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축의 생명까지 돌아보는 긍휼
잠언 12:10,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어제 우리가 살펴본 9절부터 12절까지 말씀은 경제 생활의 지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10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성경의 무대인 팔레스타인 지역은 초지가 많고 목축 활동이 활발했기 때문에 10절 말씀은 가축의 생명을 예로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축이 활발한 그 지역에서 가축의 생명을 돌보는 것은 생계와도 직결되는 일입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장인의 가축을 돌보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 그 장인 댁이 크게 번성했고, 본인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가축이 번성하여 큰 부자가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축의 생명을 잘 돌아보는 것은 목축업자의 기본적인 생활태도입니다. 그 일을 잘한다면 반드시 복이 임합니다.
하지만 이 본문의 어조는 경제 생활 자체보다, 근본적으로 짐승의 생명에 대하여 존중하는 태도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습니다. 의인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데,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가축의 생명과 건강에까지 마음을 두고 수고의 손길을 펼치는 사람입니다. 가축이 아프거나 상처를 입거나 병들거나 할 때 잘 돌봐주고, 하루 하루 먹을 것들을 챙겨주고, 새끼를 출산하는 일들도 하나 하나 살펴서 가축이 건강하고 편안하게 잘 지내도록 배려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비단 사람만을 돌보시는 분이 아니요 하찮은 짐승까지도 배려하시곤 하십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 규례를 지키라고 명하실 때에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그치고 쉬라는 계명의 목적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 집의 종들 나아가 그 집의 가축인 소나 노새, 나귀 등도 하루를 쉬면서 피로를 풀라는 뜻입니다.
신명기 25장 4절 말씀에,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고 하신 말씀도 타작하기 위하여 힘들게 멧돌을 돌리고 있는 소가 지치고 힘들 때 곡식을 혀를 쑥 내밀어 먹는 것은 당연한 보상이라는 것입니다. 그 먹는 곡식까지 아까와서 아무 것도 먹지 못하도록 재갈을 물리거나 입에 망을 씌우는 것은 인색한 일이요 잔인한 일이기에 율법으로 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느라 지친 소까지도 불쌍히 여겨 챙겨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 사람들이 회개하자 멸하지 아니하고 아끼신 이유를 불평하는 요나에게 설명하실 때 말씀하시기를,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 만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 4:1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논밭의 곡식들을 다 거두지 아니하게 하시고, 안식년을 지키게 하신 목적도 가난한 레위인들과 이웃들을 위하여 배려함이요 그들이 또 남긴 것들은 들짐승들에게 먹게 하시기 위함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말씀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일개 하찮은 짐승들의 생명조차 귀중하게 여기시는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하찮은 짐승의 생명도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가난하고 어려운 인간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긍휼과 사랑의 마음이 하나님을 닮아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 버려진 이들을 향하여지고 관심이 기울어져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말 못하는 짐승일지라도 희노애락의 감정이 있습니다. 짐승을 노엽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방치하여 그 생명을 고통 중에 죽게 하는 일들은 악한 일이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일입니다.
후반절에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고 하였는데, 짐승을 무참하게 도살하거나 잔인하게 고통을 주거나 하는 행동들은 벌을 부르는 행동입니다. 도살할 소의 무게를 더하여 돈을 더 벌려고 물을 항문이나 입으로 강제로 넣어 소를 고통스럽게 하거나 살아 있는 곰의 쓸개에서 웅담즙을 빼내서 먹거나 하는 일들은 참 잔인한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양심이 점점 화인 맞아가는 자들입니다. 그 마음에 긍휼한 마음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최근 일본의 한 작가가 우리나라 일제 시대의 압제를 사죄하기는커녕 일본이 우리나라를 다스림으로 인하여 수명이 두배나 연장되었다면서 우리나라 강점이 한국민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몰지각하게 말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겪은 수많은 고통은 외면하는 참 잔인한 사람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이 죄가 전혀 없는 것을 알면서도 무죄 방면시키지 않고 로마 군병들로 하여금 무지막지하게 예수님을 때려서 거의 죽다시피 할 만큼 고통을 주어 사람들 앞에 세워놓았습니다. 자기 딴에는 예수님을 이렇게 실컷 때려서 세워놓으면 군중들이 불쌍히 여기고 봐줄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그 처사는 빌라도의 본성이 얼마나 잔인한가 한 점을 더욱 여실히 보여준 것입니다. 긍휼히 여긴 것이 무참하게 매질하고, 채찍질한 것이니까 그가 평소에 얼마나 잔인한 사람이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잔인한 마음은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마음이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잔인하고 폭력적인 스포츠나 영화들은 우리가 조심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잔인한 영화, 지나치게 폭력적인 영화, 격투기, 투견 같은 것은 되도록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잔인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들을 피하십시오. 우리는 할 수 있다면 온유한 마음을 지켜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일을 좋아하고, 생명이 죽어가는 것들을 향한 긍휼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일제 때의 기독교 저항시인 윤동주 님의 서시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애틋하고 아파하는 마음, 이것이 시인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이요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긍휼의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지극히 하찮은 짐승의 생명까지 돌아보시는 분이시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그의 넓고 깊은 그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짐승의 생명까지 돌보아봅시다. 또한 이 시대에 구석지고 어두운 곳에서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레위인들, 선교사님들, 어르신들, 고아들, 길거리를 헤매는 가출 소년 소녀들, 노숙인들의 생명까지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품고 기도하는 사랑의 사람이 됩시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우리에게 속한 자녀들의 생명을 불쌍히 여기시고 더욱 자상하게 돌봐주실 것이요 챙겨주실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주여, 하나님의 사랑이 펼쳐지지 않은 곳은 없나이다. 주는 말못하는 짐승의 고통스런 신음소리와 배고파하는 까마귀 새끼의 울음소리도 들으시고 응답하시나이다. 그러한 한없는 긍휼로 우리를 돌아보고 계시며 살펴 보호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잔인한 마음일랑 일체 물리쳐 주옵시고, 항상 연민과 사랑의 마음이 더욱 촉촉해져서 주님의 드넓은 사랑을 조금씩 더욱 닮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