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독서토론
토론 도서 : 레이첼 헬드 에반스 저 「다시 성경으로」
1.성전 +기원이야기 :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오해하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기원이 말하는 것은 우주의 탄생이나 인류의 진화 같은 21세기 과학의 문제에 답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본성이나 하나님과 창조물의 관계처럼 당시 사람들이 초미의 관심을 두었던 문제에 답하기 위한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긋난 이스라엘의 DNA속에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이 들어 있고, 그러한 원인으로 지금 이스라엘이 어려움 당한다는 것을 우화적으로 전달하려고 쓰인 것이다. 기원이야기는 우리가 누구이고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세상은 어떤 곳인지 말해 준다. 창세기를 단순히 역사적 사실이나 과학적 발견, 폐허에서 건져낸 고고학적 성과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면, 기원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을 삶의 다양성 속에서 만나고 지혜 얻는 것을 상실하게 되고 고정화되고 화석화된 하나님만을 알게 될 위험성이 있다. 완고한 근본주의자나 공격적인 무신론자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기원 이야기에 신화나 과정의 흔적 또한 문화적 영향이 보일 때 결코 사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문화 양식을 크게 오해한 결과다. 유대인은 미드라시 라는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려 하는데, 그들은 기록된 성경의 구절과 구절 사이에 수많은 이야기들이 생략되었고, 그 생략된 이야기는 성경을 읽는 독자들의 상상력과 통찰력을 통해 되살아 날 수 있으며, 그 되살아 난 이야기를 통해 구절과 구절 사이의 행간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의 말씀에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고 그 질문들을 답하는 형식으로 토론을 즐기는데, 그들은 토론을 거쳐 결론에 도달할 때 교육적으로 유익을 얻을 뿐 아니라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신과 공동체 그리고 믿음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믿는다. 기독교인들은 대화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성경을 펼치지만 유대인들은 대화를 시작하려고 성경을 펼친다. 유대인들은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얻는 이름 곧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이스라엘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한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싸우는 링 위의 존재로 생각한다. 이스라엘은 자신을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는 승자가 아니라 방황하며 끊임없이 질문하는 존재로 인식한다. 그들은 믿음과 씨름하는 사람들이다.”
□ 토론: 개신교전통에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것으로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완전한 말씀이다 라는 교리와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여주고 증거하는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이나 그 속에 신화, 우화, 시, 역사적 사실, 교훈, 예언 등의 문학적 다양한 양식들을 사용하여 기록되었음으로 문자적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성경이 하나님의 존재와 그가 역사 속에서 행하신 일들과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의심의 여지없이 사실이다 라 고 주장하는 저자의 논거에 대하여 토론해 보세요.
2.우물+구원 이야기: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과 사람들, 그들이 처한 상황과 맥락에 따라 관점과 입장이 달라지고 그 해석도 달라 질 수 있다. 19세기 노예제 폐지 운동과 20세기 흑인 민권 운동의 서사에 가장 많은 영감을 준 것은 출애굽 이야기였다. “내 백성을 보내라”는 모세의 외침이 그들의 입에서 더욱 힘차게 메아리쳤다. 노예 신분에서 벗어난 요셉, 느부갓네살의 사자 굴에서 구원 받은 다니엘 같은 성경 인물이 흑인 영가와 문학, 설교의 주요 소제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여러 세대에 걸쳐 미국 흑인들에게 연대와 투쟁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해방신학자인 제임스 콘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흑인들을 억압하는 폭력을 연결 짓는 신학으로 많은 이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흑인노예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노예상인들은 노아의 아들 함에게 내려진 저주가 곧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살 운명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며 흑인 착취를 합리화했다. 미국으로 건너온 수많은 청교도들과 개척자들은 원주민 공격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가나안을 정복한 여호수아 이야기를 이용했다. 율법을 보는 시각도 입장에 따라 다르다. 유대인들은 율법은 하나님이 자기 민족에게 주신 선물로서 하나님과 자신들을 잇는 특별한 관계임을 나타내는 표시라고 믿는다. 그 해석에 있어 613개의 조항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 주장하는 정통파와 특정 음식의 섭취를 금하는 정결법 같은 것을 강제하지 않는 개혁파의 입장이 다르지만 이 두 집단들도 율법은 전통을 살아 있게 하는 생명줄로서 그 생명이 제대로 살아 있는지 점검하기 위해 율법을 끊임없이 토론하고 해석하고 또 다른 전통과 비교하는 일에 동일하게 힘쓰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좀 더 복잡하다. 정통 보수주의 자들은 동성애를 비난하거나 연방법원청사에 십계명 석판 설치를 지지할 때에나 적극적으로 율법을 인용한다. 반면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시위에 가지고 나갈 팻말에 “나그네를 환대하라”와 같은 구절을 쓸 때 말고는 율법을 시대에 뒤쳐진 쓸모없는 골동품인 양 취급한다. 보수주의자들이 율법에서 혼합 직물로 지은 옷을 입지 말라 했고 불순종하는 자녀는 돌로 쳐 죽여도 된다 했다고 들고 나오면 진보주의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리스도인은 율법 아래 있지 않다!” 고 응수 한다. 왜 율법이 시각에 따라 달리 해석되고 적용되는 것일까? 율법을 그것이 둘러싸고 있는 서사적 맥락에서 떼어 놓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난데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집트와 약속의 땅 사이에 있는 광야, 시내산이라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나온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히브리 노예를 해방한 사건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그들의 구원 이야기의 후속편인 셈이다. 율법과 자유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오랜 세월 억압했던 이집트 제국을 비롯한 주변의 문화와는 완전히 구별되는 이스라엘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해 준 것이 바로 이 신선한 법령이라고 믿었다. 율법 속에 나오는 모든 ‘하라’ ‘하지 말라’는 조항들은 이집트와 가난안 문화와 자유를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별하는 것이며, 그들의 문화에 종속되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들이다. 제사법 또한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것은 이방 문화의 제사와는 완전히 차별화시켜 주는 것이었다. 성경의 율법을 완전히 구시대적이고 비도덕적이라고 깍아 내리는 것도 오류지만, 정의로운 사회상을 반영한다며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문제이다. 같은 인간으로서 타인의 인권과 존엄성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고대 이스라엘 사회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은 그 당대에 그들에게 적합하고 필요한 것이었지만 시대가 변하고 문화가 달라지고 상황이 바뀌게 되었을 때 더 완전한 율법으로 변하여 갈 필요가 있었다. 예수님은 유대교 율법을 없애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마5:17) 오셨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셨다. 그분의 삶과 가르침은 율법이 의도했던 것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 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뺌마저 돌려 대어라.…” 예수님을 보면 살아 숨 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고대에 주어진 율법을 고지 곧 대로 유지하고 지키려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더 완전한 정신과 계명을 완성하려 하셨고, 그것은 자신의 삶과 십자가를 통해 실제 완성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하나의 단어로 정의한 것에서 드러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마22:37~40)모든 해방과 광야의 시간, 황소와 효모와 피에 관한 율법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일이다. 사랑은 노예주뿐 아니라 노예에게도 자유를 선사하는 계명이다. 사랑은 구원 이야기의 최종편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성경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할 수 있다. 노예제도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성경 구절을 찾을 수도 있고, 반대하는 구절을 찾을 수도 있다. 여성을 억압하는 구절과 반대로 여성을 존중하는 구절도 찾을 수 있다. 폭력을 정당화하는 말씀도 반대하는 말씀도 찾을 수 있다. 심지어 동성애를 옹호하는 자들까지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찾든 반드시 던져야 할 한 가지 질문이 있다. “나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의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있는가, 아니면 판단과 권력, 이기심과 탐욕을 추구하기 위해 읽고 있는가? 나는 굴레를 씌우려고 하는가, 자유를 주려 하는가? 짐을 얻으려 하는가, 짐을 거두려 하는가? 성경 해석의 원리와 중심축은 십자가에서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 토론: 1.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과 무관하게 자신의 생각을 지지해 주거나,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거나, 자신이 추구하는 일이나 성취하고자 하는 일이 인간적이기 보다 하나님의 뜻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적절한 구절을 찾으려는 유혹을 받은 적이 있나요?
2.당신은 어떤 문제나 상황에서 해답을 찾기 위해 성경을 펼쳐, 자신에게 적합한 본문을 찾아 해석하고 적용할 때 언제나 십자가에서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랑의 원리 안에서 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나요? 3.논쟁 + 지혜이야기: 고통을 죄의 결과로 보는 시각은 유대사회에 만연한 신앙가치관이었다.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는 사람은 성경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일종의 상호 조약을 가르치고 있다고 믿는데, 올바르게 살고 명령을 잘 지키면 복을 받고, 거짓말하고 사기치고 훔치면 그것에 응당한 처벌을 받는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반쪽짜리 진실이다. 욥은 매사에 흠이 없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가족들을 거룩하게 세우는 사람으로, 이웃들에게 구제하고 베푸는 사람으로, 나그네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으로 살았다. 어느 날 갑자기 이유를 모를 고난이 불어 닥쳤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실함으로 버리지 않았다. 그의 친구들이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찾아와 욥이 받은 고난의 이유를 두고 지혜의 본질에 관한 열띤 토론을 벌인다. 욥의 친구들의 주장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은 엘리바스의 말이다.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이 있더냐? 내가 본대로는, 악을 갈아 재난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더라.”(4:7,8) 즉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다. 욥의 친구들은 ‘신정론’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 결말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욥의 세 친구들을 책망하시며, 그들에게 통쾌한 한 방을 날리신다. 세 철학자가 그토록 죄인이라고 정죄했던 욥이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만 “기도를 기쁘게 받고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겠다.”(42:8)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욥에게는 이전보다 더 큰 축복을 내리신다.
욥기의 문학적 가치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욥기의 문학적 장르를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욥기가 전형적인 지혜문학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지혜는 단순한 미덕이 아니었다. 지혜는 모두가 탐내는 유용한 자산이며, 동시에 충만하고 명예로운 삶을 약속하는 보증 수표였다.(잠언3:15) 개신교 성경은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를 한데 묶어 지혜 문학으로 분류한다. 유대인은 이를 ‘케투빔’ 곧 ‘성문서’의 일부로 간주하는데, 율법이나 예언서의 범주에 들지 않는 문서를 일컫는다. 지혜문학은 현실 속에 숨겨진 진리를 드러내어 독자 혹은 청중을 일깨우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단일한 결정이나 믿음 또는 규칙이라기보다 인생의 변곡점이나 갈림길에서 끊임없이 찾아야 할 ‘길’ 혹은 ‘방향’에 가깝다. 지혜는 진실하게 한 걸음씩 내딛는 삶의 방식이다. 욥기는 지혜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우선, 욥기는 실제 고통을 겪어 본 사람의 지혜는 그렇지 않고 사색만 한 사람의 지혜보다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약학자 엘린 데이비스는 자신의 책 ⌜하나님의 진심⌟에서 “욥기를 통해 우리는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독특한 신학적 권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에게 불평하고 애원하고 격분하는 자는 한 순간도 하나님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신비의 세계로 들어간다. 오직 고통 받는 자에게만 열리는 문을 지나 하나님과 대화할 자격을 얻는다.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대화로 초대받는 것이다.” 고 하였다. 다음으로 욥기에서 더 주목할 점은 다른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 곧 선한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기고 악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긴다는 관념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욥기는 신명기 같은 율법책에서 인정하는바 의인은 복을 받고 불순종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세계관을 흔들어 놓는다. 의인 욥은 악을 행하지 않았으나 까닭 없이 고통 한 가운데로 떨어졌다. 물론 욥기 뿐 아니라 다른 지혜서에서도 이 세상에 의인이 까닭 없이 고난당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럼에도 의인의 고난당함에 대하여 욥기만큼 분명하게 보여 주는 곳은 없다. 욥의 세 친구들이 어떠한 상황에서 진실인 것이 모든 상황에서도 진실일 것이라고 가정하는 오류를 범한 것을 통해 죄인뿐 아니라 의인도 고난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결론적으로 욥기와 지혜문학을 통해 성경은 고통과 축복에 관한 단일한 결론을 도출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경적인 신정론은 하나가 아닌 다수가 존재하는 셈인데, 성경을 저술하고 편찬한 이들은 이러한 긴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듯하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 말씀에 따르면”으로 시작하는 거창한 말들을 경계해야 한다. 성경 말씀을 갖다 대기 전에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떤 맥락에서?” “왜?”를 물어야 한다. 지혜의 쓸모는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무엇을 말하느냐가 중요한 게 하니라 언제 말하느냐가 중요하며, 무엇이 사실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제 그것이 사실이 되는지 아는 게 중요하다. 따라서 성경의 지혜를 이해하는 첫걸음은 다변적인 지혜의 속성을 부인하지 말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전도서의 현인이 말했듯이 모든 것에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전3:1,4~8) 성경의 지혜 이야기는 인생의 고통은 불가피한 일이며, 동시에 아름다운 일임을 피력한다. 역설적인 욥기, 불편할 정도로 솔직한 시편, 고뇌에 찬 전도서는 우리에게 하나님께 울부짖고, 따져 묻고, 요구하고, 그분과 논쟁하면서 쉬운 답에 안주하지 말고 인생의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가라고 도전한다. 성경에는 살면서 마주치는 기쁨의 순간들과 슬픔의 순간들 그리고 복잡하고 다양한 인생사가 담겨 있다. 욥기에서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사람은 가방끈이 긴 신학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감히 말다툼을 건’ 솔직하고 용기 있는 자다.
□ 토론
저자는 말합니다. 젊은 시절 나는 성경을 모든 문제에 대해 명확하고 보편적인 답을 주는 교과서라고 믿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성경은 어떠한 오류와 모순도 있을 수 없는 논리적 완전체였으며 온갖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 관해 믿을 만한 답을 주는 만물박사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양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다양한 문제들에 부딪치면서 항상 동일한 처방만을 내리는 인생 지침서 같은 성경은 복잡다단한 현실에 전혀 맞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 우울증이나, 불안감, 중독으로 인해 전문적인 상담이나 약물 치료가 필요한 상황임에도 성경이 치유해 줄 것이라는 말만 듣고서 오랫동안 괴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지기수인 것을 알고 혼란스러웠습니다. 정치와 경제의 성경적 해답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인해 개혁되지 못한 건강보험 법 때문에 치료를 받지 못해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사람들로 인해 울어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들의 성경해석은 자신들이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자는 정통 개신교에서 강조하는 성경은 모든 것의 답이다 것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을 각종 사회적, 정치적 이슈에 관해 하나님의 의견을 밝혀 놓은 성명서로 생각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명쾌한 답을 원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은 그와는 거리가 멀뿐입니다. 복잡하고 상충하는 폭넓고 깊은 인생의 경험들이 반영된 성경은 다양한 목소리와 견해들이 이루는 불협화음 때문에 잠시도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지혜문학이 그것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잠언은 “지혜가 으뜸이니 지혜를 얻어라”(4:7) 외치면서 전도서는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고, 아는 것이 많으면 걱정도 많더라”(1:18)고 합니다. 잠언서는 “즐거운 마음은 병을 낫게 하지만 근심하는 마음은 뼈를 마르게 한다”(17:22) 외치는데, 전도서는 “슬픔이 웃음보다 나은 것은 얼굴을 어둡게 하는 근심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다”(7:3) 고 말합니다. 심지어 잠언 26:4절과 5절은 서로 상충하는 지혜를 이렇게 나란히 놓고 있습니다.
4절 “미련한 사람이 어리석은 말을 할 때에는 대답하지 말아라. 너도 그와 같은 사람이 될까 두렵다” 5절 “미련한 사람이 어리석은 말을 할 때에는 같은 말로 대응하여 주어라. 그가 지혜로운 체할까 두렵다.”
성경의 저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는 지혜로울 수 있는 것이 어떤 상황에서는 어리석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인생의 해답을 찾는 지혜는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은 반듯하게 정리된 정답지가 아니라 도리어 다양한 상황 속에서 복잡한 인생의 문제들에 대한 답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다양하게 주어 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그래서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해 준다고 합니다. 당신은 성경에서 인생과 삶의 다양한 문제들의 해답을 찾을 때, 각자가 처한 상황과 환경과 심리적 상태와 내적 갈등과 관계적 문제 등을 고려하지 않고 교리적이고 교훈적인 한 가지 답만을 주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더 큰 혼란을 준다고 생각하나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사용하는 것이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의 답을 주는 데 있어 바람직하다고 생각 하나요? 지혜문학의 관점에서 토론해 보세요.
4.짐승 + 저항 이야기: 성경은 괴물이 득실댄다. 성경에 등장하는 짐승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돌연변이 생물이 상징하는 것은 다름 아닌 포악한 제국이 저지르는 악행이다. 오늘날 독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 간과하는 것은 성경은 제국의 압제 아래 살던, 신앙적인 한 소수 민족에 의해 쓰여졌다 는 사실이다. 구약성경의 배경은 이집트,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그리스, 페르시아 제국이고, 신약은 로마제국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수 세기에 걸쳐 자신들과 점령당한 다른 민족들에게 고통을 안겨 준 이 제국들을 바빌론으로 통칭해 불렀다. 이스라엘 민족이 직면했던 중대한 질문은 밖으로는 무력을 앞세워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지 못하게 가로막고, 안으로는 우리를 회유하여 제국을 모방하고 제국에 동화되라고 하는 바빌론에 우리는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그들은 이야기와 시, 예언과 경고가 담긴 책을 저술했다. 이러한 책들 가운데 상당부분이 저항 문학으로 간주할 수 있다. 저항 문학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예연자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자는 미래를 예측하는 점술가나 점쟁이가 아니다. 과거와 현제, 미래를 있는 그대로 보며 진실을 말하는 사람,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향해 현실을 직시하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라고 독려하는 사람이 성경의 예언자다. 브루그만은 그의 기념비적인 책 ⌜예언자의 상상력」에서 “예언자의 소명은 상상력의 불씨를 지키는 것이다. 왕이 독점적으로 제시하는 미래상이 아닌 대안적인 미래상을 그려 내고 제안하는 것이 예언자의 역할이다” 고 했다. 예언자들은 정치, 종교, 지도자들 보다 훨씬 분명하게 현실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현실이 안고 있는 문제를 정확하게 직시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답을 제시하고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게 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현실의 문제 해결을 위해 신정국가의 정치적 신앙적 지도력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비판의 칼날을 겨눈다. 그들의 부패함과 타락을 꼬집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도록 책망한다. 그들이 돌이키지 않을 때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선포한다. 그래서 예언자들 그들의 저항 운동으로 인해 핍박과 죽음의 위험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닌다. 예언자들은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이다.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도 그들의 고유한 언어와 이미지에 신학적 의미를 담아 희망을 말한다. 예언자들의 희망의 메시지들은 대부분 묵시문학적으로 드러난다. 묵시라는 단어는 ‘드러내다’ 또는 ‘나타내다’라는 의미다. 따라서 묵시 문학에 나오는 사건이나 환상은 현실을 실제 그대로 드러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화려함과 가식, 두려움과 불확실함을 걷어내고 세상을 이끌어 가는 힘의 실체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다. 그들은 고도의 상징법과 신학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묵시 문학의 형식을 빌려 더욱 극적으로 저항 운동을 표현한다.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막강한 제국의 압제 아래 신음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던져 준다. 예언자 다니엘과 요한이 제국을 사나운 짐승으로 묘사하며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그것을 보여 주는데, 그 메시지는 “화려한 제국의 부와 권력과 사치의 이면에, 눈에 띄는 것을 모조리 밟아 뭉개는 괴물들이 도사리고 있다.” 는 것이다. 그들이 활동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하나님은 때가 되면 그것들을 모조리 없애신다. 예언자들은 “이것이 끝이 아니다. 아무리 막강한 제국도 선함과 의로움, 정의로 세워진 나라를 이기지 못한다.” 고 위로한다. 묵시 문학은 막강한 제국들의 힘의 실체를 상징적 언어로 표현하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짐승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그 메시지를 처음으로 읽었던 독자들에게 짐승의 존재는 거리를 행군하는 제국의 병사들이나, 가정과 생계를 위협하는 황제의 칙령만큼이나 실제적이었다. 우상 앞에 절하지 않거나, 황제를 숭배 하지 않으면 죽음을 요구하는 황제의 명령은 그들에게 짐승만큼이나 두려움을 주는 실제였다. 그럼에도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그 짐승들을 죽이시고 승리하실 것과 평화가 도래할 것을 선포하며 짐승을 두려워하지 말고 저항할 것을 권면한다. 성서학자 에이미 질 레빈은 ⌜성경의 의미⌟라는 책에서 묵시 문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묵시의 목적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위로를 전달하는 것이다. 성경은 3천년쯤 지나서 개봉될 하나님의 비밀을 살짝 보여 주는 예고편이 아니다” “묵시적인 글은 하나님의 손이 지금도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며 틀림없이 정의를 이루실 것이라고 선포한다.” 하지만 많은 기독교인들, 특히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현실보다 초현실적이 이야기를 선호하는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옷만 남긴 채 아이들이 사라지고, 하늘을 날던 비행기가 사라지고, 역병이 지구를 덮치고, 민주당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는 등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날 것을 예고한 것이 묵시의 목적이라 여긴다. 이와 같은 현상은 미국인, 조금 더 특정하자면, 기득권을 누리기 때문에 개혁 의지가 박약한 미국 백인들이 묵시 문학의 비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 한다. 현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자랑하고 있다. 세계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공포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미국이다. 백인 우월주의, 식민주의, 교도소 산업 복합체, 군수 산업, 시민 종교, 물질주의 그리고 탐욕은 예언자들이 언급했던 짐승의 또 다른 이름이다. 사람들은 미국이 ‘기독교 국가’였을 때를 그리워하며 향수에 젖지만, 실상 미국의 역사는 아무런 이유 없이 멸시받고, 노예가 되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학살된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의 피로 얼룩져 있다. 오로지 특권 계층이 더 많이 축재할 수 있도록, 그들이 희생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일들이 단지 과거의 망령이 아니라 현재도 경제적 박탈과 사회적 차별을 겪은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원주민의 후손들은 여전히 높은 빈곤율과 범죄율로 고통 받고 있고, 양질의 교육과 음식, 주택, 저렴한 의료보험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교회들이 묵시 문학을 읽을 때 예언자들이 고발했던 이스라엘의 죄와 그 죄의 배후에서 활동했던 짐승들이 현재의 미국 안에서도 여전히 존재하고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그 죄를 돌이켜 회개하도록 촉구하고 짐승의 활동을 드러내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나 그것을 외면하고 미래에 도래할 일들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미국의 백인 교회는 예언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권력을 약속하는 말씀을 붙잡았다. 망명자들의 편에 서서 희망의 노래를 부르며 함께 투쟁하기보다 제국과 손을 잡고 더 많은 망명자를 만들어 냈다.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많은 경우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짐승의 명령을 수행했다.
□ 토론: 저자는 말합니다. 세계 곳곳에서 “오늘날에도 저항 이야기는 계속 쓰여 지고 있다.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러 올리듯 현대의 예언자들은 성경 속 예언자들에게 영감과 힘을 얻는다. 이들은 정치적이지만 당파적이지 않고 현실적이지만 고집스러울 정도로 낙관적이고 희망적이다.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비판적이지만 그들의 비판은 언제나 공동체를 향한 깊은 사랑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저자가 안타까워한 것같이 미국과 같이 한국의 개신교도 메시지가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고 항상 미래의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짐승의 활동, 휴거와 재림, 마지막 심판과 천년왕국, 십이만 이천 등에만 관심 갖고 있다는 것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나요? 5.샘물 + 복음 이야기 :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곳은 샘물을 깃는 우물이었다. 누구나 예수님을 만난 우물이 있다.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고 다양할 것이다. 과연 그들이 예수님을 만난 그때가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을 들은 때였을까? 복음서의 ‘기쁜 소식’이라 불리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그토록 인상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지구상의 조금만 어촌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수천 년을 지나 1984년 지구 반대편의 앨라배마주 버밍엄에 사는 댕기 머리 유치원생의 귀에까지 닿을 정도로 어머어마한 파장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이 ‘기쁜 소식’의 내용은 뭘까? 사도 요한에게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는 기쁜 소식이다. 마태와 마가에게 복음이란 예수님이 모두가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소식이다. 그분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오셨다는 기쁜 소식이다. 의사 누가에게 복음이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 탕자와 병자들,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곤경에서 구하시고 치유하시고 불의를 바로 잡으시는 구원자가 오셨다는 기쁜 소식이다. 사도 바울에게 복음이란 예수님 안에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정점에 이르렀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이 세상에 구원을 베푸는 민족의 사명을 마침내 완수할 것이며, 이제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이야기에 ‘접목’되었고, 그들이 하나님의 가족에 완전히 통합되는 데 걸림돌이었던 율법과 의식들은 무효가 되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비로소 진정한 일치가 이루졌다 는 기쁜 소식이다. 복음은 예수님을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이다. 복음을 한 단어,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는 없다. 실제로 성경을 살펴보면 누구도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 누구도 ‘영접 기도문’을 읽거나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겠다고 하지 않았다. 복음이 온 세계에 좋은 소식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좋은가는 사람마다, 공동체마다 다르다. 따라서 사람들이 “복음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을 때 우리가 줄 수 있는 답은 “제가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이다. 예수만난 기쁜 소식의 이야기 말이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그분은 주로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공관복음에서만 그 같은 표현이 82번 나온다. 하나님 나라를 저 멀리 어딘가 육체를 벗어난 영혼들이 모여 사는 낙원쯤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과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통치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늘나라는 지금 여기에 있지만 가려져 있고, 내재적인 동시에 초월적이다. 임박한 그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지만 또 우리 너머에 있으며, ‘이미’와 ‘아직’ 사이에 존재한다. 그의 나라는 가난하고, 온유하고, 화평케 하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 하나님을 갈급히 찾는 사람의 것이다. 그의 나라는 권력과 힘이 아니라 은혜와 자비, 겸손과 사역을 통해 확장된다. 그 나라에서 꼴찌기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일이 흔히 벌어질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부자는 하늘나라에 가기가 힘들지만 어린아이들은 언제나 환영받는다. 하나님 나라의 구세주는 군마를 타고 오지 않고 나귀를 타고 오시며, 승리와 정복이 아닌 죽음과 부활로 나라를 세우신다. 영원히 지속할 나라는 오직 하나님 나라뿐이다. 이것이 복음의 기쁜 소식이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주제를 가장 많은 비중을 두셨지만 오늘 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관해 이야기할 때 “예수님이 죽으려 오셨다”는 식의 일종의 계약 관계에 중점을 두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흠이 없는 제물이 필요하셨는데, 바로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가 그 제물이 되어 마침내 믿는 자들이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단지 우리의 보석금을 내려오신 것에 불과하다. 그런 경우, 그분의 삶과 가르침은 흥미로운 배경이 될지는 몰라도 구원 사역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예수님은 죽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그분은 살기 위해 오셨다. 가르치고, 치유하고, 탁자를 뒤엎고, 불결하다 여겨진 사람들에게 손을 얹고, 함께 식사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과 식사하고, 빵을 떼고, 포도주를 붓고, 발을 씻기고, 유혹에 맞서고, 권력자들을 꾸짖고, 율법을 완성하고, 용서하고, 전혀 새로운 나라를 시작하고,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보이고,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원수를 사랑하고, 무덤에서 일어나 죽음을 이기러 오셨다. 우리를 죄에서 구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만이 아니다. 그분의 죽음만큼 그분의 삶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한다.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은 우리를 해방의 길로 이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를 단순한 공식(사영리,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 등)안에 가둘 수는 없다. 복음은 예수님을 만난 삶이고, 삶에서 만난 예수님 때문에 얻게 된 기쁜 소식이기 때문이다.(예: 아만다의 복음은 IS병사에 의해 상해를 입은 어린이에게 붕대를 매어 주고 나서 곧 바로 그 어린이에게 상해를 가한 IS병사에게 똑같은 마음으로 붕대를 매어 준 이라크 모술 외곽의 야전 병원에서 만난 그리스도인 간호사의 이야기이다. 볼츠 웨버의 복음은 온 몸에 문신을 세기고, 벳 사람처럼 입이 거칠고 이따금 스텐드업 코미디도 하는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 극적인 변화를 받은 후 루터교 목사가 되어 덴버에서 마약 중독자, 여장남자, 회의자와 유족들을 위해 작은 교회를 시작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사람들에게 그들이 전적으로 사랑받는 존재이고 어떤 실수도 하나님의 자비보다 클 수 없다는 진리를 일깨우는 것이라 전하는 자신의 변화라고 말할 것이다.) 그럼으로 복음은 복음의 공식이라는 것에 가둘 수 없다.
□ 토론: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 과거와 현재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잔혹한 일들, 교회를 갈가리 찢어 놓은 분열, 신앙생활에서 겪는 의심과 절망,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는가? 무엇이 그들을 신자로 남아 있게 하는가? 복음주의 루터교, 침례교, 성공회, 라틴계, 흑인, 백인, 인도인, 한국인, 고교회파, 저교회파, 카톨릭, 개신교, 개혁주의, 감리교, 이성애자, 양성애자, 성전환자, 목사, 학자, 작가, 운동가, 레게머리 아줌마, 문신을 새긴 욕쟁이 목사, 패션 리더 등 겉만 봐서는 도무지 아무런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집단의 사람들이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에 대답하면서 자신이 만나 예수님, 예수님이 자신의 삶을 바꿔주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이 나눈 복음의 이야기는 용어의 차이는 있지만 부인할 수 없는 정통 기독교 신앙고백인 죄와 회개, 침례(세례), 죄 고백, 성육신, 부활, 그리고 성경에 관한 나눔이었습니다. 당신은 오늘날 개신교회가 복음을 이야기할 때 신자 개개인이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기쁨의 소식보다 교리적 공식이나 성경의 정형화된 내용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신자들이 실제 현실 속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로서의 복음이 상실된 것이 아닌지, 여기에 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지 나누어 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