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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오전에 춘천 KBS홀에서 춘천 시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한 후 서울로 이동해 저녁에는 서초구민회관에서 서울 시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먼저 춘천에서 열린 즉문즉설 강연 소식부터 전해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새벽 예불과 기도를 마치자 마자 5시 30분에 울산 두북을 출발해 춘천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도중 소백산을 지나갔는데, 소백산 정상에는 몇 일 전 내린 눈이 아직도 하얗게 쌓여 절경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울산에서는 아침 기온이 0도였는데, 점점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추워지더니 영하 4도까지 떨어졌습니다. 바야흐로 겨울 초입에 들어선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 소백산
스님은 어제 하루 종일 김장 준비와 농사일을 하고, 밤에도 밤새 원고 집필 작업을 하셔서 그런지 차 안에서 깊은 숙면을 취하셨습니다.
아침 7시에는 휴게소에 들러 간단히 식사를 한 후 10시가 조금 넘어서 춘천 KBS홀에 도착했습니다.
▲ 춘천 KBS홀
12월의 첫날. 한 달 전부터 춘천정토회 산하의 정토법당에서는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오늘 강연을 홍보하기 위해 전단지와 현수막을 들고 춘천 시내 전역을 누비고, 카카오톡으로 지인들에게 열심히 홍보 메시지를 전했다고 합니다. 그 노력의 결실이 바로 오늘입니다.
▲ 시민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춘천정토회 자원봉사자들
호수의 도시 춘천은 안개가 많은 도시인데 오늘도 영하의 날씨에 약간의 안개가 끼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강연장에 모인 봉사자들의 얼굴엔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났습니다. 긴장 속에서도 서로를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 짓는 모습에 금세 긴장과 추위도 녹아나는 듯 했습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20대 대학생들, 현수막을 보고 오신 60대 남성분, 지인의 소개로 오셨다는 분, 부모님의 권유로 오셨다는 분 등 많은 분들이 강연장을 찾아 관중이 자리를 꽉 채웠습니다.
총 550여 명이 자리한 가운데 스님 소개 영상이 끝나고 스님이 등장하자 관객들은 박수로 스님을 반겼습니다.
먼저 스님은 즉문즉설은 곧 야단법석이라고 하면서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야단법석은 법상을 법당이 아닌 바깥에 내어놓고 불교라는 좁은 주제뿐 아니라 인생 전반에 대해 자유로이 이야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다보니 엄숙하기보다는 웃기도 울기도 하며 좀 시끌벅적합니다. 조용해야 할 절이 시끌벅적해서 무슨 일인지 물어보면 ‘지금 야단법석을 하고 있다’고 대답하니까 시끌벅적하면 ‘야단법석이다’고들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곳에서 그렇게 야단법석을 해봅시다. 거룩하고 고상한 이야기만 하지 말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겪는 고민이나 의문이 있다면 무엇이든 이야기해봅시다. 그런 대화의 광장이 즉문즉설입니다.”
스님의 말씀대로 오늘은 정말 고상한 법당이 아니라 누구나 찾아올 수 있는 공개홀에서 야단법석이 펼쳐진 셈입니다. 스님의 이야기가 끝나자 마자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분들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오늘은 총 5명이 질문을 했습니다. 첫번째 질문자는 돈까스 식당을 10여 년 간 운영하고 있는 여성분으로 신 메뉴나 새로운 광고를 제안하면 늘 반대하는 남편에게 화가 나는 자신을 보며 참회의 기도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었습니다. 두번째 질문자는 홀시아버지 봉양 문제로 마음의 괴로움을 느낀 여성분이었는데 해결책을 질문했고, 세번째 질문자는 올 2월에 남편의 불륜을 알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갖느라 4살짜리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 그 원망을 남편에게 돌리며 화를 내는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네번째 질문자는 외국 항공사에서 10년 정도 승무원으로 일하다 퇴사를 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어떤 곳에 취직을 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습니다. 다섯 번째 질문자는 한글 천수경을 읽다가 ‘죄무자성 종심기’로 시작하는 구절이 궁금하다며 그 뜻을 물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첫 번째 질문인 식당을 운영하면서 생긴 남편과의 갈등에 대한 스님의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스님은 질문자가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을 지적해 주면서 괴롭지도 않으면서 변화도 가져올 수 있는 일거양득의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참회의 의미도 함께 설명해 주었습니다.
“남편과 작은 식당을 10년째 운영하고 있는데 제가 새로운 메뉴나 광고 방법에 대해 의견을 낼 때마다 남편이 항상 ‘그건 안 돼’라는 말을 먼저 합니다. 어떤 이유를 들어서든지 계속 안 된다고만 하니, 저는 변화를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이 많았지만 거의 해보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맞서 싸워도 보았지만 이제는 제가 점점 포기하다 보니 남편에게 불만이 쌓여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게 됩니다. 어떨 때는 아이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물건을 집어던질 정도로 화를 주체하기 어렵고, 화가 날 때 아이들이 옆에 오면 아이들에게도 화를 냅니다. 스님 법문을 들어보면 남편에게 참회기도를 하라는 말씀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다른 분들의 상황은 이해가 되는데, 제 상황에서는 어떻게 참회 기도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기에 여쭙습니다.”
“남편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질문자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솔직하게 말해보세요.”
“둘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질문자의 문제는 뭐예요? 남편의 문제는 뭐고요?”
“저는 제 주장을 많이 하려는 게 문제인 것 같고, 남편은 제 주장을 꺾으려 하는 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청중 웃음)
“남편이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데 질문자가 참회를 한들 어떻게 참회가 되겠어요? 참회한답시고 절하다가 ‘왜 내가 참회를 해야 돼? 남편이 문제지’ 해서 염주를 집어던지게 될 텐데요.” (청중 웃음)
“어떻게 참회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세세생생 지은 제 죄를 참회합니다’ 하고 30일 동안 아침에 기도하긴 했어요.”
“그렇게 엉뚱하게 기도하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억지로 하면 반발심만 생깁니다. 죄 안 지은 걸 지었다, 내가 잘못 안 한 걸 잘못했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염주 집어던지는 건 물론이고 스님까지 미워져요.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지,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라는 것이 참회가 아닙니다. 인천 사람이 서울 가는 길을 묻기에 동쪽으로 가라 했는데, 그걸 본 춘천 사람이 서울 간답시고 동쪽으로 가면 바다에 빠져 죽어요. (청중 웃음) 참회는 그렇게 무턱대고 흉내 내는 게 아니에요. 인천 사람이 서울 가려면 동쪽으로 가야 하지만 춘천 사람은 정반대인 서쪽으로 가야 하잖아요. 그렇게 섣불리 접근하면 안 돼요.
우선 물어볼게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지난 10년 동안 남편이 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장사를 했는데 가게가 망했어요? 안 망했어요?”
“아직 망하지는 않았어요.” (청중 웃음)
“망하지는 않았지만 질문자에게는 자기 의견대로 했으면 가게가 더 잘 됐겠다는 생각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남편은 자기 생각대로 했기 때문에 안 망했다고 생각할 겁니다. ‘수많은 가게가 장사를 접는 가운데서도 우리가 이나마 안정되게 사는 것은 내가 고집해서 이렇게 꾸려온 덕분이다’라는 생각이 있어요. 그런데 질문자 생각대로 해서 잘 됐을지, 망했을지, 남편 생각대로 해서 발전을 못한 것인지, 안 망하고 유지된 것인지는 지금 알 수 없어요. 누가 옳은지 객관적으로 증명할 길이 없잖아요.
그러니 이 문제만을 놓고 볼 때 남편 입장에서는 그래도 자기 생각대로 해서 아내를 말렸기 때문에 이만큼 유지한다고 생각할 확률이 높아요. 남편하고 살아보지도 않고 가게를 10년간 지켜보지도 않은 스님이 어떻게 잘 아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오늘 집에 가서 술상을 잘 차려 대접하고 남편이 취기가 돌 때 슬쩍 말을 붙여보세요.
‘여보, 나는 그 동안 내 식대로 했으면 가게가 잘 되었을 거라는 생각밖에 안 해서 당신한테 화도 내고 당신을 미워도 했는데, 오늘 스님하고 대화하다 보니 내 생각대로 해서 오히려 망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어요. 나는 변화를 추구하고 당신은 안전을 추구했는데 지금 가게가 안전한 것은 당신 덕택인 것 같아요.’ 이렇게 반성하는 자세로 말을 붙여보세요. 꼭 ‘내가 뭘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당신 마음을 몰라줬다’는 뜻에서 이렇게 이야기해보세요. 그러면 ‘그걸 이제야 알았냐? 당신은 스님 말은 들으면서 내 말은 아무리 해도 안 듣더라.’ 십중팔구 이렇게 나올 겁니다.
남편이 가게의 발전을 반대하거나 가게가 망하기를 바랄 아무런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데도 질문자를 말린다는 것은 남편의 성격이나 가치관이 모험보다 안전을 중요시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이미 장사를 하고 있으니 당연히 안전하리라는 것을 전제로 두고 변화와 도전을 중요시하는 편입니다. 질문자가 나쁜 건 아니에요. 그러니 반성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안정과 변화가 모두 필요해요. 안전을 중요시하는 쪽을 보수, 좀 바꿔보자는 쪽을 진보라고 합니다. 한쪽이 옳고 다른 쪽이 그른 게 아니에요. 안전 위에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안전만 고집하면 사회가 정체되고, 변화만 주장하면 사회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이든 사람은 대체로 안정을 추구하려 들고, 젊은 사람은 변화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은 대체로 변화를 추구하고, 내륙에 사는 사람은 안정을 추구하는 성향이 큰 편입니다. 가진 게 좀 있는 사람은 안전을 추구하고, 아직도 더 가지고 싶은 사람은 변화를 추구합니다. 어차피 지금도 불안정하기는 매한가지니까 이리 되든 저리 되든 한번 도전해보자고 생각하거든요.
북한 안에서도 일반 국민들은 변화를 추구하고 권력자들은 안정을 추구합니다. 남북을 비교해 보면 삶이 불안정한 북한 쪽이 훨씬 더 변화를 추구하고요. 8월 25일에 남북 협상이 타결되었을 때 우리는 전쟁을 피했다고 안도했지만 북한 주민들은 엄청나게 실망했어요. 꼭 전쟁을 하고 싶다는 게 아니라, 워낙 살기가 힘드니까 남북 갈등으로 꽉 짜인 조직이 느슨해지면 전쟁을 하든 중국으로 도망가든 어떤 변화든 시도하고 싶었으니까요. 전쟁이 나면 지금의 삶조차 보전이 안 되는 데도 불구하고 사람의 심리가 그렇습니다.
질문자는 변화를 추구하고 남편은 안전을 추구합니다. 아마 가족 전체 분위기나 자라난 환경도 많이 달랐을 거예요. 이럴 때 둘이 갈등을 일으키면 변화를 추구하는 쪽이 안달하게 됩니다. 지금 정계를 봐도 야당 의원들이 안달하지, 대통령과 여당은 느긋하잖아요. 안정을 추구하는 쪽은 이미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상대편이 뭐라고 해도 신경을 안 씁니다. 바깥에서는 변화를 추구해야 된다고 애쓰다가 안 되면 좌절하고 화도 내게 되죠.
그러나 이러면 요란하기만 하지 실제 변화가 거의 없어요. 질문자가 화를 내고 남편과 아이들에게 성질을 부리는 것은 질문자가 원하는 식당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어요. 변화를 추구할 수 없으니까 스트레스를 받아서 화가 난다는 심정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식당에 변화를 가져오기는커녕, 오히려 아내가 하자는 대로 하면 식당이 망할 것이라는 남편의 불신을 강화할 뿐입니다. 물건을 집어던진다는 것은 자기 성질대로 안 되면 미쳐 날뛴다는 이야기잖아요.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식당을 맡기겠어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남편 말을 따라도 지난 10년간 식당은 유지되어 왔으니 앞으로 남편 말을 따르면 10년은 더 유지될 거예요. 이 사람은 안전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니까 질문자가 원하는 만큼 변화는 못 시켜도 안전은 장담할 수 있잖아요. 새로운 안을 낼 때는 항상 안전을 기본으로 해서 변화를 추구해야 해요. 그러니 남편의 반대에는 안전을 중요시한다는 좋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그럴 수 있겠다’ 하고 받아들이는 게 필요합니다. 질문자의 의견이 안 받아들여져도 나쁜 게 아니라는 점을 알고, 지금처럼 미쳐 날뛰는 것을 그만둬야 해요.
질문자의 화는 남편의 고마운 역할에 대한 질문자의 이해 부족으로 생겨난 화입니다. 질문자가 뭘 해보려는 게 잘못된 게 아니라, 남편의 성질을 질문자가 이해하지 못해서 남편을 나쁘게 생각하는 게 잘못됐다는 겁니다. 이제 뭘 참회해야 하는지 이해하시겠지요? 잘못이 반반씩이라며 참회를 하면 절을 하다가도 ‘나만 잘못했냐? 너도 잘못했잖아’라는 생각이 들어서 참회가 안 돼요.
두 번째, 변화를 추구하지 않더라도 남편을 미워할 일은 아닙니다. 어차피 지난 10년간 변화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변화하기 어렵다면 싸우면서 변화 안 하는 것보다 안 싸우면서 변화 안 하는 게 나아요. (청중 웃음)
질문자는 변화도 못 시키면서 싸움만 일으켰으니 어리석다고 할 수 밖에요. 지혜로운 사람은 싸우지 않고 그냥 살든지, 싸우지 않고도 변화를 이루어냅니다. 나도 좋고 너도 좋은 최상책은 싸우지 않고 변화시키는 것이에요. 중책은 그대로 유지하더라도 싸우지는 않는 것이고, 하책은 싸우면서 그대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건 아무 쓸모없는 짓이에요. 질문자는 지금까지 쓸모없는 짓을 해온 셈입니다.
남편 말을 들어서 지금까지 안 망하고 잘 해왔으니 고맙게 생각하고, 이제 내가 어떤 시도를 해도 남편이 항상 안전은 담보해주겠거니 하고 고맙게 생각하세요. ‘남편은 사실 고마운 사람인데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뭘 반성해야 할지 알 수 있어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고 하면 그게 나한테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변화를 시도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조금씩, 편안하게 시도해 보세요. 메뉴가 10가지 있다면 한꺼번에 3가지를 바꾸자고 하지 말고 하나만 실험삼아 해보자고 제안하는 겁니다. 기간도 한 달이든 석 달이든 정해서 딱 그만큼만 해보고 별로 손님이 없으면 그만두겠다거나, 주문이 복잡해지면 질문자가 시험 메뉴를 맡겠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안전에 위험을 주지 않는 선에서 실험적인 방법을 제시하면 남편이 생각하기에 조금 쓸데없다 싶더라도 그 정도로는 가게가 어려워지지 않겠다 싶어서 허락해줄 겁니다. 그렇게 점진적으로 접근하는 게 좋아요. 하나도 안 된다는데 한꺼번에 3개를 바꾸려 들면 안 돼요. 그러니 처음에는 하나만, 그것도 기한을 정해두고 제안하세요. 재료 양도 하루 몇 인분만 준비해서 팔겠다고 제한하고, 바깥에 홍보하지 말고 식당 안에 ‘특별 메뉴’라고만 붙여놓고 실험삼아 해보는 거예요. 그래야 실패해도 부담이 적어요. 괜히 떠벌려서 했다가 실패하면 ‘내 말 안 듣고 까불더니 그것 봐라!’ 이런 소리 듣습니다. (청중 웃음)
그렇게 실험적으로 해보고, 하나가 성공했다고 해서 ‘그것 봐라, 되지? 내 말대로 하면 다 됐을 텐데 당신 때문에 못 했잖아.’ 이러고 성급히 일을 벌리면 안 돼요. ‘실험해보도록 허용해줘서 고마워. 당신 협력 덕분에 잘 됐네’ 이렇게 칭찬해주고, 정식 메뉴로 올리고 좀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여보, 이런 것도 실험 한번 해볼까?’하고 다음 안을 내야죠.
지난 10년 동안 이렇게 했다면 벌써 메뉴를 다 바꾸고도 남았어요. (청중 웃음) 싸울 필요도 없고 애들한테 성질낼 필요도 없었는데 질문자가 바보같이 한 거예요. 그러니 ‘내가 어리석어서 괜히 분란을 일으켰습니다. 남편 마음을 몰랐습니다’ 이렇게 참회를 해야 해요. 남편이 적도 아닌데 내 인생을 왜 반대하겠어요?
아이가 강가에서 놀고 싶다고 하면 부모가 허락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자기가 잘 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더 많이 살아본 부모가 보면 위험해 보이니까요. 부모는 항상 자식의 안전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어릴 때는 부모 말을 듣는 게 좋아요. 그런데 나이 들면 부모 말을 들으면 망해요. (청중 웃음) 부모는 안전밖에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이란 때로는 도전도 해야 하고 위험도 감수해야 하는데, 자식에게 위험을 감수하라는 부모는 하나도 없습니다. 나이 80인 어머니가 나이 60인 아들더러 길 조심하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부모 말을 다 들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부모가 그 말을 잘못 한 건 아닙니다. 그게 바로 부모의 심정이란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조심히 다녀오겠습니다’ 이렇게 말해야지 ‘제가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그러세요’하고 화를 내면 안 돼요. 그러나 부모가 시키는 대로 늘 조심만 하면 인생에 비전이 없죠. 그러니 좀 거역해도 괜찮습니다.
거기다가 부모가 아닌 남편과는 의견이 다를 때 더 조율하기가 어렵죠. 그래서 질문자가 가끔 의견을 내서 실험삼아 해보자고 제안하고, 그것마저 못하게 하면 질문자가 하고 싶은 요리를 집에서 그냥 만들어 식탁에 올리세요. (청중 웃음) 만들겠다고 미리 말하면 또 수작부린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냥 요리해서 내놓고 남편이 ‘이거 맛있네’ 하면 ‘그래? 그럼 우리 가게에서 잠깐 해볼까?’ 이렇게 접근해야죠.”
“네. 감사합니다.” (청중 박수)
스님이 얘기해 준 갈등하지 않고 변화시켜 나가는 방법에 대해 질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반가운 화색을 내비쳤습니다. 청중들도 스님이 제시한 방법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공감의 박수를 쳤습니다.
스님은 마지막 다섯번째 질문자의 ‘죄무자성종심기’라는 표현이 포함된 천수경 한 구절의 뜻을 질문한 내용에 답하면서 앞에서 질문한 남편과의 갈등 해결법이 어떤 교리와 원리에 따라 설해진 것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남편과의 갈등과 이에 대한 스님의 처방이 불교 교리와 이치적으로 딱 맞아떨어지면서 그 명쾌함에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천수경을 읽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어서 질문드립니다. ‘죄업이란 자성이 없어 마음따라 일어남에, 마음 자체가 멸한다면 죄도 또한 사라지니, 죄도 없고 마음도 멸해 한적해진 본래 자리, 이 도리를 증득하면 참된 참회가 되오리다.’ 이 구절의 뜻을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여기 있는 컵을 물병과 비교해보면 컵이 작습니다. 이 뚜껑과 비교해본다면 컵이 큽니다. 그런데 컵만 딱 들고 보면 이 컵은 커요? 작아요?”
“잘 모르겠습니다.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합니다.”
“질문을 잘 듣고 다시 대답해보세요. 이 컵이 커요? 작아요?”
“뭐와 비교하느냐에 따라... 잘 모르겠습니다.”
“질문을 잘 들으세요. ‘이 컵이 커요? 작아요?’라고 물었으니 답은 ‘크다’, ‘작다’ 둘 중 하나잖아요. 뚜껑과 비교해 물으면 크다고 대답하고, 물병과 비교해 물으면 작다고 대답할 텐데, 컵만 갖고 물으면 크다 할 수도 없고 작다 할 수도 없으니까 그대로 대답하면 되죠.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닙니다’ 또는 ‘크다 할 수도 없고 작다 할 수도 없습니다’라는 대답이 됩니다. 이것이 묻는 질문의 언어를 빌려서 대답하는 방식이에요. 이걸 한자로 표현하면 ‘비대비소(非大非小)’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할 때는 ‘큰 컵’ 혹은 ‘작은 컵’이라는 표현을 일상적으로 씁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을 할 뿐이지, 실제로 이 컵은 크다 할 수도 없고 작다 할 수도 없습니다. 그때그때의 인연을 따라 크다고도 불리고 작다고도 불리는데 그것은 그런 인연에서 내가 인식을 어떻게 했느냐를 표현한 거예요. ‘크다’, ‘작다’, ‘잘했다’, ‘못했다’, ‘잘생겼다’, ‘못생겼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객관적인 상황이 아니라 인식상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합니다. 다 마음이 짓는 바, 즉 인식상의 문제란 말입니다.
아까 질문하신 분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의견을 냈는데 남편이 안 받아줍니다. 내 입장에서 보면 내가 옳고 남편이 틀렸어요. 이는 지금 컵과 물병을 놓고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크기가 다른 것과 같습니다. ‘이쪽이 옳으냐, 저쪽이 옳으냐’는 어느 쪽을 기준으로 해서 보느냐에 따라 인식이 달라요. 그래서 실제로는 옳다 할 것도 없고 그르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 컵이 크다고도 할 수 없고 작다고도 할 수 없다는 것과 같아요.
‘이 컵이 새것이냐, 헌것이냐’라고 물어도 마찬가지예요. 어떻게 인연이 되느냐에 따라서 새것이라고도 말하고 헌것이라고도 말하지만, 이 자체만 가지고 물으면 새것이라 할 수도 없고 헌것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무겁다고도 할 수 없고 가볍다고도 할 수 없고요. 뭘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옳으니 그르니, 맞니 틀리니, 잘했니 잘못했니 하는 게 다 마음이 짓는 바입니다. 인식상에서 생겨나는 문제이지, 존재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면 이 존재 자체를 두고는 뭐라고 할까요? 묻는 말을 따라서 표현하자면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라 해서 금강경에서는 ‘비대비소’라고 표현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이를 ‘공(空)’이라고 표현합니다. ‘크냐, 작냐?’라고 물으면 ‘공하다’라고 대답합니다. 이건 철학적인 용어예요.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다, 옳은 것도 아니고 그른 것도 아니다, 이런 모든 것을 한마디로 ‘공이다’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선(禪)에서는 이것을 두고 ‘다만 그것이다’라고 표현합니다. ‘크냐, 작냐?’라고 물어도, ‘옳으냐, 그르냐?’라고 물어도 ‘다만 그것이다’라고 해요. 묻는 말에 끌려가지 않습니다.
질문한 ‘천수경’의 구절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망심멸양구공(罪亡心滅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則名爲眞懺悔)
죄라고 하는데 죄라고 할 실체가 없어요. 무자성(無自性), 즉 ‘이것이 무엇이다’라고 할 스스로의 성품이 없다는 말입니다. 죄라는 것은 마음을 따라서 생겼습니다. 종심기(從心起), 즉 마음에서 생겨난 거라는 말이에요. ‘크다’, ‘작다’가 다 마음에서 생긴 거예요. 이 마음은 어리석은 마음이에요. 딱 깨쳐서 어리석은 마음이 사라지면 죄라고 할 것 또한 사라집니다. 그래서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이라고 해요. 또 죄망심멸양구공(罪亡心滅兩俱空)이라 합니다. 어리석은 마음도 사라지고 죄도 사라져서 그 자리가 텅 비었다는 말이에요. 즉 제법이 공하다는 말입니다. 시즉명위진참회(是則名爲眞懺悔), 즉 이를 일러 진정한 참회라고 합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는 게 참회가 아니에요.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하면 참회가 안 돼요. 아까 질문자가 ‘남편도 반 잘못하고 나도 반 잘못했다’라고 이야기하잖아요. 내가 99개 잘못하고 남편이 1개 잘못했다 해도, 이렇게 서로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내가 99번 참회할 때 남편도 1번 해야 하는 거예요. ‘나는 하는데 너는 안 하냐?’ 이런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참회가 되겠어요? 그러니 남편이 옳다 할 것도 없고 내가 옳다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기준으로 해서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이렇게 잘못 생각하고 상대를 미워한 겁니다. 이건 내 잘못입니다.
새로운 메뉴를 만들겠다고 한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남편을 미워한 게 잘못됐다는 거예요. 미움은 어리석음에서 비롯되었어요. 그러니 ‘내가 어리석어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워했습니다. 참회합니다’ 이렇게 참회해야 합니다. 내가 변화를 바라고 시도했다고 해서 잘못했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래서 ‘내가 어리석어 잘못 알고 내 생각을 고집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참회해야 해요. 그게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죄역망 죄망심멸양구공 시즉명위진참회’입니다. 잘못을 서로 반반씩 했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참회가 되겠어요? (청중 웃음)
그리고 사람이 살다 보면 한쪽이 죄다 잘못하고, 다른 한쪽이 죄다 옳은 일을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본질은 옳고 그름이 없고 다 제 식대로 하는데 내 기준에서 보니까 잘못돼 보여서 내가 미워한 거예요. 그렇게 미워하면 어리석은 짓일 뿐더러 자기가 괴로워요.
오늘 질문자들에게 이야기한 것도 모두 사실은 이 교리를 쉽게 설명해서 현실적으로 이해하도록 한 겁니다. 자기 입장만 생각하던 것에서 벗어나 남편의 입장에서, 시아버지의 입장에서,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지 돌아보게 한 거예요. 이렇게 자기 자리에서 한 발 물러나서 전체를 보고 ‘아, 그게 아니네’ 하고 알아야 합니다. 원리를 직접 깨쳐야만 마음의 괴로움이 없어집니다.” (대중 박수)
질문자의 구체적인 사례에 스님의 교리 설명까지 함께 합해지니 이치가 딱 들어맞아 졌습니다. 청중석에서는 절로 탄성과 함께 박수 갈채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렇게 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마치자 2시간 10분이 훌쩍 지나 있었습니다. 스님은 마지막으로 강연을 마치면서 이런 원리를 알아서 누구나 다 행복하게 살 것을 당부했습니다.
“재미있었어요? 겉으로는 그냥 인생 상담 같지만 다 이렇게 굉장한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원리와 지식을 배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것을 내가 삶 속에서 체득하는 게 중요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행복할 수 있으니까 여러분들도 그렇게 해서 행복하게들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스님의 간곡한 호소에 청중들도 감사의 마음을 담아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이어서 로비에서는 책 사인회가 열렸습니다. 길게 늘어선 줄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스님은 손가락에 불이 날 정도로 사인을 쉬지 않고 해주면서도 강연장을 찾아와 준 한 명 한 명에게 일일히 눈을 마주쳐주며 환한 웃음을 보여주었습니다.
▲ 책 사인회
사인하는 도중에 아기를 엎고 온 엄마가 보이자 “아기를 기쁜 마음으로 키워야 해요” 라고 응원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스님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강연을 준비한 춘천정토회 소속의 자원봉사자들 모두와 함께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활짝 웃는 얼굴에는 보람과 기쁨이 가득 묻어 났습니다.
▲ 오늘 강연을 준비한 춘천정토회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오늘 춘천 즉문즉설 강연은 강원경기동부 지부에서 준비한 올해의 마지막 강연이었습니다. 무사히 강연을 마친 것을 축하하며 봉사자들은 스님과 종강연 기념식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정토불교대학에서 가장 최고령 학생인 조연정님이 스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꽃다발을 선물했습니다.
▲ 스님께 꽃다발을 전달하는 조연정님
이어서 춘천정토회의 한 봉사자가 집에서 직접 만들어 온 떡케이크를 컷팅하며 축하의 마음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어서 스님께 올리는 감사 편지를 춘천정토회 김영선님이 읽었습니다. 김영선님은 “스님의 법문을 듣고 어머니, 동생과의 흐트러진 관계를 바로잡을 수 있었고, 깊은 참회와 더불어 감사하며 살 수 있는 삶의 변화를 가져왔다” 고 하면서 눈물을 글썽였고, “스님의 하루를 읽으며 어리석은 중생을 깨우쳐주고자 하는 스님의 간절한 마음을 매일 느낄 수 있었다”고 하면서 “이제는 저희들이 스승님의 뒤를 따라 전법과 평화 통일의 원을 향해 나아가겠다”고 다짐을 말했습니다. 감사 편지를 다 읽고 울먹이며 자리에 앉으려는데 스님은 이리 오라고 부르며 함께 사진을 찍어 주었습니다.
▲ 감사 편지를 낭독하는 김영선님
이어서 스님은 회원 수가 많지 않고 열악한 조건에서 활동하고 있는 춘천정토회 봉사자들을 위해 격려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이렇게 활동하는 것은 장한 일이에요. 겨울이 없으면 좋을 것 같지만 겨울이 없으면 오히려 성장에 장애가 됩니다. 제가 이번에 고소며 달래, 상추 등을 키워봤는데 요즘 날이 따뜻해서 그런지 가을 상추를 먹어보니 향기가 없어요. 고소도 원래 먹기 힘들 만큼 향이 강한 채소인데도 아무런 향기가 없었습니다. 겨울을 지나고 봄에 올라오는 첫 잎이어야 향기가 강합니다. 부추도 그래요. 그래서 봄에 첫 수확한 부추는 사위도 안 준다고들 하지요. 그처럼 우리가 겨울, 즉 고난을 한번 겪어야 합니다. 부처님뿐 아니라 위대한 고승들도 다 한 번씩은 죽을 만큼 어려운 경우를 겪고 나서 새로 태어났습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자면 거듭났어요.
우리 정토회도 처음 시작할 때는 시련을 겪었습니다. 처음 포교당을 열고 강의를 시작했을 때 두 명이 왔는데, 첫날 강의를 듣고 한 명이 떨어져나가서 남은 한 명만 데리고 석 달을 강의했어요. 그 사람이 친구들 몇 명을 데려오고 광고도 내어서 다음 석 달은 다섯 명을 데리고 하고, 이렇게 조금씩 늘어났습니다. 여러분은 그것보다는 낫잖아요. 정토회가 그렇게 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법륜 스님 죽으면 정토회도 허물어질 거다’라고 하지만 그리 쉬이 허물어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처음 시작할 때는 제가 스님이 아니라 머리를 기른 법사인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참여한 사람들은 신심이 굉장히 굳습니다. ‘법륜 스님’이 약간 유명해진 뒤에 온 여러분은 스님에게 무슨 스캔들이라도 생기면 주르륵 떨어져나갈 거예요. 그러나 처음부터 세상에서 안 알아주고 아무것도 없는데도 신뢰를 한 것은 오래 갑니다. 춘천정토회 상황이 어렵다고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세요. 어려운 가운데서 이렇게 도반들과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면 신뢰가 생깁니다. 그런데 어려우면 서로 싸워서 떨어지기도 쉬워요. 세상이 그렇습니다. 동업을 해보면 잘 돼도 싸우고, 안 돼도 싸웁니다. 그런데 동업자들이 일이 안 풀리는 과정을 겪으면서 함께 극복했다면 그게 겨울을 난 뿌리처럼 굉장한 힘이 됩니다.
한국에서 천주교가 좀 강한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천주교는 박해와 순교라는 고난을 겪으면서 정착했기 때문에 그 뿌리가 튼튼합니다. 불교도 조선조 500년 간 고난을 겪었지만, 그 고난이 너무 길다보니 자포자기해 버렸어요. (청중 웃음) 너무 오랫동안 어렵다보니 피폐해져버린 경우이지만 그래도 그 밑바탕에는 고난을 겪은 경험의 힘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 불교도 살아나면 아주 굳건할 거예요. 신라는 불교를 150년간 탄압했습니다. 그 고난을 겪고 일어났기 때문에 신라 불교가 백제나 고구려 불교보다 발전한 거예요. 고구려와 백제는 불교가 처음부터 왕궁으로 들어와 환영받았기 때문에 위기가 닥치자 금방 훼손되었어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 성장하는 게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정토회 40여 개 지부 중 춘천정토회가 규모 면에서는 끝에서 순위를 다툴 만큼 작지만 정토회 수행의 묘미와 신뢰도는 으뜸이다’ 이런 자세로 단결해서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신구(新舊)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뒤에 온 사람들은 먼저 와서 어려운 일을 겪은 사람들을 존중해주고, 먼저 온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이 참여한 것을 기뻐하며 새로운 사람들이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줘야 해요. 오늘 함께한 홍천 법당이나 인제에서 오신 분들도 마찬가지예요. 어려운 데서 시작한 사람들은 참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 수가 작고 어려운 조건에서는 고집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이걸 일으켜 세워내지 못해요. 어떤 경우에는 고집불통이 나쁜 역할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고집불통이 좋은 역할을 합니다. 고집한다는 자체가 나쁜 게 아니에요. 주먹을 무뢰배에게 쓰면 정의의 주먹이 되지만 아내에게 쓰면 폭력이 되는 것과 같아요. 어떤 인연에 적용하느냐에 따라서 좋은 역할이 되기도 하고 나쁜 역할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연이 소중합니다. 그런 걸 명심하시고, 춘천정토회가 오늘을 계기삼아 잘 해나가시길 바랍니다. 춘천정토회 화이팅!”
“화이팅!” (청중 웃음, 박수)
▲ 다함께 "화이팅!"을 외치는 춘천정토회 자원봉사자들
스님의 파이팅 구호에 봉사자들도 큰 힘을 받았는지 함박 웃음을 머금으며 화이팅을 함께 외쳤습니다. 이 기세라면 춘천정토회도 많은 이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복전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고난을 겪으며 거듭나야 강해질 수 있다는 말씀이 계속 가슴에 남았습니다.
이렇게 종강연 기념식을 마친 후 스님은 곧바로 춘천을 출발했습니다. 서울에는 오후 3시 20분에 도착해서 연이어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들과 미팅을 가졌습니다. 3시간 동안 미팅을 갖다보니 오히려 강연을 할 때보다 목이 더 아픈 것 같아 보였습니다.
평화재단에서의 미팅을 마치고 저녁 7시부터는 서초구민회관에서 서울 시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