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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3일간 51km 걸으며 해발 3,000~4,750m 넘나들다
남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백패킹 코스를 소개합니다!
페루 산타크루스 트레킹
이미지 크게보기카리스마 넘치는 첨봉인 타우이라후의 위용. 파리아야영장에서 푼타우니온으로 향하는 길에 멋진 경치를 만났다. 첨봉의 왼편 끝에 푼타우니온 고개가 있다.
남미 안데스산맥에는 세계에서 가장 긴 산군이 있다. 높이로 따지면 세계에서 히말라야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바로 ‘코르디예라 블랑카Cordillera de Blancas’이다. 페루 중앙부에 위치하며 200km에 걸쳐 5,000~6,000m급 봉우리가 무려 500개나 솟아 있는 거대한 산군이다.
페루를 여행하는 백패커나 하이커들에겐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몇 년 전 백패킹으로 세계여행할 때, 내 발을 몇 개월이나 묶어놓은 곳이기도 하다. 걷고 싶은 만큼 걷고, 멋진 경치가 나타나면 그 자리에 잠자리를 마련하는 백패커들의 천국이다.
그중에서도 산타크루스Santa Cruz는 51km를 3박4일 일정으로 여유 있게 산행할 수 있어 가장 인기 있는 곳이었다. 여행사에 들러 대략적인 정보를 얻고, 위성지도 어플에 경로와 야영할 만한 곳을 저장해 두었다. 페루 여행 중 합류한 일본인 친구 마리는 어느 정도 고산 적응이 된 것 같다며 산타크루스 트레킹을 함께하고 싶어 했다. 다만 마리가 해외 트레킹 경험은 많지만 백패킹은 처음이라 걱정되었다. 일단 가보고 무리일 것 같으면 다음날 탈출하기로 하고 산행을 시작했다.
이미지 크게보기산타크루스 트레킹이 남미 최고로 꼽히는 건 그만큼 아름다운 장면이 많기 때문이다. 푼타우니온 고개를 지나면 산타크루스 하산길이 계곡 사이로 펼쳐진다.
블랑카산군의 거점도시인 와라스Huaraz가 출발지이다. 아직 어슴푸레한 오전 6시 반쯤 출발해 1시간을 달려 융가이Yungay(2,544m)에 도착했다. 융가이에서 차를 갈아타고, 다시 트레킹의 출발지점인 바케리아Vaqueria(3,600m)로 이동했다. 낡은 콜렉티보(현지의 미니버스)는 굽이진 산길을 달리며 고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정점에 다다랐을 때, 고도계를 보니 4,700m를 찍고 있었다. 급변하는 고도에 마리의 컨디션이 무너질까 걱정했지만, 마리는 괜찮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바케리아에 도착해 함께 타고 있던 프랑스인 커플과 우리 둘은 콜렉티보 위에 묶여 있던 배낭을 받아 내렸다. 데니스와 아벨린 커플과 통성명을 하고, 서로의 숙영지를 공유했다.
그들은 최대한 많이 걷고 경치 좋은 곳에서 묵을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마리의 컨디션에 맞춰 천천히 걸으며 숙영지를 정할 예정이었다. 데니스 커플은 백패킹이 익숙한 듯 인사를 하고 망설임 없이 먼저 출발했다. 바케리아에서 이어지는 길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지만, 데니스 커플을 따라 무리 없이 마을을 벗어났다.
해발 3,600m의 트레일 위에는 푸른 목초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 위로 식사에 열중하는 양떼가 구름처럼 둥둥 떠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 평화로운 곳이었다. 바케리아에서 5km 남짓 거리에 위치한 우아스카란Huascaran국립공원 입산 신고소가 나왔다. 미리 준비해 둔 국립공원 입장권을 확인하고, 간략하게 트레킹 스케줄을 적어 냈다.
이미지 크게보기들머리인 바케리아마을에는 길이 여러 갈래로 이어져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백구에게 응원 받은 일본인 친구
길은 약간 높낮이는 있지만, 서서히 고도를 올리고 있었다. 마리에게도 무리는 없어보였지만, 고산증에 대비해 천천히 걷도록 했다. 텐트를 포함한 대부분의 식량과 짐을 내가 짊어지고 있어 마리의 속도에 맞출 수는 없었다. 페이스대로 걷다가, 마리가 도착하면 서로의 컨디션을 확인하고 다시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바케리아를 출발한 지 4시간 만에 첫 번째 야영지 파리아Paria(3,860m) 야영장에 도착했다. 10km에 고도 300m를 내려갔다가 다시 500m를 올랐다. 크게 무리 없는 코스였지만, 초보자인 마리에게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낭을 풀고, 텐트를 쳤다. 야영장을 끼고 흐르는 계곡물을 떠와서 물을 끓였다.
이미지 크게보기아루아이코차에서의 야영. 여행사 일정에는 빠져 있는 곳이라 조용히 대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잠시 후 지친 기색의 마리가 백구와 함께 도착했다. 마리의 설명을 빌자면, “지쳐 쉬고 있는데 백구가 다가와 ‘여기서 멈추면 안 돼. 미정이가 너를 기다리고 있어. 힘내. 내가 함께 가줄게’라며 용기를 북돋아줬다”는 것이다. 평소 말장난을 잘하는 그녀이기에 농담인 줄 알고 박장대소를 했다. 그런데 마리는 사실이라며 정색했다.
내 경험상, 먹을 것을 쫓아 따라왔을 것 같았지만, 백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마리가 그로 인해 용기를 얻었다면 그걸로 다행이었다. 마리에게 따뜻한 커피를 건네주고, 백구에게도 감사의 의미로 소시지 하나를 주었다.
마리는 올라오는 길에 만난 당나귀 끌던 남자에게, “내일 아침 파리아로 데리러 와달라”고 했다고 한다. 새벽부터 이어지는 강행군에 지친 마리는 나에게 짐이 된다며, “되돌아간다”고 했다. 마리와 함께 걸으면 재밌고 좋겠지만, 내일은 해발 1,000m를 올려야 해서 강요할 수는 없었다.
이미지 크게보기‘BIEN VENIDOS!’ 융가이를 출발한 콜렉티보가 멈춘 바케리아의 상점에는 트레커들을 환영하는 문구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산타크루스 트레킹을 시작하는 트레커들은 이곳에서 추가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할 수 있다.
해발 4,750m 전망대는 구름 속
다음날 아침부터 마리는 온 야영장의 견공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는 그녀의 미소에 넘어가 최소한의 식량만 남겨놓고 나머지를 그녀에게 건넸다. 마리의 모습에서 홀가분한 마음이 느껴졌다.
아침식사가 끝나기도 전에 당나귀가 도착했다. 마리의 짐을 꾸려 먼저 보내고, 텐트를 철수했다. 컨디션이 좋다면, 야영하고 싶은 곳까지 장거리 이동할 계획이었다. 궂은 날씨가 변수였지만 상황에 따라 언제든 멈춰 텐트를 치면 된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조금씩 설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따금 파란 하늘이 보였지만, 2월의 산타크루스는 구름의 훼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은 첨봉 사이로 흘러내린 거대한 빙하 위에 생크림 토핑처럼 얹힌 구름이 고요한 호수에 반영되어 트레일의 명성을 실감케 했다. 3시간쯤 걸었을까. 멀리서 누군가가 부르는 듯했다. 푼타우니온Punta Union(4,750m)을 목전에 둔 모로코차Morococha(4,600m)호숫가 저편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곳에서 데니스 커플이 손짓을 하고 있었다.
이런 낭만적인 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니! 좋은 숙영지를 그냥 지나쳐야 하는 게 너무 아쉬웠다. 아벨린은 소시지 하나로 점심을 때우려던 나에게 토스트와 차를 건넸다. 데니스는 다음 숙영지는 어디냐고 물었다. 백패커들에게는 경치 좋은 숙영지를 정하는 게 최대 관건이었다. 나는 가능하다면 세계에서 손꼽히는 미봉으로 알려진 알파마요Alpamayo(5,947m)를 근접 조망하며 린리이르카Rinrihirca(5,810m)에서 흘러내린 빙하와 맞닿아 있는 아루아이코차Arhuaycocha(4,420m)에서 머물고 싶다고 했다.
해발 1,000m를 오르내리며 대략 17km를 걸어야 했다.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푼타우니온만 넘어가면 큰 고비는 넘기는 것이다. 컨디션에 따라 부담 없이 경치 좋은 곳 어디든 배낭을 내릴 준비는 되어 있다. 데니스는 좀더 여유를 부리다 여행사들이 야영하는 타우이팜파Taullipampa(4,250m)에서 묵는다고 했다. 먼 길을 계획한 나는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이미지 크게보기웅장한 타우이라후 봉우리를 조망할 수 있는 타우이팜파는 산타크루스에서 가장 멋진 숙영지이다.
거대한 바위산 위로 좁다랗게 이어진 길을 조심스럽게 올라섰다. 푼타우니온 전망대였다. 걸어온 길을 내려다보니, 실처럼 이어진 길을 중심으로 자그마한 호수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엄청난 높이와 거리가 실감이 났다. 주위를 둘러싼 웅장한 산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하늘은 구름을 쏟아내며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푼타우니온은 구름과 맞닿아 있었다. 거친 바람에 일렁이는 구름은 칠흑 같은 바위와 어우러져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내가 이 고개를 호락호락 넘어가게 둘 수 없다는 듯이. 고도는 최고조에 달해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조금만 더 오르면 더 멋진 풍경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그 풍경이 궁금해 안달이 나서 발걸음이 빨라졌다.
바위산을 가르며 이어진 고개의 정점에 다다랐다. 머리칼을 휘젓던 바람이 사라졌다. 인기가 많은 코스라서 그런지 길 위의 돌무지가 잘 정비되어 있었다. 암벽 사이를 빠져 나왔다. 드라마틱한 풍경을 기대했지만, 심술궂은 구름은 내가 상상했던 지상낙원을 상하로 반토막 내버렸다. 만년설을 머리에 얹고 기세등등하게 우뚝 솟아 있어야 할 고봉들은 하얀 어둠에 갇혀 버렸다. 산에서 쏟아져 내린 빙하가 녹아 든 타우이코차Taullicocha만큼은 에메랄드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산길은 크게 힘들지 않았다. 시시각각 움직이는 구름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고산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나쁘지는 않았다. 타우이팜파야영장에 도착했다. 반대쪽 카샤팜파Cashapampa에서 올라왔다는 여행사 팀이 자리 잡고 있었다. 6시간 동안 약 12km를 걸었다. 피곤하긴 했지만, 아직 오후 1시밖에 되지 않았다. 아루아이코차까지는 5km 정도 남았다.
고도를 천천히 끌어올리며 발을 옮겼다. 2시간 남짓 쉬지 않고 걸었다. 길은 수월했지만, 누적된 피로로 빨리 도착해 마음 편히 쉬고 싶었다. 설산을 덮쳐버린 구름이 나의 휴식 욕구를 짓누르는 것도 있었다. ‘4,420m 아루아이코차’ 팻말이 보였다. 드디어 도착했다. 작고 노란 꽃이 나를 환영해 주었다. 홀로 떠나는 백패커들이 머무는 곳이 틀림없었다. 돌무지 사이로 텐트 한 동이 들어갈 만한 너비의 공간이 군데군데 잘 닦여 있었다. 비밀장소를 독차지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호수 건너편 미끄럼틀처럼 흘러내린 빙하가 코앞에 있는 것 같았다.
텐트를 친 뒤 빙하까지 갈 수 있는지 길을 살펴보았다. 누군가 시도는 해본 듯하지만, 길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식사를 하며 알파마요를 바라보았다. 구름은 약을 올리듯 나를 둘러싼 설산들을 휘젓고 있었다. 순간 거짓말처럼 구름이 사라지더니 알파마요가 나타났다. 동쪽에서 바라본 알파마요는 사진 속에서 본 모습과는 달랐지만, 그에 못지않게 위엄이 있었다. 땅거미가 지자 조금은 음산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텐트 문을 닫고, 피곤한 몸을 따뜻한 침낭 속에 밀어 넣었다.
이미지 크게보기트레킹의 종착지인 카샤팜파에서 만난 현지 주민 아주머니. 땀에 절은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나를 가장 설레게 했던 말은?
아침이 밝았다. 아루아이코차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얄궂은 구름만이 공간을 휘젓고 있었다. 해는 구름을 뚫고 간신히 하얀 실루엣만 내비칠 뿐이었다. 이곳에서 하루 더 머문다면 정오쯤 잠깐 날씨가 좋아져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고민했지만, 마리가 무사히 하산했는지 걱정되어 야속한 구름을 원망하며 텐트를 정리했다.
어차피 몇 개월을 머물며 코르디예라 블랑카의 다양한 트레킹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타트는 이 정도로 만족했다. 알파마요는 알파마요 트레킹에서 다시 만날 것을 다짐하며 카샤팜파로 향했다. 길은 계곡을 따라 이어졌다. 고도를 1,500m나 낮췄다. 날씨도 좋아 파란 하늘을 보며 걷느라 힘든 줄도 몰랐다.
카샤팜파에 도착하자마자 마리에게 연락을 했다. 요리 솜씨가 좋은 마리는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놓겠다고 했다. 몇 개월 동안 홀로 여행을 하는 게 익숙해졌지만, 순간 그토록 설렐 수 없었다. 나를 기다리는 마리가 있다는 게 좋은 건지, 맛있는 음식이 좋은 건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이미지 크게보기여행사에서는 클라이언트의 낙오에 대비해 항상 당나귀와 동행한다. 클라이언트 대신 짐을 싣고 올라오는 당나귀 뒤로 타우이코차호수가 보인다.
산타크루스 트레킹 정보
일반적으로 바케리아에서 푼타우니온 패스를 넘어 카샤팜파까지 U자형으로 도는 약 50㎞ 코스 3박4일 트레킹이다. 여행사에 따라 들머리가 다를 수도 있다. 트레킹 적기는 5~8월이며 이외의 시즌에는 우기로 멋진 풍광을 만나기 쉽지 않다.
필자 단독 트레킹 코스
와라스~융가이 : 미니버스(콜렉티보)로 1시간 이동.
1일차 바케리아(3,600m)~파리아 (3,860m) 10km, 총 4시간 소요.
2일차 파리아~푼타우니온(4,750m) ~타우이팜파(4,250m)~아루아이코차 (4,420m) 17km, 총 8시간 20분 소요.
3일차 아루아이코차~야마코랄 (3,650m)~카샤팜파(2,900m) 24km, 총 6시간 소요.
주의사항
트레킹 최적기는 6~7월이지만 일교차가 심하므로 방한복은 항상 준비해야 한다. 이외의 시즌에 고산에 위치한 산타크루스 트레킹을 진행한다면 급변하는 날씨에 대비해 우의를 준비해야 한다.
단독 트레킹을 하는 경우, 산타크루스 트레킹은 바케리아를 들머리로 정하면 파리아야영장에서 약 3km 떨어진 곳에 7박8일 코스의 알파마요 트레킹과의 갈림길이 있기 때문에, 미리 경로를 숙지해야 한다.
알파마요 트레킹 코스로 빠질 경우 2~3일은 탈출하기 쉽지 않다.
융가이나 카샤팜파에서 푼타 우니온까지는 고도차가 1,800m 이상 나므로, 고산에 익숙하지 않은 트레커는 고산증약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비교적 쉬운 트레킹 코스이긴 하지만 날씨와 고산 컨디션으로 인한 조난의 위험이 있으니, 식량은 하루나 이틀 치를 추가로 준비하는 것이 좋다.
본 기사는 월간산 6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