)은 빛나도다
이것은 원종(原宗)註 109109 법흥왕을 말한다.닫기을 [위한 찬이다.]
의를 좇아 죽는 일 놀랄 일인데
하늘꽃 흰 젖은 더욱 다정하다
칼날이 한 번 번쩍, 몸을 마친 뒤로
절마다 종소리 서울을 흔든다
이것은 염촉을 [위한 찬이다.]
註 109
법흥왕을 말한다.
주제분류
문화>문학>문학형식>시문
색인어
卷 第三 >제3 흥법(興法第三) >법왕금살(法王禁殺) >법왕이 살생을 금하다
법왕이 살생을 금하다
법왕금살(法王禁殺)
백제 제29대 법왕(法王)의 이름은 선(宣)인데, 혹은 효순(孝順)이라고도 한다. 개황(開皇)註 110110 수(隋) 문제(文帝)의 연호로 개황 년간은 581년~600년이다.닫기 19년 기미(己未)에 즉위하였다. 이 해 겨울에 조서를 내려 살생을 금하고 민가에서 기르던 매 따위를 놓아주게 하고 고기잡이나 사냥하는 도구를 불사르게 하여 일체 [살생을] 금지시켰다.
註 110
수(隋) 문제(文帝)의 연호로 개황 년간은 581년~600년이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불교정책
정치>왕실>국왕>신상
卷 第三 >제3 흥법(興法第三) >법왕금살(法王禁殺) >왕흥사ㆍ미륵사가 세워지다(600년 (음))
왕흥사ㆍ미륵사가 세워지다 ( 600년 (음) )
이듬해 경신(庚申)에는 승려 30명을 득도(得度)케 하고, 당시의 서울인 사비성(泗沘城) 지금의 부여(扶餘)에 왕흥사(王興寺)註 111111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신리 왕은이골에 있었던 사찰로 600년(법왕2)에 창건되었고, 백제 왕실의 비호 아래 대찰의 면모를 유지했으나 백제의 멸망으로 폐허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폐허 이후 근래에 이르기까지 정확한 위치조자 파악되지 않았으나 1934년에 ‘王興’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수습됨으로써 그 위치가 밝혀졌다.닫기를 세우게 하여 겨우 [그] 기초를 세우다가 승하하였다. 무왕(武王)註 112112 백제의 제30대 왕이다. 제29대 법왕(法王)의 아들로 600년에 즉위하여 재위 42년(641)에 사망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신라의 변경을 자주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시켰다. 또한 익산에 천도하려는 계획을 세워 그곳에 궁궐을 세웠고 당시 최대의 사찰인 미륵사를 창건하기도 하였다(노중국, ≪백제 정치사연구≫, 일조각, 1988).닫기이 왕위를 계승하여 아버지가 닦은 터에 아들은 집을 지어 수십 년을 지나서 완성했는데, 그 절은 또한 미륵사(彌勒寺)註 113113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절이다. 미륵사의 창건연대는 본 조의 기록을 토대로 백제 무왕 때 창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 성덕왕 18년(719)조의 “금마군 미륵사에 벼락이 떨어졌다(震金馬郡彌勒寺)”를 통해 통일신라 때까지 미륵사가 경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초의 승려 혜거국사(惠居國師) 비문에 의하면, 후백제 견훤 때(922)에 미륵사탑이 복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미륵사지에서는 고려시대의 유물과 유구가 많이 출토되어 이 시기까지도 절이 번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조선시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강후진의 ≪와여록(臥旅錄)≫을 통해 17세기 말까지 석탑이 존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미륵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되어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폐사가 되었다는 기록이 1980년부터 이루어진 문화재연구소의 발굴로 입증되었다(이왕기, ≪백제 사찰건축의 조형과 기술≫, 주류성, 2006). 무왕대의 미륵사 창건의 사상적 배경은 사찰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륵사상 즉, 미륵불국토의 건설이라는 이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미륵사의 창건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사실들이 미륵경(彌勒經)에 보이는 미륵하생신앙(彌勒下生信仰)과 밀접한 대응관계를 보이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김영태, 「미륵사창건 연기설화고」, ≪마한·백제문화≫1, 1975). 이와 같은 미륵사상에 의거하여 미륵사의 3개의 탑이 신라의 황룡사 9층탑과 같은 9층탑이고 미륵사탑보다 뒤에 만들어진 황룡사 9층탑이 주변국의 복속을 기원하는 목적으로 백제인에 의해 건립된 사실에 주목하여 미륵사의 창건배경 역시 주변국을 복속시키고 미륵불국토를 구현하고자 하는 신앙적인 염원에서 발현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길기태, 「미륵사 창건의 신앙적 성격」, ≪한국사상사학≫ 30, 2008). 또한 무왕대의 미륵사 창건의 또다른 배경으로, 무왕이 용화산 아래에서 만난 미륵삼존은 성불한 미륵과 그 보처보살(補處菩薩)로 파악하고 이 삼존불을 만난 무왕을 전륜성왕에 비유될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노중국,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1988) 한편 ≪삼국유사≫ 무왕조의 세주에 의하면, 미륵사를 왕흥사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5 법왕 2년(600)조에 “왕흥사를 세우고 승려 30여명을 두었다(創王興寺 度僧三十人)”라고 함으로써 법왕대에 왕흥사가 완공되어 승려가 주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 권3 흥법3 법왕금살조(法王禁殺條)에는 “(법왕 2년에) 수도인 사비성[부여]에 왕흥사를 세웠다. 처음 왕이 절을 짓기 시작하여 끝내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무왕이 왕위를 계승하여 법왕이 시작한 일을 이어서 몇 년을 지나 완성하니 그 사찰의 이름을 또한 미륵사라고 하였다(創王興寺於時都泗泚城 [今扶餘] 始立栽而升遐 武王繼統 父基子構 歷數紀而畢成 其寺亦名彌勒寺)”라고 하여 왕흥사가 무왕대에 완성된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부여의 왕흥사는 무왕대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익산의 미륵사와 동일한 이름으로 나타나 혼란을 주고 있다.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 법왕 2년(600)조의 “창왕흥사(創王興寺)” 기사를 부여의 왕흥사 창건 사실로 보고, ≪삼국사기≫ 무왕 35년(634)조의 “성왕흥사(成王興寺)” 기사를 익산의 미륵사 창건사실로 받아들인 견해가 있다(노중국,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1988). 또는 왕흥사와 미륵사는 서로 다른 사찰이지만 왕권의 상징인 왕흥사가 대성팔족(大姓八族)의 입김으로 미륵사라고도 불렸을 가능성(김주성, 「백제 무왕의 사찰건립과 권력강화」, ≪한국고대사연구≫ 6, 1992), 미륵과 관련된 절이 왕권의 상징인 듯한 왕흥사라는 이름이 붙여진 데서 비롯되었을 가능성(김두진, 「백제의 미륵신앙과 계율」, ≪백제사의 비교연구≫,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92), 사비와 익산에 존재하던 두 개의 왕성(王城)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을 가능성(김선숙, 「≪삼국유사≫ 武王條의 薯童說話에 대한 檢討」, ≪韓國學論集≫ 42, 2007) 등을 제시하였다. 한편, 2009년 1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를 위한 해체조사 과정에서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해 조성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일체를 발견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삼국유사≫ 무왕조에는 미륵사의 창건 주체를 백제 무왕과 그의 왕비, 즉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번에 새롭게 발견된 유물에서는 무왕의 왕비가 백제 최고 관직인 좌평의 딸이라는 구절이 발견되었다는 점, 그리고 미륵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가 무왕 재위 시대의 기해년(己亥年), 즉 무왕 40년(639)이라는 사실 등이다.닫기라고도 한다. 산을 등지고 물에 임했으며 꽃나무가 수려하여 사시의 아름다움을 구비하였다. 왕은 항상 배를 타고 물을 따라 절에 가서 그 경치의 장려함을 구경하였다. 고기(古記)의 기록과는 조금 다르다. 무왕은 가난한 어머니가 못의 용과 관계하여 낳았는데, 어릴 때의 이름은 서여(薯蕷)이고, 즉위한 후 시호를 무왕이라고 하였다. [절은] 처음에 왕비와 함께 창건하였다.
註 111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신리 왕은이골에 있었던 사찰로 600년(법왕2)에 창건되었고, 백제 왕실의 비호 아래 대찰의 면모를 유지했으나 백제의 멸망으로 폐허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폐허 이후 근래에 이르기까지 정확한 위치조자 파악되지 않았으나 1934년에 ‘王興’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수습됨으로써 그 위치가 밝혀졌다.
註 112
백제의 제30대 왕이다. 제29대 법왕(法王)의 아들로 600년에 즉위하여 재위 42년(641)에 사망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신라의 변경을 자주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시켰다. 또한 익산에 천도하려는 계획을 세워 그곳에 궁궐을 세웠고 당시 최대의 사찰인 미륵사를 창건하기도 하였다(노중국, ≪백제 정치사연구≫, 일조각, 1988).
註 113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절이다. 미륵사의 창건연대는 본 조의 기록을 토대로 백제 무왕 때 창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 성덕왕 18년(719)조의 “금마군 미륵사에 벼락이 떨어졌다(震金馬郡彌勒寺)”를 통해 통일신라 때까지 미륵사가 경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초의 승려 혜거국사(惠居國師) 비문에 의하면, 후백제 견훤 때(922)에 미륵사탑이 복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미륵사지에서는 고려시대의 유물과 유구가 많이 출토되어 이 시기까지도 절이 번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조선시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강후진의 ≪와여록(臥旅錄)≫을 통해 17세기 말까지 석탑이 존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미륵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되어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폐사가 되었다는 기록이 1980년부터 이루어진 문화재연구소의 발굴로 입증되었다(이왕기, ≪백제 사찰건축의 조형과 기술≫, 주류성, 2006). 무왕대의 미륵사 창건의 사상적 배경은 사찰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륵사상 즉, 미륵불국토의 건설이라는 이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미륵사의 창건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사실들이 미륵경(彌勒經)에 보이는 미륵하생신앙(彌勒下生信仰)과 밀접한 대응관계를 보이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김영태, 「미륵사창건 연기설화고」, ≪마한·백제문화≫1, 1975). 이와 같은 미륵사상에 의거하여 미륵사의 3개의 탑이 신라의 황룡사 9층탑과 같은 9층탑이고 미륵사탑보다 뒤에 만들어진 황룡사 9층탑이 주변국의 복속을 기원하는 목적으로 백제인에 의해 건립된 사실에 주목하여 미륵사의 창건배경 역시 주변국을 복속시키고 미륵불국토를 구현하고자 하는 신앙적인 염원에서 발현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길기태, 「미륵사 창건의 신앙적 성격」, ≪한국사상사학≫ 30, 2008). 또한 무왕대의 미륵사 창건의 또다른 배경으로, 무왕이 용화산 아래에서 만난 미륵삼존은 성불한 미륵과 그 보처보살(補處菩薩)로 파악하고 이 삼존불을 만난 무왕을 전륜성왕에 비유될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노중국,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1988) 한편 ≪삼국유사≫ 무왕조의 세주에 의하면, 미륵사를 왕흥사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5 법왕 2년(600)조에 “왕흥사를 세우고 승려 30여명을 두었다(創王興寺 度僧三十人)”라고 함으로써 법왕대에 왕흥사가 완공되어 승려가 주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 권3 흥법3 법왕금살조(法王禁殺條)에는 “(법왕 2년에) 수도인 사비성[부여]에 왕흥사를 세웠다. 처음 왕이 절을 짓기 시작하여 끝내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무왕이 왕위를 계승하여 법왕이 시작한 일을 이어서 몇 년을 지나 완성하니 그 사찰의 이름을 또한 미륵사라고 하였다(創王興寺於時都泗泚城 [今扶餘] 始立栽而升遐 武王繼統 父基子構 歷數紀而畢成 其寺亦名彌勒寺)”라고 하여 왕흥사가 무왕대에 완성된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부여의 왕흥사는 무왕대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익산의 미륵사와 동일한 이름으로 나타나 혼란을 주고 있다.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 법왕 2년(600)조의 “창왕흥사(創王興寺)” 기사를 부여의 왕흥사 창건 사실로 보고, ≪삼국사기≫ 무왕 35년(634)조의 “성왕흥사(成王興寺)” 기사를 익산의 미륵사 창건사실로 받아들인 견해가 있다(노중국,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1988). 또는 왕흥사와 미륵사는 서로 다른 사찰이지만 왕권의 상징인 왕흥사가 대성팔족(大姓八族)의 입김으로 미륵사라고도 불렸을 가능성(김주성, 「백제 무왕의 사찰건립과 권력강화」, ≪한국고대사연구≫ 6, 1992), 미륵과 관련된 절이 왕권의 상징인 듯한 왕흥사라는 이름이 붙여진 데서 비롯되었을 가능성(김두진, 「백제의 미륵신앙과 계율」, ≪백제사의 비교연구≫,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92), 사비와 익산에 존재하던 두 개의 왕성(王城)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을 가능성(김선숙, 「≪삼국유사≫ 武王條의 薯童說話에 대한 檢討」, ≪韓國學論集≫ 42, 2007) 등을 제시하였다. 한편, 2009년 1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를 위한 해체조사 과정에서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해 조성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일체를 발견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삼국유사≫ 무왕조에는 미륵사의 창건 주체를 백제 무왕과 그의 왕비, 즉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번에 새롭게 발견된 유물에서는 무왕의 왕비가 백제 최고 관직인 좌평의 딸이라는 구절이 발견되었다는 점, 그리고 미륵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가 무왕 재위 시대의 기해년(己亥年), 즉 무왕 40년(639)이라는 사실 등이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사원·단월
색인어
이름 : 무왕
지명 : 부여
卷 第三 >제3 흥법(興法第三) >법왕금살(法王禁殺) >찬하여 말하다
찬하여 말하다
찬하여 말한다.
짐승들 보호하니 그 은혜 천 산에 미쳤고
가축이나 물고기에까지 어진 덕택 흡족하네
덧없이 가신 성군이라고 말하지 말라
상방(上方) 도솔천(兜率天)엔 꽃피는 봄 한창이라네
주제분류
문화>문학>문학형식>시문
卷 第三 >제3 흥법(興法第三) >보장봉로 보덕이암(寶藏奉老 普德移庵) >보장왕이 도교를 따르다(624년 (음))
보장왕이 도교를 따르다 ( 624년 (음) )
보장봉로 보덕이암(寶藏奉老 普德移庵)
고려본기(高麗本記)[고구려본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구려 말기 무덕(武德)註 114114 당 고조(高祖)의 연호로 무덕 년간은 618년~626년이다.닫기·정관(貞觀)註 115115 당 태종(太宗)의 연호로 정관 년간은 627년~649년이다.닫기 연간에 나라 사람들이 오두미교(五斗米敎)註 116116 중국 후한말 장릉(張陵)이 창시한 도교의 일종으로 이보다 앞서 성립된 태평도(太平道)와 함께 도교의 조형(祖型)을 이룬다. 오두미교란 명칭은 입교자로부터 쌀 5말씩을 받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닫기를 다투어 신봉하였다. 당(唐)나라 고조(高祖)가 이 소문을 듣고 도사(道士)를 파견하여 천존상(天尊像)註 117117 도교에서는 노자를 태상노군(太上老君)·진군(眞君) 등으로 부르며 그의 모습을 조각한 천존상을 숭배하였다.닫기을 보내고 와서 ≪도덕경(道德經)≫註 118118 도가 철학의 시조인 노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책이다. ≪노자(老子)≫또는 ≪노자도덕경≫이라고도 한다.닫기을 강의하니 왕이 나라 사람들과 함께 들었다. 곧 제27대 영류왕(榮留王) 즉위 7년, 무덕 7년 갑신(甲申)의 일이었다. 이듬해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불교와 도교를 배우고자 청하니 당나라 황제 고조를 말한다.가 이를 허락하였다.
보장왕(寶藏王)註 119119 고구려의 제28대 마지막 왕으로 재위 기간은 642~668이다. 이름을 장(臧) 혹은 보장(寶臧)이라고 하였다. 왕 27년(668)에 고구려가 망하자 당으로 끌려갔다. 그 후 몰래 말갈과 통하였으므로 681년 공주(邛州)로 소환되어, 이듬해 그 곳에서 죽었으며 위위경(衛尉卿)에 추증되었다(임기환, ≪고구려 정치사 연구≫, 2004, 한나래).닫기이 즉위하여 정관 16년 임인(壬寅)(462년)이다. 역시 3교(三敎)를 함께 흥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때 신임받던 재상 개소문(盖蘇文)註 120120 성은 연(淵) 또는 천(泉)이고 이름은 개소문으로, 영류왕을 죽이고 스스로 막리지의 지위에 올라 나라의 권력을 독점했다. 보장왕 2년(643) 당에 사자를 보내어 도교를 받아들이도록 하였다.닫기이 왕에게 권고하기를 유교와 불교는 함께 성하나 도교(黃冠)註 121121 황관은 도사들이 머리에 썼던 기물을 말한다.닫기는 성하지 못하니 특별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자고 하였다.
註 114
당 고조(高祖)의 연호로 무덕 년간은 618년~626년이다.
註 115
당 태종(太宗)의 연호로 정관 년간은 627년~649년이다.
註 116
중국 후한말 장릉(張陵)이 창시한 도교의 일종으로 이보다 앞서 성립된 태평도(太平道)와 함께 도교의 조형(祖型)을 이룬다. 오두미교란 명칭은 입교자로부터 쌀 5말씩을 받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註 117
도교에서는 노자를 태상노군(太上老君)·진군(眞君) 등으로 부르며 그의 모습을 조각한 천존상을 숭배하였다.
註 118
도가 철학의 시조인 노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책이다. ≪노자(老子)≫또는 ≪노자도덕경≫이라고도 한다.
註 119
고구려의 제28대 마지막 왕으로 재위 기간은 642~668이다. 이름을 장(臧) 혹은 보장(寶臧)이라고 하였다. 왕 27년(668)에 고구려가 망하자 당으로 끌려갔다. 그 후 몰래 말갈과 통하였으므로 681년 공주(邛州)로 소환되어, 이듬해 그 곳에서 죽었으며 위위경(衛尉卿)에 추증되었다(임기환, ≪고구려 정치사 연구≫, 2004, 한나래).
註 120
성은 연(淵) 또는 천(泉)이고 이름은 개소문으로, 영류왕을 죽이고 스스로 막리지의 지위에 올라 나라의 권력을 독점했다. 보장왕 2년(643) 당에 사자를 보내어 도교를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註 121
황관은 도사들이 머리에 썼던 기물을 말한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도교사상>경서
문화>사상>도교사상>도관·도사
색인어
서명 : 도덕경
卷 第三 >제3 흥법(興法第三) >보장봉로 보덕이암(寶藏奉老 普德移庵) >보덕스님이 절을 옮기다(650년 6월 (음))
보덕스님이 절을 옮기다 ( 650년 06월(음) )
그때 보덕(普德)註 122122 보장왕이 당(唐)에서 도교를 들여와 불교가 쇠퇴함을 개탄하고, 백제로 가서 완산주(完山州) 고대산(孤大山)에 경복사(景福寺)를 짓고≪열반경(涅槃經)≫을 강론하였다.닫기화상은 반룡사(盤龍寺)註 123123 평안남도 용강군에 있었던 절이다.닫기에 있으면서 좌도(左道)가 정도(正)에 맞서면 국운이 위태로울 것을 걱정하여 여러 차례 [왕에게] 간했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그는] 신통력으로 방장(方丈)을 날려 남쪽의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全州)이다.고대산(孤大山)註 124124 ≪신증동국여지승람≫ 전주부 불우조에 “景福寺 在高達山 寺之飛來堂 有普德大士畵像”라는 것으로 볼 때 경복사가 있었다고 한 이 고대산(孤大山)은 고달산인 듯하다.닫기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곧 영휘(永徽)註 125125 당 고종의 연호로 650년(진덕왕 4)~655년(무열왕 2)에 사용하였다.닫기 원년 경술(庚戌) 6월이었다. 또 본전(本傳)에서는 건봉(乾封)註 126126 당 고종의 연호로 666년~667년에 사용하였다.닫기 2년 정묘(丁卯) 3월 3일(667년)이라고 하였다.[그후] 얼마되지 않아 나라가 망하였다. 총장(總章)註 127127 당 고종의 연호로 668년(문무왕 8)~669년(문무왕 9)에 사용하였다.닫기 원년 무진(戊辰)(668년)에 나라가 망했으니, 경술년과는 19년의 간격이 있다. 지금 경복사(景福寺)註 128128 전북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고달산에 있던 사찰로 고구려의 고승 보덕이 659년(보장왕 9) 3월에 반룡산 연복사(延福寺)에서 사찰 전체를 옮겨와 창건하였으며 그 때 공중으로 날아와서 절을 옮겨 왔다고 하여 비래방장(飛來方丈)이라고도 한다. 창건 이후 원효, 의상이 이곳에서 ≪열반경≫≪유마경≫을 배웠으며 보덕의 진영이 고려 때까지 봉안되었다고 한다. 폐사연대는 알 수 없다.닫기에 비래방장(飛來方丈)이 있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상은 ≪국사(國史)≫이다.
진락공(眞樂公)註 129129 고려 예종 때의 학자 이자현(李資玄, 1061∽1125)의 시호이다.닫기이 남긴 시가 [그] 당(堂)에 남아 있고, 문열공(文烈公)註 130130 고려 인종 때 활약했던 김부식(1075~1151)의 시호이다.닫기은 [그의] 전기를 지어 세상에 전하였다.
註 122
보장왕이 당(唐)에서 도교를 들여와 불교가 쇠퇴함을 개탄하고, 백제로 가서 완산주(完山州) 고대산(孤大山)에 경복사(景福寺)를 짓고≪열반경(涅槃經)≫을 강론하였다.
註 123
평안남도 용강군에 있었던 절이다.
註 124
≪신증동국여지승람≫ 전주부 불우조에 “景福寺 在高達山 寺之飛來堂 有普德大士畵像”라는 것으로 볼 때 경복사가 있었다고 한 이 고대산(孤大山)은 고달산인 듯하다.
註 125
당 고종의 연호로 650년(진덕왕 4)~655년(무열왕 2)에 사용하였다.
註 126
당 고종의 연호로 666년~667년에 사용하였다.
註 127
당 고종의 연호로 668년(문무왕 8)~669년(문무왕 9)에 사용하였다.
註 128
전북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고달산에 있던 사찰로 고구려의 고승 보덕이 659년(보장왕 9) 3월에 반룡산 연복사(延福寺)에서 사찰 전체를 옮겨와 창건하였으며 그 때 공중으로 날아와서 절을 옮겨 왔다고 하여 비래방장(飛來方丈)이라고도 한다. 창건 이후 원효, 의상이 이곳에서 ≪열반경≫≪유마경≫을 배웠으며 보덕의 진영이 고려 때까지 봉안되었다고 한다. 폐사연대는 알 수 없다.
註 129
고려 예종 때의 학자 이자현(李資玄, 1061∽1125)의 시호이다.
註 130
고려 인종 때 활약했던 김부식(1075~1151)의 시호이다.
주제분류
문화>문학>문학형식>시문
정치>행정>관인>政務諫言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생활
색인어
이름 : 보덕(普德)註 122122 보장왕이 당(唐)에서 도교를 들여와 불교가 쇠퇴함을 개탄하고, 백제로 가서 완산주(完山州) 고대산(孤大山)에 경복사(景福寺)를 짓고≪열반경(涅槃經)≫을 강론하였다.닫기화상,진락공,문열공
卷 第三 >제3 흥법(興法第三) >보장봉로 보덕이암(寶藏奉老 普德移庵) >양명이 개금으로 환생하다(612년 (음))
양명이 개금으로 환생하다 ( 612년 (음) )
또 ≪당서(唐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보다 먼저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요동(遼東)을 정벌할 때 양명(羊皿)이라는 비장(裨將)이 있었다. 전세가 불리하여 죽게 되자 [그는] 맹세하기를 “[내] 반드시 총신(寵臣)이 되어서 저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다”고 하였다. 개(盖)씨가 조정을 전횡하게 되자 개(盖)를 성으로 하였으니, 곧 양명(羊皿)이 이에 부합된다.註 131131 양(羊)과 명(皿)을 합치면 개(盖)가 되는 것으로 양명(羊皿)이 다시 태어나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한 것이 실현된 것을 뜻한다.닫기
또 고려고기(高麗古記)[고구려고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수나라 양제가 대업(大業)註 132132 중국 수(隋) 양제(煬帝)의 연호로 605년~616년에 사용하였다.닫기 8년 임신(壬申)에 3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서 쳐들어왔다. 10년 갑술(甲戌)(614년) 10월에 고구려왕 이때는 제36대 영양왕(嬰陽王) 즉위 25년이었다.이 글을 올려 항복을 청하였다. 그때 어떤 한 사람이 몰래 작은 활을 가슴 속에 감추고 표문을 가져가는 사신을 따라 양제가 탄 배 안에 이르렀다. 양제가 표문을 들고 읽을 때 활을 쏘아 양제의 가슴을 맞혔다. 양제가 군사를 돌이켜 세우려 하다가 좌우에게 말하기를, “내가 천하의 주인으로서 작은 나라를 친히 정벌하다가 이기지 못했으니 만대의 웃음거리가 되었구나!”라고 하였다. 이때 우상(右相) 양명이 아뢰기를, “신이 죽어 고구려의 대신이 되어서 반드시 [그] 나라를 멸망시켜 황제의 원수를 갚겠습니다”고 하였다.
황제가 죽은 후 [양명은] 고구려에 태어나서 15세에 총명하고 신무(神武)하였다. 그때 무양왕(武陽王)이 그가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국사≫에는 영류왕의 이름이 건무(建武) 혹은 건성(建成)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서는 무양(武陽)이라고 하니 잘 알 수 없다. 불러들여 신하로 삼았다. [그는] 스스로 성을 개(盖)라고 하고 이름을 금(金)이라고 하였는데, 지위가 소문(蘇文)에 이르렀으니, 곧 시중(侍中)의 직이다. ≪당서≫에는 “개소문이 스스로 막리지(莫離支)라고 했으니, 중서령(中書令)과 같다”고 하였다. 또 ≪신지비사(神誌秘詞)≫의 서문에는 “소문(蘇文) 대영홍(大英弘)이 서문과 아울러 주석하다”고 했으니, 즉, 소문이 곧 직명인 것은 문헌으로 증명되지만, 전기에 이르기는 “문인(文人) 소영홍(蘇英弘)의 서문”이라고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註 131
양(羊)과 명(皿)을 합치면 개(盖)가 되는 것으로 양명(羊皿)이 다시 태어나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한 것이 실현된 것을 뜻한다.
註 132
중국 수(隋) 양제(煬帝)의 연호로 605년~616년에 사용하였다.
주제분류
정치>신이>생물>사람·귀신
색인어
이름 : 양제,양명,양명,양제,양제,양제,양제,양명,무양왕,금,개소문,대영홍,소영홍
지명 : 요동
卷 第三 >제3 흥법(興法第三) >보장봉로 보덕이암(寶藏奉老 普德移庵) >개금이 왕에게 도교를 추천하다(625년 (음))
개금이 왕에게 도교를 추천하다 ( 625년 (음) )
개금(金)이 [왕에게] 아뢰기를, “솥에는 세 발이 있고, 나라에는 3교가 있어야 합니다. 신이 보니 나라 안에 다만 유교와 불교가 있을 뿐 도교가 없으므로 나라가 위태롭습니다”고 하였다. 왕이 이를 옳게 여겨 당나라에 요청하였더니 태종(太宗)이 서달(敍達) 등 도사 여덟 명을 보냈다. ≪국사≫에는 “무덕 8년 을유(乙酉)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불교와 도교를 청하니 당나라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에 의하면, 양명이 갑술년(甲戌年)(614년)에 죽어서 이곳에 태어났다면, 나이가 겨우 10여 세일 것인데, 재상으로서 왕에게 권고하여 사신을 보내 청했다고 하였으니, 그 연월에 반드시 한 군데는 틀린 것이 있을 것이지만, 지금 두 기록을 다 남겨둔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도교사상>도관·도사
색인어
국명 : 당
보장봉로 보덕이암(寶藏奉老 普德移庵) >보장왕이 불법을 믿지 않아 나라가 망하다(668년 (음))
보장왕이 불법을 믿지 않아 나라가 망하다 ( 668년 (음) )
왕이 기뻐하여 절을 도관(道館)으로 삼고, 도사를 높여 유사(儒士) 위에 앉게 하였다. 도사들은 국내의 유명한 산천을 다니면서 진압하였다. 옛 평양성(平壤城)의 지세는 신월성(新月城)이었는데, 도사들은 주문으로 남하(南河)의 용에게 명하여 [성을] 더 쌓게 하여 만월성(滿月城)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용언성(龍堰城)이라고 하고, 참서[讖]를 지어 용언도(龍堰堵)라고 하고, 또 천년보장도(千年寶藏堵)라고도 하였으며, 혹은 영석(靈石)을 파서 깨뜨리기도 하였다. 속설에 도제암(都帝嵓)이라고 하고, 또는 조천석(朝天石)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옛날에 성제(聖帝)가 이 돌을 타고 상제(上帝)에게 조회하였기 때문이다.
개금이 또 아뢰어 동북 서남에 장성(長城)註 133133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8 영류왕 14년조에 왕이 백성들을 동원하여 동북의 부여성에서 동남의 해변까지 천여 리에 걸쳐 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닫기을 쌓게 했는데, 이때 남자들은 부역에 나가고 여자들은 농사를 지었다. 공사는 16년만에야 끝났다.
보장왕시대에 이르러 당나라 태종이 친히 6군을 거느리고 와서 치다가 또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고종(高宗) 총장(總章) 원년 무진(戊辰)에 우상(右相) 유인궤(劉仁軌)와 대장군(大將軍) 이적(李勣)註 134134 당(唐) 조수(曺州)사람으로 본성은 서씨이고 본명은 ‘세적’이나 당태종의 이름을 피해 ‘적’을 사용하였다. 당 고조에 의해 이씨를 사성받았고 그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구당서(舊唐書)≫ 권67 열전17 이적| ≪신당서(新唐書)≫ 권98 열전18 이적).닫기과 신라 김인문(金仁問)註 135135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둘째 아들이자 제30대 문무왕의 동생이며, 어머니는 문명왕후(文明王后) 문희(文姬)이다. ≪삼국사기≫ 열전에 입전되어 있어 그 생애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는데, 당(唐)에 전후로 7차례 들어갔고 총 22년간 숙위하였다. 통일전쟁기 대당외교에서 큰 역할을 했으며, 고구려 및 백제와의 전쟁에도 참여하였다. 현재 경주시 서악동에 전 김인문묘가 있다(권덕영, 「김인문소전」, ≪문화사학≫ 21, 2004).닫기 등이 침공하여 나라를 멸망시키고 왕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돌아가니 보장왕의 서자(庶子)는 4천여 가(家)를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하였다. ≪국사≫와 조금 다르므로 아울러 기록한다.
대안(大安)註 136136 요(遼) 도종(道宗)의 연호로 1085년~1094년에 사용하였다.닫기8년 신미(辛未)(1091)에 우세승통(祐世僧統)註 137137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1055~1101)으로 이름은 후(煦)이고, 대각국사는 그의 시호이다. 1067년(문종 21)에 우세(祐世)라는 호와 승계의 최고위인 승통(僧統)을 수여받았다.닫기이 고대산 경복사 비래방장에 이르러 보덕 성사의 진영을 뵙고 시를 남겼는데, “열반방등(涅槃方等)의 교는 우리 스님으로부터 전수하였다”고 운운하다가 “애석하구나, 방장(房)을 날려온 후에는 동명왕(東明)의 옛나라 위태로와졌네”[라는 구절에] 와서 발문(跋)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구려의 보장왕이 도교에 혹하여 불법을 믿지 않으므로 스님은 방을 날려 남쪽으로 이 산에까지 왔다. 후에 신인(神人)이 고구려마령(馬嶺)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너희 나라가 망할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고 고(告)하였다.
註 133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8 영류왕 14년조에 왕이 백성들을 동원하여 동북의 부여성에서 동남의 해변까지 천여 리에 걸쳐 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註 134
당(唐) 조수(曺州)사람으로 본성은 서씨이고 본명은 ‘세적’이나 당태종의 이름을 피해 ‘적’을 사용하였다. 당 고조에 의해 이씨를 사성받았고 그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구당서(舊唐書)≫ 권67 열전17 이적| ≪신당서(新唐書)≫ 권98 열전18 이적).
註 135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둘째 아들이자 제30대 문무왕의 동생이며, 어머니는 문명왕후(文明王后) 문희(文姬)이다. ≪삼국사기≫ 열전에 입전되어 있어 그 생애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는데, 당(唐)에 전후로 7차례 들어갔고 총 22년간 숙위하였다. 통일전쟁기 대당외교에서 큰 역할을 했으며, 고구려 및 백제와의 전쟁에도 참여하였다. 현재 경주시 서악동에 전 김인문묘가 있다(권덕영, 「김인문소전」, ≪문화사학≫ 21, 2004).
註 136
요(遼) 도종(道宗)의 연호로 1085년~1094년에 사용하였다.
註 137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1055~1101)으로 이름은 후(煦)이고, 대각국사는 그의 시호이다. 1067년(문종 21)에 우세(祐世)라는 호와 승계의 최고위인 승통(僧統)을 수여받았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도교사상>도관·도사
문화>사상>도교사상>술법
정치>군사>군사시설>성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색인어
이름 : 개금,보장왕,태종,고종,유인궤,이적,김인문,보장왕,우세승통,보덕,동명왕,보장왕
卷 第三 >제3 흥법(興法第三) >보장봉로 보덕이암(寶藏奉老 普德移庵) >보덕스님의 제자
보덕스님의 제자
[이것은] 모두 ≪국사≫와 같고 [그] 나머지는 본전(本傳)과 ≪승전(僧傳)≫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스님에게는 11명의 고명한 제자가 있었다. 무상화상(無上)은 제자 김취(金趣) 등과 함께 금동사(金洞寺)註 138138 평안남도 안주군 오도산에 있었던 절이다(권상로, ≪한국사찰사전≫, 이화문화출판사, 1994).닫기를 세웠고, 적멸(寂滅)과 의융(義融) 두 스님은 진구사(珍丘寺)註 139139 전라북도 임실군에 있던 절이다(권상로, ≪한국사찰사전≫, 이화문화출판사, 1994).닫기를 세웠으며, 지수(智藪)는 대승사(大乘寺)註 140140 대승사라는 절은 여러 군데에 있어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닫기를 세웠고, 일승(一乘)은 심정(心正)·대원(大原) 등과 함께 대원사(大原寺)註 141141 전라북도 전주 서남쪽의 무악산에 있던 절이다(권상로, ≪한국사찰사전≫, 이화문화출판사, 1994).닫기를 세웠으며, 수정(水淨)은 유마사(維摩寺)註 142142 전라북도 정읍군 칠보산에 있던 절이다(권상로, ≪한국사찰사전≫, 이화문화출판사, 1994).닫기를 세웠고, 사대(四大)는 계육(契育) 등과 함께 중대사(中臺寺)註 143143 중대사라는 절은 여러 군데에 있어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닫기를 세웠으며, 개원화상(開原)은 개원사(開原寺)註 144144 충청북도 단양군 금수산에 있던 절이다(권상로, ≪한국사찰사전≫, 이화문화출판사, 1994).닫기를 세웠고,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註 145145 소재를 알 수 없다.닫기를 세웠다. 개심(開心)과 보명(普明)도 전기가 있는데, 모두 본전과 같다
註 138
평안남도 안주군 오도산에 있었던 절이다(권상로, ≪한국사찰사전≫, 이화문화출판사, 1994).
註 139
전라북도 임실군에 있던 절이다(권상로, ≪한국사찰사전≫, 이화문화출판사, 1994).
註 140
대승사라는 절은 여러 군데에 있어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
註 141
전라북도 전주 서남쪽의 무악산에 있던 절이다(권상로, ≪한국사찰사전≫, 이화문화출판사, 1994).
註 142
전라북도 정읍군 칠보산에 있던 절이다(권상로, ≪한국사찰사전≫, 이화문화출판사, 1994).
註 143
중대사라는 절은 여러 군데에 있어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
註 144
충청북도 단양군 금수산에 있던 절이다(권상로, ≪한국사찰사전≫, 이화문화출판사, 1994).
註 145
소재를 알 수 없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법명·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