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원고:12.5매)
호박넝쿨
김정순
쌀쌀한 바람이 이는 언덕을 오른다. 억새는 흰 머리카락을 날리며 서있다. 한껏 멋 부린 연갈색 정장을 입은 노신사처럼 멋있게 보일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 주위의 풀들도 누렇게 시들어가는 것 같아 서글프다.
갈색 언덕 한곳에서 초록색이 눈으로 들어왔다. 호박넝쿨이다. 반가웠다. 제법 차가운 날씨에도 생명의 빛을 잃지 않고 있다. 시름시름 메말라가는 풀 속에서 저 혼자 당당하게 푸르다. 절망에서 희망을 보듯 가슴이 설레었다. 여름날의 잎처럼 크고 활기차지 않지만, 그래도 넝쿨과 잎 사이에 작은 열매와 꽃봉오리까지 달고 있다.
호박넝쿨 앞에 가만히 앉았다. 여린 잎이 바람에 파르르 떨고 있다. 생명을 놓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엿보인다. 애처롭다. 멀지 않아 된서리가 내릴 것이다. 날벼락 같은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려고 이러고 있을까. 삶에 대한 욕심이 남아서일까.
부질없는 상념에 잠긴 내게 호박넝쿨이 말을 걸어온다.
황금곳간 몇 개나 채우고도
또, 미련 남았냐고 말하지 마라
떠날 때 가져가지 못한다고 빈정거리지 마라
땀 흘려 채운 곳간 남겨두고 가면 누군가 웃겠지
빚지고 떠나기보다 남기고 갈 것 많으면 기쁘지 않겠나?
어느 때인데 아직도 푸르고 꽃피우고 열매 맺느냐고 비웃지 마라
갈 때 되었다고 누렇게 뜬 얼굴로 시들시들 사위어가는 생이 싫어서다
떠나는 날까지 생생하게 살다
밤새 내린 된서리 맞고 한순간에 끝나면 그게 복 받는 거지.
우리 동네에는 화요일과 토요일에 골목시장이 열린다. 시장 한쪽에는 늙고 허리 굽어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가 좌판을 펴고 있다. 좌판의 채소를 다 팔아봐야 2만원도 될 것 같지 않다. 채소는 시들어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하는 것 같다. 돈을 벌기위해 장사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린다. 자식들도 모두 잘 살고 있는데 왜 저리 궁상을 떠는지 모른다며 수군거린다. 자식들이 창피스럽다며 말려도 듣지 않는다는 소문도 있다. 노년을 살아보지 못한 젊은이와 자식들이 어찌 할머니의 마음을 알 수 있으랴. 쓸쓸함과 외로움, 허망함을 달래는 몸부림을 알기나할까. 된서리를 눈앞에 둔 호박넝쿨 같은 할머니가 명치끝을 아리게 한다. 어쩜 그 모습이 또 다른 나일 것만 같아서다.
태어나고 자라서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길러 독립시키고 나면, 할 일을 끝마친 것처럼 홀가분하다. 그것도 한순간이다. 휴! 한숨 쉬고 돌아보면 할 일이 없다. 무료한 일상으로 살다보면 허망함이 몰려온다. 자식들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즐기면서 살라한다. 즐거운 것이 무엇일까. 숨 가쁘게 달려오느라 그 방법을 익히지 못했다.
친구들을 따라서 노래교실도 가보았다. 백화점 쇼핑에 몰려다녀도 보았다. 식당에 모여앉아 잡담을 하며 어울려도 보았다. 노래하고 쇼핑하고 맛있는 음식 먹고 잡담하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일까. 어울리다 돌아서면 빈 가슴만 휑했다. 그래도 우울감에 허우적거리며 새들새들 병치레하는 친구에 비하면 나을 것 같다.
글쓰기 강좌에 발을 들여놓았다. 강의를 듣고 남의 글을 읽고 한줄 두 줄 적어가는 사이, 나도 모르게 즐기게 되었다. 친구들은 말한다. 무엇하려고 골치 아프게 글을 쓰냐며 비웃는다. 누가 무어라하여도 나는 재미있고 즐겁다. 사람마다 즐거워하는 것이 다른 것 같다.
가을언덕을 오르면서 느낀다. 한해살이 식물을 보면 인생의 축소판과 똑같아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부분이 많다. 식물의 종류사이에도 다른 점이 있다. 살아가는 법과 마지막을 맞이하는 모습 등이 그러하다. 생의 마무리가 억새처럼 누렇게 시들어가는 풀이 있는가하면, 호박넝쿨처럼 끝까지 살아있음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식물도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내가 호박넝쿨처럼 최선을 다하는 것은 글쓰기다. 컴퓨터를 열고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열심히 글자판을 두드리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헛된 일인 줄 알면서도 호박넝쿨이 끝까지 열매 맺고 꽃봉오리를 만드는 것처럼, 내 글쓰기도 그러하다.
자식들은 제 어미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너스레를 떤다.
“우리엄마 최고! 엄마나이에 글을 쓴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야. 흔하지 않은 귀한 거야. 엄마가 자랑스러워.”
나는 그 말에 철없는 아이처럼 우쭐거려본다.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진다. ‘어떤 삶을 이어가겠느냐?’ 서슴없이 대답할 것이다. 누렇게 시들어가는 억새보다는 호박넝쿨 같이 생생한 삶을 이어갈 거라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이야기를 짜는 나와 쉬지 않고 곳간을 채우려는 끝자락의 호박넝쿨! 얼마나 용기 있고 멋진 모습인가?
(2022년 10월 대구문학 181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