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03.木. 맑음
센千과 치히로千尋의 행방불명.
멀리서 우레 소리가 들려왔다. 맑던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고 저 멀리 고가도로 너머로 보이던 산이 어슴푸레 흐려져 갔다. 내륙지방에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내릴 것이라던 일기예보가 어쩌면 맞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을 했다.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맞바람이 들어와 거실 안을 함부로 돌아다녔다. 급한 소나기나 지역성 호우가 쏟아지기 전에 나타나는 몇 가지 현상들이 하나 하나 눈에 뜨이기 시작했다. 우레 소리가 점점 커지고 거대한 울림이 귓가로 가까이 다가왔다. 바람 끝에 물 먼지 같은 것이 비치는 둥 마는 둥 시나브로 날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후둑.. 후둑.. 후두둑.. 갑자기 빗방울이 실하게 커지면서 소리를 요란하게 내더니 유리창과 거실바닥에 치열한 자국을 남겨놓았다. 나는 얼른 거실 창문과 안방 창문을 닫아주었다. 유리창窓은 비스듬히 날아와 부딪치는 빗방울에 금세 뿌옇게 변해버렸다. 허공중에 바람이 줏대 없이 사방으로 불어 다니는 건지 사방의 창窓에 다 빗방울이 튀겨있었다. 모든 창窓이 거의 동시에 젖어가는 풍경은 마치 잠수정을 타고 낮은 바다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것 같았다. 푸른 하늘과 빨간 해는 어느새 행방불명行方不明이고, 검은 구름과 알맹이 큰 빗방울만 천지에 가득했다. 긴 시간동안 하늘을 뒤덮는 장마성 호우가 아닌 성질 급한 소나기는 대략 삼십 분 만에 그쳐버렸다. 그런데 성질 급한 일회용이라는 소리가 듣기에 싫었던지 한 시간 뒤쯤에 한 번 더 푸른 하늘과 빨간 태양을 행방불명 시킨 후 소나기는 하늘의 검은 구름 속으로 또 몸을 숨겼다. 오전에는 하늘이 맑더니만 오후는 내내 그렇게 날이 흐렸다. 성질 급한 소나기로 인해 푸른 하늘이 잠시 행방불명이었으나 푸른 하늘이 다시 얼굴을 내밀자 이번에는 소나기가 검은 구름 속으로 일단 행방불명이 되었다. 푸른 하늘과 검은 구름은 대기大氣의 서로 다른 상황에서의 두 모습이라는 점에서 센千과 치히로千尋와 비슷하다고 생각을 했다. 동시에 보일 수 없는 몸의 앞면과 뒷면이 어느 한쪽이 보이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행방불명이 돼야 하는 동전 양면兩面의 이치와 같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날씨가 하루에도 몇 번이고 바뀌었다.
그러니까 내가 ‘센千과 치히로千尋의 행방불명神隱し’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본 것은 십년이 훨씬 넘은 일이었다. 가족이 차를 타고 이사를 가던 중 부모님과 함께 길을 잘못 들어 수상쩍은 터널을 통과한 뒤에 신神의 나라에 들어선 치히로라는 응석받이 소녀가 그곳을 지배하는 마녀로부터 센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는다. 센은 신의 음식을 잘못 먹어 돼지가 된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기이하고 까다로운 난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하쿠라는 마녀의 부하인 강의 요정을 만나게 된다. 하쿠는 센이 되어버린 치히로에게 이렇게 충고를 해준다. “자신의 본래 이름을 잊어서는 절대 안 돼, 진짜 이름을 잊어버리면 이곳에서 나갈 수가 없거든.” 센이 있는 곳에서는 치히로가, 치히로가 있는 곳에서는 센이 이유 없이 종적을 감추는 것은 하나의 상황에서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이름은 하나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한 소녀의 성장통成長痛으로부터 인간의 정체성正體性 회복에 이르기까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그러니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고 번역된 이 애니메이션의 원 제목인 ‘千と千尋の 神隱し’의 ‘神隱し’는 ‘신에 의해 숨겨졌다, 혹은 이유 없이 종적을 감추다.’ 라는 뜻이 된다.
우리 일행들이 통방산 무면사無面寺라는 절을 방문하자고 한 것은 3박4일간의 하계 템플스테이를 더욱 알차게 보내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니까 템플스테이 3일차 프로그램인 자유활동시간을 이용해서 30분 안팎이면 가볼 수 있다는, 옛날에는 거찰巨刹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거의 폐허화 되어버렸으나 부도전 만큼은 장엄하기 그지없다는 무면사無面寺 부도전附圖田을 참배할 양으로 점심공양을 마치자마자 바로 출발을 했다. 그때가 햇살이 머리 위에서 하얗게 반짝거리는 정오正午경이었다. 오늘 일기예보에서 중부지방에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지역에 따라 한때 내릴 것이라고 했지만 우리들은 그다지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봐야 강우 가능성이 30%라고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긴 장마기간 동안 장마전선의 정체로 인한 폭우를 많이 봐온 우리들에게 그깟 소나기정도야 하는 마음이 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막상 무면사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주변에 별로 없었다. 물론 내비게이션에 ‘통방산 무면사’ 하고 쳐보아도 ‘검색내용이 없음’ 이라는 글만 떠올랐다. 그래서 일단 통방산 기슭을 향해 가다가 현지 주민들에게 물어서 위치를 확인하기로 하고 들뜬 마음으로 사륜구동차를 몰아 사찰순례에 나섰다. 템플스테이 법사스님께는 저녁공양시간까지는 돌아오겠지만 혹시 조금 늦게 되더라도 오늘밤 안에는 분명 돌아올 터이니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씀을 드려놓았다. 국도를 따라 달려가다가 도장리를 조금 지나 정배리 조금 못 미친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면 통방산을 향해 오르는 가파른 언덕길이 시작되었다. 경사진 길 왼편 숲 안쪽으로는 별밤이니 은하수촌이니 외로운 별똥별 이니 하는 카페와 펜션 몇 채가 보였다. 아직 밤이 되지 않아 그 분위기까지는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사방이 어두워진다면 카페의 이름들처럼 유난히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이 장관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고개 마루까지 구불구불 올라갔다가 이번에는 명달리를 향해 빙글빙글 돌아가는 내리막길이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늘에는 여전히 맑은 햇살이 하얀 불꽃처럼 땅을 향해 내리쬐고 있었다. 뜨겁고도 상쾌한 어느 여름날 오후의 낭만 가득한 고찰古刹 탐방探訪길이었다.
(- 센千과 치히로千尋의 행방불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