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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9 장
피조물은 왜 하나님
아들들의 등장을 기다릴까 (2)
(히브리서 11장 말미)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아들들’의 올바른 진술로 하나님의 자손 아브라함으로 밝혀지고,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다윗도 모세도 그들의 인생에 담고 있었던 진리라는 내용으로 하나님의 자손으로 밝혀진다.
‘지나가는 일행을 극진히 대접했는데 알고 보니까 하나님이었어.’라며 복을 받은 아브라함의 얘기가 예화로 많이 쓰이고 간증에도 많이 나온다. 자기들도 그렇게 했더니 그게 진짜 예수님이었다고.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열심과 열정으로 그분을 감동시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얻어낸 야곱을 보며 강청기도 하자고 한다. 요즘 일천 번제보다 더 어마어마한 기도가 나왔다고 하는데, 거기서는 기도할 때마다 헌금을 낸다고 한다. 맨몸으로 가서 기도하는 게 아니라 갈 때마다 돈을 갖고 간다. ‘천오백 번제’ 같은 것도 있다고 한다.
형제들의 배신에도 인내하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잃지 않고 결국은 애굽의 총리가 되는 복을 받은 요셉, 애굽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하나님의 도구로 열심히 살다 간 모세, 이미 경수가 끊어져 태가 막혔는데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이삭이라는 자식을 얻은 아브라함과 사라. -> 이런 얘기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인생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했던 핵심 내용이 아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누구는 …” 식으로, ‘믿음’을 주어로 해서 위의 얘기를 다시 쓴다. / 믿음이 그렇게 했다고 생각해 보자. 모세는 사람을 죽이고 도망갔고,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낫게 여긴 것도 아니다. / 처가살이 하면서 풀 죽은 상태로 하나님께 쓰임 받은 것이지, 대단한 결심을 하고 애굽을 나온 사람이 아니다. / 하나님이 자식을 낳게 해준다고 했을 때 사라가 믿습니다 하고 자식을 받은 것이 아니라 휘장 뒤에서 비웃었다. / 그러한 내용을 히브리서 11장이 확 폭로한다.
너희는 그런 존재인데 믿음이 너희를 그렇게 만들었다. -> “너희들의 행함은 그 정도였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들어 있어서 그 손길이 결국 너희들을 그렇게 만들어 내었다.” -> 그 안에서 일하신 하나님의 손길, 크로노스 안에서 일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초점이 있지 그들의 행함에 초점이 있지 않다. / 그런 방식으로 구원을 얻게 된 하나님의 성도들이 믿음의 선진들의 삶의 내용을 진리 안에서 올바로 이해하고 설명하지 못하면 그들은 온전한 자가 아니다. / 아브라함이 하늘에서 땅을 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나가는 길손을 대접한 게 진리야?” 모세도 “나는 사람 죽이고 도망 나왔어. 나를 칭찬해 준다고 내가 기분이 좋을 줄 알아? 안 그래. 너희들이 왜 나를 그렇게 보니? 나의 실체를 보고 나를 만지시는 하나님을 보아.” 할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존경하려고 한다. 그 사람 안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 크로노스의 땅이 카이로스의 하늘로 깨달아지면 그 상태를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 상태 => 연합. / 아래의 물을 위의 물로 깨닫게 되는 것이 위와의 연합. => 짝. / 어둠이 빛으로 이해되고 어둠을 통하여 빛을 알면 그 어둠이 빛이 되는 것 = 짝. / 짝은 반드시 하나로 연합되어야 한다. -> 창세기 1장의 ‘자칼’과 ‘네케바’의 이야기.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 / 남자는 반드시 여자 안으로 들어가 여자의 반쪽으로 붙어서 하늘의 사람이 된다. 그게 창세기 셋째 날의 완성이다.
창세기 셋째 날: 씨 이야기. (‘제라’=씨를 가진 자) / 이것(짝)이 완성되어야 -> 자칼과 네케바,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야기.(사도 바울) / 둘은 반드시 하나로 연합되어야 비로소 온전한 존재가 된다. / 마찬가지로 땅의 것이 하늘의 것을 담아서 하늘의 것으로 되면 그게 완성.
언어학: 모든 나라의 이름이 여성형. / a로 끝나는 나라 이름은 전부 여성형. 오세아니아, 영국 브리타니아, 재팬(자포니아), 코리아, 오세아니아, 인디아, 아메리카. / 아메리카 대륙은 콜럼버스가 발견한 것이 아니라 ‘아메리노’가 발견했다. 거기에 여성형이 붙어서 아메리카가 되었다. /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역사가 암묵적으로 땅을 여자로 알고 있다. 하늘만 남자이다. / 땅인 여자가 하늘의 씨, 진리를 받아 아들로 태어나면 그게 연합이요 생명. / 엄밀하게 말해서 땅이 씨를 받아 어미가 죽고 아들이 된다. ->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 / 육은 모두 하늘의 씨를 받아 진리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성경 전체가 그 이야기이고 세상이 그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 땅의 것 조금, 하늘 것 조금 서로 내놓아서 연합하는 게 아니다. 땅은 하늘로 완전히 빠져들어가야 된다. -> 크로노스의 죄와 악으로 카이로스의 의와 선을 배웠다면 땅의 죄와 하늘의 의가 하나가 된다. 그걸 알면 땅의 죄가 삭제된다. => 용서. / 땅이 어두움으로 하늘의 빛을 깨달아 알면 어둠과 빛이 하나가 되고 땅의 어둠은 없어진다.
카이로스를 사는 사람은 어둠인 땅에 살면서 어둠이 없는 하늘, 빛만 있는 세상을 여기서 산다. 어둠과 상관없기 때문이다. / 어두움의 삭제가 연합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선과 악, 좌와 우, 어두움과 빛 등에 치우치지 않고 하나로 똑바로 가운데 서게 된다. => 부활. / 선악과 따먹은 아담, 선악과 패러다임 아래 아담은 좌로 치우치고 우로 치우치고, 선으로 치우치고 악으로 치우치고, 어두움으로 치우치고 빛으로 치우쳤다. / 기독교의 목적은 선악과와 아무 상관없는 상태로 사는 것이다.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시가서 다섯 편이 내가 위에 말한 이야기를 중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성경은 카이젬 구조로 기록되어 있다. 카이젬 구조란 A B C D C’ B’ A’ 구조이다. 내용이 확장되어 가다가 가운데 주제를 놓고 다시 축소되어 간다. 복음서도 대부분 이렇게 쓰여 있다. 내용을 쭉 펼쳐 가다가 가운데 핵심을 놓고 다시 그것을 설명해 준다. 제일 가운데 있는 것이 주제이다. / 성경을 덮었다가 가운데를 열면 시편, 시가서가 나올 것. -> 시가서 다섯 편이 성경 전체의 주제인 아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우리는 그런 관점에서 시가서를 읽어야 한다.
시가서 다섯 편 중 첫 편 욥기 -> 하나님의 아들 된 자의 시작, 처음을 설명. / 욥을 본받자는 게 중심이 아니다. / 41장 이전의 욥처럼 살면 지옥에 간다. 욥은 아브라함과 동시대 사람. / 하나님은 욥을 들어 쓰지 않고 아브라함을 사용. “믿음은 이런 거다, 하나님의 씨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렇다”를 아브라함을 통해 설명. / 욥이 너무 버거워서 쓰시지 않은 것이 아니다. 욥은 아주 율법적인 사람. -> 잔치를 벌이고도 제사를 지냈고 아이들을 위해서 매일 제사 지냈다. 결벽증 있는 사람처럼 행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죄를 멀리하려고 했다. 하나님은 죄를 통해 하늘의 의를 알게 하려고 했지만 욥은 그것을 자꾸 멀리했다. 그리고 “나 잘했지요?” 한 게 욥의 모습.
(욥1:4-5) 4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나라면 잔치 안 했을 것. 사람 명수대로 짐승을 죽이고 피를 내어 제사 드리는 것이 얼마나 번거로운가. 잔치 한 번 하면 전부 다 불러서 제사를 지낸다. 제사 열심히 지내면 정말 죄가 없어지나? 그러면 히브리서는 찢어버려야 한다. / 사람들은 이런 욥을 본 받아야 한다며 따라 한다. 성경은 이런 욥의 상태를 어떻게 탈출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 욥처럼 율법적인 사람들은 크로노스의 세상에 묶여서 산다. / 성경은 사탄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욥을 고소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걸 보고 하나님나라에 가면 사탄도 있는지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성경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하나님은 영이다. 그런 상상은 하지 말라. / 사탄(‘사타나스’) 자체가 비진리, 대적자, 진리의 대적자란 뜻이다. 성경은 욥을 통해 비진리를 어떻게 대적하는가를 보여준다.
얼핏 보면 하나님과 사탄이 짜고 한 사람을 갖고 노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이 어쩌면 그렇게 아들들 다 죽이고, 재산 다 빼앗고, 독종까지 나게 하면서 사람을 갖고 장난쳐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그건 아닐 것이다. / 비진리가(사단이) 주장한다. “하나님이 욥에게 그가 원하는 세상의 풍요를 다 허락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께 제사드리고 의인답게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걸 다 빼앗아 보세요” / 하나님이 “그래, 가서 다 뺏어 봐.”하고 허락하심. ->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 뭔가 설명해 주고 싶으신 것. / “내가 욥처럼 너희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으면 너희는 신앙생활 어떻게 하겠니?”
-> 단순히 사탄의 모함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욥의 신앙이 그 수준이었다는 내용. / 크로노스의 시간 안에 머물면서 물리적 세계 속에 갇혀 있는 인본주의 속의 아담의 모습. / 하나님의 허락을(사주를?) 받은 사탄이 욥의 재산과 가족을 몽땅 친다. / 이 이야기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내가 검으로 왔다. 이것을 자르러 왔다” 하셨을 때 말씀하신 내용이 다 들어 있다. 예수님도 그것을 자르러 오셨고 실제로 잘라 버리셨다.
그때 욥의 고백: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 받으실지니이다.” -> 어마어마한 고백. / 모태는 항상 어머니의 자궁, 옛 성전을 가리킨다. /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와서 다시 그 옛 성전에 알몸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리인가? 인간은 알몸으로 다시 거기로 돌아가면 죽는다. 그 몸은 반드시 삭제당하고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고 돌아가야 한다. / 율법주의에 갇혀 있는 인간들은 호 코스모스 아래 세상을 굉장히 가치 있게 여긴다. 그래서 모태에서 나온 알몸이 알몸으로 돌아가는 것을 당연하다고 알고 있다. / 하나님이 빼앗아 가신 자식, 재산, 친구 모두 하나님이 주셨으므로 그분이 취해 가셨다고 한다. / 그것들이 자기한테 너무 가치 있는 것들인데 하나님이 취해 가셨다고 한다. / 하나님이 내 생명과 관련 있는 소중한 것이라서 그것들을 내게 주셨다가, 그것들이 귀중하고 가치 있는 것이어서 다시 취해 가신다고 생각한다. /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오셔서 가져가실 수 있는 것은 당신에게 주신 생명, 진리밖에 없다. / 하나님은 그 아들만 데리고 가신다. 하나님이 왜 여러분의 재산과 자식을 갖고 가나? 인간들은 그것들이 가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분이 주시고 또 가져가신다고 생각한다. / 이것은 깨져야 할 생각이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고백이 아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의 시험을 허락하실 때는 “그래 몸도 쳐 봐. 욥이 알몸으로 나왔다가 알몸으로 온다고 하는데 그럼 그 몸도 치면 무엇으로 오는지 보자”라는 의도가 엿보인다. 대신에 생명은 내 것이니 그건 만지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건 바로 그것이다.
욥의 세 친구가 등장 -> 하나같이 욥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어서 낭패당한 거라고 충고. / “네가 죄를 지어서 그런 거야.” -> 우리의 선악 논리에 따른 이야기. / 도덕과 윤리로 보면 이들의 이야기가 하나도 틀린 게 없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도 그들이 한 말. / 그들은 죄의 정의도 제대로 내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죄가 이 크로노스의 세상 속에서 우리 육의 유익, 흥망성쇠를 결정짓는 원인이라는 엉터리 신앙관을 갖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 세상에서의 흥망성쇠도 결정되고, 그 연장선에서 구원도 주어진다는 신앙관. => 오늘날 왜곡된 개혁주의 신앙관. / 욥이 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욥은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지었다고 나를 이렇게 대하십니까?” 말한다. / “내가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었습니까? 재물에 대해서 탐욕을 가졌습니까?” 따지고 든다.
그런 것에 마음이 없다면 그까짓 것 가져갔다고 그렇게 따지겠나? 관심이 있고 마음이 있으니까 따지는 것. -> 율법주의의 위선적인 모습. -> 인과율에 사로잡힌 크로노스 세상 속 아담의 율법주의. 복음은 절대 그런 것이 아니다. 구원은 인과율로 나타나는 게 아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성취된다. / 욥은 자신이 그렇게 열심히 율법을 지키고 죄를 멀리하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대하시면 안 된다는 율법주의적인 사고로 가득 차 있다. / 하나님이 은혜와 진리를 설명하시고자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 땅이요, 세상이다. 어둠 속에는 죄도 있다. 땅을 그냥 땅으로 인식해 버리면 그게 죄이다.
우리는 땅의 것, 세상의 것, 크로노스의 것으로 하늘의 것, 초월의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 / 어두운 것, 땅의 것, 악한 것이라고 무조건 멀리하는 것은 옳지 않다. / 하나님은 그걸 통하여 하늘의 것을 알라고 (다른 말로 진리를 담아) 땅에 주셨다. 그것이 성전이고 성경이고 예수요 세상이다. / 그걸 무조건 악하다고 치워버리면 어쩌나? 성경이 그걸 마귀라고 한다. / 하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들의 아비는 마귀다”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 그 말은 “네가 마귀의 새끼”라는 말이 아니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르고 있는 그 하나님은, 너희가 악하다고 하는 것 안에 있는 분인데 그러면 너희가 섬기는 하나님은 악한 하나님이다. 그래서 너희 아비는 마귀다.” -> 율법주의, 선악과 패러다임 아래의 인본주의와 율법주의를 향해 일갈하는 하나님의 음성. “너희의 아비는 마귀다. 너희 하나님은 바알세불이다.”
바알세불이 어디 있어? 바울도 “무슨 우상이 있어? 그런 것 없어” 한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그런 이름을 들먹이며 이야기하시나? -> 너희가 하나님이라고 섬기는 것이 바로 바알세불이다. /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 “나를 다른 신으로 섬기지 말라” “나 외에 다른 신을 너희 앞에 있게 하지 말라.” -> 다른 신도 있다는 말이 아니다. -> 진짜 의미는 “나를 다른 신으로 섬기지 말라. 그게 우상 섬김이다. / 하나님은 진리라는 내용을 담아서 세상과 땅을 주셨다. 빛이라는 내용을 담아 어둠이라는 걸 주셨다. -> 그것의 내용을 알아보지 못하고 무조건 “나쁘다, 악하다, 더럽다” 판단하면 그 안에 내용으로 담긴 하나님이 악한 하나님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 임금으로 죽겠다고 하셨다. “내가 세상 임금으로 죽을게, 그 율법으로 내가 죽을게. 그래야 너희가 진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어, 진리의 영 그리스도의 영.”
36장에 엘리후라는 청년이 등장하여 하나님은 고통을 사용해서 진리를 가르치는 분이고, 그때 비로소 사람의 눈과 귀가 열려서 그분의 말씀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그들이 지금 그 고통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하는데 하나님은 그 안에도 메시지를 담아서 무언가를 전달하시는 분이시다. / “왜 크로노스의 사건 속에만 묻혀 있나?” 이 세상의 방법으로는 그 형벌(고통)에서 절대로 못 빠져나온다. 땅의 힘, 자원, 드리는 제사는 소용이 없다.
어떻게 하면 빠져나올 수 있나? 깨닫고 나와야 한다. 당신이 뭘 잘못해서 고통을 준 것도 아니고 뭘 잘해서 복을 준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을(고통, 복) 사탄이 주거나 빼앗아 가도 하나님은 아무 상관이 없다. / 그런데 교회는 하나님이 찾는 진짜 생명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하나님이 마귀 새끼에게 시키면서까지 “야! 쳐서 가져 가”하신 그런 것만 꽉 붙들고 있다. 그래서 엘리후는 땅의 자원, 행위로는 절대로 그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못을 박는다. / 하나님의 죄사함은 이 크로노스의 세상 것들, 땅 차원의 수고와 노력으로 일어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38장에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옵38:1-5)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2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누가 알지도 못하는 놈이 그 지혜로 까부는 것이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너 이제 진리의 띠로 허리를 묶고 내 말을 잘 듣고 대답해)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욥39:1-2) 1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네가 알 수 있느냐 2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나열된 것 중에 욥이 아는 것은 많았지만 그 안에 하나님이 진리로 담은 내용은 몰랐다. “내가 하늘에 열두 궁성을 깔아 놓았는데 그게 뭔지 알아?” / 열두 궁성은 세 개씩 네 그룹으로 되어 있다. 그것을 하나씩 이름 지어 놓았는데 그걸 따라가면 성경 전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내가 거기에 무슨 이야기를 심어 놓았는지 알아? 넌 그런 것 하나도 모르면서 무엇으로 날 탄핵하냐? 너의 율법적인 사고와 이성의 수준으로 내가 하는 일을 탄핵하냐?” / “네가 선악과 따먹은 죄로 나를 판단하느냐? 내가 천지만물 안에 심어둔 그 메시지, 진리가 뭔지 알아?” 모르니까 제사만 열심히 지내고 있었지. / 욥은 다 듣고 난 후 이렇게 이야기한다.
(욥42: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무지해서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 그러면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만으로 드린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시고 복 주신 것일까? 아니다. 그건 아무 상관이 없다.
(욥42: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 개역성경만의 명백한 오역. (표준 새번역, 공동 번역은 잘 번역되어 있다) 정확한 해석 -> “주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들으라 샤마, 내가 말하겠다. 대답해라. 내가 묻겠다” -> “먼저 들으라, 샤마. 그리고 대답해.”
(욥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에 담긴 진리를 설명해 주시자 “아 주님은 이런 분이군요.” “그렇군요, 하나님 그런 거였군요. 제가 몰랐습니다. 모르면서 인간의 지혜로 이렇게 까불었네요” 하고 욥이 고백한다. / 그러자 하나님이 욥에게 “그래 진리를 네가 가졌다면 이제 그걸 누군가에게 흘려보내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 말씀하심. / “네가 기도하면 저들이 산다”며 친구들도 잘못되었음을 알려주심. 네가 기도하면 저들이 산다는 것은 바로 우리 이야기이다. 중보자의 역할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