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호흡>-메리 올리버 Mary Oliver(1935~2019)
나는 생태학자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학교 교사와 기업가뿐 아니라 코끼리와 거미까지 포함하는 대가족의 일원으로서 느낀다. 그건 정신적 상태가 아닌 영적 상태이다. 시는 우리 역사의 산물이며, 우리 역사는 자연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물론 벌집 같고 지하감옥 같은 지금의 도시에서는 시가 위안이 되지 못하고,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못한다. 자연과 개인 사이의 협정이 깨졌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수확을 위한 노동은 없다. 이익을 위한 사냥만 있을 뿐이다. 삶은 더 이상 기쁨과 용맹 속에서 발현되지 않고, 오직 세속적 재물 축적의 도구로만 이용된다. 시가 그런 사람들에게 의미를 지니려면, 그들이 먼저 발걸음을 떼어야 한다. 물질에 구속된 사리추구적 삶에서 벗어나 나무들을 향해 걸어야 한다. 시를 읽는 사람들이 너무 적은 것은, 이 겁에 질리고 돈을 사랑하는 세상에서 시의 영향력이 너무도 미미한 것은, 시의 잘못이 아니다. 결국 시는 기적이 아니다. 개인적 순간들을 형식화(의식화)하여 그 순간들의 초월적 효과를 모든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음악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시는 우리 種의 노래이다.
나는 숲속에서 네 발로 걷기를 시도했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덤불사이를 지나고, 들판을 가로지르고, 크렌베리 습지로 내려갔다.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국에는 녹초가 되고 여기저기 아팠지만 풀들, 새로 돋아는 나뭇가지들, 내리막들, 덩어리들, 비말들, 개울, 깊이 갈라진 틈, 공터들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보았다.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숨 쉬고, 절름거리고, 마침내 늪 가장자리의 소용돌이와 지그재그를 이룬 나무들 아래 눕는 한 마리 늙고 느린 여우였다.
삶이 쉽다거나 확신에 차 있다는 건 아니다. 완강한 수치심의 그루터기들, 수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해결되지 못하고 남아 있는 슬픔, 아무리 춤과 가벼운 발걸음을 요구하는 시간이라 할지라도 어디를 가든 늘 지고 다니는 돌 자루가 있다. 하지만 우리를 부르는 세상, 경탄할 만한 에너지를 가진 세상도 있다. 분노보다 낫고 비통함보다 나은, 더 흥미로워서 더 많은 위안이 되는 세상, 그리고 우리가 하는 것, 우리가 다루는 바늘, 일이 있으며 그 일 안에 기회-뜨거운 무정형의 생각들을 취하여 그것들을 보기 좋고 열을 유지하는 형상 안에 집어넣는 느리고 세심한 노력을 기울일 -가 있다. 신들 혹은 자연 혹은 시간의 소리 없는 바퀴가 부드러운, 휘어진 우주 전체의 형상들을 만들어 온 것처럼, 곧, 나는 내 삶을 주장하기로 결심함으로써 일과 사랑을 통해 멋진 삶을 만들어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몇 가지 말들>
숲속에는 매력적인 게 없다. 정원들은 매력적이고, 인공동굴도 그러하며, 매력적인 목축업과 농업의 풍경들-줄 맞추어 선 식물들, 느긋한 가축 떼, 들판에 서로 기대어 선 수확된 곡식 단-에는 평안함이 있다.
그리고 숲속에는 귀여운 게 없다. 수여우도 귀엽지 않고 새끼 여우들도 귀엽지 않다. 나는 그들이 모래언덕을 달려 오르내리는 걸 본다. 여우 한 마리가 더러워진 갈매기 날개를 물어오자 다른 녀석들이 달려들어 물어뜯는다. 작은 이빨을 딱딱거리며 금빛 풀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왔다 한다. 그들은 사랑스럽지도, 매력적이지도, 귀엽지 않다.
올빼미도 귀엽지 않다. 우유뱀도 귀엽지 않고, 거미줄의 거미도, 줄무늬 농어도 귀엽지 않다. 스컹크도 귀엽지 않고, 이름이 ‘플라워’도 아니다. 숲에는 ‘덤퍼’라는 이름 가진 귀여운 토끼도 없다.
장난감들은 귀엽다. 하지만 동물들은 장난감이 아니다. 나무, 강, 바다, 늪, 알프스산맥, 가시나무 가지에서 밤새 노래하는 흉내지빠귀, 늑대거북, 자줏빛 버섯도 마찬가지다.
‘귀엽다’, ‘매력적이다’, ‘사랑스럽다’ 같은 말들은 잘못됐다. 그런 식으로 지각되는 것들은 위엄과 권위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귀여운 것은 오락거리고 대체 가능하다. 말들은 우리를 이끌고 우리는 따라간다. 귀여운 것은 조그마하고, 무력하고, 포획할 수 있고, 길들일 수 있고, 소유할 수 있다. 그 모든 게 실수다. 우리 발치에는 양치식물들이 있다. 그것들은 인간 종족이 어디에도 없고 전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던 때에 최초의 이름없는, 그리고 이름 붙일 수 없는 바다의 무시무시한 여울 속에서 거칠고 결연하게 자라났다. 우리는 그것들은 예쁘고, 섬세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서 정원으로 가져온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 주인이 된다. 자연이 사랑스럽고, 매력적이고, 조그마하고, 무력한 것들로 가득하다면 누가 권력자의 자리에 오를까? 우리다! 우리가 부모고, 통치자다. 그런 생각은 세상을 놀이터나 실험실로 보게 하며, 분명 빈약한 관점이다. 그리고 부정직하기도 하다. 겉으론 너무나 무해하고 책임감이 강해 보이지만, 사실은 둘 다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건 신성하고 복잡할 뿐만 아니라 강력하기도 한, 우리가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 영역인 자연에 대한 다른 관점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의 총합인 자연은 우리의 세상을 몰고 가는 운전대다. 기꺼이 거기에 올라타는 사람들은 빛나고 심지어 숭고하기까지 한 평안을 얼핏 볼 수 있겠지만, 인간이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세상을 조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거기 타려 하지 않는 사람들은 질질 끌려 다니며 기쁨 없이 몸에 먼지만 묻힐 것이다.
인간과 호랑이, 호랑이와 참나리(tiger lily)가 다르면서도 얼마나 흡사한지 보라! 우리 모두 몇 번의 여름, 여기 서서 바다를 바라보며 우리가 끌어 모을 수 있는 육체적, 지적 능란함으로 우리 상태를 개선시키고 그런 뒤에 조용히 풀밭으로, 죽음의 초록 구름으로 물러나지 않는가? 그 무엇이 솟아나면서, 사라져가면서 귀엽거나 매력적일 수 있는가? 삶은 나이아가라(Niagara)이거나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풀잎 한 줄기의 지배자도 되지 않을 것이며 그 자매가 될 것이다. 나는 풀 위로 머리를 내민 백합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내 심장의 줄기로부터 즐거운 인사를 보낸다. 우리는 한 나라, 한 가정에 살고 있으며 한 램프에서 불타오른다. 모두가 야성적이고, 용감하고, 경이롭다. 우리는 아무도 귀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