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해 4월 26일 김대중은 26년만에 처음으로 영화 <서편제>의 주연배우 오정해와 김운형의 주례를 섰다.
서울 63빌딩에서 거행된 결혼식 주례사에서 독특한 ‘사랑론’을 폈다.
“부부는 서로 상대방의 기(氣)를 살려줘야 한다”며 “남편은 아내의 사랑으로 살아가고 아내는 남편의 사랑으로 살아간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인생사에도 절대로 인내심이 필요하다”면서 “마음이 상하는 일이 있게 되면 하루를 참고 그래도 안 되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참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자신의 험난한 생애에서 겪은 ‘인내’의 철학이었다.
김대중이 바쁜 와중에 이들의 주례를 선 것은 영화ㆍ연극ㆍ판소리 등에 각별한 관심과 조예가 깊은 그가 <서편제>를 관람한 뒤 출연진과 인사하는 자리에서 오정해를 처음 만나 주례의 부탁을 받고 약속을 지킨 것이다. 연예계에 잔잔한 감동과 파문을 일으켰다.
대선정국은 여름을 거치면서 점차 가열되어 갔다. 여야 간에 공방이 치열해지고, 후보와 가족에 대한 폭로전이 전개되었다. 8월 초에 열린 임시국회에서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 두 아들의 병역기피 의혹이 제기되면서, 각종 여론조사에서 50%에 육박하던 이회창의 지지가 곤두박질쳤다. 국민회의측은 병무청의 각종 자료를 제시하며 이후보를 공격했다. 당시 대법관이었던 이회창이 군당국에 압력을 가해 신체검사 판정에서 체중을 조작했거나 최소한 두 아들이 체중을 고의로 감량했다고 주장했다.
수세에 몰린 신한국당은 맞불작전으로 김대중의 병역면제 문제를 제기했다.
6ㆍ25당시 징집대상이었는데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국민회의측은 “1949년 병역법 제정 당시 1929년생부터 징집대상이었으므로 김총재는 징집대상이 아니었다.”면서 “그런데도 김후보는 6ㆍ25당시 전남북지구 해상방위대부대장으로 근무했다”고 주장했다.
김대중의 병역문제는 선거가 있을 때마다 시비가 되었던 사안이었다.
본인은 1950년 연말 ‘해상방위대’에 지원하여 전라도지구 부사령관으로 재임하면서 해군의 후방지원을 맡았다고 진술했지만 반대 진영에서는 이를 믿지 않았다. 증빙자료도 없었다.
이번에 다시 이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그것도 상대후보 아들들의 ‘맞불작전’으로 제기되어 곧 대선정국의 핫이슈가 되었다. 국민회의측이 예비역 해병 준장 송인명의 ‘복무확인 증명서’를 받아내면서 김대중은 오랜 동안의 질긴 병역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증 명 서
김대중(金大中)
1925년 12월 3일생
상기자는 6ㆍ25동란시 본인이 해군목포경비 부사령관 겸 위수사령관 재직시 해상방위대 당시 대장 오재균씨와 같이 복무하였음을 증명함.
1997. 8. 18
예비역 해병준장 송 인 명 (주석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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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명의 ‘증명서’는 김대중 진영에는 구원의 메시지였다.
이로써 오랜세월 용공음해의 한 축이 되었던 병역기피 문제가 해소되고 상대적으로 이회창 진영에는 타격으로 작용했다.
주석
12) 아태평화재단, <아태평화포럼>, 199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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