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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렘7:4-7)
오합지졸 1,200만 한국교인
일반 사회나 교회 자체로부터 한국교회가 받는 가장 큰 비난은 “너희 한국교회가 1,200만의 신자라고 자랑하면서 한국에게 영향을 준 것이 무엇인가? 네 명의 한 명이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기독교가 이 사회를 얼마든지 변화시키고 말 것이 아닌가? 그런데 오히려 많은 비리사건마다 기독교 신자들이 끼어 있는 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가 있는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조소가 담긴 공박(攻駁)을 받을 때마다 정말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러면서 이해가 안 된다. 정말, 교회마다 저렇게 많은 인파가 모여들고 새벽기도라, 철야 기도라, 산상 기도라 저렇게 열심이고, 성경 공부 그룹들은 저렇게 성시(盛市)를 이루는데, 이런 엄청난 파워(power)가 이 사회에는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대형 참사나 대형 비리의 중심부에는 기독교인들의 이름이 빠지지 않으니 무슨 요지경 속인 지 모를 노릇이다.
모르긴 무엇을 모르는가?
한국교회가 그동안 구경꾼 신자, 쭉정이 신자만 양산(量産)한 탓이 아니겠는가? 구경꾼 신자, 쭉정이 신자가 4천만인들 무슨 제구실을 하겠는가? 오히려 세상 바람(風潮)에 밀려서 대량으로 날아다니므로 엄청난 장애물이 되거나 썩어서 악취를 진동할 것이 뻔하지 않겠는가?
<어디를 가나 교회가 있고 신자들이 일요일마다(수요일 저녁에도) 거룩하고 성대한 예배를 드리며 설교를 듣고 있는데, 사회는 왜 변하지 않고 있으며 신자들 자신은 왜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한국교회에 이상이 있고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이다. 이 사실은 백만 마디의 말보다도 더 웅변적으로 한국교회의 실상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사회가 도덕적으로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변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인구의 4분지 1이나 되는 기독교 신자들만이라도 변했더라면 한국 사회가 지금과 같이 도덕적으로 황폐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크고 웅장한 교회당이 많고 푸짐한 종교행사를 벌이고 있지만 사람과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교회가 한국 교회요, 한국 기독교다.> (박하규:「한국교회 어떻게 살릴 것인가?」24페이지)
이를 잘 아시기에 미디안과의 대전쟁을 앞두고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너희 군사 32,000명은 너무 숫자가 많으니 돌려보내라’ 명하셨다. 아니, 지금 그 숫자도 수십만의 미디안 군대에 비하면 중과부적이요, 오합지졸이어서 백전백패가 뻔한 노릇인데 그런 명령을 내리시다니, 너무 무모한 작전이 아닌가? 그럼에도 기드온은 믿음으로 돌려보내니 많은 군사들이 귀가하고 10,000명만 남게 되었다. 그래도 하나님은 ‘너무 많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엄선(嚴選)하고 나니 고작 300명의 용사들, 알곡들만 남았다. 그들의 믿음의 순종만 가지고도 수십만의 미디안 군대를 대파(大破)할 수 있었다.
그러면 구경꾼 신자를 양산하는 주범은 누구인가.
단호하게 대교회주의(大敎會主義)라고 주장하고 싶다. 대부분의 한국 목회자들은 자나 깨나 불타는 소원이 ‘대교회 만들기’이다. 간절한 기도 제목도 겉 포장에는 ‘교회 성장’이나 속 알맹이는 ‘대교회를 이룩해 주옵소서.’라고 표현하는 것이 솔직한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목회자에 대한 평가는 교회의 크기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유능하고 높은 학식과 인격을 가졌을지라도 작은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면 하대(下待)를 받는다.
그러나 수천 명, 수만 명 모이는 교회를 담임하면 어디를 가나 높은 우대를 받는다. 총회에서도 상석에 앉힌다. 무슨 사업을 하더라도 큰 교회의 목회자가 대표로 앉아야 일이 제대로 진행된다. 또한 동서 사방에서 부흥회나 교회 성장 세미나의 강사가 되어 달라 주문이 쇄도한다. 심지어는 명예박사 학위를 주겠다고 권유하는 곳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
그런 최상의 대우를 받는 모습이 젊은 목회자들에게는 화려한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목사들 사회에서 흔히 하는 농담은 ‘대교회의 목회자가 되고 볼 일이다.’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아파트 단지 앞에 이층 교회를 설립하고도 ‘몇 년 내에 몇천 명 모이는 교회’가 되려는 큰 꿈을 그리며 불타는 기도를 드린다.
<10개 중 8개의 개척교회가 3년 이내에 문을 닫고 있다. 수억 원의 은행 빚을 갚지 못한 채 신용불량자가 된 목회자, 매달 수백만 원의 이자를 갚지 못해 개척자금을 까먹다가 결국 문을 닫은 목회자, 개척한 지 수년이 지나도 10명 안팎의 성도 때문에 절망에 빠진 목회자, 한국 교회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매년 수천 명의 신학교 졸업생들은 ‘김삼환 신드롬’, ‘하용조 신드롬‘, ’옥한음 신드롬’같은 성공 신화를 꿈꾸며 개척교회를 시작하고 있다.>(옥성호: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332페이지)
그런 성공신화를 성취하기 위한 교과서는 단연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가 쓴 저서들이다. 그의 지시대로 따르기만 하면 순식간에 대교회를 이룩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가르치는 기도의 방법은 '네 입을 넓게 열라.'(시81:10)이다. 70-90년대에는 그의 제자들이 한국교회 안에 판을 치고 있었다.
그중에 필자도 빼놓을 수 없었다.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전력할 때, 그의 저서들은 필자에게는 성경과 맞먹은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도 그의 교훈들은 얼마나 많은 젊은 목회자들로 하여금 대교회의 환상을 쫓아 전력을 다해 뛰게 하고 있는가? 그리하여 한국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은 ‘대교회 만들기 병’을 앓고 있다.
아니, 평신도들까지 그 병이 전염되어 있다.
어느 때는 연로한 여자 집사가 대표로 기도하면서 ‘주님이시여, 우리 목사님에게 영력을 칠 배나 주셔서 수많은 영혼들이 물밀듯이 모여들게 하심으로 장안에 이름난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할 때, 등허리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낀다. 어느 때는 장로들 중에서 ‘교회는 300명 정도가 모이는 것이 가장 재미있다. 500명이 넘으니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 동네에서 누구에 인사를 받으면 저분이 우리 교인인지, 아니면 다른 교인인지 구분이 안 되어 당황할 때가 많다.’고 말하던 분이 어느 주일날 대표 기도할 때는 ‘우리 교회 연연(年年) 부흥이 되어 수천, 수만이 모이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니,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당혹하게 된다.
그렇다면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결단코 아니다. 교회가 5년 가도, 10년 가도 도무지 성장하지 못하고 그 숫자, 그 크기에 머물러 있다면, 그 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면치 못할 것이다. 교회는 믿는 자의 수가 날마다 더해 가야 한다(행 2:47).
대형교회 담당할 그릇, 따로 있어
문제는 너나없이 대교회를 만들겠다고 요란을 떨게 됨으로 한국교회가 제 구실을 못하는 데 있는 것이다. 어떻게 교회의 목표가 대교회이겠는가? 그것은 하나의 과정이지, 목표는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유능한 목회자들이 대교회 만들기를 위해 순교적인 각오로 사력을 다하고 있으니 언제 사회를 위해서 제 구실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대교회는 과연 얼마의 크기를 의미하는가?
수만 명인가, 수십만 명인가 분명치가 않다. 세계 50개 교회의 순위에 드는 것인지, 세계 장로교에서 가장 큰 교회거나 감리교에서 가장 큰 교회를 말하는지, 아니면 동양 최대의 교회를 말하는지 막연한 것 같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위치 있는 분들이 밤낮 그 자랑이지. 그런 식은 재벌들의 태도이지, 교회마저 그래서야 되겠는가?
자, 세계 50개 대교회 중에 25개가 한국교회가 차지했다니, 이제는 그 정도로 과시하는 것으로 족하게 여기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대교회는 큰 그릇이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달란트와 같다. 필자 같은 작은 그릇은 그런 교회에서 일 년만 목회하래도 견디지 못해 사표를 쓰든지, 아니면 병들고 말 것이 분명하다.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박종렬 목사는 말하기를 ‘대형 교회 된 것이 성령의 역사이든, 자기 노력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너도나도 다하는 것 아닙니다. 대형 교회 목회를 하다가 물러나면 뒤를 이을 사람이 있어야 하는 데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라 했다. (「월간 목회」지 92년 4월호)
사실, 대교회를 설립했던 1세들 중 후임자에게 물려주었으나 여러 가지 문제로 교회를 사임하므로 실패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는 대교회를 담당할 큰 그릇은 많지 않다는 이론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대교회는 나름대로 큰 사명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때로 보면 중소 교회들이 하지 못하는 큰 사역을 대교회들이 감당하는 것을 보면 너무나 귀해 보인다. 그러나 큰 그릇이 못 되는 자가 어쩌다가 큰 교회를 물려받거나 아파트단지 중심부인 좋은 곳에서 교회를 개척함으로 기성 교인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어 대교회의 목회자가 되면 거기에서 문제가 발생된다.
눅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 꼴이 되는 것이다. 교인의 한 영혼, 한 영혼이라는 개념보다는, 무슨 곡식처럼 여기어 교인의 머릿수를 세기에 바쁘고, 주체할 수 없이 쌓이는 헌금으로 큰 곳간을 짓듯이 멀쩡한 교회당을 헐고 더 큰 교회당을 건립하여 교인을 자꾸 쌓아 두려는 데만 관심을 가질 뿐, 교인들을 양육하여 제자로서 세상 속으로 파송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어리석은 부자의 잘못은 많은 수확을 거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칭찬받을 일이지 결코 책망받을 일이 아니다. 문제는 거둔 수확을 나누지 못하고 제 배만 채우려는 데 있다.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목회 윤리로 대교회를 이룩한 것은 대단히 경탄할 일이다. 목회를 해보면 교회를 성장시킨다는 것은 엄청나게 힘에 겨운 일임을 체험하는 데, 몇 년 안에 수천, 수만이 모이도록 한다는 것은 아주 위대해 보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모인 교인들, 그 모인 헌금들, 그 모든 능력들을 자기 교회를 위해서만 쌓아 두려는 그 고약한 심보에 있다. 마치, 부동산 투기로 떼돈을 번 졸부(猝富)들에 의해서 한국 사회의 경제 윤리가 엉망진창이 된 것처럼, 어쩌다가 대교회의 목회자가 된 졸목(拙牧)들에 의해서 한국교회의 목회 윤리가 땅에 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교인들을 모으고 볼 일’이라는 파행적인 목회 윤리를 가지고 닥치는 대로 교인들을 모으기 바쁘고, 헌금이 모이는 대로 땅 사기와 건물 늘리기에 전력을 다함으로 마침내 대교회를 이룩했던 것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지역성전」이라는 독특한 술수로 대교회를 확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몇몇의 거대 교회들은 그들의 풍부한 재정 능력을 동원, 신도시 개발 지역에 부지를 매입하여 교회당을 짓고 주일이면 텔레비전 폐쇄회로를 이용하여 본 교회 목사의 설교를 시청하는, 이른 바 TV교회를 드린다. 곳곳에 이렇게 지교회(支敎會)를 설립하여 마치 은행의 지점처럼 조직화하고 본 교회의 예속 하에 두어 거대한 세력권을 형성한다. 이것이 과연 교회의 참모습과 부합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주간기독교」誌 95년 6월 18일)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움켜쥐고 놓지 않는 일에는 어쩌면 그렇게 어리석은 부자의 추한 꼴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지. 그런 식으로 개척 교회나 지성전을 설립하고 후배 목회자에게 맡기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랴. 바로 그러한 대교회들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한국교인들이 구경꾼 신자로 전락되고 있는 것인가? 최고의 화려한 건물과 화려한 치장들, 편의 시설들, 최고의 성가대와 관현악단들, 그리고 축복을 물 붓듯이 부어 주는 기복주의적인 설교들로 다른 교회의 기성 교인들을 향해 유혹의 손길을 펼친다.
거리 뒷골목과 은폐된 룸에서 마음껏 사기 치고 도둑질하고 간음(姦淫)하다가 왔을지라도 ‘이 음란하고 패역한 자여. 회개하라.’고 외치기보다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속량(贖良)의 성수(聖水)를 부어 주는 교회, 자기가 가장 편리한 시간을 골라서 몇 부 예배 시간을 맞추어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가서 주보에 적힌 대로 따라서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교회, 아름다운 음악, 위로의 기도, 박사 후드로 화려하게 장식한 설교자의 위로와 속량을 부어 주는 듯한 명설교를 듣고 헌금을 적당히 내고 돌아오면 훌륭한 성도의 자격을 부여하는 교회를 누가 싫어하겠는가?
지금까지 출석하던 작은 교회와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그동안 농촌 교회, 혹은 개척교회, 중소교회에서 ‘충성하라. 새벽기도 참석하라. 십일조와 건축 헌금하라. 구제하라.’고 지겹도록 강요받던 그 고통, 그 수준 낮은 설교의 지루함에 비하면 이 화려한 교회의 생활은 천국적인 삶이 아닌가?
<한국 교인들이 대형 교회를 지향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대형 교회가 가지는 익명성(匿名性)이다. 소형 교회가 가지는 교인에 대한 관심도 바라지 않고 교인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책임도 회피하려는 도피심정이 익명성을 가지게 되고, 이러한 익명성이 대형 교회를 지향하는 것이다. 사회 일부의 특수 직업인들이 자신의 명성이 높아지게 되면 어느 한 곳에 전속되는 것을 싫어하고 자유계약자(freelancer)가 되는데, 교회도 이러한 사회의 경향으로 어느 한 교회에 묶여 있는 것보다 편리에 따라서 교회를 취사할 수 있는 편의심이 발달하여 대형 교회를 찾게 되는 것이다.
대형교회의 익명성은 결국 개인으로서의 교인을 관리하는 허점을 노출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책임성을 결여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이런 연유로 대형 교회는 소형 교회에 비해 오히려 적극적인 참여자 수나 헌금 액수가 뒤떨어진다. 이러한 경향은 많은 교회와 교인에 비하여 사회적 기여가 적은 그리스도교로 만들고 말았다. 이러한 익명성은 결국 '모이는 교회‘로서의 기능을 가능했지만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기능을 불가능하게 하였고, 교회에 대한 사회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교회가 되게 하였다.>
(이성희:「미래 사회와 미래 교회」48페이지)
그러므로 대형교회들은 몰려드는 교인들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데 비해 매년 작은 교회들이 3,000개가 문을 닫는다고 한다. 자기 집 전세금과 재산, 은행융자를 쏟아 붇고, 또한 여기저기 손을 벌려 가까스로 마련한 개척교회가 3년도 안 되어 문을 닫을 때 그 심정은 절망 그대로 일 것이 분명하다. 좋은 대학을 졸업한 후 신대원(神大院)의 치열한 입시 난관을 뚫고 입학하여 수년 동안 실력을 쌓은 인재들이 이처럼 목회 초장부터 참담한 꼴을 당함으로 완전히 의욕을 상실하게 한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무임 목사들이 5만 명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대형교회들이 책임을 면하기가 어렵다. 오광석 목사(안락한교회)는 글을 쓰기를 “작은 교회가 성장하기 힘든 것은 메가 문화 때문입니다. 대형마트가 들어서면 동네의 작은 슈퍼마켓들이 모조리 문을 닫는 이유와 같습니다. 대형교회가 한 지역에 들어서면 그 주위에 있는 20∼70개의 작은 교회들이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고 했다.
그렇다. 지금 한국사회는 메가 문화가 판을 치고 있다.
수많은 소비자들이 지역에 작은 가게들을 피해 대형마트로 몰려들고 있다. 상품들이 다양하고 저렴하기 때문이요, 편의 시설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러한 문화추세에 따라 메가 처치(mega-church)들이 신바람을 내고 있다. 살기 편한 아파트나 대형마트에 길들여진 교인들에게는 예배실과 한두 개의 부속시설, 불편한 주차시설, 그리고 피곤하게 만드는 설교와 초라한 찬양대를 가진 작은 교회나 개척교회가 너무나 짜증스러울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비해서 대형교회들은 화려한 본당과 부속 시설들, 편리한 주차장과 친절한 안내위원들, 그리고 뛰어난 설교,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수백 명의 찬양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교인들이 심신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는 작은 교회에 대해 핑계만 있으면 떠나서 대형교회로 가고 싶은 것은 당연한 추세가 아니겠는가? 그 덕에 대형교회들은 큰 노력 없이도 수많은 작은 교회로부터 수평 이동 해 오는 교인들을 통해서 흥왕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어느 모임에서 개척교회 목회자로부터 ‘자기가 전도하여 6개월 동안 최선을 다해 양육하여 중요한 일을 맡기려 했던 교인이 어느 날 옆에 큰 교회로 가버림으로 대단히 낙심해 있다.’고 하소연하는 말을 들어 보았다.
그렇다면 대형교회로 가버린 그 교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불을 보듯 훤한 일이 아니겠는가? 구경꾼 교인이 되었을 것이다. 작은 교회에서는 새벽기도로부터 모든 모임에 참석하고 이것저것 봉사하라고 강요당했지만, 대형교회는 간섭하는 이가 없어 좋다. 주일날 많은 예배 중에 한 번 참석하고 식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 너무나 좋다.
다시 말하면, 현대인들이 자연스럽게 대형마트의 고객이 되는 것처럼 작은 교회에서 수평 이동한 교인들이 대형교회의 고객으로 변질되고 있다. 그렇게 큰 달란트를 대교회의 땅에 묻어 두고 지내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하여 작은 교회는 일꾼들의 빈곤으로 허덕이고 대교회는 가진 이들, 높은 이들, 학식 있는 이들의 과잉 상태로 점점 구경꾼 신자들로 양산되고 있다.
이제는 중·소교회 위주로 전환하여야 한다.
한국교회는 대교회주의에서 과감히 중소교회 위주로 대전환이 이루어져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지금까지 너나없이 동양 최대의 교회를 만들겠다고 질주하다 보니 교회가 교회 구실을 못하고 사회의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꼴이 되었다. 대교회가 되기 위한 몸부림으로 벌이는 사업마다 ‘전도폭발’이니 ‘몇천, 몇만 모이는 날’이니 해서 이 교회의 교인들, 저 교회들의 교인들을 선물을 미끼로 강제로 끌어다 앉혀 숫자를 채우는 데 급급하지 않았는가?
그 때마다 숫자 채우기 위해 강제 동원된 교인들을 서로 품앗이로 참석해 주고 선물을 받아 가면서 얼마나 목회자들의 대교회 병에 대해 비웃었던가? 이제 대교회는 이 정도면 된다고 생각해 본다. 이제는 건실한 중소교회를 많이 육성하도록 힘쓰는 분위기로 대전환 되어야 한다.
이재범 목사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에 약 45,000개의 교회가 있는데 그 중 주일예배 참석 수가 3,000명이 넘는 교회는 0.1%가 된다.”고 분석하고 있다. 약 45개 교회라는 통계이다. 그렇다면 45,000개의 교회의 목회자가 45개라는 상류층 교회에 들어가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치며, 혹은 좋지 못한 수단을 동원하고 있는가?
그러다가 뜻대로 되지 못한 목회자들이 자기의 무능을 탓하며 열등의식으로 의욕을 상실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아니, 이미 대교회의 자리에 들어가 있는 교회들마저 수 십 만의 교인수를 가졌다는 맘모스 교회 때문에 나름대로 심한 중압감에 시달리며 늘 교인 수에 배고파 있으므로 나누어 줄 여유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이제는 통계 경쟁을 멈추고 함께 모두 동역(同役)하는 한국교회가 되도록 방향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더 이상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50여 개의 대교회가 아무리 힘써도 안 되는 일을, 나머지 4만 교회들이 대교회주의로 치닫던 질주를 멈추고 달란트 맡은 자로서 보람을 가지고 힘써 일하기 시작한다면 엄청난 파워가 한국사회와 세계 앞에 나타날 것이 분명하다.
국가의 경제도 처음에는 경제 성장이 대기업부터 이룩되고, 다음에는 건실한 많은 중소기업들이 자리를 잡을 때 튼튼해지는 법이다. 즉, 대기업이라는 큰 기둥을 중심으로 건실한 중소기업들이 지붕의 역할, 벽과 창의 역할을 해줄 때 부강한 국가경제라는 집이 이룩된다고 본다. 일본이 지금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된 요인이 무엇인가? 막강한 대기업들이 버티고 있는 반면, 건실한 중소기업들이 엄청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는 뛰고 있다」라는 책에서 보면 “미쓰비시, 후지츠, 일본전기, 소니, 마쓰시타, 도요타, 닛산, 혼다 등이 30년 만에 미·일 게임을 역전시킨 일본 측 대표선수 명단이다. 그러나 진짜 일본의 힘, 진짜 일본의 무서움은 이 명단 밖에서 나온다. 한번 호명해 보자. 먼저 마쓰우라(松浦) 기계제작소, 후쿠이(福井)라는 시골 마을의 중소기업이다. 이 회사는 세계시장 점유율 100%로 독점기업이다. 다음은 마부치 모터사로 전형적 가족 중심의 중소기업이요, 일본 전기 산업은 직업훈련 대학 전기과 출신의 28세 청년이 창업한 회사이다. 이런 유명한 중소기업이 20만 개나 달하는데 그 중 90%가 종업원 300명 미만의 중소기업이다.”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경제가 튼튼하지 못한 것은 건실한 중소기업군(群)의 층이 엷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대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부흥기를 이룩해 왔다. 이제 한국교회가 한 단계 더 성장하려면 중소교회의 중흥(中興)을 통해서 되어져야 한다. 그러면 중소교회란 어느 정도의 크기를 말하는가?
목회 경험을 통해서 나름대로 분류해 보았다. 미자립교회:100명 이하, 소교회: 100명-300명, 중교회 300명-1,000명, 중대형교회 1,000명-3,000명, 대교회: 3,000명 이상, 초대형교회: 10,000명 이상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므로 300명-1,000명이 모이는 교회가 든든히 서 갈 때, 그 나라의 교회는 큰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라면, 이제는 대교회주의가 자제되고 중소교회주의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1,000명 이상 모이면 이제는 나누어서 제2, 제3, 제4 교회식으로 분가해 나가야 한다. 사실, 목회를 해보면 1,000명 이상을 온전히 목회 한다는 것은 벅차다는 것을 느낀다. 어느 때는 제직의 이름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진다. 그러므로 2,000명, 3,000명 이상을 목회 한다는 것은 엄청난 구경꾼 신자를 양산(量産)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박종렬 목사는 말하기를 “젊었을 때 들은 얘기로는 한 사람의 목사의 능력으로 목회할 수 있는 적정 인원은 장년 교인 300~500명 선이라고 했습니다. 500명이 넘어 가면 무리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장년 500명이 넘어가면 제 2교회를 세우고 제 2교회가 분립하여 또 커졌을 때에는 또 분립하여 저변을 확대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그 때에 비해서 사회 양상도 많이 달라졌고 문명의 이기(利器)도 많이 개발되었지요. 옛날에는 도로도 그렇고 교통수단도 별로 없었지요. 심방 하면 온종일 걸어 다닌 것에 비해 지금은 차량을 이용하니 한결 수월하지요. 옛날에는 500명이 한계라고 했다면 문명의 이기의 혜택을 보니 1,000명 선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봅니다.”라 했다.(「월간 목회」지 92년 4월호)
목회자의 입장에서 목회를 신실히 하면 1,000명 정도는 감당할 수가 있을 것 같고, 또 그 정도의 수가 되어야 선교사 단독파송, 단독 개척교회 설립, 미자립교회 보조, 불우 이웃기관의 구제, 지역 시회봉사 등을 소신껏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교회가 이제는 나누어서 목회할 때가 되었다.
매년 우수한 수천 명의 신학교 졸업자들이 배출되고 있지 않은가. 1만 명 모이는 대형교회에서 부교역자 20명과 함께 엄청난 쭉정이 신자를 양산하는 것보다, 20명이 500명씩 나누어서 목회 하는 것이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함으로 많은 알곡 신자를 양육할 것이 아닌가?
중소교회의 목회자들이여, 이제는 대교회주의 신화를 과감히 버림으로 교인 머리 숫자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본격적으로 교회다운 교회, 교인다운 교인을 만들어 사회 속으로 파송하는데 주력함으로 한국교회의 새 바람을 일으키자.
그리하여 한국교회의 또 한 번의 부흥기를 이룩하자.
(소리지: '한국교회.이대로는 안된다.' 원고 2022년 재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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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목사에 관한 고찰, 감사합니다. 현대사회에서 기독교인이 영향력이 없는 이유를 확 이해한 글이었습니다. 호로록 호로록~날라다니는 쭉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