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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마지막 비상구(누가복음 8:43~48)
얼마 전 제천에 있는 한 다중이용시설에 화재가 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이 화재로 인해서 희생된 분들의 사연을 들어보면 모두 가슴 아프겠지만 이번 참사가 기독교인 입장에서 더욱 뼈아픈 것은 참사로 인해서 두 명의 목사님과 네 명의 감리교인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네 명의 감리교인들은 교회의 중직들로서, 한 분은 이번에 새롭게 장로로 피택 된 분이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번 참사로 인해서 고인들의 가족 뿐 아니라 고인들께서 섬기고 계시던 교회도 큰 슬픔에 빠져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번 참사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2층 목욕탕의 비상구가 막혀있었다는 것입니다. 비상구는 있었지만 목욕 용품을 놓는 선반으로 인해서 비상구가 막혀 있었고, 많은 희생자들의 시신이 비상구 앞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비상구를 바로 앞에 놓고 비상구임을 몰라서 구원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번 참사의 이 한 단면을 보면서 인생의 비상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삶의 풍파와 고난 속에서 절망하고 쓰러져가는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 나오는 혈우병 걸린 여인의 이야기는 4복음서에 모두 실려 있습니다. 이 여인은 12년 동안 혈우병, 즉 지금으로 치면 부인병을 앓았고, 그로 인해서 하혈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이 질병으로 인해서 생사를 넘나드는 고생을 했을 것입니다. 또 당시의 이스라엘의 관습이 하혈하는 여인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사회생활은 전혀 하지 못했을 것이고, 병의 치료를 위해서 의사들을 찾아다니다가 모든 재산을 소진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여인의 삶은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종종 사람들이 “큰 병을 앓아보지 않았다면 인생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저는 젊었을 적에 폐결핵으로 생사의 기로에 서 본적이 있기 때문에 큰 병을 앓는 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큰 병에서 회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 가족 중 누군가가 중병에 걸리면 온 가족이 나서서 몇 개월간은 가족의 회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중병이 몇 년이 지속되면 가족들도 지쳐 떨어지고 맙니다. 아마도 이 혈우병에 걸린 여인도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힌 중병으로 인해서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을 것입니다. 오랜 시간 중병을 앓아온 자신들을 돌봐준 가족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아마 이 여인은 길거리로 뛰쳐나왔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가진 예수님께서 마을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여인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이 자신의 삶의 마지막 비상구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여인은 몰래 뒤로 가서 예수님의 뒤편에서 그 옷자락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그토록 절박한 상황에 예수님의 앞에 가서 간절히 자신의 병을 치유해달라고 말하는 대신에 왜 예수님의 옷자락을 몰래 잡았던 것일까요?
중병에 오랫동안 걸린 사람들은 대게 삶의 자신감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건강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중병에 걸린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기에 그 삶의 자신감을 완전히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뒤편에서 옷자락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녀에게 예수님의 앞으로 나아갈 일말의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걸려있던 중병으로 인해서 예수님 앞에 소극적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은 거기다가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워낙 오랫동안 중병에 걸려있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집안의 골칫덩이가 된 이 여인을 “없는 사람”취급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외면과 그로 인한 사회적 고립은 이 여인을 더욱 더 외롭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성석제라는 소설가가 쓴 “투명인간”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람들의 외면으로 인해서 “투명인간” 즉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 된 주인공의 이야기를 써내려 갑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의 무관심에 의해서 지워져 있는 사람이 바로 투명인간입니다. 혈우병에 걸려서 12년 동안 고통을 받아 온 이 여인도 “투명인간”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병으로 인해서 고통 받고, 사회적 고립과 그로 인한 고독으로 인해서 고통 받아온 이 여인은 그 삶을 이어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 살았습니다. 그녀에게 구원은 그 무엇보다 절박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어느 비가 많이 오는 날 초등학생 정도 되는 아이가 부모님과 함께 짐을 이고 처마 밑에 서서 비를 피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저는 대체 이 가족이 왜 비가 오는 날 처마 밑에 살림살이를 지고 서있는 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제 또래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에게 이유를 물으니 아이는 부모님 사업이 망해서 갈 곳이 없어서 헤매다가 비를 만나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아이와 헤어진 뒤에 처마 밑에서 처량하게 비를 피하고 있는 가족의 모습이 제 머릿속에서 멤 돌았다는 것입니다. “과연 저 가족은 앞으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오늘 밤은 대체 어디서 잘 곳이나 있을까?” 아마 그 가족은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면서 자신들을 이 불행한 상황으로부터 건져줄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혈우병 걸린 여인도 자신의 삶의 비상구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음으로써 그 꽉 막혔던 인생의 출구를 찾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유일한 출구이자 비상구이신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의 삶의 고난과 역경들을 넘어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젊었을 적에 베니어 합판으로 조각을 만드는 한 작가의 전시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제 친구의 지인이었기 때문에 저는 우연한 기회로 전시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시회에서 작품들을 보니 베니어합판으로 만든 모든 조각에는 공통적으로 조그만 구멍이 뚤려 있었습니다. 저는 그 구멍의 용도가 궁금해서 그곳에 있던 조각가 분에게 그 구멍의 용도를 여쭈어봤습니다. 그런데 조각가의 답변이 저의 마음에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숨통입니다. 다 막히면 어떻게 숨을 쉽니까. 인생이 어려워도 숨은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숨통이라도 트여 있어야 이 고된 인생, 어떻게든 살아내지 않겠습니까.”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숨통”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여인이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그녀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이 자신의 옷을 만지자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가는 것을 아셨고,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어보셨습니다. 혈우병 여인은 예수님을 통해서 인생의 출구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2008~9년 세계경제위기가 닥쳐오고 난 뒤 1~2년 쯤 지난 시기에 각 국에서 소위 “출구전략‘을 모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려왔습니다. 출구전략이란 대대적인 불황으로 국가 경제가 파탄 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사용했던 다양한 극단적인 재정 정책들을 멈추고, 다시 평소 때처럼 국가 경제정책을 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출구 전략을 면밀히 세워 실행한 국가들은 세계경제 위기의 여파로 부터 지금 많이 회복되었고, 그렇지 못했던 국가들은 여전히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처럼 출구를 제대로 만들어 놓아야 국가 경제에도 희망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르트르라는 철학자는 인생에는 “출구는 없다(No Exit)”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르트르의 이 말처럼 인생에는 출구는 없는 것입니까? 이 “출구”라는 소재를 영화로 한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Last exit to Brooklyn)”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브룩클린은 미국 뉴욕시의 유명한 빈민가입니다. 그런데 제목의 “to”라는 전치사의 의미를 곱씹어서 제목을 다시 해석해보면 “브룩클린에 대한 마지막 비상구”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는 브루클린이라는 빈민가의 처절하고 각박한 삶 속에서 인간의 구원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혈우병 여인은 당시의 미국에서 가장 처절한 상황에 놓인 브루클린의 사람들과 같이 그 삶의 비상구를 절박하게 찾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그 눈 앞에서 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대면할 용기조차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옷자락이었습니다. 옷자락이라도,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인은 생각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 이 여인의 딸은 귀신에 씌어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여인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보기 위해서 “주인의 밥상을 개에게 던져 줄 수 없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여인은 이 말을 듣고,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습니다.” 여인의 이 말에는 부스러기라도, 예수님의 능력의 부스러기로라도 자신의 딸을 치유하고자 하는 간절함이 녹아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늘 이렇게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문제에서 헤어나오려면 이렇듯 예수님 앞에 절박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제천 참사의 순간에 2층 목욕탕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열리지 않는 비상구를 앞에 두고 자신의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딸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살려 달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남편과 아버지가 이미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일반인이 도저히 진입할 수 없을 정도로 화재는 번져 있었습니다. 너무나 슬프고 안타깝게도 아내와 딸은 죽음의 공간에, 남편과 아버지는 생명의 공간에 던져져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비상구가 막혀있었고, 연기로 인해서 비상구를 찾을 수도 없었기에 목욕탕 안에 있던 이들은 안타깝게도 모두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가끔 이렇게 절박한 상황이 존배합니다. 우리 인생의 절박한 상황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유일한 비상구이시기에 우리는 절박하게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형식적인 기도,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는 응답을 얻기 힘듭니다.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따라서 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기도를 얼마나 오래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느냐 입니다. 시장에서 어머니를 잃어버린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찾듯이, 간절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야 기도의 응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아니면 다른 길이 없다는 심정으로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예배를 드릴 때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쩌다 한번 마지못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창구가 될 수 없습니다. 매주 간절함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잠시 들어왔을 때, 저는 우연한 기회로 캐스트 어웨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거대한 다국적 택배회사의 직원입니다. 어느 날, 이 주인공은 회사의 비행기를 탄 채로 배송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폭풍우로 인해서 비행기가 추락하고 말았고, 주인공은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에 홀로 남겨지고 말았습니다. 주인공은 몇 년의 시간 동안 무인도에서 살아남았고, 뗏목 한 척을 겨우 구해서 먼 바다로 나가 지나가던 상선에 구출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주인공은 고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친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 불시착을 했을 때, 나의 이성은 나에게 내가 얼마 안가 비참하게 죽을 것이라고, 그래서 차라리 자살하는 게 낫다고 말했어. 그래서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자살을 시도했지만 내가 매달려있던 나뭇가지가 부러져서 자살은 실패하고 말았지. 나는 그 때 내가 죽는 것도 내 맘대로 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순간 신비롭게도 나의 머릿속에 ‘내가 이미 숨을 쉬고 있으니 계속 숨을 쉬도록 살아보자’라는 생각이 스쳤어. 그래서 그 때부터 나는 악착같이 살아남기로 했고, 4년의 시간이 흘렀어. 그런데 어느 날, 바닷가에 누워있는데 괜찮게 생긴 뗏목 한척이 파도에 쓸려 온거야. 나는 그 뗏목을 타고 먼 바다로 나갔고 구출될 수 있었지.” 주인공은 막막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인내했고, 결국 그에게 구원의 손길이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숨을 쉬고, 삶을 인내하면서 살아가면 언젠가는 우리의 삶에 갑자기 파도와 함께 밀려온 뗏목처럼 구원의 손길이 찾아올 것입니다.
이창준이라는 소설가가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소설은 “안요한”이라는 분의 삶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안요한씨는 본래 육군사관학교 교수였지만 그만 병으로 눈이 멀고 맙니다. 눈이 멀자 아내도 안요한씨를 두고 떠나버리고 분을 떠나고, 가족들은 모두 안요한 씨를 외면했습니다. 그래서 안요한 씨는 큰 절망감과 상실감으로 인해 자살을 시도했으나 눈이 보이지 않아서 자살에 실패하고 맙니다. 결국 자포자기하던 상황에서 정처 없이 떠돌다가 안요한 씨는 서울역에 다다르고, 신문팔이 소년을 만나게 됩니다. 신문팔이 소년은 안요한 씨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고, 그 집에서 받은 따뜻한 사랑을 동력 삼아 안요한 씨는 다시 재기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눈먼 안요한 씨를 신문팔이 소년을 통해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삶에 대해서 포기하고 싶을 때,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는 분입니다.
혈우병 여인이 고침을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사실 이 여인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신 것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대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삶에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을 때, 그 어둠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비상구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인생을 구원하는 마지막 비상구입니다. 또한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받는 그릇입니다. 믿음이 없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예수님을 영접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삶은 누구에게나 녹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우리의 삶에 드리워진 어둠에서, 고난과 역경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한 비상구이시며, 예수님을 만나려고 모인 교회가 우리를 삶의 풍파로 부터 막아주는 방주입니다. 영육의 구원을 주는 곳이 바로 교회이며, 천국을 향해서 놓인 야곱의 사닥다리가 바로 교회입니다. 혈우병 여인과 같이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내미시는 구원의 손길을 잡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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