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프마켓, 10월 14일 개방
길게 이어진 높은 담벼락 너머는 늘 궁금했다. 어떤 곳이길래, 담벼락 위에 가시철조망까지 겹겹이 둘러놓은 걸까.
우리 땅이지만, 온전히 우리의 것이 아니었던 ‘부평 캠프마켓’.
지난 80여 년간 일본과 미국을 거쳐 대한민국 안의 외국 영토였던 캠프마켓이 시민들 품으로 돌아와 오는 10월 14일, 시민들을 만난다.
조병창과 애스컴시티
부평구 산곡동에 위치한 캠프마켓 역사는 1939년 일제강점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일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일본은 중국 대륙 진출을 위한 병참 기지로 부평에 조병창*을 건설한다. 1939년 조성된 일본 육군 조병창은 한강 이남 최대 규모의 무기 제조 공장으로, 일제의 주요 군수 기지 역할을 했다. 이곳에선 1만 명 안팎으로 추산되는 조선인이 강제 동원돼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조병창은 빠르게 군수 산업 단지로 커졌고, 생산된 군수품은 모두 전쟁 물자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각지의 일본군에 보급됐다.
1945년 9월, 일본이 떠난 자리에 미국이 들어왔다. 한반도 남부 점령군으로 상륙한 미군 제24지원사령부Army Service Command 24가 조병창 부지에 자리 잡으면서 부평에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캠프마켓과 캠프그랜트, 캠프타일러, 캠프해리스, 캠프하이예스, 캠프테일러, 캠프아담스 등 7개 구역으로 나눴으며, 주민들은 이 사령부의 이니셜을 따서 그 일대를 ‘애스컴시티ASCOM City’라 불렀다. 애스컴시티에는 전국 각지에 있는 주한 미군 부대로 무기와 식량을 보급하는 보급창뿐만 아니라 공병대, 항공대, 의무대, 후송 병원 등이 점차 들어서면서 하나의 거대한 도시가 되어갔다.
*조병창 : 무기나 탄약 등의 장비를 제작·저장·보급하는 시설
▲1948년 10월 부평 전경. 가로로 긴 하얀 건물은 현재도 남아있는 조병창 건물(추정)
(출처 : nobe-faye) ▲‘애스컴시티’라는 철조망을 둘러친 채 80년간 금단의 땅이었던 캠프마켓
생계의 터전이자 아픔의 공간
6·25전쟁 직후 한국과 미국이 맺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북한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뿌리내린 거대한 도시 애스컴시티. 미군들은 이곳에서 2~3개월 머물다가 동두천, 송탄, 평택에 있는 부대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기지 안에는 각 부대의 군사 시설과 함께 미군들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식당, 클럽, PX, 병원, 도서관, 극장, 체육관, 교회 등의 편의 시설이 생겼다.
애스컴시티에서 나오는 풍부한 일자리와 물자들을 쫓아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부평으로 몰려들었다. 애스컴시티에서 나온 미제 물건들은 여러 경로의 암시장, 일명 ‘양키 시장’으로 흘러나와 동인천과 서울 남대문시장 등으로 퍼져나갔다.
미군을 상대로 한 각종 부대 산업이 꽃을 피우며 부평 산곡동 일대에는 수많은 미군 클럽이 운영되기 시작했다. 흘러넘치는 미제 물건으로 번성한 도시엔 다양한 문화가 형성됐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여인들과 미군 사이에서는 혼혈아가 태어났고, 미군을 통해 알려진 미국의 대중문화는 새로운 음악의 창조로 이어졌다. 오디션이 엄격한 미8군 무대에서 노래하고 연주하기 위해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들이 부평에 터를 잡기 시작했다. 1950년대 ‘김시스터즈’ 등 초창기 미8군 가수들과 연주인들은 대부분 이곳을 거쳤으며, 1960년대로 이어지면서 스탠더드 팝, 스윙 재즈와 로큰롤이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되기도 했다.
▲캠프마켓 안에 있는 커뮤니티 클럽.
널찍한 내부에는 화려했던 조명과 술을 팔던 바bar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80년 만에 이뤄진 캠프마켓 반환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국제 정세의 흐름과 함께 애스컴시티는 1973년 6월 30일 공식적으로 해체된다. 캠프마켓을 제외한 6개의 캠프가 철수하거나 이전했고,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자로 생활해 온 많은 사람들도 부평을 떠났다. 하지만 캠프마켓의 주소는 여전히 ‘APO901 San Francisco California’. 분명히 대한민국 안에 있는 우리 땅이지만, 결코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었다.
이후 캠프마켓 주변으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섰지만, 캠프마켓만은 금지된 땅이었다. 그렇게 서로 담 하나를 두고 단절된 시간이 흘러왔다.
1996년 5월, 시민·사회단체들은 부평 미군 기지 캠프마켓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부대 앞 농성, 시민 감시단, 시민 걷기 대회, 인간 띠 잇기 행사 등이 지속적으로 펼쳐졌다. 드디어 2002년 3월, 부평 미군 기지 반환이 결정된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11일 정부와 주한 미군이 인천을 비롯해 원주, 동두천 등의 주한 미군 기지 4곳을 반환하기로 합의하면서 부평 캠프마켓은 ‘공식’ 반환됐다. 일제강점기 육군 조병창을 건설한 지 80여 년 만에 다시 우리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캠프마켓 안의 건물을 설명 중인 류윤기 인천시 부대이전개발과장
시민과 함께 활용 계획 수립
우리 시는 캠프마켓 반환 부지 21만765㎡ 가운데 환경 정화에 지장이 크지 않은 남측 야구장 부지 9만3,000㎡를 10월 14일에 개방할 예정이다.
“무엇보다 시민들이 자유롭게 산책하며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돼야 합니다. 캠프마켓 홍보와 더불어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들어 활용 방안을 마련하는 인포센터를 설치하고, 지역 기반형 음악창작소를 조성해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할 계획입니다.” 류윤기(54) 인천시 부대이전개발과장은 야구장이 있는 10만804㎡의 B구역 나머지 공간은 근대건축물 조사와 환경 정화 등이 완료되는 대로 단계별 개방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설명한다.
“캠프마켓에는 아직 제빵 공장과 유통 센터 등 주한 미군 5개 기관이 주둔하고 있으며 코로나19로 조금 늦춰지기는 했지만 2021년 상반기 중으로 이전할 예정입니다.”
현재 캠프마켓에는 모두 136개의 건축물과 시설물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전수조사를 통해 조병창으로 활용된 부분과 각종 시설물의 보존 가치 등을 파악해 역사와 문화를 잘 살려 많은 사람들이 찾는 수도권 지역의 관광명소로 만들 계획이다. 또 토양 정화가 끝나는 대로 문화예술고 등 다양한 공공시설과 지원 시설을 조성할 예정이다.
▲굳게 닫혔던 출입문이 드디어 오는 10월 14일 활짝 열린다.
▲시민들에게 개방되는 부지에 미군들이 사용했던 수영장과 야구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
■ 캠프마켓 활용 방안 시민들에게 듣는다
시는 지난 4월 ‘부평 미군부대 지구단위계획 수립(변경) 용역’을 발주했다. 용역은 내년 10월까지 진행된다. 80여 년 만에 반환된 만큼 캠프마켓 부지 활용 계획도 서둘러 수립하지 않고 각계각층의 다양한 의견을 충분히 듣겠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시는 최근 제5기 캠프마켓 시민참여위원회를 구성하고 캠프마켓 서포터즈 및 소통 박스를 운영하는 등 의견 수렴과 홍보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소통 박스는 시청 본관 1층 로비와 부평구청 1층 로비, 캠프마켓 A구역 한국환경공단 사무실(환경 정화 모니터링 장소)에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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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출처 : 굿모닝인천 웹진 https://www.incheon.go.kr/goodmorning/index
글 김윤경 굿모닝인천 편집위원│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