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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리 강변마을과 "원서리 고인돌 유적지"
고인돌 유적지는 강변마을 입구에 있다
갈미봉 아래 폭포수
비가와서 계곡물이 많을 때만 폭포수가 흘러내린다
산내면
산내면의 지세와 연혁
밀양시의 동북쪽 변두리에 위치하며 경북 청도군과 경남 울주군 등 세 광역시.도와 세 시.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중의 별구(別區)이다
부경(府境)의 태산(泰山)이라고 일러오는 재악산(載岳山 사자봉 獅子峰, 해발 1189.2m) 줄기가 동남쪽으로 분수령을 이루어 울주군 상북면과 단장면 구천리와 각각 경계를 지었고,
그 북쪽에 영남알프스의 주산(主山)인 가지산(迦智山, 실혜산 實惠山, 천화산 穿火山, 해발 1240m)이 우뚝 솟아 세 광역시.도와 세 시.군의 경계를 이루면서 앞 가슴에 백운산(白雲山, 해발 885m)을 품고 있다
또 정북(正北)에는 운문산(雲門山 해발1188m, 함화산 含花山, 호거산虎踞山 , 화망산 花忘山)이 동서로 길게 뻗은 능선을 사이에 두고 경북 청도군 운문면과 도계(道界)를 이루었고, 그 서쪽에 억산(億山 해발 985m)을 거느리고, 다시 구만산(九萬山, 해발 785m)과 용암봉(龍岩峰, 해발 686m) 산줄기는 상동면, 산외면과 면계(面界)를 이루었고
남쪽에는 정각산(正覺山, 해발 859m)이 단장면과 경계를 이루었다
이와 같이 사방에 1000m를 전후하는 태산 준령으로 둘러싸인 이 곳은 다만 서남쪽에 길게 입구가 트이어 “호리병 속의 별천지 즉, 호리건곤(壺裏乾坤)”이라고 일컬었다.
또한 동북쪽 분수령인 백운산에서 발원한 물이 산내천이되어 젖줄을 이루었고, 그 하천을 중심으로 좌우의 분지에는 옹기종기 아담한 취락이 형성되었는데 물 좋고 반석 좋고 토지가 비옥하다고 하여 “삼락(三樂)의 가경(佳境)”이라고도 했다
산내면은 임진왜란을 겪은 뒤 17세기 초에 면방(面坊)의 구역을 정비할 때 중동면(中東面, 산내면, 산외면, 단장면)에 편입되었다. 당시에 이웃한 상동면과 하동면(삼랑진읍)의 사이에 있다고 하여 밀양부(밀양도호부)에서 보아서 중동면(中東面)이라 했다.
즉, 중동면은 지금의 산내, 산외, 단장면을 포함하는 넓은 구역이었으나, 산내면에 해당하는 방리(坊里)로는 천화리(穿火里), 벌완(伐宛), 실혜촌(實惠村), 석동(石洞) 뿐이었다.
그 때만해도 언양(彦陽) 고을과 경계를 이룬 천화령(穿火嶺 석남령 石南嶺)의 아래에 취락이 몰려 있었으며, 그 뒤 새로운 방리(坊里)가 생겨 18세기 말에는 오치리(烏峙里), 소고례리(所古禮里), 가라리(加羅里), 용천리(龍泉里), 적암리(赤巖里), 원당리(院堂里), 양지리(陽地里), 음지리(陰地里), 가좌리(加佐里), 양송정리(養松亭里), 미라리(美羅里), 임고정리(林高亭里), 발례동리(發禮洞里) 같은 여러 마을이 면내(面內) 전역(全域)에 자리잡았다
18세기초에는 다시 중동면(中東면)에서 단장면(丹場面)이 분할되어 떨어져 나가고, 지금의 산내와 산외를 합친 구역을 천화면(穿火面)이라 개칭했는데 이는 애초에 이 면의 발상과 중심지가 천화령(穿火嶺, = 석남령 石南嶺)의 아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천화(穿火)라는 지명은 일반적으로 화산 지대의 분화구라는 뜻으로 불이 땅을 뚫고 나온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실지로 이 지대는 지질학상으로도 안산암(安山岩) 계통의 화강석(花崗石)이 널리 분포되어 화산 지질임을 알 수 있고, “시례호박소” 등의 산상(山上)의 소택지(沼澤地)가 그 분화구에 해당된다고 한다.
1860년 경에 면방(面坊)을 개편하면서 종래의 중동면(中東面)인 천화면과 단장면을 통틀어 다시 중초동, 중이동, 중삼동 등 세 면(面)으로 분할한 일이 있었다. 이 때 천화면(穿火面)은 중초동면(中初同面)과 중이동면(中二同面)으로 나누어 단장면을 중삼동면으로 일시 명칭을 바꾸었으며,
1880년 경에는 다시 중초동면과 중이동면을 폐합하여 천화면으로 환원하였으며 그 경계는 서남쪽 입구의 높은 산(山)인 (乘鶴山)과 백암산(白岩山), 동천의 협곡의 안쪽으로 삼았고, 중삼동면(中三同面)은 다시 단장면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는 천화면을 또 분할하여 서남쪽 입구의 높은 산을 경계로 하여 그 바깥쪽에 해당하는 중이동면(中二同面)을 천화산외면(穿火山外面)이라고 했고, 안 쪽에 있었던 중초동면(中初同面)을 천화산내면(穿火山內面)이라고 했다.
이 때 천화산내면의 취락으로는 오치(烏峙), 소고(所古), 벌완(伐宛), 노라(蘆羅), 용천(龍泉), 적암(赤巖), 원당(阮堂), 양지(陽地), 음지(陰地), 가좌(加佐), 송포(松圃), 미라(美羅), 임고정(林古亭), 발례동(發禮洞) 등 14개 방리(坊里)로서 종래의 천화리(穿火里). 실혜촌(實惠村) 등 중심 취락의 이름이 없어진 반면, 방리의 표기가 다소 변경되었다
1914년 전국적으로 일제히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종전의 자연마을을 통합하여 지금과 같이 용전(龍田), 임고(臨皐), 송백(松白), 봉의(鳳儀), 원서(阮西), 가인(佳仁), 삼양(三陽), 남명리(南明里) 등 8개리로서 법정리를 삼았다.
1918년에 이르러 천화산내면이 산내면으로 개칭되었고,
1965년에 8개 법정리에 소속된 자연마을을 조정하여 23개 행정리로 재편성하였다
이; 면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비허선사(備虛禪師)가 석굴(石窟, 지금의 석골사)에서 수도하며 운문산의 보양(寶壤)과 서로 왕래 했다는 사실이 있고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초적(草賊)의 괴수(魁首) 효심(孝心)의 항거지(抗拒地)로서 밀성(密城)의 저전촌(楮田村, 지금의 용전리)이 있다” 했으며
구밀주지(舊密州誌)에는 임진왜란의 전적지로로서 석동(石洞, 원서리 석골마을)과 대암(臺岩巖 ,삼락정 부근)이 소개되어 있다
또 면내에는 忠.孝.烈의 삼강(三綱)을 높이 숭상하기 위하여 세운 탁삼재(卓三齋)를 비롯한 고가(古家)의 정각(亭閣) 등 많은 유적이 산재해 있으며, 시례호박소, 얼음골, 이목굴, 함화산(= 운문산 = 호거산 = 화망산), 구만폭포 등의 경승지도 있는데, 특히 점필재 김선생의 구연시(臼淵詩)와 오한(聱漢) 손기양(孫起陽)의 석골사시(石骨寺詩)가 유명하다
산내면 대부분의 지역은 높은 일교차의 기후 조건으로 주 재배 작물은 사과이며, 얼음골사과 재배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옛날의 천봉답과 동천변 논의 대부분이 사과밭으로 변하였다. 얼음골사과는 맛이 좋기로 전국적으로 명성이 나 있다
1985년에는 고을의 숙망이었던 밀양- 언양간 산업관광도로가 2차선의 포장국도로서 개통되어 오지의 산간벽지였던 산내면이 이제는 동북경남의 교통요지이며, 관광 명소로서 각광을 받게 되었으며,
2008년 4월 24일에는
우리나라 국도에서 가장 긴 가지산터널이 울산 - 안양간 24번 국도상인 가지산에 개통되고, “밀양 - 언양”간 국도가 거의 확포장 및 개량됨에 따라, 울산까지 약 30분의 시간이 단축되어 산내면과 밀양시 전체의 발전에 더 가속도가 붙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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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원서리(원서리)
원서리의 지세와 연혁
산내면 한가운데로 남북으로 길게 쳐진 옛날 석골사의 사하촌(寺下村)이다. 서쪽으로 가인리와 인접하였고 동쪽에는 삼양리,남명리와 이웃하였다. 남쪽으로는 정승봉(政丞峰 827m)을 분수령으로 단장면 구천리와 면계를 지었으며, 북쪽으로 억산과 운문산 등 준령을 사이에 두고 경북 청도군 금천면과 운문면으로 각각 도계를 삼고 있다
마을의 중심을 관류하고 있는 동천을 젖줄로 삼아 그 양안(兩岸)에 제법 넓은 들판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옛날에 방리 이름은 석동 또는 석골동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운문사산의 한 봉우리인 일출붕(日出峯, 함화산 含花山)의 산록에 자리잡은 석골사로 인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그러므로 매우 오래된 역사를 지닌 동리로서 지금의 서촌 또는 서곡이란 마을 이름은 옛날의 석골 또는 석촌(石村)에서 전음이 된 것으로 위치상의 방위 표기와는 무관한 듯 하다
근대 이후에 동천 가에 전개된 들판과 국도를 중심으로 여러 자연 마을과 땀이 형성되었는데 오래된 마을인 西村과 원당(院堂) 비롯하여 지동껄, 등자방, 새보안(新洑內), 백동골 등이 그것이다
1914년 행정 구역을 통폐합 조정할 때 하천의 이 쪽 저 쪽 에 있는 대표 마을인 원당과 서촌에서 한자씩 취하여 원서리(院西里)라는 법정리를 정했으며,
1965년에 다시 두 마을을 중심으로 1동과 2동으로 행정리를나누었다.
1洞에는 서촌(石骨), 지통껄(紙筒街), 등자방(등돌뱅이)이 속했고, 2洞에는 원당(院堂), 새보안, 백동골 등을 편입시켰다
(1) 서촌(西村, 西谷, 石骨, 石洞, 石村)
이 동리의 중심 마을로 석골사의 아래 쪽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운문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계류가 형성된 골짜기에 있는 마을인데 당초에는 석골동 또는 석동이라 했으나 지명의 音이 변하여 석촌 또는 서곡으로 지명을 표기하고 있다
마을 뒷산 골짜기에는 기암과 괴석, 그리고 석굴과 석전이 가득하여 석골동이라는 지명이 어울리는 곳이다
밀주구지에는 석동에 대한 역사기록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밀양부 출신인 밀성(密城) 손씨(孫氏) 문중(門中) 출신의 오한(聱漢) 손기양(孫起陽)과 진사(進士) 이경승(李慶承)이 당시 부사(府使) 박진(朴晋)과 함께 고을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결국 이 곳으로 후퇴하여 병사들을 주둔시키고 진을 친 곳이라했다.
또 얼마 뒤 이진사(李進士)의 백형(伯兄)인 이경홍(李慶弘)도 노모(노모)를 업고 이곳으로 들어와 형제 상봉을 하고 손오한(孫聱漢 = 孫起陽)과 합세하여 싸우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다른 기록도 있다
이 절 위쪽에 있는 손개굴(孫家굴), 형제굴(兄弟굴)의 지명이 전해지고 있는 . (주) 레나 : 형제굴은 석골사에서 서쪽으로 암봉 가까이 있고, 손가굴은 석골사에서 운문산 정상 방향의 정구지 바위에서 500m 위에 있다 것도 그 당시의 유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촌에는 조선조 후기에 사인(士人) 김영민(金榮敏)이 입촌한 후 청도(淸道) 김씨(金氏)의 세거지가 되었으며, 1961년에는 그 자손들이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서 원모재(遠慕齋)를 지어 보존하고 있다
석골사(石骨寺)
서촌에는 북쪽 계곡을 따라 약 500m 올라간 운문산 산록에 위치한 신라 말기의 고찰이다. 이 절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밀양지 문화재사적편(459 ~ 462P)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본래의 절 이름은 석굴사(석굴)라 하였고, 신라말 고려초의 고승인 석골사의 개산조(開山祖, 절을 창건한 스님)인 비허선사(備虛禪師)가 수도한 곳이라 한다
지금의 절 건물은 1965년도에 신도들의 시주에 의하여 재건한 것이며, 법당 뜰 한 구석에 고려 시대의 탑재 유물이 남아 있고, 절의 입구 왼쪽에는 함화당의청(含花堂儀淸), 회적당(晦迹堂) 등 역대 승려들의 부도탑이 서 있다 (주) 레나 : 이 부도탑은 절 입구 약 100m 전(前)의 절로 들어가는 방향에서 왼쪽 도로 위에 있으며, 일부러 살피지 않으면 도로의 언덕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절 이름은 석굴사(석굴사), 석골사(石骨寺), 석동사(石洞寺) 드으로 불리었다
법당등(法堂嶝)
서촌의 입구 지금의 석골사가 있는 산등성이의 이름인데 옛날에 법당이 있었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북암터(北庵址)
석골사 위쪽의 골짜기 지명이다. 옛날에 석골사의 부속암자가에 해당한느 북암(北庵)이 있었던 자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살맷등
석골사와 북암터중간에 잇는 산등성인데 근처에 싸리나무가 많이 자생했으므로 생긴 지명이다
손개굴(송개굴, 孫家窟, 얼음굴)
석골사에서 위쪽(운문산 방향)으로 한참 올라가면 정구지바위가 나오는데 이 곳에서 우측으로 약 500m 정도 올라가면 있는 자연 석굴이다. 굴은 모두 3개인데 내부는 각각 10평정도의 넓이이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잇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어킨 오한(聱漢) 손기양(孫起陽)이 부몰르 모시고 이곳에 피난했다고 하여 붙여진 석굴의 이름이라 한다
형제굴(兄弟굴, 얼음굴)
석골사의 위쪽 (주) 레나 : 서쪽 정상의 암봉 아래 위치하며, 손가굴과는 반대방향에 있음 에 있는 3개의 굴 중 하나이다. 여름에는 하도 시우너하여 제2의 어름골이라는 말도 있다. 손개굴과 함께 임지왜란 때의 유적으로 의병을 일어킨 근재(謹齋) 이경홍(李慶弘)과 진자 이경승(李慶承)의 형제가 이곳에서 상봉하여 노모와 함께 한 가족이 피난했던 장소로 전해지고 있다
상운암(上雲庵)
석골사의 동쪽인 운문산 주봉(主峰)인 일출봉(日出峰)의 아래에 있는 암자의 이름이다. 석골사의 부속 암자로 석골사를 창건한 함화(含花) 대사(大師)가 주석했던 곳으로 일명 함화암(含花庵)이다. (주)레나 : 운문산의 정상은 해발 1188m이며, 상운암이 있는 곳은 해발 1107m이다. 지금도 암자가 남아 있고 스님 한 분이 수도(修道)를 하고 있다. 밀양지명고에는 상원암(上院庵)이라고 표기했으나, 상운암(上雲庵)이다. 운문산(含花山) 정상이 너무 높아 자주 구름에 쌓여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는 상암(上庵)이었다
석굴사당(石窟祠堂)
서촌의 동쪽 산비탈에 있는 당산을 일컫는다. 공신(洞神)을 모신 곳으로 매년 정월과 상월 보름에 두 차례 당제를 지낸다
석골폭포(石骨瀑布)
석골사 입구에 계곡 폭포이다. 수량이 많고 물이 마르지 않고 주우의 경관이 좋아 한여름에는 한기를 느낄 정도이다. 자연적인 유원지로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장승배기
석골사입구 쪽 산등성이 둔덕에 있는 지명이다. 옛날 사찰의 경계를 표시하는 장승이 서 있었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이다
병풍디미(屛風崖)
석골사 동북쪽 산비탈에 있는 바위의 이름이다. 병풍처럼 둘려져 있는 바위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바위가 층듬으로 되어 있다
문방우(門岩)
석골사 동쪽에 위치한 바우이다. 모양이 대문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범방우(虎岩)
석골사 서쪽 산비탈에 있는 바위이다. 형상이 호랑이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밀밭등(麥田嶝)
서촌 동쪽에 잇는 등성이의 지명이다. 일부 밭으로 개간하여 밀을 심었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이다
배남등(梨木坪)
서촌 동남쪽에 있는 들이 름이다. 옛날에 배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들에 물을 대는 보를 배남들보라 한다
벌통골
지통골 북쪽 산기슭에 위치한 골짜기의 이름이다. 양봉가들이 벌통을 자주 놓아 두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골안
지통골 북쪽 병풍골 곁에 또 다른 골짜기가 있는데 그 이름이다. 벌통골의 안쪽이라 하여 안쪽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대밭골(竹田谷)
지통골 벌통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이름이다. 이 일대에 대밭이 있었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무등산(無等山, 大根嶝)
지통골 벌통골 서쪽에 있는 산등성이를 말한다. 밭을 개간하여 무우를 심었던 등성이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욋들(外野, 瓦坪)
지통골 서남쪽에 있는넓은 들이다. 마을 바깥에 있다고 하여 바깥들 또는 외야(外野)라고도 한다. 이 보에 물을 대는 보를 욋들보라 한다
음들(陰坪들, 陰坪)
지통골 서쪽에 있는 산답의 들 이름이다. 음달이 지는 곳이라 하여 음달들 또는음평이라 한다
지통골(紙筒谷, 욋들마, 瓦坪)
서촌의 남서쪽에 인접한 마을 이름이다. 옛날 이 곳에 기와굴이 잇어서 와곡(瓦谷), 와평(瓦坪), 욋들의 지명이 생겼다. 또 뒷산에 닥나무가 많아 종이를 생산하던 곳이기도 하다. 한지(韓紙)를 뜨는 지통(紙筒)을 항상 쌓아 두는 곳이라 하여 지통골이라 한다
딱밭등(楮田嶝)
와평(욋들) 마을의 북쪽 억산의 동쪽 기슭에 있는 산등성이다. 닥나무가 많은 곳으로 지통곡(지통곡), 한지 생산의 원료를 공급했다
딱밭재
석골사 동쪽 계곡으로 올라가 다시 왼쪽으로 올라가면 운문사로 넘어가는 고개가 잇는데 이를 딱밭재라 한다. 지금은 운문산 정상과 그 반대에 있는 팔풍재.억산 정상으로 향하는 등산로의 주요 지점이다
찌개수통
서촌과 지통골 앞을 흐르는 동천과 석곡사 계곡에서흐르는 물을 모아 가인리앞들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수로이다. 차천 바닥에 터널식으로 물길을 뚫은 것인데 새보안까지 약 150m나 되는 인공수로(人工水路)이다
수리등칭이(취등애 鷲嶝崖)
와평 마을 서북쪽 수리봉(취봉 鷲峯 해발 763m)의 수리봉 아래에 있는 바위 층덤이다. 독수리가 서식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욋들비알(瓦坪嶝)
와평 마을 뒤쪽에 있는 산비탈이 이름이다
찬물새미들(冷泉坪)
서촌의 동남쪽에 있는 들 이름이다. 들의 위쪽에 찬물이 솟는 샘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들에 물을 대는 보의 이름을 냉천들보라 한다
등자방(登子坊, 亭子坊)
서촌의 동남쪽 좌우에 있는 들이름이다. 이 곳에 물을 대는 보의 이름을 등자벙보라 한다
사내들(寺內坪)
서촌 마을 남쪽에 잇는 들 이름ㄴ이다. 옛날 석골사의 사찰답으로 절 안?에 잇는 들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홈골
정자방 동쪽에 있었던 골짜기의 이름이다. 골짜기의 모양이 홈통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용바위(龍岩)
석골사 아래 쪽 장승배기 곁에 있는 바위의 이름이다. 모양이 용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치마바위
석골사 앞 계곡의 동쪽에 위치한 바위의 이름이다. 여자가 치마를 두루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선녀폭포(仙女瀑布)
석골사의 위쪽으로 운문산 정상으로 가는 도중에 정구지바위 아래에 있는 폭포이다. 낙차가 높고 길며 가늘고, 굽이쳐 떨어지며, 물이 마르지 않는 폭포로서 선녀가 놀았다는 전설이 있는 폭포이다. 정구지 바위를 그냥 지나치면 잘 보이지 않는다
무지개폭포(비홍폭포 飛虹瀑布)
석골사의 서쪽 수리봉 아래에 있는 폭포이다. 맑은 날에는 폭ㅊ포에서 떨어지는 물보라 때문에 무지개가 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상운암계곡(석골사계곡)
운문산 정상에서 서쪽면(上雲庵쪽)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으로 운문산 계곡 중에서 가장 갚고 아름답고, 깨끗한 계곡이다. 여름에는 겍고 전체가 울창한 숲으로 등산로를 따라가면 내내 시원하다
(2) 원당(院堂)
국도 24호선 석골사 입구 버스정차장이 잇는 마을이다. 원당(院堂)이란 원당(願堂)에서 한자표기가 바뀐 것인데 원래는 가인(佳仁)과 원서(院西)의 동리 경계 지점인 불미등(佛彌嶝) 끝에 있었다. 인근 주민들이 기복과 치성을 드리는 불당(佛堂)이었는데 길가에 잇어서 번잡하다고 하여 동남쪽 골짜기인 지금의 원당 마을로 옮겼다.
원래 원당(願堂)이 있던 자리는 원무골이 되었고, 옮겨진 장소는 지금도 당과 석단이 남아 있어 기도처로 삼고 있다
이 마을에는 조선 말기에 일직 손씨의 일파가 터를 잡아 세거지로 정했는데 1931년 유남(維南) 손창헌(孫昌憲)이 자손들의 강학고를 겸한 재사를 창건하고 실혜산의 남쪽이라 하여 혜남정(惠南亭)이란 현판을 걸어 보존하고 있다
조선 숙종 때 사인(士人) 방태필(房泰弼)이 입촌한 이래 남양(南陽) 방씨(房氏)의 세거지가 되기도 했다
원당골(院堂谷, 惠南山谷)
원당 마을 뒤쪽에 있는 산골짜기의 지명이다. 나무가 울창하고 여러 가지 산채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다. 실혜산(實惠山)의 남쪽이라 해서 이 산을 혜남산(惠南山) 이라 한다
원들(院坪, 원당들)
원당 마을과 새보안 마을 사이의 글 이름이다. 원서리에서 가장ㄴ 넓고 수리시설이 잘 된 비옥한 들판이다
새보안(新洑內, 江邊村)
원당 마을 앞들 건너에 있는 강변 마을이다. 가인들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터널 수로를 만들고 새로운 보(洑)를 구축한 곳이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마을의 새보의 안쪽에 있으므로 새보안(신보내 新洑內)라고 한다. 강변(江邊)이란 다른 이름도 있다
질배미(長夜畓)
원당 앞들 한가운데 있는 논 이름이다. 논의형상이 길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굼논
원당 앞들 가운데에 있는 논배미의 이름이다. 질배미의 동쪽으로 길게 굽어 있다고 하여 굽은 논, 굽논이라 했다
백동골(栢桐谷, 百冬谷)
원당 마을 동쪽에 위치한 땀 이름이다. 뒤편 골짜기에 잣나무와 오동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백동곡(栢桐谷)이라 했다. 또 이 곳은 got빛이 적은 음지로 백날을 가도 추운 겨울 같다고 하여 백동곡(百冬谷)이라는 다른 이름도 잇다
마을 앞에는 석골과 연결되는 넓은 들이 잇는데 찬물샘이 있는 들이라 하여 찬새미들(冷泉坪)이라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