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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4: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1 어린 신앙은 유업을 얻을 수 없다
우리의 조상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믿음으로 계약했다. 왜냐하면 10가지 재앙을 보았고 바다를 갈라 애굽의 칼로부터 건져주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그러한 구원의 하나님을 모든 백성은 믿고 말씀대로 행할 것을 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바로 이 상태가 어린 믿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직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단계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지식에만 있는 상태가 어린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어린 신앙으로는 유업을 얻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은 입술의 고백에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씀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아버지의 마음을 결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운전사의 마음을 알려면 운전에 대한 공부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직접 운전해보아야 그 마음을 아는 것과 같다. 지식과 살아냄은 깨달음의 깊이가 차원이 다르다. 그러므로 말씀을 깨닫지 못한 사람의 믿음의 고백은 너무 가벼워 작은 어려움에도 넘어진다.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몸과 마음과 힘과 목숨을 다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이 가르치는 장성한 예슈아의 믿음이다. 예슈아의 믿음은 아브라함에게도 다윗에게도 수많은 선지자들에게도 요구하셨고 계시하셨다. 이러한 순교 신앙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말씀이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말씀 뿐이다. 그리고 말씀이 하나님이다. 그 가치와 비밀을 안다면 영원한 말씀을 위해 기꺼이 생명을 다할 것이다. 그것이 예슈아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헌신이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시119:18,27)
# (갈4: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2 어린 아이를 지키는 율법
여호와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들이 믿음을 만나기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두신다. 당신의 아들들인 이스라엘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배우도록 하신다. 즉 선생님 아래서 율법을 배우게 하시고 규칙과 법도를 배우게 하시는 것이다. 왜 어린 아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직 신뢰하지도 않을 때 법도들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시는 것일까? 과연 어린아이에게 법도와 규칙을 가르치는 의미가 무엇일까? 이유는 무엇이 죄(불의)이고 무엇이 선한 행동(의)인지 가르쳐주어 자유와 한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특히 아직 선악을 판단하지 못하고 백지와 같은 어린 아이에게 하나님의 가치관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이다. 초신자도 동일하다. 이때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은 성인이 되어 살아갈 때도 기준이 되어 올바르게 판단하게 하고 가장 중요한 자기 조절을 배우게 한다. 절제하게 하고 책임과 의무를 배우게 한다. 아직 하나님을 잘 모르고 신뢰하는 것도 모르는 어린 신앙일 수록 이러한 죄와 의로움에 대한 기초를 가르치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자라나면서 의로운 말씀이 삶에서 경험되는 순간 말씀이 살아있고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믿음이 생기고 그때부터는 성숙해가는 신앙인으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땐 율법 때문에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진리이고 사랑이기 때문에 지키게 될 것이다. 이것이 율법 아래있는 것이 아닌 자유자로서 지키는 모습이다. 사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 같지만 율법이 우리를 지킨다. 왜냐하면 율법이 있기 때문에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들이 보호 받고 율법이 있기 때문에 종이 자유를 얻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공의로운 재판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에 공의와 사랑과 자유와 평등과 심지어 권리까지 거절하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무지함으로 때문에 가장 중요한 울타리를 스스로 무너뜨리기도 한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히5:13,14)
# (갈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3 세상의 초등학문은 무엇인가
세상 초등학문이 무엇일까? 우선 세상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일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판단을 할 수 있어야 세상을 안정감있게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치관의 혼란 시기인 사춘기가 오는 것이다. 그러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무엇일까? 무엇이 선한 것이고 무엇이 악한 것일까? 우린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을 모두 사단의 속성인 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정말 그런가? 선과 악을 모른다면 그는 앞뒤도 분간하지 못하고 판단할 수 없는 어리석은 자일 것이다.
태초에 에덴에는 두가지 나무가 있었다. 하나는 생명 나무이고 하나는 선악과이다. 이름 때문에 사람들이 혼동하고 오해하지만 쉽게 말하면 하나는 생명 나무이고 하나는 반대로 사망 나무이다. 왜냐하면 그 나무 실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창2:17). 그러므로 사망 나무는 무엇인가? 바로 신명기 28장에서 말하는 불순종의 나무이다. 생명 나무는 무엇인가? 신명기 28장에서 말하는 순종의 나무이다. 즉 사망 나무는 불순종의 가치관으로서 그 마지막은 사망이다. 다시 말해 사단이 말하는 선과 악을 말한다. 반대로 생명 나무는 반드시 살게하는 순종의 가치관이다. 즉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선과 악의 가치관을 말한다. 그러므로 생명 나무는 하나님의 판단의 법도인 율법 히브리어로는 토라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생명나무와 사망 나무 모두 선악에 대한 개념이다. 단지 하나님의 가치관이냐 사단의 가치관이냐의 차이이다. 따라서 생명 나무는 율법 나무이고 사망 나무는 불법 나무라고 할 수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이처럼 세상의 기초는 판단의 법도이다. 다시 말해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관이다. 그러나 어린 아이 신앙일 때는 아직 기초가 없어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온전한 율법을 배우지 못하고 섞인 율법을 배우게 된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는 사람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배우는데 가르치는 사람의 해석과 가치관이 섞여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신앙일 때 사람에게 종노릇한다는 부정적인 단어를 쓴 것이다. 이는 가르치는 사람의 명령과 전통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신앙으로는 유업을 받지 못한다. 아직 스스로 선악을 온전하게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문제는 율법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언제나 문제는 사람에게 있다. 그래서 율법에 작은 것이라도 더하거나 빼는 것이 죄인 이유이다. 그렇다고 사람에게 율법을 배우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성령을 통해 사도와 교사의 직분을 세우신 것은 성도로 온전하게 하기 위함이다(고전12:28). 즉 아직 믿음이 없는 어린 신앙, 말씀을 경험해보지 않은 새신자가 겪는 과정이다. 그러나 언젠가 진정한 믿음과 순종을 만나 진리 안에서 자유케 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성숙한 믿음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계22:18,19)
4 세상 초등학문은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세상 초등학문은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이 섞인 율법이라고 했다. 사실 섞인 율법은 더이상 율법이 아니다. 율법을 가장한 사람의 명령일 뿐이다. 예를 들어보자.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율법이 있다. 거기에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 불을 키거나 끄지 말아라" 라고 가르친다면 불을 키거나 끄면 계명을 어긴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게 해석한 사람의 명령을 어긴 것이다. 이처럼 사람의 잘못된 해석이 섞였다면 더이상 율법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전통이나 철학이라고 말하는 게 더 맞다. 그렇다면 골로새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골로새서도 세상 초등학문은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이고 철학과 속임수라고 말하고 있다. 속임수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명령인 줄 알았는데 그럴 듯하게 하는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철학이라는 말을 통해 가치관을 통해 전해지는 학문 또는 교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이라는 말을 통해 사람을 통해 가르쳐지고 따라서 사람의 종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골2:8,16)
그런데 왜 많은 사람이 골로새서에서의 세상 초등학문이 율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와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골2:16)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등학문을 율법이라고 오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율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명령과 가르침인데 세상 초등학문은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이라고 말했고 헛된 속임수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골로새 교인들에게 왜 이러한 경고를 했을까? 율법을 안지키는 것을 비판하지 말라고 율법은 세상 초등학문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 뜻이 아닌 것은 이미 앞에서 말했다. 그렇다면 반대의 의미일 것이다. 즉 율법을 지키고 있는데 비판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왜 율법을 지키고 있는데 비난을 받을까? 왜냐하면 사람의 전통을 기준으로, 철학(교리)을 기준으로 비판하기 때문이다. 당시 예슈아께서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한다고 책망하셨다(마15:3). 이처럼 예슈아의 제자들은 계명을 폐하는 사람의 전통을 지키지 않았다.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고 유익한 전통은 지켰다. 그러나 당시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골로새 교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예슈아의 제자들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외식하는 자들 눈에는 불법처럼 보였던 것이다. 또한 세상의 규례를 순종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몸을 괴롭게 할 뿐이다'(골2:21-23) 즉 금욕주의 철학이 규례가 되어 사람들을 속이며 율법처럼 가르쳐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골로새서에서 말하는 세상 초등학문도 율법에 사람의 가르침과 명령이 섞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율법인척하는 사람의 가르침, 유대인인척하는 자칭 유대인, 그리스도인척하는 적그리스도 이 모든 것이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하는 사단의 속임수이다.
율법이라고 속이는 전통과 거짓 가르침 때문에 예슈아께서 죽으셨다. 율법에 더하거나 빼는 것은 죄이기 때문이다. 예슈아께서는 죄를 없애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요일3:5). 어린 신앙일 때는 어쩔 수 없이 섞인 율법을 배울 수 밖에 없지만 예슈아의 믿음을 만난 우리는 이런 거짓 가르침을 버리고 율법의 진정한 목적을 성취해야 한다. 그래서 예슈아께서 율법 아래있는 자들을 구속하시러 오신 것이다. 진정 하나님의 아들로 자유자의 아들로 살기 위해서는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골2:20-22)
5 샤밧, 월삭, 절기, 코셔는 장래 일의 그림자이다
어떤 사람들은 샤밧, 월삭, 절기와 코셔가 그림자이기 때문에 실체이신 예슈아께서 오셨으므로 더이상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문장을 잘 살펴보면 그림자는 예슈아의 그림자가 아니라 장래 올 것의 그림자이다(골2:17). 샤밧은 안식일이다. 샤밧은 안식의 나라를 상징한다. 유월절은 영생을 주기 위해 예슈아께서 속죄하신 것을 의미하고 초막절은 예슈아께서 왕으로 오셔서 다스릴 나라와 영원한 나라를 상징한다.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나라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말은 우리가 예슈아의 아내로서 남편의 소유인 것을 말하고 우리가 교회로서 예슈아께서 머리되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을 더이상 그림자가 필요없다고 이해하면 안된다. 이 땅은 오는 세상의 그림자이고 우리의 육체는 부활체의 그림자이다. 본질이 있기 때문에 그림자가 필요없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가 있기 때문에 영원한 것을 훈련받고 거룩하게 된 자들이 그날에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말씀의 가르침이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이 거절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사람의 명령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골2:22). 다만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명령을 사람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명령으로 변질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2:17)
# (갈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토라의 지배를 받는 자가 속량의 대상이다
정말로 놀라운 말씀이 여기 있다. 지금까지 어린 신앙은 세상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 노릇하고 유업을 받을 수 없고 철학과 속임수로서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경고하셨는데 놀랍게도 예슈아께서 우리처럼 율법 아래 나셨다는 것이다. 우리와 똑같이 불완전한 종교인들 아래에서 율법을 배우셨다는 말이다. 온전한 율법이 아닌 그들의 왜곡된 가치관과 사람의 명령이 섞인 율법이었을 것이다. 우리와 똑같이 사람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율법 아래 나시게 하신 것은 바로 우리 같은 자들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함이다. 우리가 진정한 믿음으로 말씀을 깨닫기 전에 알지 못하고 지은 모든 죄를 씻어 주시고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것이 예슈아께서 오신 이유이다. 우리가 진정한 믿음을 만나게 되면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신다. 전에는 우리가 잘못 배우고 믿음과 사랑과 공의가 없이 종교생활을 했다면 진정한 믿음은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다. 이처럼 예슈아의 죽으심과 부활은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으로 자유가 없이 억압을 받고 있던 모든 자에게 소망을 주신다.
한편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접붙여졌다. 그러나 이 믿음은 아직 어린 신앙이다. 선악을 판단할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홍해를 건너고 광야에서 순종을 훈련받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선악을 판단하기까지 율법아래에서 순종을 훈련 받아야 한다. 이것이 어린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너무도 당연한 성장 과정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장성한 믿음의 수준에 도달하면 마침내 자유자의 아들로서 토라안에서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히4:6,11)
# (갈4:6,7)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7 종이 아니라 아들이다
성경은 어린 신앙을 종이라고 부른다. 굳이 왜 종이라고 표현할까? 그냥 어린 신앙 또는 부족한 신앙 등 다른 표현을 쓰지 않고 종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가 무엇일까? 분명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종’과 대비되는 단어가 있다. ‘아들’이다. 하지만 종이라는 개념은 꼭 나쁜 의미는 아니다. 우리도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문제는 세상 초등학문이 사람의 명령이기 때문에 어린 신앙은 사람의 종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성숙한 믿음은 종이라고 표현하지 않을까? 이것도 하나님의 종이라고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종으로 삼으려는 것이 아님을 이 단어로 알 수 있다. 즉 유업을 얻는 아들로 부르셨고 진정한 자유자가 되어 하나님을 섬기라고 부르셨다. 여기서의 자유는 분명 죄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러므로 우린 두가지를 볼 수 있다. 어린 신앙은 결국 누군가의 종이 될 수 밖에 없고 성숙한 신앙은 누구의 종도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법도를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우린 사람의 전통을 버리는 것을 두려워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을 거절할 때 주어지는 하늘의 유업을 안다면 우린 당장에 버리고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것이다. 다만 우리가 아직 용기와 믿음이 없어 그렇게 하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사람의 명령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시작할 때 그 믿음을 의롭다 하시고 더 나아가 생명을 다해 지킬 수 있는 장성한 믿음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마19:2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롬6:16,19)
8 한(에하드) 공동체로 한배에 탔다
‘아바 아버지’에서 אבא (아바)는 히브리어를 그대로 음역했고, ‘아버지’는 헬라어 πατήρ (파텔)을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는 히브리어로 다른 하나는 헬라어로 아버지를 두 번 반복한 것이다. 그래서 헬라어나 한글 번역으로는 에하드(하나) 개념을 볼 수 없다. 반면 히브리 번역은 אבא אבינו(아바 아비누, 아버지 우리 아버지)라고 번역하여 אחד(에하드) 개념을 볼 수 있다. 성경에서는 ‘우리 하나님’이나 ‘우리 아버지’라고 대부분 쓰고 있기 때문에 히브리 번역이 더욱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에하드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공동체(하나) 개념이므로 함께 살펴보는 게 좋겠다.
불행히도 현대 기독교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사적인 믿음과 개인주의적인 ‘고독한 방랑자’ 믿음이다. 하지만 교회는 개인주의자들의 모임 이상이 되어야 한다. 개인은 결코 단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공동체에 대한 히브리적 개념에 있어서 유대 학자 랑게(Nicholas De Lange)는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그룹, 즉 유대 백성에 속하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민족 즉, 그룹에 대한 뿌리 깊은 성경적 강조는 대부분 기도가, ‘나’라는 단수 대신 ‘우리’라는 복수 형태로 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예슈아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6:9)에서도 잘 표현되어 있다. 현대 유대 공동체에서, 유월절 의식에 참여하는 모든 유대인은 자기 자신을 (단순히 그들의 조상들만이 아니라)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과 동일시하도록 요구된다. 즉, 모든 유대인은 바로 자신들이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서 있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그래서 토라는 모세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유대인 개개인에게 주어진다.
비슷한 방식으로 인간 생명의 신성성이 집단적 인격의 개념에 있어서 기본이 된다. 미쉬나는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이라도 멸망시킨 사람은 모든 세계를 다 멸망시킨 사람으로 여겨야 하며, 한 생명이라도 구원한 사람은 온 세계를 구원한 사람으로 여겨야 한다.”(산헤드린4:5) 또한, ‘세계 유대인’(World Jewry) 은 오랫동안 공동체의 모델 역할을 해왔다. 히브리어 משטת(미쉬파트)는 ‘가족’을 뜻한다. 하지만 미쉬파트는 단순히 부모나 자녀들만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체 사회 단위로서 아저씨, 아주머니, 먼 사촌까지 모두 포함한다. 더욱이, 각자 자신들을 전 세계 유대인 가족의 일부로서 생각한다. 오랜 옛날부터 유대인들은 모든 사람을 의미해왔다. ‘그의 형제를 지키는 자’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이웃의 어려움과 필요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사실, 그 누구도 이웃과 완전히 격리해서 사는 사람은 없다.
이러한 점을 잘 설명해주는 극적인 이야기가 탈무드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한 배에 세 사람 탄 이야기’이다. 세 사람이 한배를 타고 있었는데, 그들 중 한 사람이 갑자기 자기 자리 밑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당장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말렸다. 그러자 그는 “너희들이 왜 염려하냐? 나는 다만 내 자리 밑에 구멍을 뚫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랍비들이 이끌어낸 이 공동체 교훈은 거듭거듭 되풀이해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우리는 모두 한배에 탄 운명 공동체이다.
샤밧 예배: 토요일 11시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헌금 계좌
농협 301 0293 8190 01
깃발 재작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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