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래의 출생과 그 신앙의 뿌리
박병래는 1903년 5월 27일, 지금의 충남 논산읍 욱동(旭洞)이라는 마을에서 천주교 신자인 아버지 박준호(朴準鎬) 요한과 마리아라는 본명을 가진 어머니 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말하자면 박병래는 태중 천주교 신자다.
그 스스로 하느님을 찾아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부모로부터 신앙을 이어받아 신자가 된 것이다.
그렇게 박병래는 특별히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그의 자녀가 되었고, 어쩌면 이후 그의 삶도 그런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살도록 정해져 있었는지 모른다.
원래 박병래의 아버지 박준호는 전북 완주 고산(高山) 지역 되재(升峙)라는 곳에 살았다.
‘되재’라는 명칭은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승치리에 자리 잡은 고개 이름으로,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천주교회가 처음 그 역사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지역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된 1784년 이후 첫 번째 천주교 박해가 시작된 1791년 신해박해를 겪으면서 형성된 교우촌이기 때문이다.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주로 충청도와 경기도 지역에 살던 신자들이 상대적으로 박해가 심하지 않았던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경계 지점인 이곳 산악지대로 피신해 살면서 교우촌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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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성당에 걸려 있는 ‘출발’ 그림. |
조선대목구 설정과 파리외방전교회
이런 상황에서 초기 한국 교회 신자들은 사제를 모시기 위해 끊임없이 로마에 청원했고, 1831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그때까지 북경교구에 속해 있던 조선 천주교회를 독립시켜 초대 대목구장에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브뤼기에르 주교(Bruguiere, Barthelemy, 1792~1835)를 임명한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초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된 것을 크게 기뻐하며 당시 중국 쓰촨대목구의 선교사로 있던 앵베르 신부에 이어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를 함께 일할 조선교구 사제로 받아들인다.
1832년 6월 26일자에 쓴 한 편지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왕국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우리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 삶을 바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스스로를 위하여 성사를 거행하고, 성교회의 경계를 넓혀 나갈 조선인들을 사제로 서품할 것입니다”라고 조선 포교에 대한 비장한 각오를 보여주고 있다.
조선 입국을 위해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출발해 조선으로 오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러나 1835년 10월 20일 중국 열하성(熱河省)의 한 교우촌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다음 달 그곳에서 선종하는 비운을 맞는다.
조선을 향해 출발한 지 4년여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결국 조선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중국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서울대목구에서는 대목구 설정 100주년이 되는 1931년 10월에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를 서울로 옮겨와 지금 용산성당 성직자묘지에 안장했다. 참으로 눈물겨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파리 시내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가면, 1663년 이후 이 선교회가 약 300년 동안 해외에서 활동해 온 선교 역사, 특히 동양에서 163명(한국에서만 25명)의 순교자를 낸 역사를 보여주는 많은 기록물과 그림, 그리고 물건들을 볼 수 있다.
그중에 눈길을 끄는 그림이 하나 있다. 샤를르 쿠베르탱이라는 화가가 아시아로 떠나는 네 명의 사제 파견식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그렸다는 ‘출발’(The Departure)이라는 그림이다.
파견식에 참석한 신자들이 차례로 나와 검은색 긴 수단을 입은 사제들과 작별하는 모습을 그린 감동적인 그림이다.
당시에 아시아 지역, 특히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된다는 것은 거의 목숨을 내놓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복음 선포만을 위해 박해와 핍박의 땅으로 가는 젊은 사제들의 모습에 숙연함을 금치 못한다. 명동성당 옆 문화관 2층 ‘코스트’ 홀 입구에도 커다란 액자에 담긴 같은 그림 한 장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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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로 설립 358년을 맞은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건물. |
비에모 신부와의 운명적인 만남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된 이후에도 사실상 50여 년간 천주교 박해는 이어졌고, 이로 인해 신자들은 되재 같은 산속 마을로 피신해 살아야 했다.
이런 신자들을 위해 사제가 절실했을 이 지역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비에모(Villemot, 1869~1950) 신부가 부임해 온 것은 1893년의 일이다.
1892년 초, 23세에 사제품을 받고 그해 6월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온 비에모 신부는 다음 해인 1893년에 전라도 지방으로 내려와 선교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놀랍게도 그 나이에 그는 이곳에 한옥 성당을 짓기로 결심한다.
프랑스은행으로부터 직접 대부를 받아 건축 공사를 시작한 지 1년 만인 1895년에 완공한 되재성당(지금의 고산성당)은 이보다 3년 앞서 1892년에 세워진 서울 약현성당(현재의 중림동약현성당)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성당이다.
재미있는 일은 이때 지은 성당 내부 제대 앞에서 성당 출입구까지 사람 키 높이의 칸막이를 해서 남녀 자리를 구분했다는 점이다. 공개적으로 남녀가 함께 있지 못하게 한 우리나라 유교 풍습을 그대로 반영한 일이다.
비에모 신부가 박병래의 조부 박현진(朴賢鎭)을 만난 것도 이때이고, 이후로 그는 박준호와 박병래 부자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당시 고산 지역에서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했던 박현진은 7형제가 모두 순교자였을 만큼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고 한다.
그런 그의 자손인 박준호와 박병래가 이어 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 연유는 참으로 기적과 같은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추측건대, 고산 지역의 뿌리 깊은 천주교 신앙은,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42~1791)으로부터 교리를 배운 충청남도 예산 출신 하느님의 종 이존창(루도비코, 1752~1801)이 신해박해 중에 이곳에 피신해 전교하게 된 일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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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에모 신부가 세운 되재성당. 이 성당은 6·25 한국전쟁 때 소실됐으며, 현재는 옛 모습을 복원한 건물이 들어서 있다. |
고산에서 놀뫼로, 그리고 다시 서울로
박병래의 아버지 박준호는 1900년을 전후해서 충청도 놀뫼(지금의 논산시 부창동)로 이사를 한다. 그리고 1903년에 아들 박병래를 거기서 낳게 된다. 당시 놀뫼에는 공소나 성당이 없었는데 이곳에 처음 공소가 생기게 된 데는 일화가 있다.
놀뫼로 이사를 와서 살던 박준호는 그곳에 함께 살던 누이동생의 혼인성사를 주례해 주도록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나바위(현재 화산)본당 베르모렐(Vermorel, Joseph) 신부를 초청한다.
그러나 베르모렐 신부는 자신이 그곳에 가서 별도의 혼인성사를 집전하면 다른 가난한 신자들이 위화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면서 먼저 놀뫼에 공소를 설립할 것을 제안한다. 이 말을 듣고 박준호는 놀뫼에 공소를 설립한다.
이때가 1907년이다. 이 공소는 박준호 가족이 서울로 떠난 뒤 1921년에 전라북도 화산본당에서 분리되어 지금의 논산 부창동본당이 된다.
박준호 가족은 아들 박병래가 열두 살 되던 해 서울로 이사한다.
이 결정은 특히 평소 박준호의 집안과 가깝게 지냈던 비에모 신부의 강력한 권고와 도움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비에모 신부는 되재성당을 떠나 1898년부터 서울로 임지를 옮겨 조선대목구 살림을 담당하고 있던 때였다.
그는 1895년 국내 두 번째 성당을 전라도 산골 마을 되재에 설립한 능력을 인정받아 조선대목구청으로 불려 오게 된 것이 분명하다.
놀랍고 신기한 일은, 그가 되재에서 사목하는 동안 박준호의 비범함과 성실함에 탄복하고, 아들 박병래가 태어나 몇 년 뒤 소학교를 마치자 이들 부자(父子)를 서울로 이사시켜 신학문을 배우도록 하게 한 일이다.
결국, 비에모 신부의 생각대로 이들 부자는 서울로 올라와 각각 교육과 의료 분야에서 한국 천주교 발전에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새삼 비에모 신부의 지혜로운 판단과 실천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