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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시학
가스통 바슐라르 Gaston Bachelard. 1884~1962
역자 :곽광수 교수
「가스통 바슐라르:
1884년 프랑스의 철학자, 문학박사, 파리대학과 소로본 대학의 교수 역임. 그의 저서는 시, 꿈, 정신분석 , 상상력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이 책 <공간과 시학>(1958년)은 그의 작품 중 가장 인기 있는 작품 중 하나이다. 」
「역자: 1941년 4월 13일 경북 출생. 서울대 불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프로방스대학에서 「베르나노스 소설에 있어서의 물의 이미지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과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다.」
[바슐라르와 상징론사] -곽광수-
19세기말부터 프랑스에서 문학 연구의 주류를 이루어 오고 있었던 전기적 비평이 이를테면 구비평 이었다면, 그에 대한 반대 명제로 나타난 신비평은 정신분석적 비평, 마르크스주의적 비평, 구조주의적 비평, 실존주의적 비평, 테마 비평으로 나뉘어 파악될 수 있었다고 하겠다. 바슐라르의 문학 사상은 바로 테마 비평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사상이다.
전기적 비평에 대한 반대 명제로서의 바슐라르의 문학 연구를 특징짓는다면, 전자가 작품을 작가의 전기적인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결정론적인 입장이 반면, 후자는 작품을 창조한 작가의 상상력의 독자성을 강조함으로써 작품의 본질을 작가의 전기적인 상황에 초월적인 것으로 여기는 비결정론적인 입장이라고 하겠다. 이 점에 있어서 바슐라르의 입장은, 함께 신비평에 속하기는 해도 역시 결정론적인 입장인 정신분석적 비평과 마르크스주의적 비평에 대해서도 대립적이다.
<공간의 시학>에서 에는 전기적 비평과 정신분석적 비평에 대한 비판이 약간의 아이러니와 더불어 끊임없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이해함은 바로 이 책 자체를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그 비판은 바로 결정론적인 문학관에 대한 비판이고, 그로써 저자의 비결정론적인 문학관에 관한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상상력의 독자성, 절대성은 상상력의 소산인 이미지의 그것이 되는데, 그에 대한 주장은 바슐라르의 문학에 관한 저술에 있어서 초기 저서인 <불의 정신분석>의 결론에 이미 상당히 조직적인 표현을 얻는다. 그러나 <공간의 시학>에서 그것은 책 전체를 통해, 가장 조직적이며 가장 강력하게 표명된다. 그리고 그 주장을 함에 있어서 이 책에서 선택된 논증은 다름 아닌 시적 교감의 현상을 통한 것이다. 이 시적 교감의 문제가 전기적 비평과 정신분석적 비평이 비판되는 계기를 이룬다. 전기적 비평과 정신분석적 비평에서는 시적 이미지를, 의식적인 것이든 무의식적인 것이든 작가의 생애의 한 요소, 즉 그가 경험한 어떤 것에 비추어 설명하려고 한다. 즉 여기에서 설명의 원리가 되어 있는 것은 인과성(因果性)이다: 작가의 생애의 한 요소가 원인이 되어, 그것에 대응되는 작품의 요소, 이 경우 시적 이미지가 그 결과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인과적인 설명 원리야말로, 특히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걸쳐 서구의 지배적인 사조였던 실증주의에 근거를 둔 전기적 비평이 스스로를 실증적인 문학 연구로, 따라서 가장 바람직한 연구로 내세우는 근거였다. 그러나 실제에 우리들 독자들이 구체적으로 하나의 문학 작품, 하나의 시적 이미지에서 감동을 느낀 독서 체험을 돌이켜보면, 그 감동은 정직하게 말해 작가의 생애에 관한 지식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졌음을 인정해야 한다. 즉 우리들은 작가의 생애를 전혀 모르고서도 작품에서 감동을 느끼는 것이다. 이 점을 솔직히 인정함으로써 바슐라르는 기실 시적 교감의 문제를 가장 정직하게 표명했던 문학연구가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시인이 제공하는 말의 행복. - 시인의 생애의 드라마마저 뛰어넘는 그 말의 행복을 체험하기 위해 시인의 괴로움들을 살아 보아야 할 필요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바슐라르의 독창적인 점은, 그 이전까지 사람들이 상상력을, 단순히 외계의 대상들의 이미지를 기억하는 정신 기능으로 생각했던 데 반해, 그는 상상력이 외계의 대상들의 이미지와는 관계없이 독자적인 법칙에 의한 작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데 있다. 극단적으로 그는 ‘이미지를 가지지 않는 상상력’의 존재를 가정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상력을 경험론인 설명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고 오직 우리들의 정신 차원에서만 가능케 함으로써, 그는 상상력을 ‘하나의 관념철학의 근본적인 원리’ 정립시키기에 이른다.
바슐라르가 특히 <공간과 시학>에서 시적 이미지를 두고 존재론이라는 말을 빈번히 쓰고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독자적인 상상력의 소산인 이미지의 독자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 시적 이미지는 ‘그 자체의 존재와 그 차체의 힘’을 가지므로, 그 자체로서 파악되어야 한다(어떤 원인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즉 존재론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슐라르의 이와 같은 관념론적인 상상력 이론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상상력의 독자적인 작용이 외계의 대상의 이미지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달리 말하면 상ㅅ아력의 독자적인 작용이 어떻게 외계의 대상의 이미지를 변화시키는가를 밝히는 사원소론(四元素論)이 그 첫째이고, 둘째는 상상력의 그 독자적인 작용 자체를 밝히는 이미지의 현상학이며, 셋째는 상상력의 궁극성을 밝히는 원형론이다. 하지만 이 세 부분은 서로 따로 독립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전체로서의 상상 현상의 세 측면을 각각 조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상 현상의 그 세 측면을 한 데 묶어 쉽게 말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상상력은 외계의 대상의 이미지를 받아들여, 그것을, 스스로 궁극적인 것 즉 이상적인 것으로 삼고 있는 상태로 변화시켜 가는데, 그 작용이 우리들의 외적인 삶이나 실용적인 목적이나 생리적인 욕망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기에 독자적인 것이다.
<공간의 시학>은 바슐라르 스스로 이미지의 현상학을 행한다고 한 저서인데, 위에서 본 바대로 상상 현상의 세 측면을 동시에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이 책에서 문제되어 있는 상상력의 궁극성은 요나 콤플렉스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들이 어머니의 태반 속에 있을 때에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 형성된 이미지로서, 우리들이 어떤 공간에 가사이듯이 들어 있을 때에 안온함과 평화로움을 느끼는 것은 이 요나 콤플렉스 때문이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이미지들은 그러므로, 집, 서랍, 상자, 장롱, 새집, 조개껍질, 구석 등 내밀할 수 있는 공간의 이미지들 및 그 변양태들, 그리고 내밀하지는 않더라도 그런 이미지들과의 상관관계 밑에서라야 이해될 수 있는 이미지들이다. 말하자면 우리들의 상상력이 전자의 이미지들을 안온함과 평화로움을 느끼게 하는 내밀한 공간으로 파악하고 후자의 이미지들을 그런 공간의 내밀성의 가치에 비추어 파악하는 것이, 그것이 독자적인 작용인 것이다.
[머리말]
(1)
과학철학의 근본적인 과제들에 전념하며 자신의 전 사상을 형성해 온 철학자, 스스로 할 수 있는 한 단호히 현대 과학의 능동적 이성주의, 점증적 이성주의의 축을 따라온 철학자는, 만약 그가 시적 상상력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연구하려고 한다면, 지금까지의 그의 지식을 잊어버려야 하고 그의 모든 철학적 연구의 습관들을 버려야 한다.
시적 이미지란 갑작스러운 정신의 융기, 부수적인 심리적 인과관계로는 잘 밝혀지지 않는 정신의 융기이다. 또한 일반적이고 조직된 어떤 것도 시의 철학에 기본이 될 수 없다. 원리라는 관념, 기본이라는 관념은 여기서는 파괴적인 것일 것이다.
시적 이미지와, 무의식의 밑바닥에서 잠자고 있는 원형 사이의 관계에 언급해야 할 때에라도, 우리는 그 관계가 엄밀히 말해 인과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키도록 해야 될 것이다. 지적 이미지는 충동적인 힘에 예속되어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메아리가 아닌 것이다. 사정은 차라리 그 역이다: 이미지의 번쩍임에 의해 먼 과거가 메아리들로 울리는 것이며, 그리고 그 메아리들이 얼마만큼의 깊이에까지 반향하며 사라져 가게 되는지 우리들은 거의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의 새로움과 그의 약동 속에서 시적 이미지는 그 자체의 존재와 그 자체의 힘을 가진다. 그것은 하나의 직접적인 존재론에 속하는 것이며, 우리가 지금 노력을 기울이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존재론에 대해서인 것이다.
시의 철학은 다음과 같이 주장해야 한다: 시적 행위는 과거를, 적어도 그것이 준비되고 나타나는 과정을 우리들이 따라가 볼 수 있는 그러한 가까운 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에 뒤이어 우리가 새로운 시적 이미지와, 무의식의 밑바닥에서 잠자고 있는 원형 사이의 관계에 언급해야 할 때에라도, 우리는 그 관계가 엄밀히 말해 인과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키도록 해야 될 것이다. 시적 이미지는 충동적인 힘에 예속되어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메아리가 아닌 것이다.
시적 이미지가 인간의 마음의, 영혼의, 존재의 직접적인 산물 -그 현행성에서 파악된-로서 의식에 떠오를 때, 이미지의 현상을 연구하는 것.
(2)
많은 경우에 있어서 시란 영혼의 참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영혼에 연결된 의식은 정신의 현상들에 연결된 의식보다 더 휴식적이고 덜 의도적이다. ~~~몽상이란 그것만으로는 아주 흔히 꿈과 혼동되는 정신적 차원이다.
(4)
시적 이미지는 언어의 떠오름이며, 언제나 의미하는 언어보다 약간 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작품을 읽으며 그것을 살 때(體驗), 우리들은 건강에 이로운, 떠오름의 경험을 하게 된다.
(5)
시행은 언제나 움직임을 가지며, 이미지는 시행의 선 속에 살며시 끼어들어 상상력을 이끌고 간다. 그것은 마치 상상력이 신경섬유를 만들어 늘이는 것과도 같다.
(6)
그리고 새로운 존재란 행복한 인간이다. 말에 있어서 행복하니 따라서 실제에 있어서는 불행한 인간이라고 정신분석가는 곧 반박할 것이다. 정신분석가에게는 승화란 바로 보상이 측면적인 도피이듯이, 수직적인 봇아, 위를 향한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곧 정신분석가는 이미지의 존재론적인 연구를 떠나 버린다: 그는 한 인간의 역사를 시시콜콜이 파내어, 그 시인의 내밀한 괴로움들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말하자면 꽃을 두엄거름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현상학자는 그토록 멀리 가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미지가 바로 눈앞에 있으며, 말이, 시인의 말이 그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제공하는 말의 행복. - 시인의 생애의 드라마마저 뛰어넘는 그 말의 행복을 체험하기 위해 시인의 괴로움들을 살아보아야 할 필요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시에 있어서 승화란, 세속적으로 불행한 영혼의 심리를 굽어보듯이 그 위로 솟아올라 잇는 것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시는 그것이 어떤 드라마틱한 생애를 그려 보이도록 된 것일지라도, 그것에 고유한 행복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것과 같은 순수한 승화는 연구 방법상 드라마틱한 점이 없지 않은데, 왜냐하면 말할 나위 없이 현상학자는 정신분석이 그토록 오랫동안 연구해온 고전적인 승화과정의 깊은 심리학적 현실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삶을 반영하지 않는 이미지들, 삶이 마련하는 게 아니라 시인이 창조하는 이미지들을 현상학적으로 찾아가는 것인 것이다. 문제는, 시인이 t라지 않았던 것을 사는 것이며 언어의 개방성에 몸을 여는 것인 것이다. ~~~~시는 끊임없이 그의 원천을 넘어서며, 기쁨과 슬픔 속에서 더 멀리 나아가 작품들을 빚어냄으로써 더 자유롭게 있는 것이다.
(9)
우리는 집의 시학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잊혀지지 않는 과거를 되돌아볼 때면, 어떻게 은밀한 방, 없어진 방들이 거소(居所)로 나타나는가?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휴식은 그것에 최적한 상황을 발견하는가? 어떻게 잠시 동안의 은신처, 우연적인 피난처들이 때로 우리들의 내밀함의 몽상에서, 어떤 객관적인 근거도 없는 가치들을 얻게 되는가?
비어 있는 서랍은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생각할 수만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알고 잇는 것에 앞서 상상하고 있는 것을, 검증하는 것에 앞서 꿈꾸는 것을 묘사해야 하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모든 장롱들은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새집과 조개껍질 -척추동물과 무척추동물의 그 두 은신처 - 에 바친 두 장은, 실제의 대상에 거의 제한받지 않는 상상력의 활동을 개진한다. ~~~우리가 살지 못하는 그러한 장소들에 사려는 몽상들을 따라가 본 다음, 우리는, 언제나 그 이미지들을 살기(體驗) 위해서는 새집이나 조개껍질 속에서처럼 우리 자신을 아주 작게 해야 하는 그러한 이미지들을 고찰했다. 사실, 우리들은 바로 우리들 집 안에서, 우리들이 몸을 웅크리고 앉아 좋아하는 골방들이나 구석들을 발견하지 않는가? 웅크리고 앉는다는 것은 ‘....에 산다’는 동사의 현상학에 속하는 것이다.
구석의 이미지에 대한 짧은 한 장을 썼다. 내밀한 공간들에 바쳐진 이상의 모든 장들 다음에, 우리는 공간의 시학에 있어서 큼과 작음의 변증법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외부 공간에 있어서 상상력이 어떻게 관념의 도움 없이 거의 자연적으로 크기의 상대성을 즐기는가를 살펴보려고 했다. 이 큼과 작음의 변증법을 우리는 세미와 무한을 테마로 하여 묘사했다.
제1장
집
“지하실에서 지붕 밑 방까지, 오두막집의 뜻”
“우리 집 문을 누가 와서 두드릴까?
문이 열리면 들어오고
문이 닫히면 아늑한 소굴
문 밖 저쪽에선 세상은 요란해도“ -피에르 알베르 비로(자연의 즐거움)
(1)
내부 공간의 내밀함의 가치들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를 위해서는 집은 명백히 특권적으로 알맞은 존재이다. 물론 이것은, 집의 모든 특이한 가치들을 모두 하나의 근본적인 가치 속에 통합하려고 함으로써 집을 그것의 통일성과 복합성 가운데 동시에 파악한다는 조건 밑에서 그러한데, 사실 집은 우리에게 여러 흩어져 있는 이미지들과 동시에 하나의, 이미지들의 통합체를 제공함을 우리는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양자의 경우에 있어서 똑같이 우리는, 상상력이 실제의 가치들을 불린다는 것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일종의 이미지를 끄는 힘이 집 주위에 이미지들을 결집시킨다. 우리들이 몸을 담은 적이 있었던 모든 집들의 추억들을 통해, 우리들이 거기서 살아 보기를 열망했던 모든 집들 너머로, 그 집들의 내밀하고 구체적인 본질을, - 보호받는 모든 이미지들이 각각 가지고 있는 특이한 가치를 타당하게 할 그러한 본질을 추출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집을, 우리들이 거기에 우리들의 가치판단과 몽상을 반응케 할 수 있을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현상학자와 정신분석가와 심리학자에게 있어서는(이 세 견지는 지금 이미지의 함축성이 감소하는 순서로 늘어 놓여진 것이지만), 집들을 묘사하고 그것들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모습들을 상세히 이야기하고 그것들의 안락함의 이유들을 분석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이와는 전혀 반대로, 묘사의 문제를 - 그 묘사가 객관적인 것이든 주관적인 것이든간에, 즉 그 묘사가 사실을 이야기하든 인상을 이야기하든간에 -넘어서서 집의 근본적인 가치들, -거주한다는 근본적인 기능에 대한 우리들의, 말하자면 태어날 때부터의 애착이 드러나게 되는 그러한 가치들에 이르러야 한다.
그러나 좋아하는 장소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애착의 여러 뉘앙스들의 각각의 깊은 실체를 밝히려고 할 경우,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서로 얽혀 있는가? 현상학자에게 뉘앙스란 원초적인 솟구침의 심리 현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뉘앙스는 보충적인 표면의 빛깔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삶의 공간에서 삶의 모든 모순적인 양상과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는가. 어떻게 우리가 하루하루 우리 자신을 ‘세계의 한 구석’에 뿌리박고 있는가를 말해야 한다.
(2)
말할 나위 없이 집의 덕택으로 많은 우리들의 추억들이 그 안에 거처를 잡아 간직되어 있으며, 그래 집이 약간 복잡한 것이 기라도 하면, 집에 지하실과 지붕 밑 방이, 여러 복도의 구석진 곳들이 있기라도 하면, 우리들의 추억들은 더욱더 특색 있는 은신처를 가지게 된다.
(3)
노란 모래의 오솔길 가에서 몽상에 잠겨 있는 조르드 상드는 삶이 흘러감을 보는 것이다. 그녀는 쓰고 있다. ‘길보다 더 아름다운 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것은 바로 활동적이고 변화 있는 삶의 상징이고 이미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제각기 자기의 길들과, 네거리들과, 앉아 쉼 벤치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제각기 지난날 거쳐 왔던 들판들의 토지대장을 작성해야 할 것이다. 소로는 말하기를, 자기 영혼에 새겨진 들판의 지도를 가지고 있노라고 했다. 그리고 장 바알 은 이렇게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양털 같은 생울타리
내 마음속에 간직돼 있네.“
이리하여 우리들은 세계를 우리들의 체험된 소묘들로 뒤덮는 것이다. 그 소묘들은 정확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들의 내부 공간과 같은 빛깔로 물들어져 있으면 된다.
(4)
예컨대, 정녕 나의 방이었던 방의 도면을 그려 보이는 것이, 지붕 밑 곳간 저 안구석에 있는 그 조그만 방을 묘사하는 것이, 창문에서 보면 저기 지붕들 사이의 터진 틈으로 산언덕이 보인다고 말하는 것이 무엇에 소용되겠는가? 나 혼자만이 지난 세기의 내 추억들 속에서, 그 독특한 내음 - 받침 망 위에서 말라 가는 포도알들의 내음을 나 혼자만을 위해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깊은 벽장을, 열 수 있는 것이다. 포도알의 내음! 설명의 가능성의 한계에 있는 그 내음을 맡기 위해서는 여간 많이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나는 이미 너무 많이 말한 것이다. 만약 내가 말을 더 한다면, 독자는 되찾은 자신의 방 안에서 그 독특한 장롱을 스스로 열지 않으리라. 내밀성의 가치들을 환기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지만 독자를, 독서를 잠시 멈추고 있는 상태로 유도해야 한다. 독자의 시선이 책을 떠나는 바로 그 순간, 나의 방을 환기함이 남에게도 몽상의 입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되면 말하고 있는 사람이 시인일 경우, 독자의 영혼은 울림을 얻는다. 독자의 영혼은, 민코프스키가 설명하고 있듯이 그의 존재에게 기원의 힘을 되돌려 주는 그 울림을 경험하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방에 대해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기실 당신은 몽상의 문을 살며시 연 것이다. 내밀성의 가치들은 우리들을 사로잡는 힘이 너무나 강해, 독자는 더 이상 당신의 방을 읽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방을 되 볼 따름이다. 이미 그는 아버지의, 할머니의, 어머니의, 하녀의, 고결한 마음씨의 하녀의 추억들을 - 즉 가장 큰 가치를 얻고 있는 그의 추억들의 한 구석을 지배하는 존재에 대한 추억들을 들으려 출발한 것이다.
시는 그 위대한 기능에 있어서 우리들에게 꿈의 상황을 되돌려 준다. 우리들이 태어난 집은 단순한 집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꿈들의 집적체인 것이다. 옛날 그것의 구석진 곳들은 모두 하나하나 몽상의 장소였다. 그리고 장소는 흔히 몽상을 특수화한다. 우리들은 거기서 몽상의 습관을 익혔던 것이다. 우리들이 홀로 있었던 집, 방, 곳간은 끝없는 몽상, 오직 시만이 시작품으로써 끝내고 완성시킬 수 있을 그러한 몽상의 무대를 제공한다. 이러한 모든 은둔처들에, 꿈을 지키는 그것들의 기능을 부여할 때, 내 앞선 저서에서 내가 지적한 바 있듯이 우리들 각자에게는 꿈의 집이, 사실의 과거 너머로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추억 - 꿈의 집이 하나씩 있다고 말할 수 있다.
(5)
집은 인간에게 안정의 근거나 또는 그 환상을 주는 이미지들의 집적체이다.; 우리들은 끊임없이 집의 실재를 상상하고 되상상 한다 : 그 모든 이미지들을 구별한다는 것은, 집의 영혼을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정녕 집의 심리학을 개진하는 것일 것이다. ~~~두개의 주된 테마를 고려해야 한다.
1)집은 수직적인 존재로 상상된다. 집은 위로 솟는 것이다. 그것은 수직의 방향에서 여러 다른 모습들로 분화된다. 그것은 수직성에 대한 우리들의 의식에 호소하는 것의 하나이다.
2)집은 응집된 존재로 상상된다. 집은 우리들을 중심성에 대한 의식으로 이끌고 가는 것이다.
집의 수직성은 지하실과 지붕 밑 곳간의 양극성으로 확보된다. 이 양극성의 징표들은 우리들의 너무나 깊은 내면에 전달되는 것이어서, 그것들은 말하자면, 상상력의 현상학을 위해 두 개의 아주 다른 축을 형성하는 것이다.
지붕은 지체 없이 그의 존재 이유를 말한다. 그것은 빙하 햇볕을 두려워하는 인간을 덮어 주는 것이다. ~~~지하실의 경우, 아마 그것의 유용성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그것의 편리한 점들을 열거함으로써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선 집의 어두운 실체, 지하의 힘에 참여하는 실체이다. 거기서 꿈에 잠길 때, 우리들은 인간 심연의 비합리성과 화합한다.
정신분석가 C. G. 융은 집에 늘 상 따라다니는 공포를 분석하기 위해 지하실과 지붕 밑 곳간의 두 이미지를 이렇게 이용하고 있다. 융의 저서<인간의 영혼을 찾아서>에서 우리들은, 콤플렉스를 재명명함으로써 그것의 자율성을 없애 버리려고 하는 인간 의식의 희망을 이해토록 하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이미지는 이러하다. 여기서 의식은 마치 지하실에서 수상한 소리를 듣고 지붕 밑 곳간으로 화닥닥 뛰어올라가 거기서, 도둑이 들어온 게 아니고 따라서 그 소리는 터무니없는 상상이었음을 확인하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기실 이 조심스러운 사람은 지하실에 위험을 무릅쓰고 감히 들어가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붕 밑 곳간에서도 생쥐와 쥐들이 소란을 떨 수 있다. 하지만 집주인이 들이닥치면, 그들은 그들의 소굴의 침묵 속으로 기어들어가 버린다. 그러나 지하실에서 움직이는 것들은, 한결 느리고 한결 덜 떠들썩하고 한결 신비로운 것들이다. 지붕 밑 곳간에서는 공포는 쉽사리 합리적으로 설명되지만, 지하실에서는 융이 예로 든 그 사람보다 더 용기 있는 사람의 경우에도 합리적인 설명은 한결 느리고 한결 덜 명료하다. ~~~~지하실에서는 어둠이 밤낮 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손에 촛대가 들려 있는데도 지하실에서는 컴컴한 그림자가 검은 벽 위에서 춤추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지하실에도 전등을 밝히는 우리들의 문명생활에서는, 이제 촛대를 손에 들고 지하실에 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무의식은 개화되지 않는 법이다. 무의식은 여전히 지하실에 내려가기 위해 촛대를 드는 것이다.
위대한 집의 몽상가인 앙리 보스코의 소설들 가운데 우리들은 이와 같은 엄청나게 깊은 지하실들을 발견한다. <골동품상>의 주인공의 집 밑에는 네 개의 출입문이 있는, 궁륭을 가진 원형의 지하실이 있다. 그 네 개의 문 밖으로 복도들이 뻗어 나가는데, 그 복도들이 이를테면 지하의 지평의 네 방위를 지배하는 것이다. 동쪽의 문이 열리자, 우리들은 지하로, 그 구역의 집들 밑으로 아주 멀리까지 간다.... 이 소설은 미로의 꿈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무거운 공기가 떠도는 복도들의 미로와 함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성소들인 원형의 방들과 예배당들이 나온다. 그리하여 <골동품상>의 지하실은, 말하자면, 꿈의 차원에서 복합적이다. 독자는 미로의 괴로움에 관계되는 꿈들이거나 또는 지하 궁전의 놀라움에 관계되는 꿈들로써 그 지하실을 탐험해야 하는 것이다.
좋은 책이란 어떤 것이나 읽혀지자마자 곧 되읽혀져야 한다. 스케치라고 할 최초의 독서 다음으로 완성된 작품이라고 할 독서가 이루어진다. 이때네 작자의 문제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번, 셋째 번,....의 독서가 우리들에게 조금씩조금씩 그 문제의 해결을 가르쳐 주게 된다. 느낄 듯 말 듯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에게, 문제와 해결이 바로 우리들 자신의 것이라는 환각을 준다. 나 스스로 이 작품을 썼어야 하는 건데....라는 심리적 뉘앙스는 우리들을 독서의 현상학자로ㅛ 내세운다. 그 심리적 뉘앙스에 이르지 못하는 한, 우리들은 심리학자나 정신분석가로 밖에 머물러 있지 못한다.
“꽃은 언제나 씨 안에 있는 것이다.“
이 찬탄할 만한 금언에 의해서 그 집은, 그 방은 잊을 수 없는 내밀함의 표지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사실, 장래를 꿈꾸며 아직도 씨앗에 싸여 몸을 움츠리고 있는 꽃의 이미지보다 더 응축되고 더 잘 제 중심을 확보하고 있는, 내밀함의 이미지가 어디 있겠는가! 행복이 아니라 전 행복이 둥근 방 속에 갇혀 있기를 우리들은 얼마나 바라겠는가!
(6)
앙리 바슐랭이 어렸을 때에 살던 집은 더할 수 없이 소박한 집이었다. 모르방 지방의 어느 읍 마을에 있는 시골집이었지만, 농사의 부속건물들이 딸려 있고, 아버지가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가정생활이 평안과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그런 집이었다. 날품팔이꾼이고 성당지기인 아버지가 저녁이면 성인들의 전기를 읽는, 램프 불빛이 희미하게 밝히고 있는 방 안에서, 바로 그 방 안에서 어린 앙리는 그의 원초적인 몽상을, - 숲 가운데 외따로 버려진 오두막집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을 상상할 정도로 고독을 크게 그리는 그 몽상을 즐겼던 것이다. 거주의 기능의 근원을 찾으려고 하는 현상 학자에게는 앙리 바슐랭의 글은 커다란 순수성을 가지고 있는 자료인 것이다. 본질적인 대목은 다음과 같다. ‘ 그 시간들은, 맹세코 단언하지만, 그 방 안의 우리 집 식구들이 그 조그만 도시에서, 프랑스에서, 전 세계에서 떨어져 나와 있는 것 같은 강한 느낌에 깊이 제가 젖어 들곤 하는 시간이었지요. 저는 숲 한가운데 따뜻하게 덮여진 숯꾼들의 오두막집 속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즐거워하곤 했습니다. 저는 그 즐거운 감각을 저 혼자서만 즐겼습니다. 저는 이리들이 우리 집의, 닳아지지 않는 화강암의 문지방에 그들의 발톱을 대고 뾰족하게 가는 소리를 듣고 싶을 지경이었습니다. 제게는 우리 집은 그런 오두막집과 같은 것이었지요. 저는 제가 그 안에서 주림과 추위에서 지켜지고 있음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몸을 떨었다면, 그것은 다만 바로 안락 때문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아버지를 이인칭으로 부르면서 쓰여진 이 소설에서 앙리 바슐랭은 아버지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 제 의자 속에 안정되게 박혀서 저는 아버지의 힘이 저를 지켜주시는 느낌 가운데 잠겨 있곤 했습니다.’ 이렇게 소설가는 우리들을 집의 중심으로, 마치 어떤 힘의 중심, 어떤 잘 지켜져 있는 보호 구역 안으로 불러들이듯, 불러들이고 있다.
밤 가운데 저 멀리 외따로 떨어져 있는 불빛을 보고 누가 아늑한 초가집을 꿈꾸지 않았겠는가? 한결 전설 속으로 더 들어가서는, 누가 은자의 오두막집을 꿈꾸지 않았겠는가? 은자의 오두막집, 이것이야말로 정녕 하나의 원초적인 판화이다! 진정한 이미지들은 판화들이다. 상상력이 우리들의 기억 속에 그 이미지들을 새기는 것이다. 즉 그 이미지들은 그 경험한 추억들을 다른 데로 옮겨 버리고 그 자체가 상상력의 추억들이 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숲 속 깊은 곳에서 뿔피리 소리를 듣고 있는가? 중심이 확정되지 않은 이 이미지, 밤의 자연을 채우는 이 청각적 이미지가 그에게 휴식과 안심의 이미지를 환기 시킨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그 소리는 멀리 보이는 은자의 촛불처럼 정답다.’ 그리고 지난 추억을 회상하는 우리들에게도 어떤 내밀한 골짜기에서 그 옛날의 뿔피리 소리가 아직도 울려오는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우리들은 곧, 그 뿔피리 소리에 잠을 깬 소리의 세계와 먼 불빛이 비추이고 있는 은장의 세계의, 공동의 우정을 받아들이는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우리들은 곧, 그 뿔피리 소리에 잠을 깬 소리의 세계와 먼 불빛이 비추이고 있는 은자의 세계의, 공동의 우정을 받아들이는 것일까? 어떻게 실제의 삶에서도 드문 그런 이미지들이 상상력에 그토록 큰 힘을 가지는 것일까?
창문에 있는 램프는 집의 눈이다. 상상력의 영역에서는 램프는 결코 바깥에서 불을 밝히지 않는다. 그것은 틈새기를 통해 바깥으로 새어나올 수 있을 뿐인 갇힌 불빛인 것이다. <벽속에 갇힌 자>라는 제목으로 쓰인 한시작품의 한 연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창문 뒤에 밝혀진 램프
비밀스런 밤의 한가운데서
자지 않고 지키고 있네.
몇 행 앞서 시인은 이렇게 말했었다.
돌의 사면 벽 사이에
갇힌 시선.
앙리 보스코의 소설 <이야생트> - 이 작품은 그의 다른 하나의 소설 <이야생트의 정원>과 함께 우리 시대의 가장 놀라운 심리 소설의 하나를 이루고 있는데 - 에서는 램프가 창문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램프 때문에 또 집 전체가 기다리고 있다. 램프는 간곡한 기다림의 표지인 것이다. 먼 집의 불빛에 의해 그 집은 보고, 자지 않고, 살피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다, 자고 있지 않는 그 집 안에는 누군가가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 안에서, 내가 꿈에 잠겨 있는 동안 일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쓸데없는 꿈을 쫓고 있는 동안 고집스런 한 삶이 있는 것이다. 그 단 하나의 불빛으로 하여 그 집은 인간적인 것이다. 그것은 사람처럼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밤으로 열려 있는 눈이기 때문이다.
제2장
집과 세계
보들레르는 바탕이 도시인이지만, 집이 겨울의 공격을 받을 때에 내밀함의 가치가 커지는 것을 느낀 사람이다. <인공낙원>에서 그는, 토마스 드 퀸시가 겨울 속에 갇혀서 아편이 가져다주는 관념론의 도움으로 칸트를 읽고 있을 때의 행복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름다운 집은 겨울을 더 시적으로 만들지 않는가? 그리고 겨울은 집의 시를 더 불리지 않는가? 그 흰 농가는 충분히 높은 산들에 닫힌 조그만 골짜기 밑에 앉아 있었다. 그것은 관목 숲으로, 포대기에 싸이듯 싸여 있었다.’ 이 짧은 글에서 휴식의 상상력에 속하는 낱말들을 우리는 강조해 놓았다. 칸트를 읽으며 꿈의 고독과 사상의 고독을 합치는 아편 흡입자에게는 얼마나 평온한 배경인가! 얼마나 평온한 장소인가!
보들레르는 우리들에게 중심이 있는 그림 한 폭을 넘겨 준 것이다. 그는 그리하여, 우리들이 우리들 자신을 위해 취할 수 있는 몽상의 중심으로 우리들을 안내한 것이다. 물론 우리들은 거기에 개인적인 필치를 덧붙일 것이다. 보들레르가 환기한 토마스 드 퀸시의 그 농가 안에 우리들은 우리들 과거의 인물들을 들여놓을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덧칠 없는 환기가 주는 이득을 얻게 된다. 우리들의 가장 개인적인 추억들이 거기에 와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2)
모든 계절들 가운데 겨울은 가장 나이 많은 계절이다. 겨울은 추억 속에 연륜을 넣는 것이다. 그것은 오랜 과거로 우리들을 되돌려 보낸다. 눈 밑에서는 집도 나이가 많아진다. 오래 전 지난 세기들 가운데, 집은 뒤쳐져서 살고 잇는 듯이 느껴진다. 이와 같은 느낌은, 적대성을 한껏 나타내고 있는 겨울을 묘사한, 다음의 바슐랭의 글에 잘 환기되어 있다. ‘휘몰아치는 눈과 바람으로 둘러싸인 오래된 집들 속에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위대한 이야기들이, 아름다운 전설들이 구체적인 의미를 얻게 되어, 그것들을 깊이 생각해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것들이 당장에 실현될 것 같아지는, 그런 저녁들이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조상 어른의 한 분이 기원 천 년에 그런 어느 저녁에 숨을 거두시면서, 세계의 종말이 다가왔다고 생각하셨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 이야기는 할머니들이 밤에 들려주는 요정의 이야기가 아니라 힘과 징후들을 깊이 생각 하는 이야기,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4)
다음은 폭풍우 한가운데 잇는 집의 인간적인 저항에 대한 묘사의 중심 부분이다. ‘집은 용감하게 싸웠다. 처음에는 슬피 울부짖는 것 같았다. 더할 수 없이 세찬 바람이 집을 사방에서 동시에, 명백한 증오와 너무나 광분한 노호로써 공격해 왔으므로, 때로 나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그러나 집은 견뎌냈다. 폭풍우가 시작되자마자 심술궂은 바람이 지붕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바람은 지붕을 떼어내려고, 그 허리를 분지르려고, 그것을 산산조각으로 내려고, 그것을 빨아들여 삼키려고 했다. 그러나 지붕은 등을 구부리고, 오래된 기둥들에 매달렸다. 그러자 다른 바람이 또 불어 닥쳐, 땅 위로 덮쳐들더니, 집의 벽을 습격해왔다…….’
(5)
앙드레 라퐁은 1913년에 이렇게 썼다.
‘나는 집을 꿈꾼다, 높은 창문에,
초록에 물든 얄팍하고 낡은 세 계단을 가진 나지막한 집을. ‘
이리하여 나는 내 독서 가운데 얻은 소묘들 속에서 기운을 되찾는 것이다. 나는 시인들이 내게 제공하는 문학적 판화들에 가서 사는 것이다. 새겨진 집이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더욱더 그 집은 거주자로서의 내 상상력을 촉발한다. 그것은 한낱 표상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거기에서 선들은 힘차고, 그래 그 피난처는 강장적(强壯的)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거기서 단순하게 살기를, 단순성이 주는 큰 신뢰를 가지고 거기서 살기를 요구한다. 새겨진 집은 내 내부에 오두막집에 대한 감각을 일깨운다. 거기서 나는 조그만 창문이 가지는 시선의 힘을 다시 체험한다. 그리고 보라! 성실한 마음으로 이미지를 이야기하면, 곧 강조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강조한다는 것은 바로, 글을 쓰면서 새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6)
때로 집은 커지고 늘어나기도 한다. 그런 집에서 살려면, 한결 더 유연한 몽상이, 한결 덜 명확히 그려진 몽상이 필요하다. 조르주 스피리다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집은 투명하다. 그러나 유리로 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차라리 수증기의 성질을 띤 것이라고나 할까. 그 벽들은 내가 바라는 데 따라 압축되기도 하고 확장되기도 한다. 때로 나는 그 벽들을 내가 바라는 데 따라 압축되기도 하고 확장되기도 한다. 때로 나는 그 벽들을, 바깥을 차단하는 갑옷처럼 내 주위로 바짝 당겨 붙인다.... 그러나 또 때로는 내 집의 그 벽들을 무한한 신장성 자체라고나 할, 그들의 고유한 공간에서 한껏 피어나도록 내버려두기도 한다.’
스피리다키의 집은 호흡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갑옷이었다가 다음에는 무한히 늘어난다. 우리들은 그 집에서, 번갈아 가며 인정 속에서 또 모험 속에서 산다고나 할 만하다. 그것은 골방이기도 하고 세계이기도 한 것이다. 이 경우 기하학은 초월되어 있다.
강한 현실성에 붙박혀 있는 이미지에 비현실성을 준다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시의 숨결 속에 들어가게 한다. 르네 카젤의 시편들은, 우리들이 그의 이미지들에 가 살기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이와 같은 신장을 우리들에게 말해 준다. 그는 지세의 윤곽이 더할 수 없이 뚜렷한 지방, 그가 살고 있는 프로방스의 오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 용암의 꽃이 숨 쉬고 뇌우와 기진케 하는 행복이 태어나는, 그 찾아낼 수 없는 집을, 그것을 나는 언제쯤 찾기를 그만두랴? ~~~~ 내 집이 나는, 온통 갈메기들로 고동치는, 바닷바람의 집과 같았으면 한다.’
(7)
온통 빛으로 싸여 있는 이런 이미지들에서,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더 먼 과거까지 회상함을 강요하는 고집스런 이미지들로 넘어가면, 시인들은 우리들의 스승들이다. 영원히 잃어버린 집들이 우리들 내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시인들은 우리들에게 얼마나 힘 있게 증명해 보이는가! 그 집들은 마치 우리들에게 존재의 보충분을 기대하기라도 하듯이, 우리들 내부에서 되살기를 고집하는 것이다.
오 덧없이 지나간 시간에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던 장소들에 대한 향수여!
이제 멀리서 난 그 잊었던 몸짓,
보충적 행동을
거기에 돌려주고 싶구나. -릴케. 과수원
피에르 세게르가 이렇게 쓰고 있다.
침묵과 벽이 되돌려 주는
이름을 부르며 나 홀로 가는
집. 내 목소리 속에 있고
바람이 살고 있는 기이한
집. 그 집을 나는 만들어 낸다.
내 손은 구름을, 수풀위의
넓은 하늘의 배를, 이미지들의 장난에선 양
흩어지고 사라지는 안개를 그리고. -피에르 세르게 <공유지>
이 집을 안개 속에, 숨결 속에 더 잘 세우기 위해서는,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한결 센 목소리와 그리고 마음과 말(言)의 푸른 향(香)이 필요할 것이라고. 숨결의 집과 마찬가지로 바람과 목소리의 집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진동하는 가치이다. 아마도, 사실주의적인 정신의 소유자라면 이 진동의 영역 훨씬 이쪽에 머무를 것이다. 그러나 시를 상상의 즐거움 가운데 읽는 사람은, 잃어버린 집의 메아리를 두 음역을 통해 들을 수 있는 날, 큰 행운을 얻을 것일 것이다. 과거의 집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그 집은 메아리들로 가득 찬 기하학적 대상이 아니겠는가? 과거의 목소리들은, 목소리는 큰 방과 작은 방에서 다르게 울린다. 층계에서 부르는 소리는 그것대로 또 다르게 울린다.
(8)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이렇게 쓰고 있다. ‘시골에서 마주치는 모든 외딴집들 앞에서 나는, 거기서 만족스럽게 내 삶을 보낼 수 있으리라고 혼자 생각하곤 한다. 왜냐하면 그 집들에 유리한 사실이지만 내게는 그것들이 불편한 데라고는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거기에 내 귀찮은 생각들과 몰취미한 습관들을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이고, 그래 그 풍경을 상하게 하지 않은 것이다.’
조르주 상드는 ~~~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초가집을 꿈꾸고, 초가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궁전을 꿈꾸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들은 각자 초가집을 꿈꾸는 시간과 궁전을 꿈꾸는 시간을 가진다. 우리들은 대지 가까이 초가집의 마당에 살기도 하고, 다음 공중누각에서 지평선을 굽어보기를 바라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독서를 통해 수많은 거소의 정소를 접했을 때, 우리들은 우리들 내부에 초가집과 성의 변증법이 울리도록 할 수 있게 된다.
창문에서 바라보이는 모든 것이 집에 속하게 된다.
산의 몸체가 내 창문에서 멈칫거린다.
나는 산인데 어떻게 들어갈 수 있지,
바위들과 자갈들을 가진,
높은 데선 하늘에 의해 변질된 대지의 한 조각인 산인데?
(9)
나는 어느 이탈리아 소설에서, 낫질하는 당당한 동작으로 비를 움직이는 거리 청소부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몽상 속에 빠져, 아스팔트 위에서 상상의 풀밭을, 진짜 평원의 드넓은 풀밭을 낫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상상의 풀밭에서 그는 그의 젊은 시절을, 솟아오르는 태양 아래서의 낫질의 위대한 직분을 되찾고 있었던 것이다.
제3장
서랍과 상자와 장롱
제4장
새 집
빅토르 위고는 <노트르담의 곱추>에서 몇 마디 표현으로 거주의 기능의, 이미지들과 존재들을 결합시키고 있다. 콰지모도에게 있어서 노트르담 성당은 연이어서 ‘알이고, 새집이고, 집이고, 조국이고, 우주’였다. 거의, 그는 마치 달팽이가 그 껍질의 형태를 띠듯이 노트르담 성당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고나 할 만 했다. 성당은 그의 거처였고, 소굴이었고, 피막이었다...이를테면 그는 마치 거북이 그의 등딱지에 붙어 있듯이 거기에 붙어 있었다. 그 울퉁불퉁한 성당은 바로 그의 갑각이었다. 보기 흉한 콰지모도가 어떻게 그 복잡한 건물의 이곳저곳 구석에 있는, 제 몸을 숨기는 모든 장소들의 울툭불툭한 형태를 띠고 있는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위의 모든 이미지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시인은 수다한 이미지들로써 우리들에게 갖가지 은신처의 은익의 힘을 민감하게 느끼게 한다.
(3)
새집은 물론 새에게는 따뜻하고 아늑한 거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생명의 집인 것이다. 그것은 알에서 깨어 나오는 새를 계속 품어 준다. 알에서 깨어 나오는 새에게는 새집이란, 그의 아직 벌거벗은 살갗이 자체의 솜털을 얻기 전에, 이를테면 외면의 솜털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보잘 것 없는 것을 인간적인 이미지로. 인간을 위한 이미지로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성급하게 이루어지는가! 사랑하는 이들이 자신들에게 마련하려 하는, 잘 닫혀 있고 따뜻한 새집 같은 보금자리를, 나무 위 나뭇잎들 사이에 버려진 듯 걸려 있는 실재의 새집과 정녕 비교해 본다면, 새집의 이미지의 우스꽝스러움을 느낄 수 잇을 것이다. 새들은 - 이 점을 미리 말해 둬야 하는데 - 집 밖 숲 속에서의 사랑밖에 모른다. 새집은 나중에, 들판을 날아다니며 하는 미친 듯 한 사랑이 있은 후에, 짓게 된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해 보고 거기에서 인간적인 교훈을 이끌어 내야 한다면, 숲 속에서의 사랑과 시가지의 집 방 안에서의 사랑의 변증법을 또한 창안해야 할 것이다. 그것 역시 이 책의 주제는 아니다.
다만 앙드레 퇴리에가 지붕 밑 방과 새집을 비교한 적이 잇음을 미리 말해 두기로 하자. 그는 그 비교에 다음과 같은 단 한마디의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꿈은 높은 가지에 올라앉기를 좋아하지 않는가?’ 한마디로 말해, 문학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새집의 이미지는 유치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경험적인 새집은 그러므로 이미지로서는 잘못 시작된 이미지다. 그러나 새집의 이미지는, 작은 문제들을 다루기 좋아하는 현상학자가 발견할 수 있는 원초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철학적 현상학의 주된 기능에 대한 오해를 지워 버릴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이 현상학의 작업은 자연 속에서 마주치는 새집들을 묘사하는 게 아니다. 그것이야 전적으로 실증적인 작업으로서, 조류학자에게 맡겨져 있는 일이다.
새집을 발견함은 우리들을 우리들의 어린 시절로 되돌려 보낸다. 우리들 가운데, 삶이 그것의 우주성의 전 용량을 보여준 이들은 극히 드물다. 얼마나 여러 번 나는 우리 집 정원에서 새집을 너무 늦게 발견한 실망을 느꼈던가! 가을이 와 있고, 나뭇잎들이 이미 많이 떨어지고 있다. 그때에야 저 두 나뭇가지가 갈라지는 사이에 버려져 있는 새집이 보인다. 그러니 아빠새, 엄마새, 새끼새들이 저기에 있었던 게 아닌가, 그리고 나는 그들을 보지 못한 것이다.
제5장
조개껍질
(1)
조개껍질에는 너무나 명확하고 공고한 개념이 대응되어 있기 때문에, 시인은 단순히 그것을 묘사할 수가 없고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잇을 따름이어서, 우선 이미지의 부족을 느낀다.
(3)
경탄의 가장 훌륭한 표징은 과장이다. 조개껍질의 거주자가 우리들을 놀라게 하기에, 상상력은 머지않아 조개껍질 속에서 놀라운 존재들을, 현ㅅ리보다 더 놀라운 존재들을 나오게 한다.
(4)
현실에 있어서 연체동물은 그의 껍질에서 무기력하게 빠져나온다. 만약 우리의 연구가 달팽이의 행동의 실제적인 현상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그 행동은 큰 어려움 없이 우리의 관찰에 맡겨질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바로 그 관찰 자체 가운데 전적인 소박성을 회복시킬 수 있다면, 즉 원초의 관찰을 정녕 되살(再體驗)수 있다면, 우리는 외계에 나타낸 모든 최초의 행동에 수반되는 그 공포와 호기심의 콤플렉스를 다시 활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보고 싶어 안달하면서도, 보기를 겁낸다. 이것이야말로 일체의 앎의 감각적인 입구인 것이다. 이 입구에서 흥미는 물결치다가 흐려지고, 흐려지다가 되살아난다. 이 공포와 호기심의 콤플렉스를 지적하기 위해 우리가 마주친 예는 커다란 것이 아니다. 달팽이 앞에서의 공포는 곧 가라앉고, 마멸되고,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 책은 바로 그 무의미한 것의 연구에 바쳐진 것이다. 때로 그 무의미한 것에는 기이한 미묘성이 드러난다. 그 미묘성을 드러내기 위해 그것을 상상력의 확대경 밑에 두고 살펴보기로 하자.
영화에서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빠른 속도로 나타내면, 그것은 장엄한 봉헌의 이미지가 될 것이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t고도로, 망설임 없이 열리는 꽃은 증여(贈與)의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나, 그것 자체가 바로 세계의 증여라고나 하겠다. 만약 이처럼, 제 껍질을 빠져나오는 달팽이의 모습을, 하늘을 향해 제 두 뿔을 재빨리 쳐드는 달팽이의 모습을 빠른 속도로 보여준다면, 그것은 얼마나 힘찬 공격의 이미지가 될 것인가! 얼마나 공격적인 뿔인 것인가! 그러면 우리들의 공로는 일체의 호기심을 낙아 버릴 것이다. 공포 - 호기심의 콤플렉스는 갈라져 버릴 것이다.
(8)
상상력의 이미지가 도대체 현실에 가깝게 있는 적이 있는가 하고 자문한다. 대부분의 경우, 묘사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기실 상상하는 것이다. 즐겁게 하면서 가르치는 - 그렇게들 생각하는데 - 묘사를 하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 그릇된 장르는 문학의 한 부분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한 젊은 기사의 교육을 위한 저서임을 표방하고 있는 18세기의 어느 책에서, 저자는 자갈에 붙어 있는 입 벌린 섭조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끈과 말뚝으로 쳐 놓은 천막처럼 보인다.’ 저자는 그 가느다란 끈들로 사람들이 천을 짜기도 했음을 일러두기를 잊지 않고 있다. 아닌게아니라 사람들은 그 조개의 끈들로 실을 만든 적이 있는 것이다. 저자는 또한 다음과 같이, 아주 평범하나 우리로서는 한 번 주목하지 않ㅅ을 수 없는 이미지를 통해 철학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달팽이들은 조그만 집을 지어, 그것을 지니고 다닌다.’ 그래 ‘달팽이는 어느 곳을 돌아다니더라도 언제나 제 집에 있는 것이다.’
조개껍질 - 집이라는 이미지보다 더 낡은 이미지는 없다. 그것은 성공적으로 복잡하게 재창조될 수 있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새롭혀질 수 있기에는 너무 오래된 것이다. 그것은 그것이 말해야 하는 것을 단 한마디로 말한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것이 원초적 이미지임은 여전히 사실이다. 그것은 파괴되지 않는 이미지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상상력의 고물들을 파는 없어지지 않을 바자(전통시장)에 속하는 것이다. ~~~한 생물학자가 이렇게 쓰고 있다. ‘ 달팽이는 마치 놀림 받은 여자 아이가 제 방에 들어가 울듯이, 어느새라고 할 것 없이 제 집 안으로 몸을 움츠리고 만다.’
(9)
자연은 우리들을 경이롭게 느끼게 하는 아주 단순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크게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보통 대성수반이라고 부르는 거거(車渠)라는 조개에 있어서, 우리들은 자연이 거대한, 보호의 꿈, 보호의 광란을 이끌어 가는 것을, 그러다가 보호의 기형에 이르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연체동물은 14파운드밖에 나가지 않으나, 그 껍질 한 짝의 무게는 250에서 300킬로그램까지 되고 그 길이는 1미터에서 1.5미터까지 된다.(※아르망 랭드랭<바다 괴물들>) 유명한 경이총서의 한 권인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중국에서는 ~~~부자 관리들이 이 조개의 껍질로 만든 목욕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14파운드의 동물이 그토록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니, 얼마나 큰 휴식의 힘을 느낄 수 있었겠는가! ~~~어느 저자는 말하기를, 대성수반(거거)에게 억지로 하품을 시키기 위해서는 그 두 껍질의 각각에 두 마리의 말을 매달아야 한다고 했다.
집에서 홀로 산다! 얼마나 위대한 꿈인가? 조개껍질 속에서 산다는 것과 같은 더할 수 없이 굳어 버린 이미지, 물리적으로 더할 수 없이 터무니없는 이미지라도 그러한 꿈의 배아(胚芽)가 될 수 있다.그 꿈은 약한 이들이나 강한 이들이나, 모든 사람들을, 삶의 커다란 슬픔의 순간들에 인간과 운명의 부당함에 대항하여, 찾아오는 꿈이다.
별과 이슬이
오가는 낡은 집
을 꾸었는데,
그와 동시에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이다.
내 그림자는 소리 울리는 조가비
시인은 제 몸 그림자의 조가비 속에서
제 과거를 듣네. (※막심 알렉상드로<살갖과 뼈>)
(10)
플린pline은 속살이게와 공생하는 삿갓조개가 제 먹이를 다음과 같이 얻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앞 못 보는 조개는 그의 주위에서 놀고 있는 조그만 물고기들에게 제 몸을 드러내 보이며 껍질을 연다. 처음에 아무런 위해도 가해지지 않으니까, 그것들은 겁이 없어져 조개껍질 속으로 가득히 들어간다. 바로 그 순간, 망을 보고 있던 속살이게가 조개를 가볍게 물어 사태를 알린다. 조개는 갑자기 껍질을 닫아, 껍질 사이에 사로잡히게 된 모든 것을 으스러뜨려, 그 희생물을 그의 동료와 나누어 먹는다.
레오나르도 다 빈티의 <잡록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굴은 만월처럼 껍질을 완전히 열어젖힌다. 그것을 보면, 게는 돌 조각이나 잔 나뭇가지 조각을 조개에 던져, 그것이 다시 껍질을 닫지 못하게 하여 제 먹이가 되도록 한다.’ 그리고 다빈치는 이 이야기에 - 의당한 일이지만 - 교훈을 맞춰 끼워 놓았다: ‘비밀을 털어놓다가 조심성 없는 상대자에게 발목을 잡히는 입이 이와 같다.’
내버려진 조개껍질에 들어가 사는 은자 베르나르의 이미지에 사람들은 때로, 다른 새들의 집에 들어가 알을 낳는 뻐꾸기의 습성을 연상한다.
제-6장
구석
(1)
구석진 공간은 어떤 것이나, 우리들의 상상력에 대해서는 하나의 고독, 즉 하나의 방의 배아, 하나의 집의 배아가 된다.
(2)
소설가들은 , 꾸며낸 소박성을 달고 있는 사건들이 체험되지 않은 꾸며낸 어린 시절에 있었던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문학 창조 활동에 의해, 작품이 진행되는 시간 이전의 먼 과거로 투사되는 이 비현실적인 과거는, 흔히 실제의 몽상을 숨기고 있는데, 그 몽상은, 작가가 그것을 정년 실제적인 소박성 가운데 우리들에게 제시한다면 그것의 전 현상학적인 가치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재와 묘사는 근접시키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5)
오래된 벽면에- 시간이 그어 놓은 선들에는 세계 지도가 있지 않는가? 천정에 나타난 몇 개의 선에서 어느 누가 새로운 대륙의 지도를 보지 않았던가? 그 모든 것을 시인은 알고 있다. 그러나 소묘와 몽상의 경계에서 우연이 만들어 놓은 그 세계를 자기 식으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는 거기에 가서 살려고 할 것이다. 그는 갈라진 천정의 세계에서 체류하기 위한 구석을 하나 찾을 것이다.
한 시인이 쇠시리의 오목한 길을 따라가다가, 그 구석에서 그의 오두막집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의 한 예이다. 피에르 알베르 비로가 <다른 나에게 바치는 시>에서 ‘따뜻함을 유지하는 곡선‘에 ’꼭 붙어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자. 그것의 따뜻함은 얼마 안 있어 우리들에게, 우리들 몸을 무엇으로 휘감아 덮으라고 명령한다.
....나는 쇠시리를 곧장 따라가고
쇠시리는 천정을 곧게 따라가고
그러나 거기 사물들의 소묘를 ‘듣고 있으면,’ 곧 모퉁이, - 몽상가를 사로잡는 함정인 모퉁이가 나타난다. 그러나 내가 빠져나올 수 없는 모퉁이들이 있다. 바로 그 감옥에 평화가 든다. 그 모퉁이들에서, 그 구석들에서 몽상가는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있는 휴식을 체험하는 듯하다. 그는 그때에 비현실성의 존재인 것이다. 그를 밖으로 내던지기 위해서는 하나의 사건이 필요하다. 이난 게 아니라 시인은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나 내가 천사의 꿈으로 죽어 가기 시작하고 있는 그 모퉁이에서, 나를 경적 소리가 빠져나오게 했다.
제7장
세미화(細微畵)
(1)
심리학자는 - 하물며 철학자는 말할 것도 없고 - 동화에 흔히 등장하는 세미화적인 사상들의 작용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심리학자의 눈에는 작가가 이집트 콩 한 개 속에 들어가는 여러 채의 집을 만들면서 그냥 즐거워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야말로 시작에서부터 터무니없는 짓거리로서, 동화를 더도 덜도 아닌 단순한 공상의 서열에 위치시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공상 속에서는 작가는 환상적인 것의 위대한 영역에 정녕 들어가지 못한다. 작가 자신, 그의 손쉽게 지어낸 이야기를 펼쳐 나갈 때에는 -흔히 아주 서투르게 - 그러한 세미화에 관계있는 심리 현실을 믿고 있지 않은 듯하다. 거기에는, 작가에게서 독자에게로 옮아갈 수 잇을 그 미량의 꿈이 빠져 있다. 남에게 믿게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믿어야 하는 법이다. 철학자에게는, 그 ‘문학적‘ 세미화들, 그, 문학가에 의해 그토록 쉽게 축소되는 대상들을 두고 하나의 현상학적 문제를 제기해 볼 만한 가치가 있을까? 의식 - 작가의 의식, 독자의 의식 - 은 그러한 이미지들의 시원에 있어서도 진지하게 활동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일까?
(2)
사라노의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이 사과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조그만 우주이다. 그 씨앗은 다른 부분들보다 더 더운데, 스스로의 주의로 사과 전체를 보존하는 열을 방사한다. 그리고 그 견해에 따르면, 그 씨앗은 그 조그만 우주의 조그만 태양이며, 그 조그만 덩어리의 생장촉진적인 요소인 소금을 데우고 배양한다고 한다.’
이 텍스트 가운데 실사적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며, 일체가 상상되고 있는데, 그 상상적인 세미화는 하나의 상징적인 가치를 감싸 안고 있는 것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 한 가운데 씨앗이 있는데, 그 이외의 전체 사과보다 더 덥다는 것이다. 그 응집된 열, 인간이 사랑하는 그 따뜻한 안락, 이것이 이 이미지를, 보는 이미지의 서열에서 체험하는 이미지의 서열로 옮겨가게 하는 것이다. 상상력은 생산촉진적인소금이 배양하는 그 씨앗의 힘으로 기운을 전적으로 회복한 듯이 느낀다. 사과, 과일이 이젠 근본적인 가치가 아니다. 참된 역동적인 가치는 씨앗인 것이다. 씨앗이 역설적이게도 사과를 만든다. 그것은 방향성(芳香性) 즙을, 그것의 보존적인 힘을 사과에 보내어 준다. 씨앗은 과일 덩어리의 보호를 받으며 다사로운 요람 속에서 태어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이 오히려 생명의 열의 생산자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상 가운데서는 관찰자적인 태도에 반하는 하나의 전적인 전도가 있다. 상상하는 정신은 이 경우, 관찰하는 정신과 정반대의 길을 따르고 있다. 상상력은 지식들을 요약해 놓은 도표에 이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상상력은 이미지들을 더욱 더 많이 만들 구실을 찾을 뿐이다. 그러다가 한 이미지에 흥미를 가지게 되면, 그 즉시 상상력은 그것의 가치를 크게 불린다. 시라노가 ‘사과-태양’을 상상하게 된 그 순간, 그 씨앗이 삶과 열의 중심이며 한마디로 하나의 가치라는 신념을 그는 가졌던 것이다.
사과 씨앗은 사과의 태양인가? 충분한 몽상을 가지고 생각해 본다면 - 아마도 많은 몽상이 필요하겠는데 - 필경 우리들은 이 문제가 몽상적으로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시라노 드 베르주락은 불합리한 문제들에 즐겁게 부딪히기 위해 초현실주의를 기다리지 않았다. 상상력의 측면에서는 그는 틀린 게 아니다. 왜냐하면 상상력은 결코 틀리는 법이 없기 때문이고, 상상력은 이미지를 객관적인 현실과 대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더 멀리 나아가 보아야 한다 : 시라노는 그의 독자들을 틀리게 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독자들도 ‘틀리게 알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언제나, 그 상상력 수준의 독자들을 발견하게 되기ㅐ를 바랐을 따름이다. 일종의, 존재(인간 존재) 차원의 낙관주의가 모든 상상력의 작품에 내재해 있다. 제라드 드 네르발(덴마크의 물리학자)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의 상상력은 이 세계에서나 다른 세계들에서나, 참되지 않은 어떤 것도 창조하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3)
1851년네 간행된 <새신학 백과사전>가운데의 한 권인 두꺼운 <기독교 식물학 사전>에서 우들은 ‘두루미냉이’의 항목 밑에, 일명 독일 수수라고도 하는 두루미냉이의 꽃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묘사를 읽을 수 있다: ‘솜털로 덮힌 요람 속에서 자라난 그 꽃들은 작고 섬세하여 희색이나 장미색을 띤다..... 나는 그 조그만 꽃받침을, 그것을 덮고 있는 그, 긴 비단실로 된 것 같은 그물로써 들어낸다.... 순형(脣形)꽃잎의 아래 것은 곧게 뻗어 나가면서 약간 휘어 있다. 그것은 안쪽으로 강렬한 분홍색을 띠고, 바깥쪽에서는 모피 같은 빽빽한 솜털로 덮혀 있다. 이 식물 전체가, 거기에 사람의 피부가 닿으면 따끔거리게 한다. 그것은 조그만 진짜 북극 지방 옷을 입고 잇는 듯하다. 네 개의 조그만 수술은 마치 노란색의 조그만 솔 같다.’ 여기까지 텍스트는 객관적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것은 심리화 한다. 전차적으로 하나의 몽상이 묘사를 동반하게 된다: ‘그 네 개의 수술은 아래쪽 꽃잎들이 만들고 있는 일종의 조그만 벽감 같은 아늑한 공간에서 곧게, 그리고 서로 아주 사이좋게 서 있다. 그것들은 아주 두터운 메트리스를 벽에 댄 조그만 지하 방공호 같은 곳에서 따뜻함을 유지하고 있다. 조그만 암술은 수술들의 발밑에 공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 크기가 너무나 작으므로, 그것에 말을 건네기 위해서는 수술들 또한 무릎을 굽히지 않으면 안 된다. 작은 여인들이 집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 가운데서도 말소리가 가장 공손한 듯한 여인들이 흔히 살림살이에서 가장 결연한 행동을 취한다. 네 개의 벌거벗은 씨앗은 꽃받침 밑바닥에 머물면서 자라난다. 마치 인도에서 어린아이들이 해먹 속에서 흔들리며 자라나듯이. 각각의 수술은 스스로의 작품을 알아보며, 질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모피로 유지되는 따사로운 열을 느꼈고, 씨앗을 흔들어 잠재우는 해먹을 보았다. 형상들의 조화에서 거소의 안락함을 확인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4)
돋보기를 든 인간의 현상학을 개괄하면서 우리는 실험실의 연구가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 연구가는 객관성의 기율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상상력의 모든 몽상을 막아버린다. 그가 현미경을 통해 관찰하고 있는 것은, 그가 이미 본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는 결코 처음으로 보는 법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확실한 객관성 가운데 이루어지는 과학적인 관찰의 영역에서는 처음이란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 관찰이란 여러 번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과학적인 연구에 있어서는 우선 심리적으로 놀라움을 소화해야 한다. 과학자가 관찰하는 것은 여러 생각들과 실험들의 집적체 가운데 정확히 정의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상상력을 연구할 때에 주목의 대상을 찾아야 하는 것은, 과학적인 실험이 제기하는 문제들의 차원에서가 아니다. <머리말>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과학적 객관성의 모든 습관들을 잊어버림으로써 우리들은 처음의 이미지들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5)
빅토르 위고는 크게 보는 묘사가이지만, 또한 세미화를 그릴 줄도 안다. <라인 강>에 이런 묘사가 나온다: ‘프라이베르크에서 나는 오랫동안, 내 눈 아래에 펼쳐져 있는 광활한 풍경을 잊고, 내가 앉아 있는 사각형의 풀밭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것은 산언덕의 솟아오른 넓지 않은 황량한 부분이었다. 거기 또한 하나의 세계가 있었다. 풍뎅이들이 풀잎들의 긴 섬유 밑에서 천천히 기어가고 있었다. 양산 모양의 독당근 꽃들이 이탈리아 소나무를 흉내 내고 있었다.... 황색과 흑색의 비로드로 덮인 듯한 몸통을 한 뒝벌 한 마리가 가엾게도 물기에 젖어 가시 난 잔가지를 따라 힘겹게 올라가고 있었다. 빽빽한 모기떼들이 그 뒝벌에게 햇빛을 가리고 있었다. 조그만 방울 모양의 푸른 꽃이 바람에 떨고 있었다. 한 족속 전체라고 할 만한 진디떼가 그 거대한 텐트 밑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나는, 땅벌레 한 마리가 진흙에서 빠져 나와 공기를 빨아들이며 하늘을 향해 몸을 뒤트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노아의 홍수 이전의 괴사(怪蛇)처럼 생겼는데, 아마도 그것 역시 그 미세한 세계 안에서 즈를 죽일, 헤르쿨레스에 해당하는 것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묘사해 줄 퀴비에(프랑스의 박물학자)같은 학자가 있을 것이다. 요컨대 그 세계 또한 이 세계만큼 큰 것이다.’
제8장
내밀(內密)의 무한
(1)
무한은 우리들의 내부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삶이 억제되고 조심성이 멈추게 하나 고독 가운데서는 다시 계속되는 일종의 존재의 팽창에 결부되어 있다. 우리들은 움직임 없이 있게 되자마자, 다른 곳에 가 있게 된다. 우리들은 무한한 세계 속에서 꿈꾼다. 무한은 움직임 없는 인간의 움직임이다. 무한은 조용한 몽상의 역동적인 성격의 하나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철학적인 배움을 시인들에게서 얻고 있으니, 여기서, 세 시행의 시구에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 피에르 알베르 비로를 읽어보기로 하자 :
그래 나는 펜을 한 번 휘갈겨
세계의 주인, 무한한 인간으로
나를 창조하노라.
(5)
무한은 시적 상상력의 한 범주이며 단순히 웅장한 광경들의 관조에서 이루어진 일반적인 관념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텐 Taine의 글에서 뽑은 것을 이야기해 볼 수 있겠다. 우리는 이 예에서 시 대신에 나쁜 문학, - 어떻게 해서라도, 근본적인 이미지들을 희생해서라도 현란한 표현을 바라는 문학, 그런 문학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고자 한다. <피레네 산맥 여행기>에서 텐은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을 때, 나는 더할 수 없는 불쾌한 환멸을 맛보았다...., 파리 부근에서 볼 수 있는, 네모진 녹색 양배추밭들과 다갈색 보리밭 지대를 이웃하고 있는, 길게 퍼진 사탕ㅂ=무 벌판을 보는 것 같았다. 멀리 보이는 돛들은 마치, 되돌아오는 비둘기들의 날개 같았다. 그 원경은 내게는 좁아 보였다. 화가들의 그림에서 본 바다는 더 넓었었다. 무한의 감정을 되찾기 위해서는 나는 사흘이 필요했다.’
(6)
릴케가 그의 관조의 대상인 나무에 무한적인 생존을 줄 때, 그의 시를 들어 보기로 하자.
‘공간은 우리들 밖에서 사물들로 퍼져 나가 그것들을 표현한다.
만약 네가 한 나무의 생존을 훌륭히 이루어 내린다면,
그것에 내부 공간을 주라. 네 안에
그 존재가 잇는 그 공간을.
그것을 속박으로 둘러싸라. 하나
그것은 경계가 없고, 네 자신의 포기(抛棄)
한가운데서 질서를 찾을 때에야
정녕 한 나무가 된다.‘
나무를 속박으로 둘러싸라는 권고는 우선, 그것을 묘사해야 한다는, 그것으로 하여금 외부 공간 속에서 한계를 가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지각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고,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즉 더 이상 상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무는 어떤 참된 존재와도 마찬가지로 그것의 경계가 없는 존재가운데 파악된다. 그것의 한계는 우연적인 것일 따름이다.
제9장
안과 밖의 변증법
제10장
원의 현상학
[민음사판 역자 후기]
<공간의 시학>의 번역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이제야 그 간행을 눈앞에 두고 보니, 약간의 감회를 금할 수 없다.
[Review]
(피 흐르는 눈 4)
-한강-
이 어스름한 저녁을 열고
세상의 뒤편으로 들어가 보면
모든 것이
등을 돌리고 있다
고요히 등을 돌린 뒷모습들이
차라리 나에겐 견딜 만해서
되도록 오래
여기 앉아 있고 싶은데
빛이라곤
들어와 갇힌 빛뿐
슬픔이라곤
이미 흘러나간 자국뿐
조용한 내 눈에는
찔린 자국뿐
피의 그림자뿐
흐르는 족족
재가 되는
검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의 책이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책의 소장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작가 싸인 이 들어있는 초판본은 고가에 거래된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작가의 사회적 성향을 두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작가의 시집 한권을 어렵게 구해서 읽었다. 선입견 때문인지 시어들이 무겁게 다가왔다. ‘피’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서슬 퍼런 군부의 구둣발과 총검, 절규하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등을 돌린 뒷모습‘, ’이미 흘러나간 자국뿐‘, '찔린 자국뿐', '피의 그림자뿐’, ‘조용히 재가 되는’ 시어들에서 아픈 상처들과, 모든 것 들이 세상의 무관심 속에 사라져가는 것을 슬퍼하는 시인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아마도 문학작품에서 작가는 경험된 이미지로 글을 쓴다는 나의 생각 때문이다.
이 책<공간의 시학>은 문학적 표현 특히 시적 표현에서 작가는 어떤 이미지를 연상할 때 과거의 경험에 바탕을 둔다는 전통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하며, 작품을 창조한 작가의 ‘상상력의 독자성’(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을 때 무의식 속에서 형성된 이미지. 요나 콤플렉스)으로 작품의 본질이 작가의 전기적인 상황에 초월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전기적 비평과 정신분석적 비평에서는 시적 이미지를, 의식적인 것이든 무의식적인 것이든 작가의 생애의 한 요소, 즉 그가 경험한 어떤 것에 비추어 설명하려고 한다. 즉 여기에서 설명의 원리가 되어 있는 것은 인과성(因果性)이다: 작가의 생애의 한 요소가 원인이 되어, 그것에 대응되는 작품의 요소, 이 경우 시적 이미지가 그 결과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인과적인 설명 원리야말로, 특히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서구의 지배적인 사조였던 실증주의에 근거를 둔 전기적 비평이 스스로를 실증적인 문학 연구로, 따라서 가장 바람직한 연구로 내세우는 근거였다. 그러나 실제에 우리들 독자들이 구체적으로 하나의 문학 작품, 하나의 시적 이미지에서 감동을 느낀 독서 체험을 돌이켜보면, 그 감동은 정직하게 말해 작가의 생애에 관한 지식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졌음을 인정해야 한다. 즉 우리들은 작가의 생애를 전혀 모르고서도 작품에서 감동을 느끼는 것이다.”(역자의 글)
어떤 책은 한번 읽고 지나가는데, 몇 번 보아도 알지 못하는 책이 있고, 또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책이 있다. 후자는 용어나 문장의 구성에서 이미 생소함을 느끼기 때문에 오는 어려움도 있지만, 분야에 대한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책은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골치 아픈 책이다, 오죽하면 이 책의 번역자(서울대 명예교수)는 십년에 걸쳐 이 책을 번역하면서 마음고생이 많았고, 다시는 이런 책을 번역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는 그만큼 이 책이 자닌 가치가 크다는 의미일 수 있다.
타이핑을 하며 정성스레 읽고, 다시 전체 내용을 들여다보아도, 저저가 말하는 ‘상상력의 독자성’이 어떤 것인지 쏙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최소한 더 순수한 마음, 열린 마음으로 문학작품을 대할 수 있는 안목을 넓힐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에 실린 총체적으로 “집“에 담긴 열 가지 소재(집, 집과 세계, 서랍과 상자와 장롱, 새鳥집, 조개껍질, 구석, 세미화, 내밀의 무한, 안과 밖의 변증법, 원의 현상학)의 내용에는 인간의 순수한 상상력에 도움을 주는 많은 내용들이 담겨 있어서, 독자는 문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이 책에서 문제되어 있는 상상력의 궁극성은 요나 콤플렉스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들이 어머니의 태반 속에 있을 때에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 형성된 이미지로서, 우리들이 어떤 공간에 가사이듯이 들어 있을 때에 안온함과 평화로움을 느끼는 것은 이 요나 콤플렉스 때문이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이미지들은 그러므로, 집, 서랍, 상자, 장롱, 새집, 조개껍질, 구석 등 내밀할 수 있는 공간의 이미지들 및 그 변양태들, 그리고 내밀하지는 않더라도 그런 이미지들과의 상관관계 밑에서라야 이해될 수 있는 이미지들이다. 말하자면 우리들의 상상력이 전자의 이미지들을 안온함과 평화로움을 느끼게 하는 내밀한 공간으로 파악하고 후자의 이미지들을 그런 공간의 내밀성의 가치에 비추어 파악하는 것이, 그것이 독자적인 작용인 것이다.”(역자의 글)
저자는(1884~1962) 프랑스 소르본 대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그의 여러 저술 중에서 이 책은 대표적 작품으로 꼽힌다.■
(본문)
“시적 이미지란 갑작스러운 정신의 융기, 부수적인 심리적 인과관계로는 잘 밝혀지지 않는 정신의 융기이다. 또한 일반적이고 조직된 어떤 것도 시의 철학에 기본이 될 수 없다. 원리라는 관념, 기본이라는 관념은 여기서는 파괴적인 것일 것이다. ”
“시적 행위는 과거를, 적어도 그것이 준비되고 나타나는 과정을 우리들이 따라가 볼 수 있는 그러한 가까운 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에 뒤이어 우리가 새로운 시적 이미지와, 무의식의 밑바닥에서 잠자고 있는 원형 사이의 관계에 언급해야 할 때에라도, 우리는 그 관계가 엄밀히 말해 인과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키도록 해야 될 것이다. 시적 이미지는 충동적인 힘에 예속되어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메아리가 아닌 것이다.”
"시행은 언제나 움직임을 가지며, 이미지는 시행의선 속에 살며시 끼어들어 상상력을 이끌고 간다. 그것은 마치 상상력이 신경섬유를 만들어 늘이는 것과도 같다."
“시란 영혼의 참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영혼에 연결된 의식은 정신의 현상들에 연결된 의식보다 더 휴식적이고 덜 의도적이다.”
“시인의 생애의 드라마마저 뛰어넘는 그 말의 행복을 체험하기 위해 시인의 괴로움들을 살아 보아야 할 필요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시적 이미지는 ‘그 자체의 존재와 그 차체의 힘’을 가지므로, 그 자체로서 파악되어야 한다(어떤 원인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즉 존재론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보잘 것 없는 것을 인간적인 이미지로. 인간을 위한 이미지로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성급하게 이루어지는가! 사랑하는 이들이 자신들에게 마련하려 하는, 잘 닫혀 있고 따뜻한 새집 같은 보금자리를, 나무 위 나뭇잎들 사이에 버려진 듯 걸려 있는 실재의 새집과 정녕 비교해 본다면, 새집의 이미지의 우스꽝스러움을 느낄 수 잇을 것이다. "
”시는 그 위대한 기능에 있어서 우리들에게 꿈의 상황을 되돌려 준다. 우리들이 태어난 집은 단순한 집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꿈들의 집적체인 것이다. 옛날 그것의 구석진 곳들은 모두 하나하나 몽상의 장소였다. 그리고 장소는 흔히 몽상을 특수화한다. 우리들은 거기서 몽상의 습관을 익혔던 것이다. 우리들이 홀로 있었던 집, 방, 곳간은 끝없는 몽상, 오직 시만이 시작품으로써 끝내고 완성시킬 수 있을 그러한 몽상의 무대를 제공한다. 이러한 모든 은둔처들에, 꿈을 지키는 그것들의 기능을 부여할 때, 내 앞선 저서에서 내가 지적한 바 있듯이 우리들 각자에게는 꿈의 집이, 사실의 과거 너머로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추억 - 꿈의 집이 하나씩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현상학자에게 뉘앙스란 원초적인 솟구침의 심리 현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뉘앙스는 보충적인 표면의 빛깔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삶의 공간에서 삶의 모든 모순적인 양상과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는가. 어떻게 우리가 하루하루 우리 자신을 ‘세계의 한 구석’에 뿌리박고 있는가를 말해야 한다.”
“조개껍질 - 집이라는 이미지보다 더 낡은 이미지는 없다. 그것은 성공적으로 복잡하게 재창조될 수 있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새롭혀 질 수 있기에는 너무 오래된 것이다. 그것은 그것이 말해야 하는 것을 단 한마디로 말한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것이 원초적 이미지임은 여전히 사실이다. 그것은 파괴되지 않는 이미지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상상력의 고물들을 파는 없어지지 않을 바자(전통시장)에 속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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