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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忘女(8)
- 著者 여강 최재효
다음날 아침을 들고 난 뒤 금봉이는 아버지 어머니가 마실 나간 틈을 타 집을
나와 산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며칠 전 내린 눈으로 천지는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들판, 개울, 민가, 저 멀리 보이는 이등령도 온통 하얗다 못다 푸른빛이
돌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이 논에서 썰매를 타기도 하고 높은 언덕에 올라
소나무 가지를 잘라서 두세 명이 앉아 미끄럼을 타는 모습도 보였다.
산길 중간 중간 물이 고여 있던 곳은 얼어 빙판이 되어 있었고 그 위에 눈이
살짝 뿌려져 있어 잘못 밟으면 빙판에 넘어질 것 같았다. 멀리 이등령이 있는
시랑산 정상에 하얀 눈이 덮여 있었는데 구름이 휘감아 천천히 하늘로 올라
가는 모습은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방불케 했다. 금봉이는 무거운 몸으로
천천히 산길을 걸었다. 두 식경 쯤 걸으니 성황당이 나타났다.
“서낭신님, 자주 찾아뵙지 못했어요. 그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우리
박달님은 잘 계시는 지요? 서낭신님, 이 소녀 뱃속에 서방님의 씨앗이 자라고
있어요. 서낭신님이 점지해 주신 거죠?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는데 우리
박달서방에게서 소식이 없어 답답해 죽겠어요. 하루 빨리 박달 서방님이
평동 벌말로 돌아와 소녀와 함께 서낭신님 앞에 서서 기도를 올릴 수 있도록 해주
셔요. 장원급제를 못하셨더라도 몸만이라도 오셔서 소녀와 서낭신님 앞에 다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 소녀의 소원은 단지 박달 서방님 뵙는 것이랍니다.
흑흐흐흐 -.”
금봉이는 박달이 생각에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금봉이 울음을 그치고 서낭당을 지나 다시 산길을 걸었다. 종종 바람이 불면
간신히 매달려 있던 나뭇잎이 허공을 향해 날아오르며 펄럭거렸다. 날씨가
며칠간 따뜻하더니 길 곳곳에 눈이 녹아 물이 고인 곳도 있어 금봉이 신고 있던
미투리가 금방 젖어 버렸다. 금봉이는 혹시라도 박달이 이등령을 넘어 벌말로
달려오고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면서 앞을 똑바로 바라보며 걸었다.
‘아아, 벌써 박달서방님이 떠나가신지 넉 달이 넘어 다섯 달째 접어들고 있건만
어째서 소식이 없으신 것일까? 무슨 사단이 난 게 분명한 것 같은데. 과거에 입격
하지 못하셨다 하더라도 그냥 오셨으면 좋을 텐데......’
금봉이 정신없이 이런 저런 생각에 골몰하며 걷고 있을 때 멀리서 갓을 쓰고 지팡
이를 든 선비가 걸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앗, 바, 박달 서방님이시다.”
금봉이는 옷매무새를 고치고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서방님 -.”
“박달 서방니임 -.”
“서방님, 어서 오셔요. 저 금봉이에요.”
“서방님, 빨리 오세요.”
‘아아, 천지신명님이시여. 정말로, 정말로 고맙습니다. 소녀의 청을 들어 주셨
군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서방님, 어서, 어서 뛰어오세요.”
그러나 점점 가까워지는 사람은 박달이 아닌 선비차림의 늙은 남자였다.
“처자, 나를 불렀소?”
“아아,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박달서방님이 분명했는데......”
“원, 별 이상한 처녀를 다보겠네. 빨리 오라고 손짓해서 달려 왔건만, 늙은이를
놀리다니. 배고파 죽겠구먼.”
늙은 선비는 길을 가다 뒤돌아보면서 금봉이에게 눈알을 부라렸다.
“으흐흐흐 흐흐흐......”
늙은 선비가 지나가자 맥이 빠진 금봉이는 길 옆 바위에 걸터 앉아 흐느꼈다.
“서방님, 언제 오시려는지요? 소녀, 서방님 기다리다 지쳐 죽겠습니다. 어서
오시어요. 으흐흐 흐흐흐......”
금봉이는 힘을 내어 무거운 배를 두 손으로 감싸 안고 천천히 이등령을 향해 걸
었다. 하늘 높이 솔개가 제 자리에 떠서 지상의 먹이를 발견하고 날갯짓만 하고
있었다. 이윽고 솔개가 먹이를 향해 쏜살같이 수직으로 내려 꽂혔다.
“개똥어엄, 소문 들었어?”
“뭔 소문?”
“어이구, 이 멍청한 여편네는 귀뒀다 뭐혀?”
“이 여편네야, 뭔 소리여 시방?”
“금봉이가 애를 가졌다고 하는구먼.”
“뭐여? 그, 금봉이가? 아니,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어떻게 아기를 배?”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여. 지금 동네 어르신들이나 청년들은 누가 금봉이
에게 씨를 뿌렸는지 알아 보기위하여 수소문 중이라고 한다네.”
“어이쿠, 이거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아니 자다가 봉창을 뜯어도 유분수지
어떻게 처녀가 애를 밴단 말이여?”
“이 여편네야, 그러게 내가 하는 말 아니여?”
“세상 말세로세. 아니 어떻게 서방도 없는 처녀가 애를 다 밴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 갑돌이나 수돌이 아니면 동네 총각들이 슬며시
금봉이에게 씨를 뿌렸겠지.”
“호호호 호호호호호호호......”
“지금 쯤 그 씨 임자는 안절부절 못하겠네. 곧 들통 나고 말거 아녀?”
“그렇지. 호호 호호호호호호호......”
“씨앗 임자가 밝혀지면 금봉이네는 어쩔 수 없이 그 임자한테 시집을 보내야
하겠구먼. 금봉이 아버지 그렇게 우쭐대며 사윗감을 고르고 다니더니 망신살
뻗히게 되었구먼. 호호 호호호......”
벌말의 마을 한가운데 있는 우물가 빨래터에 모인 동네 아낙들은 쑤군대며 금봉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금봉이 어머니가 빨랫감을 가지고 빨래터로 걸어
오고 있었다.
“이보게들, 쉿, 저기 금봉 엄마가 오고 있어. 모두 입 다물어.”
“어이쿠, 시집도 안 간 딸이 애를 뱉는 데도 뻔뻔스럽게 빨래터를 다 오네.”
금봉이 어머니가 빨래터에 자리를 잡고 앉자 동네 아낙들은 금봉이 어머니를 마치
이방인 보듯 하였다.
‘아니, 이 여편네들이 사람을 본체 만체하네. 이 여편네들이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혹시 금봉이 아이를 가진 것을 알고 그러나? 그럴리가 없을 텐데. 금봉이가
임신한 사실은 박씨 밖에 모르는데......’
“개똥어멈, 집에 무슨 일 있어?”
금봉이 어머니가 시큰둥한 얼굴로 개똥어멈에게 말을 걸었지만 개똥어멈은 대꾸가
없었다. 부아가 난 금봉이 어머니가 다시 물었지만 개똥어멈은 그거 한번 멀뚱히
쳐다보고 말 뿐이었다.
‘어라? 이것들이 사람을 무시해?’
“개똥어멈, 내 말 안 들려?”
“성님, 저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싶지 않구먼유.”
“왜? 내가 오기 전에 말도 잘하고 깔깔거리며 웃더니 내가 오니까 입을 꽉 다물고
있는 이유가 뭐여? 우리 금봉이 가지고 입방아 찐거 아니여?”
“아니구, 성님두. 우리가 왜 쓸데없이 금봉이 이야기를 해유?”
“만약 우리 금봉이를 가지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년 있으면 내가 입을 찢어 놓을
거여. 알아서들 혀.”
“성님, 우리 개똥이가 어젯밤 오줌을 싸서 아침에 옆집에 소금을 얻으러 보낸
이야기 했어유.”
“맞어유. 호호호호호......"
'호호호호호호......"
금봉이 일로 금봉이 어머니는 동네 아낙들에게 고립돼 가고 있었다. 빨래를 대충
하여 집으로 돌아 온 금봉이 어머니는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리며 금봉이 방문을
열어 보았지만 금봉이 방에 없었다.
“아니, 이 애가 어딜 간 거여? 혹시, 또 이등령에 간거 아녀? 먼저 번에도 눈 구
덩이에 넘어져 갑돌이가 업고 왔는데. 즈네 아버지도 없은데 이일은 어찌한다?”
금봉이 어머니는 얼른 갑돌이네 집으로 가서 갑돌이를 찾았다. 마침 갑돌이는
행랑채에서 수돌이와 새끼를 꼬고 있었다.
“네에? 금봉이가 집에 없다고요?”
‘홀몸도 아닌데. 그렇다면 분명히 이등령을 간 건데......’
“금봉어머니, 제가 금봉이가 갈 만한 곳을 찾아볼게요.”
평소에 자신을 사위처럼 대해준 금봉이 어머니였다. 갑돌이 새끼를 꼬다 말고 방
에서 나가자 수돌이도 따라 나섰다.
“수돌아, 넌 여기 있어라. 내가 금봉이 갈만한 데를 알고 있으니까 얼른 다녀올게.”
‘아니, 이 녀석이 먼저도 그러더니 또 나를 떼어 놓고 저 혼자 가려고 하네.
아, 정말이지 미치겠네. 제 녀석이 마치 금봉이 남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네.’
“아, 알았다. 얼른 다녀와라. 나 혼자 새끼 고고 있을 테니.”
“수돌아, 고맙다.”
“......”
“금봉이 어머니, 집에 돌아가 계세요. 제가 얼른 다녀올게요.”
“갑돌아, 그 애가 분명 이등령에 갔을 거야. 이 추운 날 또 거길 가면 어떻해 그래?”
“너무 염려마세요. 제가 얼른 다녀올게요.”
“그래, 그래. 고맙다. 갑돌아.“
갑돌이는 즉시 이등령을 향해 달렸다.
‘아아, 금봉아, 안 돼. 너 혼자 홀몸도 아닌데 그 곳이 어디라고 이 엄동설한에
눈보라를 뚫고 간 건니. 어서 돌아와.’
갑돌이는 곁에 금봉이가 있는 것처럼 중얼거리며 달렸다. 금방 이마에 땀이 방울
방울 맺히면서 얼굴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금봉아, 네가 비록 박달 도령의 씨앗을 잉태하여도 난 좋아. 네가 에게 온 다면
그까짓 아이 하나 가진 것쯤은 이해할 수 있어. 그러니 이제라도 마음 돌리고 나한테
와아. 금봉아.’
갑돌이 뛰면서도 혼잣말로 금봉이에게 염원(念願)을 전하고 있었다.
子曰(자왈), 爲善者(위선자) 天報之以福(천보지이복)。爲不善者(위불선자)
天報之以禍(천보지이화).
공자가라사대. 선(善)을 행하는 사람은 하늘이 복(福)으로 갚고, 불선(不善)을
행하는 사람은 하늘이 화(禍)로서 갚느니라.
一日行善(일일행선) 福雖未至(복수미지) 禍自遠矣(화자원의).一日
行惡(일일행의) 禍雖未至(화수미지) 福自遠矣(복자원의).行善之人
(행선지인) 如春園之草(여춘원지초) 不見其長(불견기장) 日有所增
(일유소증). 行惡之人(행악지인) 如磨刀之石(여마도지석) 不見其損
(불견기손) 日有所虧(일유소휴)
하루 선(善)을 행해도 복(福)은 비록 아직 당장 이르지는 아니하나 화(禍)는
저절로 멀어지고, 하루 악을 행해도 화(禍)는 비록 아직 당장 이르지는 아니하나
복(福)은 저절로 멀어지느니라. 선을 행하는 사람은 봄 동산의 풀과 같아서
그 풀이 자라는 것을 보지는 못해도 날마다 조금씩 늘어나는 바가 있으며,
악을 행하는 사람은 칼을 가는 돌과 같아서 그것이 닳아 없어짐을 보지는 못해도
날마다 조금씩 이지러지는 바가 있느니라.
“서방님, 이 식혜 좀 드시면서 공부하세요. 그리고 너무 방에만 게시지마시고
가끔 바람도 좀 쐬시고 공부하세요.”
아지는 소반에 시원한 식혜를 한 그릇 받쳐 들고 박달이 방을 찾았다. 마침 점심
시간이 지나서 주막에 손님이 뜸했다.
“미안하오. 나 때문에 신경을 너무 쓰는구려.”
“서방님, 그럼 말씀하지 마세요. 지난일은 다 잊으시고 무조건 과거에 입격만
하시면 됩니다. 저는 이번 봄에 있을 별시에 서방님께서 꼭 입격하실 것을 믿습니
다. 그러니 아무 생각하지마시고 오로지 입격하시는 꿈만 꾸세요.”
“고맙소.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지끈거려 바람 좀 쐬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박달은 식혜 한 그릇을 단숨에 비우고 미투리를 신었다.
‘그렇지, 금봉이 아버지가 만들어 준 미투리지. 고마운 어른이신데 은혜를 갚지도
못하고 이리 한양의 마포 나루 주막에서 세월을 보내야 하다니......’
박달을 신을 신으며 벌말에서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금봉이를 생각하
였다. 아지에게 잠시 강가를 다녀오겠다고 하고 주막을 나섰다.
‘아아, 어찌하나? 잠시 벌말에 다녀올까? 나를 얼마나 원망하고 있을까? 어르
신도 나를 나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 아아, 나는 왜 가는 곳 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걸까?’
박달은 한강이 있는 나루터를 향해 걸었다. 한양에 온 지 서너 달이 되도록
한 번도 한강을 구경한 적이 없었다. 거리에는 응달을 제외하고는 눈이 거의 다
녹아 있었지만 찬바람은 불지 않았다. 날씨가 풀려서인지 거리는 장작과 옹기를
잔뜩 실을 우마차와 장사치들 그리고 한양의 백성들이 많이 지나다녔다.
조금 아래로 내려가니 마포나루가 나타났다. 한강이 얼어 얼음 위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강을 건너고 있었다. 웬만큼 추워도 얼지 않은 한강이었다. 얼마나
한강이 단단히 얼었는지 달구지도 강위로 다니고 있었다. 마포 나루 좌우로
초가집과 기와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양지 바른 집 앞 마당에 아이들이
나와서 제기차기 놀이와 자치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강 건너 길게 이어진 모래
사장이 양화진까지 끝없이 이어져 아득하게 보였다.
그때 박달이 머리 위로 한 떼의 기러기들이 남녘을 향해 날고 있었다. 끼룩 끼룩
거리며 나는 기러기가 박달은 부러웠다. 점심때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서 그런지 사방이 어둑해 진 것 같았다. 날씨는 아침보다
더욱 풀려 푸근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저 기러기처럼 날개를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금봉이가 보고
싶다. 아마도 지금 쯤 나와 헤어진 이등령을 넘나들며 하염없이 북녘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텐데. 기러기들아, 이 답답한 내 심정을 저 시랑산 아래 벌말에
있는 금봉이에게 전해다오. 이 박달이 한양에 금봉이가 보고 싶어 하루도
마음편한 날이 없다고. 그리고 이번 별시에 입격하면 곧 바로 벌말로 달려가겠
노라고 꼭, 꼭 점해다오.
흑 -, 금봉이, 미안하구려. 내 비록 마음에도 없는 여인의 뒷바라지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마음만은 늘 그대에게로 달려가고 있다오. 바보 같은 이 남자를
원망하여도 달게 받겠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오. 내 이번에는 꼭 입격하여 그대
에게 한 걸음에 달려가리다.“
박달은 기러기 떼를 보자 더욱 더 금봉이가 보고 싶었다. 꾸물거리던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진눈깨비는 다시 비로 변하였다.
‘이런 비가 오면 어떻게 하나? 우산도 없는데......’
박달은 서둘러 나루터 허술한 주막으로 들어갔다. 아지가 운영하는 주막에
비하면 규모는 보잘 것 없지만 비를 피하기 위하여 많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바람을
쐬겠다고 빈손으로 나왔지만 주머니를 뒤져 보니 다행히 엽전 몇 푼이 있었다.
“주모, 여기 탁주 한 사발만 주시오.”
“잠시 기다리슈. 주문이 밀려서 그러우.”
후덕해 보이는 중년의 여인이 박달을 흘낏 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금봉이를 보고
싶은 마음을 한잔 탁주로 달래보려고 박달은 잔을 들었다. 공부하느라고 오래
잊고 있었던 술이었다. 박달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금봉이
생각에 그만 울컥하고 서러움 치밀어 올랐다. 멍하니 겨울비가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겨울비 내리는 마포나루에서
한 잔술에 타향의 설움 잊으려하는데
나그네 눈가에 이슬만 맺히네
고개 들어 하늘 보면
잔주름 노모(老母)가 생각나고
고개 숙여 땅을 보면
이등령에서 눈물의 이별가 부르던
물항라 저고리 산처녀가 그립네
저 창공을 나는 새처럼 날개 없으니
내 오늘 밤 꿈속에서라도 이등령을 넘으리.
박달은 처량한 자신의 신세를 탓하면 즉석에서 시를 지어 부르며 흥얼거렸다.
험준한 이등령을 향해 걷다 금봉 이는 두 번 넘어졌지만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발바닥에 금방 물집이 생기고 다리에 상처가 났다. 이미 이등령 정상에
거의 다다른 금봉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향해 걸었다.
“아아, 서방님. 이등령 정상에 섰습니다. 바람은 차지만 서방님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이 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어서 오시어요. 서방님이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어요. 저 눈이 다 녹으면 오실건지요? 그때는 제가 서방님이 너무 보고
싶어 병이 났을 거에요. 오늘은 늦으셨으니 내일이라도 벌말로 오세요.”
금봉이는 고개에서 합장한 채 끝없이 펼쳐진 일망무제(一望霧堤)를 바라보았다.
금봉이 정상에서 서서 멍하니 북쪽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돌이도 고개에 도착하
였다. 이번에는 길가에 숨지 않고 금봉이 곁으로 다가갔다. 갑돌이를 발견한
금봉이 깜짝 놀랐다.
“갑돌아, 네가 여길 어떻게?”
“네가 걱정돼서 왔어.”
갑돌이 땀을 닦으며 겸연쩍게 웃었다.
“혹시 우리 엄마가 너를 보냈니?”
“응, 너희 어머니가 나에게 오셔서 네가 말없이 집을 나갔다고 하시면서 걱정하시
기에 내가 이등령을 다녀오겠다고 했어.”
“무엇하러왔어? 금방 내려갈 건데.”
“네가 먼젓번처럼 넘어지면 안 되잖아.”
“넘어지긴 애들도 아닌데......”
“금봉아, 너 그 박달도령 보고 싶어서 여기 온 거니?”
“......”
“이제, 그 사람 그만 잊으면 안 돼?”
“뭐라고? 우리 박달 서방님을 잊으라고? 말도 안 돼. 그건 말도 안 돼는 소리야.
갑돌이 너 그런 말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그, 금봉아 그게 아니고. 생각해봐 그 박달 도령이 과거에 합격하였다면 벌써
너를 찾아왔을 거 아니니? 그런데 아직도 꿩 구워 먹은 소식인데 언제까지 기다
리고 있을 거야?”
“갑돌아, 너 자꾸만 그 분 헐뜯는 소리하려면 먼저 내려가 난 더 있다가 갈 테니.”
‘계집애, 얼마나 깊이 그 남자에게 마음을 주었기에......’
“아, 알았어.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
두 사람 사이에 찬바람이 불었다. 갑돌이는 자신이 생각 했던 것 보다 그 이상
으로 금봉이 박달이에게 마음이 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아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로구나. 금봉이가 그 사내 어디가 좋아서 단 며칠
사이에 그 남자에게 저리도 폭 빠질 수 있단 말인가? 그 동안 난 무엇을 하였나?
참으로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로다.’
갑돌이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금봉이는 그런 갑돌이가 안 되
었다 싶었는지 갑돌이에게 미안한 감정을 전하고 싶었다.
“갑돌아, 나를 걱정해 여기까지 와줘서. 정말로 고마워. 너에게는 정말로 미안해
네가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나도 네가 싫지 않았고 지금도
너를 멀리하는 마음은 없어. 다만, 다만 그 분에게 내 모든 것을 드렸기 때문에
그래. 이제 와서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갑돌아, 나를 욕해도 좋아. 나를 나쁜 년이
라고 말해도 달게 받을게.”
“아냐. 난 너를 욕하고 싶지 않아. 다만 용기 없었던 나 자신이 미울 뿐이야.”
“그러지마, 자신을 학대하거나 비관하지마. 세상에 여자가 나 밖에 없니? 대처에
가면 발에 차이는 게 여자래.”
갑돌이 금봉이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얼굴이 밝지 않았다.
“금봉아, 하나만 물어볼게.”
“......”
“딱 한 가지만 물어볼게.”
“그래. 물어봐. 무엇이든지.”
“금봉아, 만약에. 이건 만약인데.”
“만약에?”
“응, 만약에 그 남자, 박달도령이 이 벌말에 안 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거니?”
“말도 안 돼 소리야. 박달님은 나하고 약속했어. 절대로 나를 배신할 분이 아니
야. 박달님이 안 오신다면 분명 그 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신 걸 거야. 무슨
사정이 생겨서 못 오시고 계신거야. 그 사정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해결되면 나를
보시러 오실거야. 난 요즘 매일 밤마다 우리 박달 서방님 만나는 꿈을 꾸고 있어.
어젯밤에도 그분을 만나는 꿈을 꾸었어. 그 분이 어사화를 꽂은 하얀모자를 쓰고
우리 집 대문으로 들어서는 꿈을 꾸었어. 아마도 조만간 이 고개를 넘어 오실
거야. 오늘은 늦은 거 같으니 내일이나 모레쯤에는 꼭 오실거야.”
‘아아, 금봉이 그 남자를 사모하는 마음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
구나.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분명 그 남자가 하루 빨리 찾아오지 않으면
금봉이는 병이 날 텐데......’
“금봉아, 그 남자가 한양에서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서 살림을 차렸거나, 과거에
낙방하여 끝까지 안 온다면 너만 골병이 나고 말거야.”
“난, 난 이미 그 분에게 모든 것을 드렸어. 그리고 너도 눈치 챘겠지만 난 지금
홀몸이 아니야. 그 분의 씨앗이 자라고 있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
는데, 이제와서 나보고 뭘 어떻게 하란 말이야? 으흐흐 흐흐흐......”
“그, 금봉아, 울지말어. 아기에게도 안 좋아. 날씨도 쌀쌀한데 울면 안 돼.
미안해 내가 괜한 말을 했나보다. 미안해."
갑돌이는 흐느끼는 금봉이 등을 다독거리면서 금봉이를 달래주었으니 한번
울음을 터트린 금봉이는 쉽게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금봉아. 이제 그만 울어. 건강에 안 좋아 그만 울어.”
“으흐흐 흐흐흐........”
“바보야, 그만 울란 말이야. 흑 -”
갑돌이도 그만 금봉이가 서럽게 울자 마음이 짠해오면서 울먹거렸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흐느끼다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갑돌아, 정말로 미안해. 나를 용서해줘. 내가 나쁜 년이야. 너의 순수한 마음을
받아 주지 못한 내가 나쁜 계집애야.”
“금봉아, 그런 말 하지말어. 나도 요즘 너만 생각하면 잠이 안 와서 미치겠어. 두 눈
벌겋게 뜨고 너를 도둑맞은 느낌이야.”
“갑돌아, 미안해. 나를 용서해줘.”
“금봉아, 이건 좀 전에 너에게 말했던 것처럼 만약의 일인데. 너 그 아기 낳을
거니? 아기 아버지가 끝가지 찾아오지 않아도 그 아기를 낳을 거야?”
“......”
“그래, 좋아. 그 남자가 너를 찾아오지 않더라도 네가 그 아기를 낳는다면 내가
그 아기의 아버지가 되면 안 되겠니?”
“갑돌아, 너 무슨 말 하는 거야? 이 아기의 아버지는 박달서방님이셔. 그런데
어떻게 네가 이 아기의 아버지가 된다는 거야?”
“네가 그 아기를 낳고도 그 박달도령이 안 오면 내가 키우겠다고.”
“그럼, 남의 아기를 낳은 나를 네가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는 말이니?”
“까짓것 남의 아이를 양자로도 들이는데 뭐?”
“안 돼.”
“왜?”
“안 돼. 그분은 꼭 오셔. 행여 그런 말 다시는 하지마. 말도 안 돼. 설령 그런
경우가 온다고 하여도 내 양심상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어. 이 동네에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닌단 말이니?”
“박달도령이 끝까지 안 오고 네가 그 아기 낳으면 나랑 멀리 떠나가서 살면 되잖아.
난, 난 그럴 의향이 있어. 너만 좋다면.”
“갑돌아, 부탁인데 다시는 그런 말 하지마. 나, 마음이 너무 답답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어. 그 분은, 그 분은 꼭 돌아오셔. 쿨럭 -, 쿨럭 -.”
금봉이는 한동안 멍하니 북녘 하늘을 올려보다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금봉아, 이제 그만 가자. 너 홀몸도 아닌데. 너무 오래 한 데에 있었어.
빨리 돌아가자. 응?”
“갑돌아, 저기 저 하늘 좀 봐.”
“......”
금봉이 북녘 하늘에서 날아오는 기러기 떼를 가리켰다.
끼룩 -
끼룩 -
“예전에는 하늘을 나는 새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는 북녘에서 날아오는
새조차 반갑고 눈물이나. 분명 저 기러기 떼들이 박달님의 안부를 가지고 왔을
거야.”
한 떼의 기러기들이 끼룩 끼룩 길게 여운을 남기며 금봉이 서있는 시랑산 이등령
위를 두 서너 바퀴 돌더니 이내 남녘으로 사라졌다.
“갑돌아, 너도 들었지? 저 기러기들이 분명히 나에게 박달님의 소식을 전했어.
우리 박달 서방님께서 나에게 보낸 안부 편지야. 내가 몹시도 보고 싶다고 하셨어.
아아, 천지신명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아, 이일을 어째? 이제 금봉이가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금봉아, 저건 단지 새일 뿐이야. 새들에 어떻게 소식을 전해?”
“바보, 난, 저 기러기들이 하는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어. 분명히 박달님의 소식을
전해 주었어. 곧 나를 찾아 온다고 하셨어.”
금봉이는 기러기 떼의 끼룩거리는 소리를 듣고 이등령에서 내려와 집으로 향했다.
“서방님, 들으셨어요?”
“뭘 말이오.”
“조정에서 별시를 본다고 하는 소식 들으셨어요?”
“아니오. 못 들었소.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오?”
“아침에 찬거리를 사러 이현(梨峴) 시장에 갔다가 방이 붙은 것을 보았어요.
내달 초 사흗날 경회루에서 본다고 했어요. 이번에는 먼저 번 증광시 보다 입격
자를 뽑는 수가 많지는 않지만 열심히 하시면 틀림없이 좋은 소식이 있을 거예요.”
“고, 고맙소.”
박달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 번 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입격(入格)하고야 말겠
다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소리 내어 책을 읽었다.
문약한 상감이 대비의 보이지 않은 수렴청정(垂簾聽政)에서 벗어나 국정을 돌보기
시작하면서 다행히 많은 경사스러운 일들이 생겨났다. 오랫동안 건강이 좋지 않아
상감과 종친들의 애를 태웠던 대비의 건강이 좋아진 점과 상감이 보위(寶位)에
오른 지 십년이 되는 해이면서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는 점 또한 비빈(妃嬪) 중
한 명이 태기가 있다는 소식이 상감의 심기를 편안하게 하자 상감은 특별 사면령을
내려 전국 팔도의 감옥에 갇혀있는 경범자(輕犯者)들을 방면하면서 예조(禮曹)에
명해 별시를 준비토록 하였다.
아지는 예전보다 더 박달이에게 신경을 썼다. 잠자리는 종종 같이하기는 하였지만
늘 책과 씨름하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공부하는 박달에게 분 냄새를 맡게
할 경우 먼젓번처럼 또 낙방하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렇지만 아지도
여자였다. 새벽부터 일어나 하루 종일 거친 남정네들을 상대하면서 국밥과 웃음을
팔아야 하는 억척스런 여장부이면서 뜨거운 여자였다.
마음 같아서 밤마다 헌헌장부인 박달이를 끌어안고 육욕(肉慾)의 향연을 갖고 싶었
지만 과거에 낙방으로 인하여 심적 충격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박달에게 다시 한 번
청운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기 때문에 밤마다 용광로처럼 이글거리는,
주체하기 어려운 음심(淫心)을 달래기 위하여 영업이 끝난 뒤 홀로 자작하는 일이
잦아졌다.
‘나는 참으로 박복한 년이로다. 처음부터 단추가 잘못 채워진 게 틀림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별시에 박달 서방님이 보란 듯 입격해야해. 그래서 지나간 나의 한을 풀
야 해. 그러나 또 악몽이 재연된다면 어쩌지? 아니야, 아니야, 이번에는 분명히 서방님
께서 입격할 거야. 만약에 또 낙방한다면 어쩌나? 아아, 머리아파. 이번에도 낙방하면
어쩌나? 나도 모르겠어. 그 일은 그 때가서 생각해보기로 하지 뭐. 그때 가서.’
아지는 술에 취해 혼자 넋두리를 늘어놓으며 히죽 거리기도 하고 눈물을 찔끔
거리기도 했다.
“언니, 이제 그만 마시고 주무세요.”
주막에서 허드렛일을 거드는 언년이는 아지가 걱정되었다. 요즘 들어 부쩍 말 수가
적어지고 거의 밤마다 술을 마셔야 잠을 들 정도로 아지는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너도 한 잔 할래?”
“언니, 난 술 못 마시잖아.”
“여자나 남자나 세상에 한번 태어나 이렇게 맛있고 달콤한 감주(甘酒)를 마시지
못하는 것도 불행이야. 그저 세상일이 복잡해 머리가 지끈 거릴 때는 술이 최고의
약이라고. 그럼 너는 머리 아플 때 뭘먹니?”
“언니, 난 언니처럼 욕심 없어. 그냥 하루 세끼 밥 먹고 잠잘 공간 있고 일할 수
있는 근력 있으면 돼. 더 이상 욕심 부려 봤자 심신(心身)만 피폐해 질뿐이야.
난, 너무 어릴 때 그런 일을 많이 겪어서 이제 남자에게 흥미조차도 없어.”
“넌, 남자에 대하여 모르는 게 없잖니? 그러나 난, 난 말이야 한번 꾼 꿈을 접을 수
없어. 꼭 이루어야 해.”
“아지 언니처럼 독하게 살아야 하는데 난 그럴 자신이 없어. 그러면서 한편으로
속이 편해. 남자는 그저 어쩌다 그게 생각날 때 불러들이면 되고. 남자는 나에게
있어 하나의 소품이야. 그런데 그 소품을 잘못 다루면 주객(主客)이 전도되고
말지. 그래서 소품은 잘 다뤄야 해. 자주 갈아 끼우거나 새것으로 교체하면 더욱
좋고.”
“호호 호호호......, 너는 나보다 나이는 서너 살 아래지만 남자에 대하여는 선배로
구나.”
“호호호호......, 그런가?”
“얘, 언년아, 네가 보기에 박달도령님은 어떠니?”
“......”
“솔직하게 말해봐.”
“언니, 내가 이런 말 한다고 절대로 화내면 안 돼? 알았지?”
“그래. 알았어. 어서 말해봐.”
“언니, 저 박달님에게 미련 버려. 저 분 만약에 이번 과거에 합격하고 나면 다른 여자
에게 갈 거야. 지금은 언니가 뒷바라지 해주니까 머물러 있는 것이지 과거에 떡하니
붙으면 그 날로 다른 데로 날아 갈 분이야.”
“언년아, 네가 그걸 어떻게 장담하니?”
“박달님의 얼굴을 보면 죽을 때까지 여자들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할 남자야.
남자나 여자나 그저 적당하게 생겨야지. 너무 잘생기면 주변에서 그냥 놔두지
않으니 그게 문제라고.”
‘아니, 이것이 남자를 얼마나 안 다고 함부로 주둥일 놀려? 정말 눈꼴셔서 못 들어
주겠네.’
“얘, 시끄러워. 술 맛 떨어지겠다. 네가 그 분을 잘못 봤어. 저 분은 그렇게 야박한
성격이 못돼. 두고 봐라. 저 분이 과거에 합격하면 나랑 혼인하자고 덤벼들 테니.
그럼 나는 못이기는 척하고 시집가면 되는 거야. 대낮에 눈을 뜨고 다녀도 코 베가는
이 한양 바닥에 책상물림은 절대로 혼자 못 살아. 나 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여인이
서생(書生)곁에 있어야해.”
아지가 심기가 뒤틀려 언년이에게 눈을 흘기자 언년이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언니, 조심해요. 남자는 절대로 믿어서는 안돼요. 특히 박달님처럼 훤칠하니
잘 생긴 남자는 마음을 한 곳에 정하지 못해. 양귀비(楊貴妃)가 오라고 하면 얼른
달려 갈 것이고, 왕소군(王昭君)이 눈만 찡긋하면 또 그곳으로 달려 갈 거며, 초선
(貂蟬)이 눈물을 흘리면 얼른 옷을 찢어서 눈물을 닦아 줄 남자라고요.”
“그래, 알았다. 알았어. 너 그 이가 놈에게 된통 한번 당하더니 인생을 다 산 여자
같구나. 호호 호호호......”
“언니가 걱정돼서 드린 말씀이에요.”
“그래. 고맙구나. 오늘은 술 맛이 텁텁한 것이 마치 쌀뜨물을 마시는 것 같구나.”
“언니, 박달님이 입격하시면 언니하고 혼인한다고 두 분이 약속했어요?”
“아니, 그런 약속 한 적은 없지만 양심 있는 분이면 나를 그냥 버려 두겠니?”
“어휴, 언니도 참. 언니는 보기에는 약아 보이는데 잘 살펴보면 무른 데가 많아요.
특히 잘 생긴 남자에게는 더 그런 것 같애.”
“얘, 그만하고 자자. 너하고 이야기하다간 밤새겠다.
이등령에 다녀 온 뒤로 금봉이는 심한 몸살을 앓더니 이내 자리에 눕고 말았다.
약을 먹었지만 계속 나오는 기침에 금봉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박달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이 금봉이에게 환희였지만 밤이면 박달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눈물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서방님, 어찌된 것인지요? 저는 서방님 기다리다 말라 죽겠어요? 왜 안 오시는
것인지요? 으흐흐 흐흐흐……."
밤마다 딸아이의 흐느끼는 소리에 금봉이 어머니는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당장
사람을 사서 한양으로 올려 보내 박달의 소식을 수소문해 보고 싶었지만 함부로
나설 수 도 없었다. 임을 기다리는 사람이나 곁에서 바라보는 사람 모두에게 묵묵
부답으로 흐르는 세월은 잔인하기만 했다.
“오늘은, 분명히 서방님이 오실거야. 틀림없어. 간밤에 서방님이 꿈속에 나타나
셔서 나에게 손을 흔들며 달려오셨어. 오늘은 꼭 나타나실 거야.”
금봉이는 이제 기다리다 지쳐서 자주 박달의 환영(幻影)까지 보았다. 자꾸만 불러
오는 배를 부여안고 금봉이는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소리 없이 흘러도 박달은 벌말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아, 오늘은 서방님께서 꼭 오실 줄 알았는데. 내일은 꼭 오시겠지.”
금봉이는 배를 쓰다듬어 보았다. 아직 뱃속에 태아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이제
제법 배가 불러 복대를 하지 않으면 금방 타인의 눈에 이상하게 보일 정도가 되
었다. 그런 딸을 곁에서 바라만 봐야하는 금봉이 어머니의 한숨 소리는 날로 더
깊어만 갔다.
"얘야, 그 사내를 잊고 낙태를 시켜야겠다. 네가 그 사내에게 속은 게 분명해.
벌써 반년이 다 되어 가는데 코배기도 안 보이는 남정네를 뭣 하러 기다린단 말
이냐? 뱃속에 아이가 더 자라기 전에 지우자. 이제는 복대를 해도 티가 나니
어쩔 수 없구나."
"안돼요. 어머니. 절대로 아이를 지울 수 없어요. 안돼요. 어머니, 절대로.
으흐흐 흐흐흐……."
"이 미련한 것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려 뭐하려고 하니? 바보같이 덜컥 정을
줘가지고 이 고생이야. 더 늦기 전에 어서 아이를 지워야해."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그 분은 반드시 나타나실 거예요."
"에구, 에구. 미련한 것 같으니……."
밤마다 모녀는 아이의 낙태를 놓고 실랑이를 벌였지만, 금봉이의 고집으로 이러
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세월만 흘렀다. 또 뒤 늦은 폭설이 내려 이등령을 넘나드는
사람의 발길이 뚝 끊겼다. 금봉이는 이제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다. 금봉이 임신
사실은 인근 마을에까지 사람들 입을 타고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금봉이가 아이를 가졌다며?"
"그러게 말이야. 말세여 말세.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아이를 배다니 별일이여."
"혹, 수돌이 놈이 금봉이에게 씨를 뿌린 거 아녀?"
"아녀, 수돌이는 착해서 그런 짓 못해. 어쩌면 갑돌이 녀석이 씨를 뿌렸을 지도
몰러."
"갑돌이 녀석도 마음이 여려서 ……."
"그런데. 이상한 일은 금봉이가 지난해 늦가을부터 금봉이가 자주 이등령을
갔다 오곤 했대. 왜 이등령을 드나들었을까? 난 그게 아무래도 이상하단말야."
"그럼, 재 너머 마을에 사는 총각을 만나러 다닌 거 아녀? 이 근동에서는 제일
잘 생겼다는 그 최초시네 셋째 아들말여?“
"그런 것도 아닌가봐. 사람들이 봤는데 금봉이가 하루 종일 바위에 앉아 북녘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다 내려온다는 거여.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여. 산골처녀가
왜 북녘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내려올까?“
"그럼, 동네 청년들 짓이 아니게 분명해."
"참, 지난 가을에 웬 과객이 잠시 금봉이네 집에 묵은 적이 있었지? 혹시 그 작자가
금봉이에게 씨를 내린 거 아녀?"
"맞다. 틀림없어. 그때 그 사내가 금봉이에게 씨를 뿌렸다면 지금 쯤 배가 불렀을
거야. 지금 금봉이가 배가 부른 거하고 그때의 그 사내가 다녀간 시기하고 거의
맞아 떨어지잖아. 틀림없이 분명 그 사내가 씨를 뿌렸을 거야. 그 과객을 본 사람
들이 그러는데 헌헌장부에 여자들이 한번 보면 침을 질질 흘릴 정도래.“
“아니, 그 과객이 그렇게도 잘 생겼대?”
“선풍도골(仙風道骨)이니 그렇게 도도하던 금봉이와 금봉이 아버지도 첫눈에
반했을 거야. 분명해 그 자가 금봉이에게 씨를 뿌렸을 거야.”
“참 그러고 보니 이제 생각났다.”
“뭐가?”
“그때 동네 총각들이 금봉이와 웬 남자가 늦은 밤 물레방앗간에 드나드는 걸 보
았대.”
“그래? 그럼 그 과객이 금봉이를 건드린 게 분명하구먼.
"어허, 참말로. 이 동네 총각들은 도대체 뭘 한거여. 두 눈 뜨고 어여쁜 처녀를 도둑
맞다니. 멍청이들이구먼.“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그 사내 인물이 그렇게 출중했나?"
"인물 뿐만 아니래. 글도 잘하고 언변도 좋고 예의도 바르다고 하던데?"
"그런데. 그 사내는 왜 안 나타나나?"
"이 사람아. 지금 눈이 쌓여 재를 넘어 다닐 수 없는데. 어떻게 찾아오나?"
"봄이 돼야 오겠지."
"저러다. 금봉이 어떻게 되는 거 아녀?"
이제는 동네 돌아가는 소식에 둔한 노인들까지 금봉이의 임신사실을 놓고 설왕설래
하였다.
동네 사랑방에 모인 마을 사람들은 모이면 금봉이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수돌이를 비롯한 다른 청년들도 금봉이를 타인에게 빼앗긴 것이 원통해 매일 같이
술을 퍼마시고 다니며 자신의 무능함을 탓했다. 금봉이 아버지는 딸이 처녀의 몸
으로 임신한 것을 알면서 금봉이에게는 아무 내색을 하지 않았다.
갈수록 배가 불러오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한 딸이 걱정이 되어 보약을 사다
주기도 하고 딸 대신 눈이 녹은 이등령을 오르내리며 한양에서 내려오는 과객들을
붙잡고 박달의 소식을 수소문 해보았지만 박달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고얀 사람 같으니. 사람 됨됨이가 괜찮아 딸을 맡기려했던 내가 어리석었지.
저러다 생떼 같은 딸자식만 죽게 생겼구나."
딸의 임신과 동네사람들의 비웃음 속에 금봉이 아버지 역시 날마다 술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었다. 점점 불러오는 배를 바라보며 금봉이는 박달이 올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꽃피는 봄이 오면 반드시 박달이 올 거라고 마음을 고쳐먹고 기다려
보기로 하였지만 점점 몸이 피폐해져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힘들었다.
"이것아, 뭘 좀 먹어야. 힘을 낼 거 아녀? 자. 이 미음이라도 들어봐. 소식도 없는
작자를 기다려 무얼 한단 말이니? 이제 단념해.“
"어머니, 죄송해요. 박달 서방님은 꼭, 꼭 오실 거예요. 흐흐흐 흐흑……."
"어이구, 내가 빨리 죽던지 해야 이 꼴을 안 보지. 어이구, 내 팔자야. 천지신명
님도 야속하시지. 그리도 빌고 빌었거늘……."
하루가 다르게 금봉이의 건강이 악화되자 다급해진 금봉이 부모는 의원을
불러다 진맥을 보게 하였다. 근동에서 가장 용하다는 의원이 금봉이를 살펴본 뒤
금봉이 아버지를 별도로 불러 결과를 이야기해 주었다.
"어쩌다 따님이 저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두시었소?"
"의원님, 우리 딸아이의 건강이 어떻습니까?"
"홀몸이 아닌 관계로 보통 사람보다 잘 먹고 잘 자야 하거늘 따님은 지금 겨우 버텨
가고 있습니다. 저렇게 내버려 놔두다가는 큰일 날 것 같습니다."
"의원님, 어찌해야하는지요? 어찌해야 딸년을 살릴 수 있겠는지요?"
"상사병에 명약은 그리운 사람을 만나게 해주면 깨끗이 낫습니다. 따님께서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아버지께서 따님의 입장을 용서 하시
고 빨리 그 남자를 만나게 해주세요. 따님을 낫게 하는 약은 그 것 밖에
없습니다."
"하아-"
금봉이 아버지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돈이 드는 처방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행방을 알 수 없는 사람을 데려오는 일은 확신을 할 수 없기 때문이
었다. 그렇다고 딸을 저렇게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빨리 손을 쓰셔야 합니다. 따님 건강이 매우 위험합니다."
"의원님, 만약에, 만약에 이대로 차도가 없으면 우리 딸애의 목숨이 얼마나 가겠
습니까?"
의원은 침통한 표정을 짓더니 속으로 중얼거렸다.
"송구하지만, 한 달도 못 갈 것 같습니다."
“네에? 하, 한 달이요?”
의원 말에 충격을 받은 금봉이 아버지는 눈앞이 캄캄했다.
‘아아, 한 달이라? 한 달?’
마음이 다급한 나머지 금봉이 아버지는 박달을 찾으러 한양으로 떠나기로 결심
했다. 사람을 사서 보내느니 한양에 몇 번 다녀온 경험이 있는 금봉이 아버지는
직접 박달을 찾으러 가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였다.
"내 딸 아이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넓고 넓은 한양 바닥 어디 가서 박달을
찾을꼬? 그러나 내 딸을 저리 내버려 둘 수는 없어 내일 당장 한양으로 박달을 찾
으러 갈 수 밖에......“
금봉이 아버지는 과수댁에서 홀로 탁주잔을 드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또래의
동네 친구들도 있었지만 금봉이 불가 점점 불러오면서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
졌다. 답답한 마음에 탁주 한잔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금봉이 어머니가 남편
에게 물었다.
“금봉 아버지, 혼자가지 말고 누구를 데리고 가요. 당신 혼자보다 두 서너 명이
찾는 게 훨씬 수월할 거 아니에요? 한양이 얼마나 넓은데 혼자 가서 어떻게
찾아요?”
“내 전에도 몇 번 한양을 다녀온 적이 있으니 그리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금봉 아버지, 내 말대로 해요 글쎄. 갑돌이를 데리고 가봐요. 요즘 농한기이니
특별히 하는 거도 없는 거 같은데.“
“양심이 있지 그 얘를 어떻게 데리고 간단 말이오?”
“지금 딸 아이 목숨이 더 중요하지 그 알량한 양심이 중요해요? 당신보다 갑돌이가
그 박달인가 뭔가를 찾는데 빠를 거유.”
“허어, 참. 알았어요. 내 갑돌이에게 부탁해보지.”
“그만둬유. 내가 얼른 가서 갑돌 엄마한테 부탁할테니.”
“......”
이등령을 넘어서면서 금봉이 아버지는 속이 탔다. 눈보라 속을 헤치며 앞장서서
걷던 갑돌이 금봉이 아버지 눈치를 보았다.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금봉이
아버지는 자주 하늘을 우러러 보며 눈물을 훔쳤다. 다행히 날씨가 좋아 눈이 빠른
속도로 녹고 있었다. 시냇가에서는 졸졸거리며 물 흐르는 소리가 정겹게 들려
왔다.
“어르신, 좀 쉬었다 가세요. 힘드실 텐데......”
“난, 괜찮다. 네가 괜히 고생하는 구나.”
“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 어르신이 고생이시지요.”
“사람의 인연이란 이렇게 무서운 거란다. 사람들이 함부로 맺은 인연이 훗날
엄청난 결과를 낳는단다. 가문에 영광일 수도 있겠고, 또한 치욕일 수도 있겠지.
허나 이번 우리 딸의 문제는 아직 단정 지을 수 없겠지만 왠지 불안한 생각이
가시질 않는구나.”
금봉이 아버지는 궐련에 불을 붙이면서 심각한 얼굴이었다.
“어르신, 희망을 가지세요. 한양에 가면 분명 그 도령이 주막에 기거하고 있을
겁니다. 올 때가 지나도 안 온다는 것은 필시 그 도령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일 테니 직접 찾아가 자초지종을 물어보는 것도 좋다고 봅니다. 그 도령이
안 온다면 강제로라도 데리고 내려와야 합니다."
“나 혼자보다 그래도 네가 곁에 있으니 든든하구나. 너에게 무척 미안하구나.
그 도령만 우리 집에 오지 않았어도 너에게 금봉이를 시집보내는 건데......”
“어르신......”
“자, 다시 길을 재촉하자구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두 사람은 걷고 또 걸어 엿새가 되는 늦은 시각 흥인지문에
도착한 금봉이 아버지와 갑돌이는 곧바로 흥인지문 주변의 주막을 시작으로 모두
뒤지고 다녔다. 서너 집을 뒤졌지만 박달을 아는 주모도 없었고 비슷한 용모를 한
과객을 본적도 없다고 하였다. 곧 날이 어두워져 박달이 찾기를 포기하고 두 사람은
주막에 들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일찍 서둘러 주막을 나온 두 사람은
운종가와 피마골을 뒤졌다.
“주모, 혹시 이런 사람 본적 있소?”
“아니요. 처음 보는 사람인데요?”
“그래요? 혹시 보시거든 어디 거주하는 지 잘 알아봐요. 내 사흘 후에 다시 들리
리다.”
“호호호호, 잘 생긴 총각이구먼유? 집 나간 아드님이신가 보네유?”
금봉이 아버지는 환쟁이에게 부탁해 박달이 용모를 그린 그림 두 장을 들고 다니며
주막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마음처럼 박달이를 찾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사흘 동안 광통교, 애오개,
이현시장, 용산, 구파발, 노량, 양화진, 숭례문, 칠패시장, 다동 등 과객들이 묵을
만한 주막을 모두 뒤지고 다녔지만 박달을 찾을 수 없었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오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금봉이 아버지는 다시 마포나루 근처를 뒤지기
시작하였다. 두 번째로 들린 곳이 아지가 운영하는 주막이었다. 마침 박달이는
운종가로 필요한 지필묵을 사기 위하여 외출하고 없었다.
"주모, 여기 국밥 두개하고 탁주 두 사발 주시구려."
"어서 오세요. 이렇게 눈이 내리는데……."
색기(色氣)가 뚝뚝 흐르는 젊은 아지는 금봉이 아버지와 갑돌이를 보자 반색을 하
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주모, 혹시 이런 사람 보지 못했소."
금봉이 아버지가 종이에 그려진 박달의 얼굴을 내밀었다.
‘앗, 박, 박달 서방님의 얼굴인데. 어떻게 해서 서방님의 그림이 이 분 손에 있단
말인가? 혹시 박달서방님이 뭘 잘 못해서 포청에서 나와나? 행색을 보니 그렇지
않은 듯한데? 이상하다?’
“주모, 이 사람 모르오?”
"모, 모르는 사람인데요? 그 분과 어떻게 되는 사인데 찾으세요? 혹시 보게 되면
전해드릴게요.“
"이 사람은 이름이 박달이라고 내 사위 될 사람인데 과거보러 한양에 간 뒤로
반년이 다 되도록 소식이 없어서 찾고 있소."
"아이구, 선달님도 참. 애도 아닌데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찾아갈까봐 그러
셔요? 고향 가서 기다리시면 무슨 소식이 있겠지요?“
"아니오. 그런 게 아니라. 이 사람을 기다리는 내 딸이 지금 죽어가고 있소.
이 사람을 찾지 못하면 내 딸은 죽게 됩니다. 혹, 이 사람을 보시거나 어디 기거
하는지 알면 알려주시오."
아지는 박달의 초상화를 손에 들고 금봉이 아버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속으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 이 얼굴은 박달도령이 분명한데. 어찌한담? 여기 있다고 알려주면 당장
박달도령을 데리고 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될 터인데.
안 돼. 절대로 알려 줄 수 없어. 며칠 후면 과거가 있고, 과거에 입격하면 나와
정혼을 할지도 모를 텐데. 절대로 알려줄 수 없어.'
"이보시오 주모? 내 얼굴에 뭐가 묻었소. 왜 그리 빤히 쳐다봐요?"
"아, 아니에요. 내가 잠시 어제 먹던 떡이 생각나서요. 헤헤 헤헤……."
"혹시, 이 도령을 보시거든 내 사정을 꼭 전해주시오."
"염려마세요. 꼭 전해 드리리다."
주막집에서 국밥과 탁주를 한 사발씩 들고 금봉이 아버지와 갑돌이는 다른 주막집을
찾아 나섰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그 도령을 꼭 찾기 바래요."
"……."
주모는 문을 나서는 금봉이 아버지 뒤에 대고 소리쳤다.
'흥, 절대로 못 찾을걸. 이제 경우 내 서방이 되었는데 허무하게 내 줄 수 없지.
그 금봉이란 처자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어."
아지는 하루라도 남자가 빨리 찾아왔더라면 박달도령을 빼앗겼을 것이라고 생각
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지는 문 밖에 소금을 뿌리면서 손을 탁탁
털었다.
금봉이 아버지와 갑돌이는 한양에 간지 보름이 넘어 집에 돌아왔을 때 이미
금봉이는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겨우 물 한 모금 넘기면서 간신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의원의 말로는 며칠을 넘기기 어렵다고 하였다.
"어이쿠, 금봉아. 이 아비가 너를 죽게 하는구나. 어이, 으흐흐 흐흐흐……."
“아버지, 죄, 죄송해요.”
금봉이 아버지는 금봉이의 손을 잡고 통곡하였다. 오랜 기간 밥을 제때 먹지 못한
탓인지 뼈만 남은 앙상한 손이 백지장처럼 하얗다 못해 핏줄이 다 드러나 보였다.
"금봉아, 정신 좀 차려봐. 나 갑돌이야.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니? 보름사이에
왜 네가 이렇게 변해 버린 거야? 응? 정신 좀 차려봐. 으흐흐 흐흐흐.......“
“가, 갑돌아, 미안해. 나를 용서해줘. 정말 미안해. 흐흐 흐흑 ……. ”
“안 돼. 금봉아, 어서 일어나야지. 그 박달도령이 곧 올 텐데. 네가 이렇게 누워
있으면 어떻게 하니, 응? 어서 일어나야지?”
“우리, 우리 박달님은 나를 잊으셨나봐.”
“ 금봉아, 박도령은 꼭 너를 보러 올 거야. 그러니 힘을 내야 돼.”
“아아, 박달님, 으흐흐 흐흐흐........”
갑돌이는 손수건으로 금봉이 두 뺨으로 샘물처럼 솟아나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금봉이는 겨울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손을 들어 살며시 갑돌이의 손을
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갑돌아, 나 죽어도 미워하지 않을 거지?”
금봉이 모기 소리 만하게 속삭이자 갑돌이 얼른 금봉이 입에 귀를 갔다 댔다.
“금봉아, 안 돼. 어서 일어나야 해. 옛날처럼 이등령으로 칡도 캐러 다니고 산머루도
따러 가야해. 금봉아, 아흐흐흐흐흐......”
“갑돌아, 미안해. 그 분은 영영 못 볼 것 같어.”
“아냐, 금봉아 힘을 내. 곧 오실거야. 내가 이등령을 넘어오다 보니 눈도 거의 다
녹고 계곡에 물도 졸졸 흐르고 있어. 꽃 피는 봄이 오면 박달 도령도 너를 찾아 올
거야. 그러니 어서 네가 일어나 기운을 차려야지.”
갑돌이는 금봉이의 겨울나무 가지처럼 앙상한 손을 참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갑돌아, 나를, 나를 용서해 주는 거지?”
금봉이는 있는 힘을 다해 간신히 숨을 몰아쉬면서 갑돌이와 대화를 나누었다.
갑돌이는 초점을 잃어 이미 이승의 사람 눈빛이 아닌 금봉이의 두 눈을 바라보면
가슴을 쳤다. 폭포수같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갑돌이는 밖으로 뛰쳐
나갔다.
“으흐흐 흐흐흐......, 나쁜 놈, 순진한 여인을 저리 만들다니. 내 그놈을 찾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아흐 으흐흐 흐흐흐......”
갑돌이가 금봉이네 집 뒤꼍에서 땅을 치며 통곡하자 수돌이가 갑돌이 등을 토닥
거렸다.
“갑돌아, 울지 마. 금봉이는 곧 기운을 차리고 일어날 거야. 너까지 이러면 어떻게
하니? 울지마.”
“으흐흐 흐흐흐......, 그놈은 천벌을 받을 거야. 천지신명님이 살아 계신다면
분명히 그놈 머리에 벼락을 내릴 거라고. 수돌아, 이일을 어찌하면 좋니? 응, 금봉이
저렇게 내버려 두면 곧 죽게 될 텐데. 이일을 어찌해야 하니?
아흐흐흐흐흐......”
수돌이가 아무리 갑돌이를 진정시키려 해도 갑돌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갑돌이가 땅을 치며 통곡하자 동네 어른들도 가슴이 답답한지 침통한 얼굴을 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나쁜 사람 같으니. 평화롭던 마을에 평지풍파를 일으키다니. 그냥 잠이나 자고
가던지 왜 쓸데없이 순진한 산골 처녀를 건드려서 저리 만들어 놓았누?
에구, 저 일을 어쩌면 좋아 그래?”
나이가 지긋한 동네 어른이 궐련을 빨아대며 허탈한 심정을 감추느라 애쓰는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그 박달인지, 박통인지 금봉 아버지는 하룻밤만 재우고 보내지 않고 며칠씩 재워
보내니 그런 사단이 났지. 요즘 젊은 것들이 마음만 맞으면 금방 배꼽을 맞춘다는데
금봉 아버지는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나? 말세로세. 말세야.”
동네가 금봉이의 심상치 않은 일로 술렁이자 동네 이장은 동네 반장과 원로들을
불러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다.
“에, 여러분들도 소문 들어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 마을의 꽃인 금봉이가 아주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해서 각 집안에서는 더 이상 금봉이와 관련한 흉흉
소문이 번지지 않도록 각별히 입 조심 하도록 하시고, 과년한 딸이 있는 집안에서는
딸아이들의 행동과 몸가짐에 신경을 써서 다시는 오늘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각 반장들은 오늘 회의 내용을 신속히 전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원로 여러분께서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시지요.”
“에헴, 내 한마디 하겠소.”
“네에, 어르신 말씀 하시지요.”
마을에서 존경 받고 있는 원로 한 분이 일어나더니 뜸을 들였다.
“작금의 일을 보면 우리 마을이 얼마나 이웃 간의 정이 없는지 알 것 같습니다.
금봉이네가 농사도 많고 이 동네에서 가장 부유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네에
과객이 오면 제 발로 금봉이네를 찾아가거나 다름 집에 가도 금봉이네로 인도하는
바람에 음으로 양으로 금봉이네가 길을 잘못 들어 마을로 들어오는 과객을
도맡아 재우다 시피 했습니다.
오늘의 일도 인심이 후한 탓으로 금봉이네가 손해를 보았다고 할 수 있어요.
비록 금봉이가 시집도 못 간 상태에서 아이를 배고 이제는 아주 위험한 상태라고
들었어요. 이 일은 금봉이네에 한정 된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을의
남정네들이 못나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만에 하나 금봉이가 잘못된다면
우리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최대한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마을의 원로 한마디에 마을 사람들은 금봉이를 비난하는 것을 멈추고 측은한 심정
으로 금봉이 아버지 어머니에게 위로의 말을 전해주었다.
폭풍전야처럼 벌말은 침묵 속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온 동네뿐만 아니라
인근의 마을까지 금봉이의 상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밤이면 동네 총각
들은 과수댁 선술집에 모여 박달을 성토하기도 하고 자신들이 금봉이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하여 술로 울분을 삭히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갑돌이와 수돌이는
다른 사내들보다 더 많은 술을 마셔댔다.
“아흐흐흐흐흐흐......, 금봉이가, 금봉이가 불쌍해. 낮에 보니 이미 이승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어. 아흐흐흐흐흐.......”
갑돌이 큰 소리로 통곡하자 수돌이를 비롯해 마을 사내들은 침울한 얼굴로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어떤 사내는 대취하여 주먹을 불끈 쥐고 당장이라도 한양으로
박달을 찾으러 떠나자고 하였고 또 한 총각은 가짜로 박달을 만들어 촛불처럼
꺼져가는 금봉이 살리자는 제안을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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