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 장
요즘은 핸드폰을 켜들고 사진이 보관되어 있는 앱을 열기만 하면 수많은 사진을 볼 수 있어 편리하다. 한 해 내내 찍은 사진을 밤새도록 볼 수도 있다. 변화는 빠르고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쳐 성급한 사람들은 벽에 걸렸던 인화된 사진을 모두 떼어내 정갈해진 벽을 보며 문명의 발전에 찬사를 보냈을 것이다. 흑백사진을 떼어내며 컬러사진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더니 이제는 그마저 시들해지고 말았다.
우리 집 벽에는 아직 찍다가 만 필름이 들어있는 구식(?) 카메라가 매달려있다. 다 찍어 인화를 할까 하다가 그 역시 벽에 있는 사진을 떼어내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뿐이 아니다. 아직 벽에 걸려있는 사진이 여러 장 되는데 이 모두 스물이 넘은 조카들의 어릴 적 사진이거나,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의 회갑기념사진 등이다. 모두 이십 년을 훌쩍 넘어 길게는 사십 년이 된 사진이다. 마지막 하나가 고등학교 동문운동회 날 사진인데 한 결 같이 앞줄의 동창들이 아이를 앞세우고 있다.
작은애가 서너 살 때이니 삼십 년 가까이 되었다. 얼마 안 있으면 사진 속 아이들이 우리의 손자를 앞세우고 저런 사진을 찍을 나이가 되었으니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가끔 벽에 걸려있는 사진 앞에 서서 유심히 들어다보고는 한다. 다시 만난다 한들 친구들이야 알아보겠지만 아이들을 알아보기는 힘들게 되었다.
모두 삼십 대 후반쯤의 젊은 아버지들이다. 머리는 길어서 마치 깎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 시절 유행하는 머리 스타일이었고, 동창회에서 준 운동복을 유니폼처럼 입고 있다. 친구들은 사진 속의 총명함과는 달리 세월이 흘러 머리가 하얗게 쇠고 풋풋함이 사라질 것을 알지 못했다. 내가 그랬으니까 그들도 그랬을 것이다.
친구가 사위를 보는 자리에서 다시 만났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우리처럼 늙은 사람들을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혹시 혼주인 친구의 형님이나 그 또래의 친척이 참가한 것이 아니라면 더 나이 든 사람들을 볼 수는 없었다.
식사 자리에서도 대화의 내용이 바뀌었다. 한 동안 사업은 잘 되느냐, 요새도 해외로 출장은 잘 다니느냐, 부모님은 여전히 안녕하시냐고 물었었는데 어느덧 건강은 좋은가를 애피타이저로 해서 틀니 이야기, 당뇨이야기, 건강 이야기가 메인 디시로 올라왔다. 대체적으로 삶을 정리해가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간간히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와 비교하기도 한다.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은 아니고 현재 살고 있는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렇다. 듣기 좋은 이야기라면 손자손녀에 관한 것뿐이다. 그리고 후식으로 몸조심 하라는 말로 끝낸다.
근자에 고향에 내려가 건강치 못한 노모를 수발하고 있는 친구는 서울에서 집을 지키고 있는 아내를 여드레 만에 만났다며 웃었지만 아무도 신기해하거나 놀라지는 않았다. 아내란 더 이상 함께 있어야 하는 존재가 아닌 것으로 변했거나, 솔직히 그의 말이나 친구들의 반응에서 읽었던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되고 만 느낌이었다. 아내들이여! 미안하다. 남편들은 어떠한가?
부모를 모시는 효를 다하노라 그랬다고 이해하지만, 친구여 미안하네, 그가 그리 효자였는지는 모르겠다. 하기는 그렇게 드러내놓고 효도할 일도 없었다. 대화 중에 그가 노모께 효를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부모가 늙어 언행이 부자유스러워지기까지는 부모가 우리를 효자로 만들었고, 이제 가까스로 그에 대한 보답을 하고 있는 정도일 것이다. 고맙고 훌륭한 효자 친구다. 하여간 아내까지 팽개쳐버리고 말았으니 참 묘하기도 하다.
집이 멀다는 핑계를 대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술자리, 그저 그런 객담, 집이 멀어 늦은 귀가가 싫다는 것을 구실로 삼았다. 더구나 술을 마시지 못하는 나로서는 공연히 시간만 축내는 꼴이어서 술자리가 달갑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우정이 싹튼다던 입담 좋은 친구들 역시 이삼 년 전과는 달리 술자리를 마련하지 않고 헤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저녁 자리에서 비워지는 술병의 숫자만 보아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나이임을 알게 한다.
그런 친구들을 보는 것은 서글프다만, 그렇다고 세월을 되돌릴 수도 없고, 붙잡아 둘 수도 없기에 그저 등 떠밀리 듯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기만 한다. 어느덧 죽음에 관한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고, 그 말이 빠지면 안 되는 것처럼 익숙해졌다.
집에 돌아와 불을 켜니 예의 그 사진이 그 자리에서 나를 반긴다. 사진의 배경은 모교의 건물이다. 변한 것이라고는 운동장에 인조잔디를 깐 것 말고는 없다. 그런데 사진이 유난히 이상스레 보인다. 오호라, 저 사진 속의 아이들은 모두 자라서 시집 장가를 갔고, 그 뒤에 서있던 아비들은 할아비가 되었구나. 그 애 중의 하나가 오늘 시집을 갔다.
훗날 아이들이 저 사진을 보면서 말할 것이다. ‘저 앞에 앉아 있던 아이가 나란 말인가. 그 뒤의 아버지는 모두 돌아가시고 이제 우리의 차례가 되었으니 세월이 참 빠르군. 그래도 아버지가 저 사진 한 장을 벽에 걸어주셨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을 세월의 흐름이 저 사진 한 장에 담겨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