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윤리학
스피노자. 레비나스, 라캉
권대근
문학박사, 명예철학박사
스피노자의 윤리학이 있다. "나는 정서를 신체의 활동 능력(역량) 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으로 이해한다." 정서(affectus)란 무엇인가. 그것은 신체의 변용이거나 그 변용에 대한 관념이다. 그렇다면 '어떤 변용인가'가 '어떤 정서인가'를 결정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변용의 어떤 적합한 원인이 될 수 있다면 그 경우 나는 정서를 능동으로 이해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수동으로 이해한다." 능동적인 변용이 있고 수동적인 변용이 있다. 나 자신이 원인이 될 때 신체는 능동적인 것으로 변용되며 외부에 원인이 있을 때( "외부 원인의 관념을 동반할 때") 신체는 수동적인 것으로 변용된다. 수동적 변용이 낳는 정서를 따로 구별하여 정념(passio)이라고 부른다. 정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내가 내 변용의 원인이 되는 것이 좋은(윤리적인) 삶이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필연적으로 <기쁨의 윤리학>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레비나스의 윤리학이 있다. 내가 나 자신의 변용의 "적합한 원인"이 되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지만 그것으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 세계에는 타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기쁨의 윤리학'은 세상의 눈물을 닦지 못 한다. 눈물이 있는 곳을 향해, '나(동일자)'라는 좁은 세계에서 탈출해야 한다. 그러나 그 빠져나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주체의 자발성이 아니다. "동일자를 질문에 부치는 일은 타자에 의해 발생한다." 어떻게? 고통 받고 있는 타자의 '얼굴'이 나에게 무언가를 호소할 때 거기에 응답(response)하는 방식으로, 당신에 대한 책임(responsibility)을 내가 떠맡는 방식으로 그 일은 가능해진다. 그럴 때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나가 아니다. '나'라는 존재가 질문에 부쳐지는 순간, 그와 더불어 '나'는 비로소 '주체'가 된다. 뒤집어 말하면 자기 안에 갇혀 있는 이는 주체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는 얘기다. 주체 이전에 먼저 타자가 있고, 존재론 이전에 우선 윤리학이 있다. "타자의 현존에 의해 나의 자발성이 질문에 부쳐지는 일을 우리는 윤리라고 부른다." 그래서 레비나스의 윤리학은 <타자의 윤리학>이다.
마지막으로 라캉의 윤리학이 있다. 일반적으로 윤리학이 추구한다고 간주되는 것은 '이상(ideal)'혹은 '선(good)'이다. 그러나 그런 윤리학들은 속임수가 아닐까 하고 라캉은 묻는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 그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인가. 혹은 선한 것들은 과연 '누구에게' 선한 것인가 말이다. 라캉은 이상의 윤리학과 선의 윤리학이 유토피아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잘못된 믿음(상상적 윤리)이거나 혹은 기만적인 규칙(상징적 윤리)이 아닐까. 그러므로 "윤리에 대한 질문은 (상상계나 상징계가 아니라) 실재와 관련하여 인간이 점유하고 있는 위치라는 관점에서 제기되어야 한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재와의 조우에 의해 우리에게 강제된 물음 속에서 윤리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실재와의 조우, 강제된 물음, 그때 우리의 위치, 이런 것들이 핵심이다.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일이 문득 일어난다.("실재와의 조우") 그와 더불어 '나'의 삶이 고장나고 '세계'라는 현실이 붕괴한다. 그러나 그 고장과 붕괴 속에 진실이 있다면?("강제된 물음") 그 진실을 포기하지 않고 붙드는 일("우리의 위치")이 윤리적인 것이다. 그래서 라캉의 윤리학은 <진실의 윤리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