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계 9장 1-11절
설교제목 : 아비소스가 열릴 때
성령 강림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날씨변화가 심한 탓인지 감기환자가 많습니다. 건강하시길 빕니다. 조울증상이 있는 한 분이 카프카의 “변신”이 자신에 크게 공감하는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카프카의 “변신”에는 세일즈맨인 주인공, ‘그레고르 심사’가 어느날 갑충같은 거대한 벌레가 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신의 세계에 갇힌 벌레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그레고르의 모습을 자신에 투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답변하기를, 개별적 가치가 인정되지 않고, 마치 기계처럼 집단적 가치에 종속되어 살면서 갑충이 된 자의 삶이 바로 카프카의 변신 이야기임을 환기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갑충으로 퇴행하였을 때 비로소 자신의 본성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갑충이 된 자는 방문을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의식의 문턱을 넘지 못하여 신경증에 빠진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문턱을 넘어서 다시 변환된 인간,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해야 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벌레처럼 퇴행되어 좁은 의식의 방에 감옥처럼 갇히면 그곳에서 영원히 헤어날 수 없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변환을 위해 자신의 의지력을 발현해야 하지만 그것조차도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아의 힘만으로도 어렵습니다. 그곳에 새로운 구원의 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성령강림절입니다.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움츠리며 문빗장을 걸고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거룩한 영이 임재하였을 때, 비로소 그 불안과 두려움의 빗장을 열고 사람들에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에드워드 에딘저는 말합니다. “성령의 특별한 구체적인 현시로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성령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발달시킬 수 있기 위해서 죽어야만 합니다. 즉, 투사는 철회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중심주의를 넘어서 앞으로 나아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이 단게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시점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이 성령을 담는 그릇이 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집단적인 그릇인 교회가 성령을 담는 용기가 되었습니다.”[에드워드 에딘저, 그리스도인의 원형, 한국심리치료연구소, p128-129] C.G.융은 이런 성령의 임재 사건을 “계속되는 화육”의 주제와 연결하며 매우 중요하게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는 자들에 대한 성령의 지속적이고 직접적인 작용은 사실 확장된 화육의 과정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신아들 그리스도는 장자이며, 그 뒤를 이어 어린 형제들과 자매들이 끝없이 태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성령에 의해 잉태되지도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지도 않을 것입니다. ... 그들의 천한 태생(아마도 포유류로부터 발달해 나온)은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되고, 그리스도가 그들의 형이 되는 친족관계를 방해하지 않습니다.”[C.G. Jung, “Answer to Job”, CW11, para.658.] 성령의 지속적인 영향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친족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페레 라차트(Pere Lachat)에게 쓴 융의 편지에는 “신적인 화육은 지속되고 진보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신적인 드라마 안에 수용되고 통합됩니다. 인간이 그 드라마의 결정적인 부분을 맡도록 운명지워진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성령을 받아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나는 성령을 받는 것을 매우 혁명적인 사건으로 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양가적인 본성을 인식하기 전에는 발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삶을 받아들였듯이, 우리 자신의 개인적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 죽음으로 대변되는 신적인 대극 갈등을 경험하도록 운명지워진 신의 자녀가 됩니다.[C.G.Jung, CW 18, The Symbolic Life, para.1551.] 거룩한 영을 받음으로 우리에게 부과된 소명, 운명의 길이 새롭게 열릴 수 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열리는 아비소스
오늘 본문은 일곱 나팔의 심판 중에서 다섯 번째 나팔의 심판의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별이 있었고, 그 별은 아비소스를 여는 열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별이 무엇인가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가장 유력한 두가지 견해는 별은 성서에서 천사나 하늘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자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천사라고 고려되고, 누가복음 10장 18절에 근거하여 사탄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는 구절에서 사탄을 암시할 수도 있습니다. 두가지 모두 설득력 있는데, 심판을 실행하는 천상적 존재라는 것만은 확실한 듯 합니다.
그런데 이런 땅으로 떨어진 별이 아비소스를 여는 열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아비소스는 개역성경에서는 무저갱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리스 원어를 살펴보면, 아(a)와 뷔도스(buthos)의 합성어로 ‘깊이가 없는’, 즉 ‘밑바닥이 없ㄴ는 깊은 곳’을 가리킵니다. 이런 아비소스는 창세기 1장 6절에서 ‘테홈(tehom)’으로 물을 가두어 둔 곳, 혹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갇히는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아비소스는 적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나타나기 전에 있던 처소였으며, 그리스도의 천년 왕국 동안 사단이 일시적으로 갇혀 있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비소스의 열쇠를 받은 천상의 존재는 그 열쇠를 받음으로 지옥의 문을 열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을 위임받은 것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아비소스는 심리적으로 무의식의 심층으로 표현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내담자는 자신 안에 너무 거대한 블랙홀 같은 것이 있다고 표현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아비소스는 타락한 천사, 악마, 어둠의 초개인적 세력들이 거주하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율적이고, 무의식적인 콤플렉스의 거주지입니다. 실제로 깊이 뿌리내린 자율적이고 무의식적 콤플렉스는 악마적인 실재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무의식적 콤플렉스는 변환되지 않는 원초적 정신에서 그들의 에너지가 파생되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그것들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분석시에 내담자들은 이런 자율적 콤플렉스의 영향을 크든 작든 대부분 경험합니다. 때로 악마적인 사로잡힘 현상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이는 보편적인 경험이며, 누구도 면역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악마적인 사로잡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매우 철저한 자기 인식을 필요로 합니다. 자신 속에 얼마나 많이 밝은 것이 살고 있고, 그러나 또한 얼마나 많은 어둠이 살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만일 자아가 지옥의 거주한다면 더 이상 무의식적 악마가 거주하지 않습니다. 의식이 침투했기 때문에 지옥은 인구가 감소됩니다.
메뚜기의 재앙
성서에는 아래로부터 문이 열리는 것과 위로부터 열리는 것이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지옥의 문이 열릴 때 아래로부터 아주 강력한 상이 등장합니다. 오늘 그림을 보시면 그것을 형상화하였습니다. 큰 용광로의 연기같은 올라와 해와 하늘이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졌습니다. 자율적인 콤플렉스가 의식의 문을 뚫고 나오게 되면 일종의 어둠의 경험입니다. 의식의 명료함이 사라지고 점차 어스름한 무채색의 빛깔로 전망할 수 없는 상태에 이릅니다. 모든 것이 흐릿하고 뿌여집니다.
그 연기 속에서 메뚜기, 황충이 나와서 땅으로 퍼지기 시작합니다. 그 메뚜기는 전갈처럼 사람들을 쏘아서 고통스럽게 합니다. 메뚜기들은 전투채비를 한 말들과 같고 머리에는 금 면류관 같은 것을 쓰고 얼굴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빨은 사자의 이빨과 같고, 쇠로 된 가슴막이를 두르고 날개소리는 말을 끄는 병거소리와 같았습니다. 전갈 같은 꼬리와 침이 달려 있는 형국입니다.
이런 메뚜기의 모습은 요엘 1장에서 “셀 수 없이 많고 강한 메뚜기 군대가 땅을 공격하였는데, 그들의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고 날카롭기가 암사자의 송곳니와 같다”고 예언합니다. 이는 메뚜기의 재앙입니다. 심판의 날에 묵시적 원형에 의해 활성화된 악마적인 세력이 침입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집단적 무의식적 콤플렉스가 의식으로 침투하는 정신병적 증상의 발현과도 흡사합니다. 이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축적된 에너지 사이에 거대한 불균형으로, 해리된 상태에서 의식의 심각한 황폐화를 초래합니다. 의식의 기능이 현격히 저하되고, 조절되지 않은 환각이 의식을 사로잡습니다.
메뚜기의 형상이 다양한 형태를 취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분열된 특성, 여러 다양한 특성들이 결합되어 일관성을 띄지 않기에 의식을 매우 심각하게 교란합니다. 강력한 이빨, 쇠로 만든 가슴막이, 날카로운 소리, 전갈의 침등은 이 메뚜기가 어떻게 심판을 행하여 고통을 자아내는지 일러줍니다. 요엘서나 출애굽기의 재앙처럼 모든 땅의 풀을 강력한 이로 갉아먹으므로, 생명력을 고갈시킵니다. 생명 에너지의 고갈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한 강력한 쇠소리는 마치 괴롭히는 온갖 소음으로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고, 전갈의 독은 감각적으로 고통스럽게 하는 환촉과 지나친 강박사고 고통스럽게 할 수 있는 내용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메뚜기가 금면류관과 사람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은 화려하고 교묘한 얼굴로 자신의 정체를 감출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오늘 우리를 매혹시키고 사로잡는 면류관을 쓴 메뚜기는 사실 우리를 모든 중독적 삶으로 고통으로 이끄는 전갈의 꼬리 독을 지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를 아름답게 매혹하는 것 속에 독이 있음 또한 밝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권력이란 아름다운 면류관 뒤에 우리에게 전갈의 독을 주입하는 것도 비슷한 형태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메뚜기의 집단적인 현상 속에서도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을 받은 사람은 안전할 것입니다. 자기 인식과 하나님의 온전한 연결된 정체성을 부여받은 자는 그 무저갱의 메뚜기의 재앙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열린 눈으로 내 자신과 이 세계을 살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