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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등학교때였나보다. 신체검사를 하는데, 희안한 일이 생겼다.
양호실에서 선생님께서 책을 펴고 숫자를 읽으라는데, 도통 보이지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은 잘도 금방금방 대답하고 넘어가는데.
한두쪽만 펼치고, 읽으면 넘어가던 선생님이 급기야 몇 페이지를 더 물어봤다.
#2.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 처음가본 거대한 병원.
그때만해도 낡아보이는 복도.
햇볕이 좋은 날이었다.
엄마와 함께 간 나는 몇가지 검사를 받아야했다.
아가도 아닌데 블럭을 펼쳐놓고, 같은 색깔을 맞쳐보라고 했다.
현미경같은 기계에 눈을대고, 반원위에 그려진 색깔을,
버튼을 돌려 똑같은 색으로 만들어 보라고도 했다.
몇가지 검사가 끝난후 결과가 나왔다.
#3.
적록색약. 의사선생님이 정상인과 비교한
그래프를 보여주며 심하지는 않다고 했다.
왠지 실망한듯한 부모님은 연신 괜찮다고 하셨다.
미대는 불가능하지만, 나머지는 다 갈 수 있다고도 하셨던것 같다.
그때 왜 의대도 갈수 있다는 말을 하셨는지는 모르겠다.
그때까지 난 화가도 의사도 할 생각따위는 없었다.
후에 알았지만, X염색제 열성유전 인 적록색약(색맹)은
외할아버지께서 나에게 물려 주신 유산중 하나였다.
그리고 외가에서 물려봤은 유산은 또 하나가 있다.
왠지는 모르지만 어려서부터 정치는 지저분한 일이니
하지 말라는 가풍.
외할아버지의 아버지, 판사셨다던 할아버지의 뜻이라고도 들었다..
덕분에 기술을 배우신 외할아버지께서는 전화국장을 하셨었고,
아버지 어머니도 전화국에서 근무하다 만나신거니
집안분위기가 더욱 자연스럽게 기술자나 실무자를
우대하는 분위기를 향했고...
어려서부터 나에게 정치는 언제나 부정적인 무언가였고,
태어나서 대통령이 꿈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어쩌면..왕조가 바뀌자, 은거를 택해버린 부계와
종친으로 정사에 뜻을 두면 위험했던 모계를 생각하면
자연스런 귀결일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내가 요새 드라마 "대왕 세종"에 완전 빠져서....;;;)
어릴적 내 꿈은 과학자였다.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
초등학교때 과학고라는 곳이 있다는사실도 알았던것 같다.
고등학교를 2년만 다니고, 카이스트로 갈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누구도 알려준 기억이 없는데, 아마 어린이 신문을 보고 알았나보다.
뭐..어쨌든 초등학교 졸업전에 그런곳이 있다는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곳에 오기전까지,
난 평생 정치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살아갈줄 알았다.
정치나 조직이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불익을 줄수도
있음을 이곳에 와서야 처음 몸소 느꼈다.
생각해보면 중학교때 수위를 다투던 친구들은 거의 모두 문과를 지망했다.
그들은 서울대법대나 고대영문과 같은곳으로 갔다.
아마도 문과가 리더로써 영향력이 있다는걸 그들은 그때부터 알았던게다.
#4.
중학생이 되었다. 공부는 괜찮게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과학고를 가려면 고등학교 수학문제를 미리 풀수 있어야했는데,
누구도 나에게 이야기해 준사람이 없었다.
중학교 2학년때부터 아침마다 영재반에 불려갔지만,
천재가 아닌이상 예습없이 던져진 고등학교 수학문제를 풀수는 없었다.
과학이나 영어도 그랬지만, 특히나 수학이 어려웠었다.
그래서 가긴 갔지만
그곳에선 별로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던 학생이었던 것 같다.
사실, 열심히 하고 싶어도 뭘 파야하는지 모르고 지나갔다.
그시절 "부천"은 철저하게 비평준화된 지역이었다.
김포나 강화에서 아이들이 오기도 했다.
경기도에서 몇군데 명문으로 꼽히던,
서울 강남쪽에서 많이 간다는 안양고,
인천에 서인천고,
그리고 부천고,
후에 신도시 일산의 백석고와 분당에 서현고.
"부천고"에 들어갈 성적은 언제나 충분히 됐다.
(반에서 5~7등정도까지 가능했다.)
중3 첫날, 담임선생님이 각자 목표로 하는 학교를 적어내라고 했다.
나는 그때 주저없이 경기 과학고를 적어냈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졸업까지 "우"가 나온과목은
중3 2학기때 실습을 망친 체육 한과목뿐이었다.
수학도 나쁘지 않았다.
내기억에 수학 역시 정규시험에선 90점 이하로 맞은적은 1번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두세문제이상 틀린적은 9년동안 1번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중학교 졸업할무렵, 과학고를 시험볼 기회조차 나에게 주어지지 못했다.
뭐..항상 그럭저럭이던 모의고사등수는 그해 엄청나게 올랐다.
시험 보기전 마지막 모의고사는 시내 몇군데 중학교는 안봤다는걸 감안해도
너무 잘나왔다.
과학고를 준비하던 아이들은 그곳에 매달린 까닭이기도 했다.
그 시험에서, 나는 3등을 했다.
반에서가 아니라, 부천시 전체에서였다.
#4.
고등학교 입학시험은 썩 좋지 못했다.
담임 선생님이나 어머니는 좀 실망한듯 하셨는데,
그냥 붙으면 되는 것이어서 별 신경 안썼다.
반에서 3~4등 정도로 들어간것 같은데,
고등학교 내내 공부에 별뜻이 없어서 였는지;;;
그성적이라도 나온적이 한번도 없었다.
이미 과학고를 시험도 못봤었다는게 내겐 중요했다.
그즈음 뒷산 등산을 하는데,
아버지께서 뜬금없이 의사가 되보는게 어떠하겠냐고 하셨다.
아마 큰 의미없이 그냥 말씀하셨을게다.
어렸을때 세브란스갔던 기억과 "의사"도 할수 있다고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마도, 장애가 있어도 할수도 있다는 말에 오기로 그럼 해보자 했나보다.
그림은 원래 취미도 적성도 없었지만,
의사는 할수도 있는 것중에 하나였다.
#5.
고등학교 2학년이 올라가기전 모든 학생은 적성검사를 받았다.
문과쪽은 거의 모두 90점이 넘어갔다.
법학이나 문학은 거의 만점가까이 나왔다.
적성검사가 젤 안나온것은 농학이었다.
60점대였던것 같다.
농부가 될 생각은 없었으니 상관없었다.
하위권을 달리는 분야가 하나가 더 있었다.
의학이었다. 60점대나 70점대였을거다.
여담이지만, 나는 지금 농사짓는 농촌지역에서 3년째 의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2학년, 나는 주저없이 이과를 선택했다.
이과중에서도 생물반을 택했다. 의사가 되고싶었으니깐.
문과를 가서 교차지원을 한다거나,
다른 과목을 택하겠다는 요령도 없었다.
덕분에 이과적 적성이 충만한 가장 우수한 아이들이 모인,
훗날에 의사,치과의사만 통틀어 10명이 넘게 나온 우리반에서
고생도 꽤나 했다.
수능선택과목은 그나마 가장 괜찮은 화학으로 했다.
문이과 선택은 후회하진 않지만 정말 적성에 맞지않는 선택이었다.
그즈음 사춘기도 심하게 겪었다.
인생의 참의미를 찾으며;;;,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했다.
정해진 길을 가는 모범생 인생의 종말이었다.
성적은 비적성과 사춘기의 고민속에 상상을 초월하는 시너지 효과를 냈다.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수학 성적은 "가" , 화학은 "양" 이 나왔다.
수학은 3년동안 "미"이상 나온적이 없었다.
불과 2년전 부천시 전체에서 3등을 한적도 있었는데 말이다.
#6.
솔직히 말하면, 수능 모의고사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오직 "수학"을 제외한다면,
모든 점수는 상위권과 비교할수 있을 정도로 나왔고
문이과 통틀어서 언어영역은 언제나 최상위권이었다.
오로지 "이과수학" 한 과목이 발목을 잡을 뿐이었다.
수학 덕분에, 아쉬움때문에라도 수능을 세번이나 봐야했고,
수학 덕분에, 공대수학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겠다는 결심도
하게 만들었다.
대학 입학후에 "수학"이 싫어서 과외도 안하고 살았다.;;;
언어영역은 의학과는 달리 적성검사에서 "딱니적성" 이라고 나온 항목이었다.
세번 수능을 보는동안 아마 난이도도 각각 달랐을거다.
마지막해가 가장 난이도가 높았었다고 했던것도 같다.
나는 수능에선 언어영역 120점중 세번 모두 110점 이상이 나왔다.
마지막해 쉬웠던 수탐2는 만점이 나왔다.
선택과목은 3년전 "양"을 받았었던 "화학"이었다.
#7.
지지리도 적성이 아니었던 이과.
적록색약이지만 가능은 할거란 의사.
나는 그리 우수하지 의대생으로 졸업해
생각대로 의사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올해로 30대가 시작되었다.
학생시절, 날로 먹은 본1때가 생각나서
USMLE라도 공부해보자 하지만
역시 이공부가 적성에 꼭 맞지는 않는것 같다.;;;
얼마전, 가까운 지인과 통화를 했다.
앞으로 5년을 병원에 있으면 30대 중반,
보드를 따고 평범한 의사로 살아가긴
내 인생이 아깝단 생각이 든다고 했다.
물론, 완전히 다른 길을 모색하는건 아니다.
언젠가도 썼지만, 냉정하게 의학이 내 적성이 아니지만,
나는 의학과 의학이 다른사람에게 베풀수 있는 일들을 사랑한다.
적성과 상관없이 좋아서 선택한 길이니
어쨌든 의학이란 학문을 평생하면서,
그 언저리에서 살 계속 살아갈 생각이다.
그는, 내가 너무 감상적이다.
공부를 좋아하진 않아보인다,
솔직히 (모든일에) 의지도 약해보이니,
괜한 시간을 낭비할지도 모른다.
공보의 시절에 학문적으로 치열하게 산거 같지도 않은데
왜 갑자기 그러냐는 반응이었다.
물론 날 잘안다 생각하고 걱정이 되어 한말이겠지만,
단순히 인턴 들어가기 싫어서 그런거냐는 이야기로
내 마음에 상처를 줬다.
인턴을 제때 밟지않고 잘못될 경우 "예후"가 좋지 않을거라 생각한다는
의학용어를 서슴없이 농담처럼 사용하면서..
사실 다 맞는 말이다. 한방형이 날 위해, 놀러온 전문의 손님들에게 물었었나보다.
후배이자 동생들인 성형외과와 정형외과 전문의 선생님들이 오셨을때,
무조건 전문의 보드는 따놓고 하고 싶은걸 하라고 했단다.
대한민국 의사의 95% 이상이 가는 길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 졸업할때 축사를 하신 존경하는 외부 선생님은
그와는 꼭 반대로 이야기를 했었고, 대부분의 학생은 신경을 쓰지 않았을거다.
기억조차 못할지도 모르겠다.
다들 맨날 똑같은 의사가 되려 하지 말고
좀더 넓게 생각하고 여러갈래 길을 갈수 있음을 생각해보라 하셨다.
그분은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세계최초로 미지의 바이러스를 발견하고 이름을 붙인
학술원 이호왕 박사님이셨다.
6.25때부터 미지의 병이라 알려진 유행성 출혈열을 일으키는
바이러스 발견한후,
자신의이름이 아닌 한탄강에서 이름을 따서 한탄바이러스라 붙이셨고,
후에 그 아형인 서울 바이러스도 발견하셨다.
덕분에 한탄백신이 만들어질수 있었다..
수천쪽의 의학교과서 해리슨에 유일하게 실린,
한국사람의 업적 한탄, 서울 바이러스.
어제 방문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탄 바이러스 이야기를 해주자,
해마다 최대의 숫자를,특히 올해는 신안군 전체 유행성 출혈열 예방접종에
1/6을 신청해서 맞췄던 우리 지소 직원분들은 누가발견한거냐며.
발견하신 이박사님을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0-;;;;
누가뭐라든 나름 "의학적으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한다.
공중보건의로서, 지소조직 과 운영의 틀을 만들어보고,
잘못된 관행의 예비비를 없애고,
가장 많은 예방접종을 시행하고,그냥 넘어가지 않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사실 도초는 예방주사를 너무 좋아하시기도 하지만, 첫해에는 유행성 출혈열이 무슨 병인지
아침 해뜨면 이장님들의 전화를 받아서 설명해야했다.)
주마다 가장 많은 수의 환자를 방문했고,
가끔 평이하지 않은 어려운 환자가 오게되면,
상대방 의사나 환자에게 무시당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하면서
여러사람에게 전화해서 생각해보고,
(첫해에는 지소에 오시는 할아버지들이 이번에 온 의사는 전화만 한다고도 하셨다지..)
잘모르는 소아진료와 예방접종 금기들 덕에
소아과 성완이형에게 가장 많이 전화해서 묻고, 덕분에 친해졌다.
"내 나름대로" 의학을 하면서 살았었고
탁월한 임상의사는 아니었지만,
결코 "비의학적"인 것만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공부라는 걸 해보려 하는 중이다.
하지만,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띄엄띄엄 오곤하는 끊임없는 환자와
일상덕에, 시간을 낸다는게 그리 쉬운일은 아니다.
시험이란건 다만 몇시간이라도 집중해서
단기간에 준비하고 끝내야하는법인데,
이 기간내에 얼마나 할수 있을지는 정말 모르겠다.
천상 저녁시간을 활용할수 밖에 없다고 하지만,
함께 공부 하는 이도, 의지도 정말 박약하니 쉽지 않고...
부담이 커지니 더 않되는것 같아서
당분간은 너무 부담을 갖지 않으려하고 있는 중이다.
안좌 장선생이 공부처음 시작할때 해준 충고이기도 하다.
#8.
하나님이 우리를 의사로 부르셨다면
각자의 부르심에는 뜻이 있을거라고 믿는다.
분명, 외과전체를 통째로 포기해야하는 색약이라는 약점을 지닌 내가,
적성에도 맞지 않는 공부를 하면서, 즐겁고 사랑하게 하셨다면
나에게도 뭔가 부르심이 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임상의를 완전히 포기하지도, 뚜렷한 길이 보이는 것도 아니지만.
냉정하게, 임상이 적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여러가지 다양한 삶의 길들을 모색하는 모습이
때론 위태하게 보일런지도 모르겠다.
내가 봐도 그렇다. 갑자기 뜬금없이 이러니깐.
그런데, 원래 내 삶은 이렇듯 뜬금없었다.
의사가 된것도, 모두가 인턴가라고 하는데 공보의로 온것도,
모두가 올라오라고 하는데 섬에 남겠다고 한것도,
후회없이 한 결정이고, 결론적 감사하게도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덕분에, 우리가족은 이젠 어지간해서는 놀라지도 않고,
하겠다면 반대도 안하게 되셨지만..;;;.
어쩌면 완벽하게 실패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기쁘고, 그 도전에 따른 부담을 감수하겠다면
이제껏처럼 후회하지 않겠다면 그걸로 된거 아닐까?
바라기는 훗날 우리가 만나는 자리에서,
각자의 부르심의 영역에서 의사로써 충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
내용을 이렇게 쓰려고 시작한 글은 아닌데
길게 쓰다보니 결론이 이렇게 써졌다.
물론 후회는 없다;;;
내 의사 생활과 삶의 결론은 어떨지
결국 주님 보시기에 예후가 어떨지는 알수 없지만...
어느쪽이 되었든 열심히 해볼 생각이다.
물론 후회는 하지 않고 말이다..
“침술, 메디칼 안된다”
- 미국 한의사(=침구사)는 더욱 기반확보에 큰 어려움을 겪을 듯!
가주 예산삭감 정책에 밀려
*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침치료를 보험지급에서 제외한다고 한 조치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본래 캘리포니아 주에서 한의사로 자칭하는 침구사란 면허증은, 의료보조인의 지위이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침구사 면허증은 민간자격증인 NCCAOM 보다는 훨씬 권위가 높은 주정부 면허증 이다. 때문에 의사에게만 지급하는 의료보험을, 침치료를 전담하는 침구사(의료보조인)에게는 지급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법규정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아졌다.
아직도 한국에서 미국 침구사 캘리포니아 면허증을 한의사로 잘못 인식하여, 정식 의사로 분류될 것이라는 혼돈을 하고 침구사 면허 시험을 준비하는 분들이 가끔 보이고 있다. 미국으로 건너가 낭패당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미국 동양의학 제도의 실상을 계도하는 조치가 절실하다.
또한 미국, 캐나다에서는 역시 자연의학 NMD 의사가 대체의학의 대표적인 의료인 직업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보다 많은 한국 개업 한의사가 아메리카에서 의료인으로 대접받는 기반을 확보할 수 있도록 홍보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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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아놀드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서명한 2009~2010년 예산안에 정부보조 의료보험 메디칼(Medi-Cal)에서 침 치료 혜택을 제외하는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다.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400억달러가 넘는 재정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전 부서에 걸쳐 총 150억달러에 이르는 긴축재정과 예산삭감 정책을 발표했고, 침 치료를 메디칼 대상에서 제외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침 치료의 메디칼 폐지는 오는 7월1일부터 실시되며 침 치료 외에도 카이로프랙틱 치료와 심리상담, 검안, 치과 치료 등도 메디칼 대상에서 제외됐다.
가주한의사협회(회장 김갑봉)는 “침 치료는 지난 80년대부터 메디칼 대상으로 포함돼 저렴한 진료비와 우수한 치료효과로 환자와 보험사 모두에게 이득을 주었다”며 “어렵게 명맥을 유지해 오던 메디칼 침 치료 커버리지가 중단됨에 따라 한의사들은 물론 환자들도 피해를 입게 됐다”고 밝혔다.
메디칼은 침 치료를 선택 수혜사항으로 분류해 환자 1인당 최고 30달러까지 진료비 수가를 지급해 왔다. 가주한의사협회 남형각 사무국장은 “주정부가 메디칼 침 치료에 대해 지급하는 진료비가 1회에 5.75달러에 불과하다”며 “메디칼 침치료 폐지는 경제적인 문제보다는 정부 의료보험인 메디칼이 침 치료를 제외하면서 일반 의료보험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 더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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