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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문화 국제아카데미 이사장 로케슈 찬드라 박사
강연 - ‘법화경을 말하다’
인도 문화 국제아카데미의 이사장인 로케슈 찬드라 박사가 ‘법화경 - 평화와 공생의 메시지’전의 개막식(4월16일, 인도뉴델리)에서 강연을 했다.
강연에서는 법화경에 생명을 불어넣고 법화경의 정신을 현대에 소생시킨 이케다 SGI회장의 투쟁을 진심으로 칭찬했다. 여기서는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한다.
인도 뉴델리에 있는 인디아간디국립예술센터에서 열린 법화경전.(2008년 4월)
법화경은 위대한 지도자의 사상으로
저의 아버지 라그비라 박사는 불교문화에 조예가 깊고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은 언어학자였습니다. 그런 아버지 라그비라와 제가 ‘법화경’과 깊게 관계하게 된 최대의 계기는 마하트마 간디의 존재였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모든 풍설을 견디고 또 수많은 민중에게서 지지받아온 법화경의 진의(眞意)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지금은 법화경에 대해 영어로 쓰여진 서적이 풍부하게 있습니다만, 당시는 거의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아버지는 산스크리트의 문헌을 마하트마 간디에게 건넨 것입니다. 이것은 소비에트 이전의 구 러시아에서 출판된 것이었습니다.
또 아버지는 영국의 명문 옥스퍼드 대학이 출판한 ‘동방성서’라는 서적에 게재되었던, 법화경의 영역(英譯)도 마하트마 간디에게 건넸습니다. 간디는 그것들을 읽음으로써 아버지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왔습니다.
일찍이 아버지는 일본인 유학생과 알고 지내 그를 통해 법화경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또 니치렌 대성인의 전기(傳記)를 읽고 그것을 통해 법화경을 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경위도 있어 아버지는 마하트마 간디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법화경의 안목인) ‘南無妙法蓮華經’는 삼라만상을 형성하고 발전확대해가는 근원의 실체이다”라고.
이후, 마하트마 간디는 스스로 도장(아슈라무)의 기원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제목을 집어넣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간디의 스승은 니치렌 대성인이다”라고. 이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사실입니다.
어쨌든 법화경은 판디트 네루(독립 인도의 초대 수상을 지낸 네루 수상의 여동생)나 마하트마 간디라는, 우리들에게 있어 위대한 정치지도자의 사상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법화경의 위대함을 알았던 것입니다.
일본인과 인도를 잇는 존재
한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법화경은 일본을 지탱해주고 있던 군국주의와 실로 대극의 존재였습니다.
그런 군부와 정면에서 싸우고 법화경을 근본으로 하여 평화를 위해 일어선 것이 창가학회의 초대, 2대 회장입니다. 그리고 그 정신을 계승하여 평화를 위해 지금도 또 계속 싸우고 있는 것이 제3대 이케다 회장인 것입니다.
일찍이 전쟁찬미를 주장하는 국수주의적 시인이었던 요네 노구치와 인도의 대시인인 타고르는 격렬한 토론을 했습니다.
그것은 인도에도 전해져 일본인은 너무 제국주의적이고 공격적이라는 인상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인도 사람들에게 다대한 영향을 준 법화경은 동시에 일본의 국가의 토대를 형성한 경전이기도 했습니다.
7세기에 쇼토쿠 태자에 의해 법화경에 대한 첫 일본어 주석서(注釋書)가 저술되었습니다. 이 진필의 서(書)는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 뿐 아니라 전 인류에게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문화유산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법화경은 우리들 인도인의 일본관을 바꾸는 커다란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일본은 공격적이고 제국주의적이라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만, 그것은 정치적인 것이고 국민의 마음 오저에는 마하트마 간디나 판티트 네루의 견식과 같은 가치관 - 법화경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법화경은 일본인과 우리들 인도를 ‘인간적인 연대’로 이어준 것입니다.
철저한 평등주의의 사상
그러면 법화경에는 도대체 무엇이 설해져 있는 것일까. 법화경의 정신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법화경이 평등주의의 사상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바스반도(세친=석존 멸후 900년 무렵, 소승교를 파하고 대승교를 선양한 논사)는 법화경 속에 설해진 세 가지 평등주의의 지침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평등한 진리’, ‘평등한 사회’, 그리고 ‘평등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체계화된 훌륭한 철학입니까. 금후, 이 평등주의의 사고방식은 보다 상세하게 논해져야 할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 많이 존재하는 격차는 더욱 넓혀져 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종교가 해야 할 역할을 시야에 넣으면서 세친이 법화경에 대해 말한 평등주의의 가치를 재인식하고 더 한층, 상세하게 연구해 가야할 것입니다.
또 하나,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법화경이 페미니즘적 측면을 가진 경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경전과의 획을 긋는 획기적인 것입니다.
여성의 성불을 부정해온 제 경전 속에, 법화경에서 처음으로 여성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중요성은 크리스트교와의 비교를 시험해 봤을 때 더 한층 인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크리스트교에서는 아직 여성들이 사교(司敎)나 추기경에 임명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 그 중에서도 법화경은 민중에 열려진 것이며 현대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법화경에는 인간을 승려, 비구니, 남성, 여성의 네 가지 종류별로 논하고 있습니다만, 계급이나 성별의 차는 단호히 배제하고 있습니다.
석가의 시점은 결코 ‘신(神)’에게 쏠려 있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이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승려든 비구니든 첫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우선 인간이라는 점이라는 것이 깊이 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생명의 변혁
법화경이라 해도 현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니치렌 대성인이 나타내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제목입니다. 창가학회에서는 이 니치렌 대성인의 제목을 부르고 있습니다.
인디라 간디(네루 수상의 딸)는 일찍이 저에게 ‘南無妙法蓮華經’의 의미를 물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인디라 간디는 자신과 만나기 위해 찾아온 일본인들에게 제목의 의미를 물었습니다만, 누구나 장황하게 둘러서 설명을 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南無妙法蓮華經’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한 자씩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한편으로, 어구가 의미하는 것은 정신성이며 거기에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더욱 깊은 웅변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경전 전체나 어느 특정 장(章)이 아니라 단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제목만을 부르는가.
그 힌트가 되는 것이 연꽃입니다. 구마라습은 연꽃을 각각의 색으로 설명했습니다.
우토빠라(청연화)는 깊이 사색함을 나타내고 빠도마(홍연화)는 행동의 에너지를 나타내며 픈다리카(백연화)는 순수무구의 가치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네 번째 크무다(황연화)는 달이 나옴과 동시에 피며 덕 중에서도 온화함의 본질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네 가지는 인간의 마음과 그 작용의 영역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러한 연화는 단순히 마을 연못에 자라는 꽃이 아닌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인간 마음의 상징이고 인간 마음에 피는 것입니다.
이렇게 법화경이라는 꽃 그 자체에 상징적인 중요성이 설해져 있음과 마찬가지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제목에도 힘찬 가치가 상징되어 있습니다.
이 제목은 단지 어구로써의 가치가 아닙니다. 제목을 부른다는 실천에 의해 인생에 있어서의 모든 부정적 사항을 긍정적인 것으로 변혁하는 생명의 가치인 것입니다.
그러한 가치는 공허함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변화해가는 것입니다.
진짜의 의미에서 그 가치를 효과적인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또 그 가치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실천에 적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실천주의
저는 이케다 SGI회장이 저술한 ‘21세기를 여는 대화’를 되풀이해 읽으면서 인도네시아에 있는 ‘보로브두르’라는 세계 최대급의 불교유적에 새겨진 조각의 의미를 탐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역사적 유적의 탐구에 대해 생각할 정도로 이케다 회장이 말씀하시는 대로 저는 법화경에서 빛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케다 회장은 법화경이라는 경전 그 자체에 경의를 표한다는 고전적인 해석에서 행동에 입각한 해석으로 전환했습니다.
고전으로서의 경전이 그 자체로써 영구의 유산임을 마음에 남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불교의 본래의 범주가 아닙니다.
불교는 어디까지나 행동주의이고 다이나미즘인 것입니다.
그 경전이 어디서, 어느 시대에 저술되었는가 라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보다도 그 경전이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는가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성서에는 독단적 주(主)인 신(神)이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경전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인간 마음의 개화를 목표로 한 것입니다.
불교는 성서와 달리 때와 장소에 의해 여러 해석이 유연하게 변화해갑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그 경전의 근본적인 가치와 정신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제도의 틀 속에서 신선한 해석을 해가는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법화경은 개방적인 경전으로서 항상 신해석을 받아들이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전의 해석 그 자체보다도 전하려고 하는 정신이야말로 중심적인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화경은 다이나믹한 힘을 간직한 경전이며 항상 영원성을 가진, 현대가 구하는 경전인 것입니다.
이케다 SGI회장의 투쟁에 경의(敬意)
이케다 SGI회장은 법화경에 설해진 정신성을 가장 깊이 해석하는 지도자이며 무엇보다 행동으로써 법화경의 정신성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신 지도자입니다. 실로 법화경의 생명을 소생시키는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케다 회장은 법화경을 일본에서 전 세계로 넓힘으로써 인류를 계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케다 회장을 ‘인류의 교사’라고 부르며 최대로 칭찬하는 것입니다.
법화경의 정신성을 현실의 것으로 하여 세계로 크게 전개하고 계시는 이케다 SGI회장의 투쟁에 대해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면서 다음의 짧은 일절을 바치며 저의 스피치를 끝내고 싶습니다.
“모든 연화의 종자에는 꿈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윽고 연꽃으로써 자랑스럽게 핀 모습을 보일 것이지만 지금은 아직 실체가 없는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한 꽃망울 속에는 이미 그 꿈의 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은 꿈에 자극을 받습니다. 그 이상을 그려봄으로써 마음이 흔들립니다. 정열적인 마음에 태어난 불꽃은 말로 내뿜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행동이 되어 생명의, 그리고 내일을 향한 원천으로 결정(結晶)을 이룹니다.
창가의 가치창조는 착실하게 조용히 추진됩니다. 그 소리는 정적입니다만, 마치 원시의 얼어붙은 잠에서 깨어나 전 세계에 울려 퍼져 가듯이 그 행동은 신성(神聖)합니다.
의미가 말로 되고 그리고 그 말이 실체가 있는 현실로 변화해가듯이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의 말은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계속 켭니다.
그리고 그 불은 신(神)의 힘으로써 사람들의 꿈을 한 아름 안고 마치 훌륭하게 엮어진 직물처럼 커다란 완성으로 맺어져가는 것입니다.”
☞ ‘대백연화(2008년7월)’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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