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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요한복음 4장 11-15절
4:11 λέγει αὐτῷ ἡ γυνή κύριε οὔτε ἄντλημα ἔχεις καὶ τὸ φρέαρ ἐστὶν βαθύ πόθεν οὖν ἔχεις τὸ ὕδωρ τὸ ζῶν
4:12 μὴ σὺ μείζων εἶ τοῦ πατρὸς ἡμῶν Ἰακώβ ὃς ἔδωκεν ἡμῖν τὸ φρέαρ καὶ αὐτὸς ἐξ αὐτοῦ ἔπιεν καὶ οἱ υἱοὶ αὐτοῦ καὶ τὰ θρέμματα αὐτοῦ
4:13 ἀπεκρίθη Ἰησοῦς καὶ εἶπεν αὐτῇ πᾶς ὁ πίνων ἐκ τοῦ ὕδατος τούτου διψήσει πάλιν
4:14 ὃς δ᾽ ἂν πίῃ ἐκ τοῦ ὕδατος οὗ ἐγὼ δώσω αὐτῷ οὐ μὴ διψήσει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ἀλλὰ τὸ ὕδωρ ὃ δώσω αὐτῷ γενήσεται ἐν αὐτῷ πηγὴ ὕδατος ἁλλομένου εἰς ζωὴν αἰώνιον
4:15 λέγει πρὸς αὐτὸν ἡ γυνή κύριε δός μοι τοῦτο τὸ ὕδωρ ἵνα μὴ διψῶ μηδὲ διέρχωμαι ἐνθάδε ἀντλεῖν
* 묵상할 내용:
"주님을 이용하려는 사마리아 여자"
- 목마르신 주님께 물을 드리지 않는 여자
- 목마르신 주님을 겉모습으로 평가하는 여자
- 목마르신 주님께 생수 달라는 여자
사마리아 여자는 주님께 “당신은 물 길을 그릇을 가지고 있지 않다”(ἔχεις: ἔχω의 2인칭 단수)고 말한다(요 4:11). 결국 여자는 그렇게 물 길을 그릇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자기에게 도움이 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이 무엇을 가졌는지 그렇지 못한지를 기준으로 상대를 평가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찌든 가치관이다. 그것을 기준으로 상대방의 가치와 말의 중요성이 결정되어버리는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자기 마음에 들고 자기에게 이익이 될 것으로 보일 때 그것을 좋은 것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선악과의 가치관’에 따른 판단과 평가이다.
창세기 3:5-6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무엇이 선한지 악한지를 판단하는 주체가 신이 아니라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인간이 취한 결과이다. 그런데 여기서 여자는 선악과를 먹기도 전에 이미 그 나무에 대해 평가를 해버린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 이미 뱀으로 나타난 사탄의 말을 듣고 그 가치관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것에 따라 여자가 하는 평가는 창세기 2:16-17에 기록된 신의 평가와는 정반대의 것이 되어버렸다.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여자는 자기 눈과 마음에 드는 겉모습을 기준으로 대상을 평가한다. 먹음직스럽고 보기에 좋고 지혜롭게 할 것으로 보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고 선하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늘 하는 평가이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가 바로 ‘선악과의 가치관’에 따라 하는 평가인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볼품없고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주님에게는 물 한 잔 건네기도 힘든 사마리아 여자의 가치관과 같은 것이다.
인류가 해온 모든 평가는 사실 ‘선악과의 가치관’에 따른 평가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 3:5) 무엇이 선한지 무엇이 악한지를 평가했다. 무엇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를 평가했다. 산업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만족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그 결과 경제적 성과라는 것을 만들어내었다. 정치인들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공약으로 내걸고 그것을 이뤄줄 것이라고 약속하며 표를 모았다. 그렇게 모든 표로 권력을 쟁취했다. 이렇게 본다면 그것이 경제적 성과이든 권력 쟁취이든 모든 것이 ‘선악과의 가치관’에 뿌리를 둔 신을 대적하는 행위이며 그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성공’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그것을 부러워한다. 신을 대적하는 것을 부러워한다. 신의 평가와 반대로 하는 평가에 열광한다. 말 그대로 제정신이 아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이런 존재들에 의해 신의 나라는 훼손되고 있다. 그것에 신의 분노가 임하고 있다. 그런데도 인간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들은 그것을 즐기며 신을 대적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멈출 생각이 전혀 없다. 그것이 어떤 죄인지 인식조차 하질 못한다. 이것이 사탄의 저주이다. 신의 생각과의 분리, 신의 마음과의 분리 이것이 바로 인간의 종말이다.
요한복음 4:12에서 여자는 주님에 대해 야곱과 비교해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있는 것처럼 평가한다.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이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다. 이미 자기 평가가 끝나버린 비아냥거림이다. 자기에게 물을 달라고 구걸하는 존재가 어떻게 야곱보다 클 수 있겠는가? 그 여자에게 주님은 어떤 사회적 지위와 권력도 가지고 있지 않고 당장 물그릇조차도 가지지 못해 자기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존재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지위가 높고 권력이 있는 존재라면 복종하겠지만 주님은 여자에게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님은 이러한 여자의 반응과 가치관에 대해 질책하셨을 것이다. 그러한 가치관은 비록 사회에 팽배해 있어 사람들이 당연히 그것을 기준으로 살아가야 할 것처럼 여기겠지만 사실 그것은 신의 뜻과 신의 나라의 가치관을 파괴하는 세속적 가치관이며 그것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악이라는 사실을 주님은 분명히 가르치셨을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이 무엇인데 요한복음에 기록되지도 않은 내용을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하는 것인가라고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들이 신의 뜻에서 벗어난 것을 돌이키도록 그들의 잘못을 드러내어 가르치며 신의 나라만을 위해 살도록 이끌어가시기 위함이다. 그것을 위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주며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셨다. 물론 이것은 주님만이 가실 길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가야 할 길이다.
요 14:6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러니 주님께서 그 여자가 가진 잘못된 생각들을 드러내며 가르치지 않으셨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주님을 부인하며 거부하는 것과 같다. 결국 요한복음이 그런 선상에 있는 것이다. 명확히 주님이 무엇을 불편해하고 무엇에 분노하고 계시는지 요한복음은 알지 못했다는 말이다. 제자라고 여겨졌던 요한과 그의 공동체가 기록한 요한복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요한복음 4:14-15는 여자가 잘못 판단하면서 드러내지 않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게 만드는 요인을 주님이 제공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주님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요 4:14)을 줄 것처럼 쓰여 있다. 단지 여자가 그것을 구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요 4:10) 주님이 약속한 것처럼 말이다. 이에 관해서는 앞에서 다루었다.(https://cafe.daum.net/chun-mo/UDzY/314)
주님은 사람들의 욕망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어떤 말씀도 행동도 하지 않으신다. 그렇게 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사탄일 뿐이다. 사탄은 오히려 그런 욕망을 향한 질주를 멈추지 못하게 한다.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며 사람들이 자기 삶을 허비하게 만든다. 사탄은 ‘즐거움’ ‘만족’ ‘누림’ ‘행복’이라는 말과 그것을 만족시키는 상황 및 조건들로 사람을 유혹한다. 사탄은 주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고통과 멍에와 비현실적인 것으로 느끼게 만든다.
마태복음 11:28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런데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주님께 내려놓는 것을 상상한다. “너희를 쉬게 하리라”를 오해하기 때문이다. 마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주님이 대신 짊어질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짐을 더 이상 지지 않는 것, 내려놓는 것 정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 짐을 내려놓지 않고 계속 지고 있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은 그 짐을 벗어버리는 것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짐을 지고 있는 존재에게 주님은 주님의 멍에마저 더 메라고 명령하신다. 그러면 쉬게 될 것이고 짐이 가벼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마 11:29-30 : “29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결국 이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과는 완전히 반대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식의 쉼과 가벼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은 고역이고 더 이상 무거울 게 없을 정도로 힘든 삶이라고 사람들은 느끼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주님께 자기가 지고 있는 짐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멍에도 주님이 지길 원한다. 어떤 짐과 멍에도 자기가 지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그런 짐과 멍에를 지지 않고 벗어버리는 것을 쉼이라고 여기고 가벼움이라고 판단한다. 이런 가치관은 주님의 뜻과는 완전히 반대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사탄의 영향력 아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자들은 성서라는 책을 읽으면서도 사탄의 눈으로 읽고 묵상하고 배우고 가르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사탄이 제시하는 것으로 눈과 마음을 돌리게 된다. 신의 나라가 아닌 자기가 모든 것을 판단하며 자기가 좋은 것을 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행복해하는 자기 왕국을 만들고 그것을 지배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사탄의 유혹에 사람들은 환호하며 열광한다. 사람들은 그러한 사탄의 공격을 공격으로 인식할 가능성은 없다. 이미 사탄의 종으로서 열심히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은 늘 짜증과 분노를 유발하는 것일 뿐이다.
이들에게 삶을 돌이키라는 주님의 회개 선포는 죽으라는 말처럼 들리게 된다. 사회 구조 안에서의 모든 관계와 움직임을 멈추라는 사형선고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오직 신의 공의와 신만이 다스리는 신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한 일에만 시간과 생명과 가진 모든 것을 쓰라는 주님의 명령은 그들에게 비상식적이며 비현실적일 뿐이다.
눅 12:31 :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마 6:33 :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야곱을 높이는 전통에 따라 자신도 야곱을 높이고 있는 사마리아 여자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입신양명(立身揚名)을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이룬 사람을 높이며 부러워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이 어떻게 부정적일 수 있겠는가? 그것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무슨 문제라는 말인가? 교육의 목적도 사실 그것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것은 사실 ‘바벨탑의 가치관’이다. 창세기 11:4에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바벨탑을 쌓고 있는 사람들의 목적으로 ‘우리 이름을 내고’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처럼 자기 이름을 내려고 하는 모든 움직임은 바벨탑의 가치관에 기초를 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하는 모든 행동은 바벨탑을 쌓는 것이다. 신이 원하시는 것과 반대로 움직이는 반역의 행위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추구하고 있는 성공은 바벨탑을 쌓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결국 그것은 죄이다. 물론 사람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끊임없이 바벨탑을 쌓는 역사였으니 그 역사의 흐름 속에 박혀 꼼짝달싹할 수 없는 존재들은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것은 공포 자체이다.
그러니 이름을 내고 있다고 여기는 야곱을 높이는 사마리아 여자의 잘못된 ‘바벨탑의 가치관’을 주님께서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실 일이 있겠는가? 요한이 몰랐을 뿐이다.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들어도 들리지 않았을 뿐이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런 바벨탑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삶이 틀렸다고 여자에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으셨다.
주님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로 사마리아 여자를 유혹하지 않으셨다. 그 여자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는 헛된 욕망으로 주님께 요구하도록 만들지 않으셨다. 주님은 여자의 소유욕을 증폭시키는 ‘생수’를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주님은 언제나 신의 뜻을 받들며 신의 나라를 이루는 ‘생명 가득한 삶’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과는 반대라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셨다.
눅 9:23 :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