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질성을 초대하는 글쓰기
제가 사는 곳은 북한산 인수봉이 보이는 서울 수유리입니다. 자연경관지구라는 이름으로 그린벨트보다 더 강하게 개발이 금지된 곳이라 시골 같습니다. 집도 아트막하고 건폐율 때문에 옹색하나마 마당이 있습니다. 가끔 정부에서 낮은 이자로 집수리나 주변 환경 개선을 위한 은행 대출을 해줍니다. 우리 집도 몇 년 전에 낡고 기울어 쓰러질 듯한 담장을 허물고 거기에 주차장을 만들고 마당을 꽃밭정원으로 가꾸었습니다. 정원 가운데 출입로에 잔디를 심었는데, 잡초 하나 없는 잔디밭의 푸르름을 보노라면 마음이 청량해집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꽃밭에서 자라던 화초들이 야금야금 마당을 넘어왔습니다. 장맛비가 며칠 내려면 두어 걸음씩 자신들의 영토를 넓혔습니다. 날 맑은 주말이면 호미로 ‘김매기기’를 했지만,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잔디를 삼켜버렸습니다.
뒤섞임을 받아들이면
땅을 덮으며 기어가는 식물은 번지는 속도가 빠릅니다. 담장 밑 그늘진 곳을 근거지로 삼은 조개나물(아주가)이 한 무더기 보랏빛 꽃을 피우며 자신들의 소유권을 주장합니다. 단물이 많아 벌이 사라진 요즘에도 열댓 마리의 땡벌(땅벌)이 욍욍거리며 꿀을 채집합니다. 미나리아재비는 여기저기 노란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 드러누워 떼쓰는 아이처럼 질경이는 땅에서 도무지 떨어지려 하지 않더군요.
마음을 바꿨습니다. ‘잔디에 대한 로망을 버리자, 이것이 더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저처럼 질서에 목매는 사람 눈에는 여러 식물이 뒤섞여 자라는 것이 마당을 무질서하게 헝클어뜨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뒤엉킴’이 자연의 본모습입니다. 이질적인 것의 공존. 다양한 존재들이 상화작용하면서 각자의 세계를 만들어가기, 그걸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애나 칭이 쓴 《세계 끝의 버섯》이란 책을 보면, 1945년 히로시마가 원자폭탄으로 파괴됐을 때 그 속에서 처음 등장한 생물이 송이버섯이라고 합니다. 근대 자본주의 과학문명의 최대 성취로 보였던 원자폭탄이 이 세계를 폐허로 만들었지만, 이러한 인간의 패악질 속에서도 송이버섯 곰팡이와 소나무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나간다는 것이죠. 잎에서 광합성을 하여 달콤한 탄수화물을 뿌리에 붙은 송이버섯 곰팡이에 나눠주고, 곰팡이는 균사체를 뻗어 물과 양분을 흡수해 소나무 뿌리에 전해줍니다.
이 책에선 생물의 기본단위를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단일종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른 생물종과 관계를 맺고 서로가 서로에게 ‘오염’되면서 공생한답니다. 인간도 단일종이 아니라고 봅니다. 인간의 디엔에이DNA 중에서 인간에게만 있는 물질은 극히 적고 대부분은 다른 동식물이나 곤충, 미생물을 이루는 물질과 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간의 몸 안에는 1조 개 이상의 미생물이 있고 이게 없으면 음식물을 소화하지도 못하고 면역체계가 망가져 금방 죽고 말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엄마의 자궁이나 질에서 젖산균 박테리아라는 미생물을 얻게 되는데, 이게 없으면 장내 미생물의 균형이 망가져 젖을 소화할 수도 없고, 아토피나 알레르기에 쉽게 시달린다고 합니다.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모여 살면서도 말로만 ‘인간’이라고 할 뿐입니다.
글쓰기와 상관없는 얘기를 왜 이렇게 길게 하냐면, 글쓰기도 이래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이렇게 이질적인 종이 만나고 뒤엉키고 부딪치면서 공동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왜 글쓰기만은 ‘잘 정리된 하나의 생각’을 담으라고 할까요. 안 그래도 되지 않을까요?
무용한 말들 틈에서
집에 손님이 오기로 하면 방 청소를 깨끗이 합니다. 그런다고 그 사람을 위선자라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청소하지 않고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 더 성의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진실은 ‘평소의 방’이 더 잘 담고 있을 겁니다. ‘일관된 질서’라고는 찾을 수 없는, 여기저기 먼지가 쌓여 있고, 각기 다른 이유로 놓여 있는 물건의 배치가 방주인이 살아가는 삶의 진실(!)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될 것임은 분명합니다.
글에도 다양한 높낮이, 돌출과 땅꺼짐, 거기서 생기는 굴곡이 있습니다. 일직선의 반듯함보다는 구불구불 정리되지 않고 혼란스러운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글이 마음에 들 때가 있습니다. 제가 정서불안이라 그런지 모르지만, 에를 들어 조르주 페렉의 산문 《생각하기/분류하기》에 나오는 이런 대목을 만나면 동지를 만난 듯 반갑습니다.
‘내가 생각할 때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생각하지 않을 때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순간에조차 내가 생각할 때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생각할 때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를 들어 ‘생각하기/분류하기’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생각하기/분유주기’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생각하기/분유주기’나 ‘불륜을 저지른 생각’ 혹은 ‘각하의 유아기’가 떠오른다. 이것을 ‘생각하다’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떻게 읽히던가요? 사실 제가 이 글을 옮기면서 뒷부분을 조금 바꾸었습니다. 프랑스 원문과 다르게 ‘한국어에 어떤 말 있지?’ 하며 한국어 발음에 따라 ‘분류하기’를 ‘분유주기’로, ‘분류’를 ‘불륜’으로, ‘생각’을 ‘생강’으로, ‘생각하기’에서 ‘생’과 ‘기’를 지우고 ‘각하’를, ‘분류하기’에서 ‘분’을 지워 ‘유아기’로 바꾸면서 혼자 낄낄거렸습니다. 우리 머릿속은 이렇게 즉흥적이고 불쑥 혼자 낄낄거렸습니다. 우리 머릿속은 이렇게 즉흥적이고 불쑥 떠오른 것, 방향을 읽은 말과 생각들이 표류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다음의 글은 어떤가요? ‘생각은 인간 정신 활동의 핵심으로, 정보를 처리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결정을 내리는 인지적 과정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다양한 방식으로 작용해 기억과 학습에 기여한다. 생각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지속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며, 인간의 지적 활동을 이끄는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지만, 재미도 없군요.
우리 글에는 무질서와 과잉의 요소가 항상 포함돼 있습니다. 쓸데없는 말, 삼천포로 빠진 말, 과잉된 말, 주제와 동떨어진 말들, 그런데 그런 요소를 보란 듯이 포함시킨 ‘명작’이 꽤 있습니다.
방향을 잃을 때 넓어질 수 있다
소설 《레 미제라블》을 보면 장 발장이 하수도로 들어가려는 순간 ‘이걸 참고 읽어야 할까’ 의문이 들 정도로 프랑스 파리의 하수도에 대한 역사와 통계적 설명을 수십 쪽에 걸쳐 늘어놓고 있습니다. 소설 《돈키호테》를 읽다 보면, 돈키호테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야기가 생뚱맞게 들어가 있습니다(33~34장) ‘당치 않은 호기심을 가진 자에 대한 이야기’란 제목인데, 피렌체의 귀족이 장난삼아 정숙한 아내의 정절을 시험하기 위해 절친한 친구를 꼬드겨서 아내는 유혹하라고 부탁했다가 결국 세 사람 모두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내용입니다. 왜 이 이야기가 이 자리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폴 스카롱의 《희극적 소설》은 유랑극단의 모험과 그 안의 다양한 인물들이 겪는 기상천외한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런데 이 소설 속에도 등장인물들의 이야기와 전혀 관계없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라는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마치 작품이 두서없이 잡다하게 짜여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지워야 할 것을 일부러 남겨두기’ ‘잘 흘러가던 글에 이루러 방향을 잃게 하기’ ‘통일성이나 균형감을 일부러 흐트러뜨려 멈추게 하기’같습니다.
흔히 좋은 글이란 쓸데없는 이야기의 침략을 물리치고 하나의 주제, 하나의 생각,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라 말해집니다. 하나의 줄기만 남기고 나머지 잔가지를 다 잘라내라는 것이죠(저도 그런 얘기를 해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전의 글에서 ‘글의 구성’을 어떻게 짜임새 있게 할지에 대해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구성에 집착하지 말라는 이율배반적인 얘기를 하고 있네요. 그런 어쩌란 말인가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구성에 집착하지 말라는 이율배반적인 얘기를 하고 있네요. 그럼 어쩌란 말인가요.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저 관계없다고 생각되는 걸 연결해 글의 공간을 넓히고 생각을 다중화하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실제로 모든 글에는 미세한 층위 변경이나 모호한 분열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일탈이나 위반이 아니라, 글의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때로는 실패하고 부적절해 보이겠지만, 그것이 글쓰기를 곁에 두고 계속 추구해야 할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이 책을 꼼꼼히 읽은 독자는 느낄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과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군!’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쓴 글과 정반대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제 이야기의 넓이가 훨씬 넓어졌습니다. ‘구성을 하되 구성을 하지 말라. 생각을 하되 생각을 하지 말라. 맞춤한 단어와 문장을 적재적소에 쓰되, 그 단어와 문장을 쓰지 말라.’
공생하는 자세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불확정성indeterminacy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글쓰기도 불확정성과 예측 불허를 기꺼이 초대하는 게 아닐까요. 우리는 단일한 생각, 하나의 주제 통일성 있는 구성을 찾기 위해, 다시 말해 하나의 질서를 남기기 위해 애씁니다. 그게 신화가 아닐까요?
좋은 글을 이질적인 이야기들이 협력하고 공생하는 글이 아닐지, 그러니 일관성을 찾으려고 너무 애쓰지 맙시다. 내 속의 이질성을 환영하기. 글 속에 이질성을 기꺼이 초대하기, 마당에 번져나가는 풀꽃들을 보면서 든 생각입니다.
―김진해, 『쓰는 몸으로 살기』, 한겨레출판,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