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한산대첩
1시간 만에 왜선 73척 중 59척 격침, 전사자 9000명
입력 : 2023.06.29 03:30 조선일보
한산대첩
▲ 작년 8월 13일 오후 경남 통영 한산도 앞바다에서 한산대첩 재현 행사가 열렸어요. 100여 척의 선박이 참가해 한산대첩을 재현했어요. /김동환 기자
돌아가신 지 425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는 역사 인물이 있어요. 바로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입니다. 최근 이순신 장군의 칼을 국보로 지정한다고 예고됐고, 정조 때 편찬된 이순신 관련 중요 자료인 '이충무공전서'의 새 번역본이 출간됐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경남 거제시에선 20억원을 들여 만든 거북선을 폐기하기로 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렸죠. 경남 통영에선 오는 8월 4~12일 제62회 '통영 한산대첩 축제'가 열린다고 해요.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40차례 해전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대승이었던 한산대첩(한산도 대첩)은 어떤 해전이었을까요?
견내량의 유인 작전이 성공하다
"적의 척후선(상대편의 형세를 정찰하기 위한 배) 두 척이 보입니다!"
1592년(선조 25년) 음력 7월 8일(양력 8월 14일), 이른 새벽 고성 당포를 출항한 조선 수군의 함대가 통영과 거제 사이 좁은 수로인 견내량이 보이는 바다에 이르렀어요. 왜군 척후선이 곧 북쪽으로 달아났지만, 적 함대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좁은 견내량은 조선군의 큰 판옥선이 좌초(배가 암초에 얹힘)할 가능성이 있어 해전을 벌이면 위험했고, 육지와 섬이 가까워 배에서 내린 적이 도주하기 쉬웠죠.
이때 조선 수군을 이끌던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지시를 내렸습니다. "적을 넓은 바다로 유인해야 한다!" 조선군의 판옥선 5~6척이 견내량으로 진입한 뒤 후퇴하는 척하자,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함대가 이 유인 작전에 걸려들었습니다.
와키자카는 한 달 전에 있었던 육지의 용인 전투에서 승리한 뒤라 '조선 수군도 육군처럼 별것 아니겠지'라고 얕잡아 봤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왜군이 한산도 앞 넓은 바다에서 마주친 것은 거북선 2척을 포함해 약 60척에 달하는 조선 수군의 본진이었죠. 당시 왜군 함선은 73척으로 수적으로 우세한 듯 보였지만, 조선 수군은 진(陣)을 갖추고 전투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병력 집결한 왜군 "서해로 진격하라"
이보다 석 달 전인 1592년 4월(이하 음력) 왜군의 부산 침공으로 임진왜란이 시작됐습니다. 조선군은 육상 전투에서 계속 패하며 선조 임금이 의주로 피란 가는 상황을 맞았습니다. 왜군은 육지와 바다에서 함께 공격을 한다는 수륙병진(水陸竝進) 작전을 펼쳤죠. 평양을 점령한 왜군은 선조에게 편지를 보내 "우리 수군 10만 명이 곧 서해로 도착할 것인데 임금께서는 이제 어디로 가시렵니까?"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하지만 바다에서의 상황은 왜군의 뜻과 정반대로 전개됐습니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5~6월 경상도 해안인 옥포와 당포·당항포·율포 등에서 연전연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임진왜란의 원흉이자 최고 권력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6월 말 긴급히 명령을 내려 원래 수군 소속이던 와키자카를 육지에서 바다로 이동하게 했습니다. 전국시대 말기부터 해전으로 이름을 떨친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란 장수도 합세시켰는데, 수군 병력을 집결해 이순신 함대를 격파하고 서해로 진격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순신은 큰 싸움을 준비했습니다. 7월 6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병력과 합세한 이순신 함대는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와 합류했습니다. 다음 날 당포에 도착한 이순신 함대는 한 목동으로부터 '적선 70여 척이 견내량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죠. 이순신은 장수들을 모아 작전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적선 59척 격파한 압도적 승리
7월 8일, 유인 작전에 걸려든 와키자카 함대를 맞은 조선 수군은 U자 형태로 적선을 포위해 가까운 거리에서 배 한 척이 적선 한 척을 상대로 총통을 발사했습니다. 이 대형이 학 날개 모양과 닮았다고 해서 학익진이라고 합니다. 당시의 화포는 정교하지 않았기 때문에 50m 정도 가까운 거리에서 총통과 화살로 일제히 공격해 적선을 격파하는 방법을 썼습니다.
이순신이 쓴 '임진장초'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먼저 2~3척을 깨뜨리자 여러 배의 왜적들이 사기가 꺾여 도망치려 했다. 여러 장수와 군사와 관리들이 승기를 타고 분발해 앞다퉈 돌진하면서 총통과 화살을 마구 발사하니, 그 형세가 바람과 우레 같아 적함을 불사르고 적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거의 다 해버렸다."
조선군의 압승이었습니다. 와키자카 함대 73척 중 59척이 격침당했습니다. 왜군 전사자는 약 9000명으로 추정됩니다. 조선 수군은 거의 피해가 없었습니다. 실제 해전에 걸린 시간은 1시간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한산대첩을 실제 일어난 대로 영화로 만든다면 별로 재미없을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방적인 승리였죠. 지난해 개봉한 영화 '한산'은 와키자카가 좀처럼 유인책에 말려들지 않았고 왜군도 화포를 썼다고 묘사했지만 사실과 다릅니다. 극적 재미를 위한 설정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군의 수륙병진 작전도 좌절
이틀 뒤인 7월 10일, 이순신 함대는 와키자카를 뒤따라 온 구키 요시타카의 함대를 공격해 약 20척을 격파하는 승리를 거뒀습니다. 이것이 안골포 해전인데, 이 전투를 한산대첩에 포함하기도 합니다.
한산대첩은 '세계 해전에서 보기 드문 정교한 포위 섬멸전'인 동시에 '왜군의 수륙병진 작전을 결정적으로 좌절시킨 전투'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5년 뒤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왜군은 바다에서 더는 공세에 나설 수 없었고, 바다를 통한 보급로마저 차단당했습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해안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기에 군량을 조달하고 중흥을 이룩했고, (중국의) 요동(랴오둥)과 천진(톈진) 등에 적의 손길이 닿지 않아 명나라 군사들이 육로로 올 수 있었으니 모두 이 싸움(한산대첩)의 공이다"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첩(大捷)'은 '큰 승리'란 뜻이며 '큰 싸움'이란 의미가 아니므로 잘 가려서 써야 하겠습니다.
▲ 경남 창원 부두에서 공개된 해군과 전문자문단이 재현한 거북선. /김동환 기자
▲ 전남 해남 우수영 울돌목에 조성된 '고뇌하는 이순신'상. 명량대첩이 일어나기 전 울돌목 앞바다를 바라보며 조선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표현했어요. 갑옷이 아닌 군인 평상복 차림으로 칼 대신 지도를 들고 있어요. /김영근 기자
▲ 지난해 개봉한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 이순신 역을 맡은 배우 박해일이 학익진을 구상하는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김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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