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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본 천국 환상과 계시
고린도후서 12:1-10/ 1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6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7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우리나라 기독교에서 천국에 갔다 왔다는 열풍은 영국 출신인 펄시 콜레(Percy Collett)라는 사람이 쓴 ‘내가 본 천국’(홍의봉 역, 1986년)과 ‘100가지 천국의 비밀’(이장림 역, 1988년)이란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출판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간증집회(1988년)를 하면서입니다. 펄시 콜레는 그 책에서 자신은 5일 반 동안 천국 여행을 하며 100가지의 계시를 받고 6일 만에 세상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는 6일 일하고 7일째 안식하시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와 같이 일정을 잡은데 따른 것인데, 천상에서도 지상의 시간에 맞추어 7일째는 모두가 쉬며 오직 하나님께 찬양과 예배만을 올리는 까닭이라고 합니다.
펄시 콜레가 천국에 갔다 왔다는 소위 천국 경험은 그가 처음은 아닙니다. 스웨덴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라는 사람이 ‘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선물: 천재 과학자의 감동적인 천국 체험기’에서 1745년부터 27년간을 육체이탈(입신)로 천국을 드나들며 천국 체험을 하였다는 것을 쓴 것이 2009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천국은 믿음만으로는 갈 수 없다고 하였으며, 영계에도 태양이 있고, 천국에서 부부 생활을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펄시 콜레의 ‘내가 본 천국’에서 받은 ‘100가지의 천국의 비밀’에서는 천국까지 가는 데는 6시간 걸려 왕복 12시간이 걸리며, 예수님이 큰 맨션에서 살고 계시며, 수많은 천사들이 평상복과 예복을 손바느질 하고 있으며, 천국시민들은 각종 과일을 따서 주스와 포도주를 만드느라 분주하며, 아담 이전에도 인간 창조가 있었으며, 가장 큰 죄는 섹스(sex)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펄시 콜레의 ‘내가 본 천국’은 이후 이경수, 이장수, 박영문, 박현, 성경애, 이경순, 임바울, 구순연 등에 의한 ‘천국 간증자’들이 계속해서 등장했으며, 천국(과 지옥)을 보았다는 책 또한 ‘정말 지옥은 있습니다’(메리 백스터), ‘정말 천국은 있습니다’(메리 백스터), ‘지옥에 다녀온 사람들’(모리스 S. 롤링스), ‘하늘나라 기행문’(리차드 에비), '내가 본 지옥과 천국‘(신성종)으로 계속해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모교단에서는 ‘천국과 지옥을 갔다 왔다’는 목사의 경험기가 교단신문에 버젓하게 연재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러한 비성경적이고 비신학적인, 참으로 비신앙적인 것에 관심을 갖지 않기에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그리 잘 알지를 못합니다만, 우리네 주위 교회에서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만 계속해서 ‘천국을 보았다’며, ‘지옥을 보았다’는 얘기가 무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천국과 지옥을 보았다는, 천국과 지옥을 갔다 왔다는 말과 그 간증은 참으로 허구적입니다.
첫째, 우선 천국과 지옥을 가 보았다는 사람의 주장은 육체를 이탈한 영이 천국과 지옥에 들어갔다는 ‘입신’을 말합니다만, 이러한 일은 성경에서 말씀해 주고 있지도 않거니와 이러한 일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왜 이러한 입신에 의한 천국과 지옥을 갔다 왔다는 말을 하는가 하면, 천국을 오해하여 왜곡하고 있는 까닭이며 더욱이 그 왜곡한 성경을 근거로 자의적으로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하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읽은 고린도후서 12:1-10에서는 사도 바울이 본 환상과 계시가 나옵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주께로부터 받은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 그래서 주께서 보여주신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 말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고린도후서를 쓰기 전인 14년 전에 주께로부터 환상과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셋째 하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셋째 하늘’은 숫자에 있어서 첫째, 둘째, 그리고 ‘셋째 하늘’이란 말이기도 하지만 ‘세 번째(로) 하늘’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는 하늘에는 첫째 하늘, 둘째 하늘, 셋째 하늘이 있는데 그 중에 셋째 하늘을 보았다는 것이기도 하고, 숫자에 있어서 세 번째로 하늘을 보았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먼저 ‘셋째 하늘’은 하늘에는 첫째 하늘, 둘째 하늘, 셋째 하늘이 있다고 보는 이해를 갖는데 따른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셋째 하늘’이란 견해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하늘은 모두 삼층천으로 되어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하늘은 운층천(雲層天)입니다. 운층천은 구름 아래 있는 하늘을 뜻합니다. 궁창, 창공으로 말해지기도 하며 우리가 보통 말하는 하늘입니다. 둘째 하늘은 성층천(星層天)입니다. 성층천은 구름 위의 하늘로서 별이 있는 하늘을 뜻합니다. 해와 달과 함께 별이 있는 하늘의 세계입니다. 셋째 하늘은 삼층천(三層天)입니다. 삼층천은 구름이 있는 하늘보다 높고, 해와 달 그리고 별이 있는 하늘보다 높은, 이 모든 하늘보다도 더 높은 하늘의 세계이니 하늘의 하나님이 계신 높은 곳이란 것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하늘은 참으로 ‘아주 높은 하늘’이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늘의 세계가 아닌, 또한 사람이 천체망원경을 동원해서도 볼 수 없는 하늘의 세계요 우주선을 쏘아 올려도 사람으로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오직 하늘의 하나님이 계신 하늘을 바울이 삼층천(셋째 하늘)이란 말로 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을 삼층천으로 보는 것은 유대인이 갖고 있는 하늘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유대인은 하늘을 삼층으로, 또는 일곱층으로, 심지어는 열 가지 층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셋째 하늘’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을 통해서 주께서 자신에게 주신 환상과 계시는 구름 아래의 하늘에 속한 세계에 관한 것이 아니며 또한 구름 위의 하늘의 세계에 대한 것도 아니며 오직 주께서 보여주시므로 본 것이며 오직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하시므로 들은 사람이 눈으로 보고할 수 있는 그런 하늘의 세계가 아닌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오직 영으로만 바라봄에 있는 참으로 높은 하늘의 하나님이 계신 세계를 뜻하고자 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셋째 하늘’은 ‘세 번째로 하늘’에 이끌려 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주께서 주신 하늘에 관한 환상과 계시에 있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그런 일이 있었듯이 이번에 세 번째도 하늘에 관한 환상을 봄에 있었고 그 하늘에 관한 계시를 받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셋째 하늘’은 구름 아래의 하늘인 첫째 하늘과 그보다 높은 구름 위의 하늘인 둘째 하늘과 그보다 더욱더 높은 하나님이 계신 하늘을 뜻하는 것에서 셋째 하늘이 있는데 그 중에 셋째 하늘을 보았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숫자에 있어서 ‘세 번째로 하늘을 보았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현대어성경은 ‘셋째 하늘’이란 말을 하지 않고 그냥 ‘하늘로’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바울은 14년 전에 자신이 하늘로 이끌려 간 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이끌려 갔다는 것이 자신이 몸 안에 있었는지, 아니면 자신이 몸 밖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으므로 여기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셋째 하늘(낙원)로 이끌려 갔고 거기서 사람의 능력으로나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사실을 보고 들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늘’의 ‘셋째’를 어떤 것으로 이해하든지 간에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에게 있은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이탈에 의한 영(영혼)의 천국 경험을 이야기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받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한 계시를 받은 것은 환상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영이 육체 이탈해서 영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주를 뵈며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구요. 또한 선지자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계시를 받는 환상에 있은 것이, 그래서 그가 하나님 앞에 있은 것이 육체이탈에 의한 영의 천국 경험인지요. 아닙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하늘(하나님의 나라)로 끌려 올려져서 본 경험이 아니라, 그에게 환상이 임하므로 본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며, 그때 받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서도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이 몸 안에 있었는지 아니면 몸 밖에 있었는지를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함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본 것이 자신이 몸 안에 있는, 즉 몸을 입고서 사는 것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계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말이죠. 영이 육체로부터 이탈해서 하늘 세계에 들어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았는지, 아니면 죽었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는 것처럼 주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신 환상에 의한 계시가 자신이 몸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 본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이런 말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게 참으로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바울은 말이죠. 육체이탈한 영이 천국에 들어가서 그 천국을 본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내가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살아서 본 것인지, 아니면 내가 죽어서 본 것인지 모르겠다.” 라고 말하는 것에서 주께서 보여주신 환상에 의한 천국 계시를 받는 자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천국과 지옥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있는 우리의 부활이 있게 됨으로 인해서 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연합한 우리의 부활이 있어 그분과 함께 주의 나라에 들어가 주님을 영원히 섬김에 있는 생명에 있을 것이며, 또한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한 자들이 지옥에 들어가 저주의 해를 영원히 당하는 벌을 받을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한 우리의 부활이 있기 전에 이 땅에 살아 있는 자들이 천국과 지옥에 갔다 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거짓이며, 이 허황되고 허구적인 거짓을 말하기 위해서 영이 육체를 이탈하여 천국과 지옥에 들어가 보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환상이 주어진 것에 의해서 천국을 보게 된 일이 있는 것과 직접 천국에 들어가서 보게 되는 것을 분간하지 못한 데 따른 왜곡입니다.
셋째, 전통적으로 죽은 자에 대한 오해와 천국에 대한 오해를 따르는 까닭입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자신들이 죽으면 육체는 썩어 소멸하지만, 육체가 죽을 때 영혼이 육체로부터 빠져나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일시적으로 있는 낙원에 들어가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 영혼이 함께 세상에 내려와 부활한 몸과 다시 연합하여 하나가 되어서 영원한 천국에 주와 함께 들어간다는 비성경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죽은 자는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빠져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는 죽음이라는 것을 통해서 죽음(이라는 옥)에 갇혀 있는 자의 상태에 있는 것이죠. 이때에 우리 몸은 썩을 몸이 썩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썩어 없어집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천으로 만든 장막이 낡고 헐어서 무너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몸은 그러한 과정이라는 것에 의해서 죽음에 있습니다. 이 죽음에서 그 누구도 벗어날 자가 없기에 죽음에 갇혀 있는 것으로 말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을 우리 몸은 말이죠. 불원간에 불가불 다시는 죽지 않을 몸으로, 즉 썩음이 없는 영원히 썩지 않을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은 우리 몸이 반드시 죽음을 당할 것이며, 그렇게 해서 죽음에 갇혀 있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죽음은 우리 몸을 영원히 갇혀 놓을 수 없다는 것 - 죽음이 우리 몸을 영원히 사로잡을 수 없다는 것 - 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우리 몸이 영원히 죽음에 갇혀 있을 수 없도록, 그렇게 죽은 자로 있을 수 없도록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다시는 정죄 받지 않고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롬 8:1), 지금은 죽음을 앞에 둔 인간이지만 다시 살아난 뒤에는 영적인 몸이 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5:44). 이 구원의 능력과 부활의 능력이 우리를 죄에 대해서는 날마다 죽은 자가 되게 하며 또한 하나님의 생명에 대해서는 날마다 산 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에 죄는 우리를 그 책임을 물을 수 없으며 죽음의 처소인 지옥으로 끌고 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피로 입힌 의로 우리를 생명의 처소인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때까지 사람인 우리 몸이란 것은 살과 피로 이루어진 땅 위의 몸으로 있는 것이기에 이 몸에 있는 한에는 이 몸에 있는 것으로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썩어질 몸으로는 영원히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까지 죽음에 갇혀 있는 몸으로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 죽지 않고 새로운 몸을 얻을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홀연히, 참으로 눈 깜짝할 순식간에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서 나팔 소리가 들릴 때 죽었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순식간에 결코 다시는 죽지 않는, 그래서 죽음이 없는 새로운 몸을 가지고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이는 말이죠. 그 날이 오기까지 아직 살아 있는 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또한 부활한 자와 같이 한순간에 죽음이 없는 새로운 몸을 지니는 변화를 입을 것입니다. 주께서 이와 같이 하시는 것은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죽을 수밖에 없는 땅 위의 몸은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사는 하늘의 몸으로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고전 15:50-53). 바울은 로마서 8:11에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시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계시는 이 성령에 의해서 우리가 죽은 후에도 우리의 썩을 몸을 다시 살리실 것임을 말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2:1-10에서 바울은 주께서 주신 천국(낙원/셋째 하늘)환상을 보고 그 세계의 계시를 받았습니다만, 이것을 통해서 그는 자신이 천국을 보았다거나 또는 천국을 갔다 왔다고 하거나 하며 그 간증을 하는 것을 통해서 그러한 경험을 한 자라는 자신을 내세우는 자랑에 있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주께서 주신 천국 환상과 그 계시를 받았습니다만 그러함에 있은 자신에 대해서는 일체의 어떤 이야기나 자랑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서 그가 겪은 것은 비록 자신에게는 큰 자랑거리입니다만 바울이 이를 통해서 자랑하고자 한 것은 다만 자신이 약한 존재라는 것과 그러한 그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불러 주시는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우러러 경배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가 전하는 주이신 그리스도는 강합니다. 바울은 약한 점이 많은 자입니다. 그의 몸에는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지니고 있으며,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에서 그가 얼마나 약한 자인지가 여실히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러한 바울은 자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인하여 기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이 약하여져가며 무력해질수록 그만큼 더욱더 그리스도를 의지함에 있으면서 그리스도만 자랑함에 있게 되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가시도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그러한 것이 바울의 기쁨이어서가 아닙니다. 그 모두는 바울에게 고통을 주고 그의 몸을 병약하게 만듭니다만 그것을 겪는 것에서 바울이 참으로 기뻐하는 것은 주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바울의 주이신 그리스도는 생명의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자랑은 언제나 주이신 그리스도에게 있으며 그분을 통하여 생명의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함에 있었지 자신의 힘이나 능력을 자랑하는 것에 있지 않았으며 무슨 체험이나 그 이야기거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는 고린도교회에 권면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장래의 승리는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니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온 세상의 주님이 되심을 전하는 일에 항상 힘쓰십시오. 우리의 부활은 분명히 이루어지며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