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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유배문학 고전 한문수필 「소요동기(逍遙洞記)」 유유자적 노닐다>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대한해협의 길목에 위치한 거제도는 파도와 바람이 쉴 새 없이 스치는 섬이다. 과거 왕조시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제도에 유배를 왔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약 800년간, 약 520명[2026년 현재 확보한 명단]이 귀양살이를 했다. 그들 중, 누군가에겐 낯선 타향에서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고 또 누군가에겐 새로운 사색의 시작이었다. 게다가 거제도에서 사대부 유배객이 남긴 것은 절망이 아니라, 중앙의 발달된 사상과 학문 그리고 문학이었다. 거제도 유배문학(流配文學)은 단순한 풍경 묘사나 신세 한탄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정치적 추락으로 갇혀버린 사대부가 자연의 변화와 내면의 사색을 동력 삼아 정신적 거장으로 거듭나는 서사시였다. 현재까지 거제도 유배객이 남긴 유배문학은 약 1500여편[2026년 현재]에 이른다. 이들 작품 중에 대부분은 한시(漢詩)이긴 하나, 산문(散文) 수십 편이 포함되어 있다. 또 그중에 한문 수필문체라고 불리는 설(說), 기(記) 또는 기문(記文)이 20편 정도가 전해온다. 대표적인 한문수필로는 「망계룡산기(望鷄龍山記)」, 「몰인설(沒人說)」, 「죽천기(竹泉記)」, 「이소경발(離騷經跋)」, 「소요동기(逍遙洞記)」, 「명산수설(名山水說)」, 「슬설(蝨說)」, 「한륜 웅천현감전(韓熊川倫 傳)」, 「죽매면부(竹梅麪賦)」 등이 있다.
이 중에 「소요동기(逍遙洞記)」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 선생이 갑자사화(1504년)에 연루되어 연산군 12년(1506년, 병인년)에 함안에서 거제도로 이배되어 귀양살이를 하면서 지은 산문이다.
○ 경남 거제시 상문동에 소요동(逍遙洞)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現 고현천 상류에 위치한 문동저수지 일대인데 옛날에는 깊고 그윽한 골짜기에 맑은 물이 콸콸 흐르고 속세를 벗어나 노니는 듯 아름다운 골짜기였다. 연산군 재위시절 1504년 갑자사화로 인해 중앙에서 거제도로 유배 온 학자∙문인 26명 정도가 여기 소요동에서 운문(문동)폭포 사이에 모여, 1506년 당시, 암울한 조선 사회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문학 공간을 창출해 내었다. 이들 유배자들이 유유자적 노닐면서 지우(知遇)의 위안처(慰安處)를 삼아, 정신적인 여유를 되찾고 주위의 산수를 음미하며 긴장을 풀었다. 이번에 소개하는 거제도 유배문학 한문수필, 「소요동기(逍遙洞記)」는 주제가 ‘한가하게 노닐만한 골짜기’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마음의 위안과 여유를 찾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이 글의 저자인 조선전기 문신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 선생이 29세 때 거제도에서 귀양살이했던 곳이 바로 이곳 근처였다. 그는 관노(官奴)의 신분에서 우∙좌의정까지 올랐던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그가 천 리 먼 변방 거제도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풀고자 거닐었던 곳이 바로 소요동이다. 이행(李荇) 선생이 이배 된 거제도에는 유수(幽邃)한 골짜기가 있어, 속세를 벗어나 노닐 수 있을 듯하다 하여, 이 골짜기를 ‘소요동(逍遙洞)’이라 명명하고 시내 이름을 백운계(白雲溪)라 칭하였다. 소요동(逍遙洞)은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에 빗대 지은 것으로, 인생을 한가하게 노닐 듯이 쉬엄쉬엄 살자는 뜻이다. 참고로 소요(逍遙)는 얽매임 없이 조용하고 편안하게 노닌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소요유’는 어떤 속박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유유자적한다는 뜻이다. 이행 선생이 이때 새로 지은 거제도의 여러 지명들 중에, 소요동(逍遙洞)을 포함하여 지금도 지역민들이 부르는 명칭으로, 운문폭(雲門瀑, 문동폭포), 신청담(神淸潭, 문동폭포 웅덩이), 고절령(高節嶺) 등이 있다.
용재(容齋) 이행(李荇)의 거제도 배소의 집주인(보수주인)은 궁핍한 할미였고 세 칸 띳집은 매우 낡아, 비바람이 불 때에는 천장에서 비가 새기도 했다. 선생에게 주어진 양치는 임무는 양을 치는 일이었으나, 실제로는 그의 노비가 양을 치고 가사노동을 도맡아 했다. 그래서 그는 거제도로 유배 온 20명에 가까운 학자들과 시문을 주고받고 유람을 다닐 수가 있었다. 이에 약 7개월간의 거제유배생활 중에 약 170편(각종산문 포함)의 유배작품을 남길 수가 있었다.
1504년 갑자사화로 인해 거제도로 유배 온 분이 대략 26명 정도다. 이 들이 여기 거제시 상문동 ‘문동(운문)폭포와 소요동’사이에서 암울한 시기였던 1506년, 우리나라 최고의 문학 공간을 창출했다. 그중에 이행(李荇,擇之), 김공석(金公碩, 김세필), 홍대요(洪大曜, 홍언승), 홍언충(洪彦忠, 直頃), 홍언방(洪君美), 홍언국(洪公佐), 자진(子眞, 최숙생), 이윤(李胤, 子伯), 이강재(李強哉, 이려), 이공백(李恭伯), 이자선(李子善), 이원숙(李元叔), 이인지(李守訒, 訒之), 이공신(李公信) 등이 서로 가깝게 교분을 나누었다. 1506년 봄부터 가을까지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즐긴 거제도 장소가, 장평바닷가, 운문(문동)폭포와 신청담(神淸潭, 문동폭포 용소), 소요동[상문동]과 매립 전의 고현바닷가, 그리고 유자도[현 대섬(竹島), 현재 유자섬(橘島)은 당시에는 소도(小島)], 주봉 계룡산, 구천동(삼거리)까지 함께 다니며 거제 비경을 즐겼다. 거제고을 선비인 이악(李鶚,斯立), 이맹전(李孟全), 이백완(李伯完)도 가끔씩 참석했으며, 또한 거제 관리 이수간(李守幹), 수위(守威), 수인(守訒), 수심(守諶) 형제들과도 시문을 교환했다. 이분들이 가장 자주 찾은 곳이 거제시 상문동 문동저수지에서 문동폭포까지 ‘소요동’이었다.
○ 한문수필, 「소요동기(逍遙洞記)」의 내용을 살펴보자. 이 글은 척박하고 답답한 유배지 환경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아름다운 골짜기(소요동)를 통해,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자연에 투사하고 위안을 얻는 과정을 철학적 사유로 풀어낸 명작이다.
이 글은 크게 3단락으로 나뉘어진다. 먼저(1) 유배지 배경과 공간의 대조이다. 답답한 유배지에서 해방의 공간의 '소요동'의 발견이다. 글의 서두에서 작가는 사방이 험준한 산(계룡산, 망현, 증산)으로 가로막혀 숨조차 쉬기 힘들 만큼 답답한 심경을 토로한다. 그러다 우연히 산속에서 깊고 그윽한 골짜기를 발견하는데, 그곳은 속세의 때가 묻지 않은 무릉도원 같은 공간이다. 작가는 이곳을 장자의 철학에서 따온 ‘소요(逍遙, 슬슬 거닐며 자유롭게 노닐다)’로 명명하며, 귀양살이의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탈출하는 해방감을 맛본다. 둘째(2) ‘만남(遇)’과 ‘만나지 못함(不遇)’의 철학적 사유를 묘사했다. 사대부 문학에서 '우(遇)'는 군주를 만나 조종에서 뜻을 펼치는 것을, '불우(不遇)'는 시대를 잘못 만나 유배되거나 벼슬길이 막히는 것을 뜻한다. 이행은 소요동이라는 뛰어난 경치가 변방 거제도에 버려져 있는 상황을 자신의 불우한 처지에 빗대어 감정을 이입했다. 셋째(3) 조물주의 뜻과 불우한 처지의 역설적 위안과 우연의 미학이다. 마지막 단락의 사유가 이 글의 백미다. 소요동이 변방에 버려진 '불우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버림받고 '불우한 처지'가 된 자신과 만날 수 있었다는 역설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결국 "너(골짜기)가 불우했기에 내가 너를 만날 수 있었구나"라며 자연과 인간의 상호 소통을 이끌어내고, 인간의 길흉화복과 세상사 뜻대로 되지 않는 이치를 '조물주의 뜻' 혹은 '우연'으로 수용하며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 모습을 보여줬다.
● 다음 ‘소요한 골짜기를 보고 적은’ 산문(散文) <소요동기(逍遙洞記)>는 조선전기 문신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 선생의 작품이다. 저자의 문집 『용재집(容齋集)』에 산문(散文)으로 실려 있는 <소요동기(逍遙洞記)>와 <명산수설(名山水說)>에는 이 골짜기 소요동(逍遙洞)에서 정신적인 여유를 되찾아 자신의 거처 주위의 산수를 음미하며 긴장을 푸는 모습이 완연하다.
이 글의 내용을 보면, 용재(容齋) 선생이 1506년 초봄(음2월)에 이배 된 머나먼 변방의 거제도 배소 인근에 유수(幽邃)한 골짜기가 있어 속세를 벗어나 노닐 수 있을 듯하여, 이 골짜기를 소요동(逍遙洞)이라 명명하고 시내를 이름을 백운계(白雲溪)라 명명했다.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이곳을, 내가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조물주가 나에게 내린 지우(知遇)의 위안처(慰安處)인 듯하다면서, 유유자적 노닐면서 정신적인 여유를 되찾고 주위의 산수를 음미하며 긴장을 풀었다고 한다.
**「소요동기(逍遙洞記)」** 소요한 골짜기를 보고 적다. / 이행(李荇 1478~1534)
병인년(丙寅年, 1506년) 초봄(음력 2월)에 내가 거제도로 이배되어, 고절령(高絶嶺) 아래에 유폐(幽閉)되었는데, 영남 사람들(토박이 말)은 이 재를 화자현(火者峴)이라고들 하였다. 내가 현재 이름인 고절령으로 고쳤고 또한 고절령(高節嶺)이라고도 불렀다.
계룡산(鷄龍山)이 그 오른쪽에 비껴 있고 망현(莽峴)이 그 왼쪽을 에워싸고 증산(甑山)이 그 앞을 가리어, 풀과 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졌으며 지역이 비좁고 골짜기가 휘감아 시야가 멀리 트이지 않기에 기운이 이 때문에 막혀 답답했다. 그리하여 괜스레 배회하며 험준한 고절령을 돌아보았더니 구름이 걷히고 노을이 열리는데 그 모양이 마치 매우 기이한 것이 있을 듯한 느낌이 들어, 서너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가 작은 시내를 만났다. 시내를 거슬러 70여 걸음을 올라가니 움푹 깊이 들어 간 곳(洞)에 유수(幽邃, 깊숙하고 그윽함)한 골짜기가 있었다. 그윽한 숲이 둘러싸고 맑은 물이 콸콸 흘러, 눈으로 보니 푸르른 산빛이요, 귀로 들으니 쟁쟁한 물소리라, 그 빛과 소리가 서로 도와 빼어난 경치를 이루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괴상한 바위와 나무가 무늬 있는 이끼로 뒤덮이고 푸른 깃털 긴 꼬리의 새들이 즐거운 목청으로 서로 다퉈 울어 대어, 씻은 듯이 훌쩍 속진(俗塵, 속세의 티끌)을 뛰어넘고 육신의 구속(形骸)에서 벗어나서 사물의 밖(세상 밖)에서 노니는 듯하였다.
내가 산수(山水)에 뜻을 둔 지가 거의 10여 년인데도 아직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결국 곤궁한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아! 이곳이 그 소원을 채워주기에 충분하구나. 예전에는 호칭이 없었기에 내가 이 골짜기를 이름하여 소요동(逍遙洞)이라 하고, 이 시내를 이름하여 백운계(白雲溪)라 지었다.
늙은 솔이 북쪽 기슭에 기대서서 기우뚱 남쪽으로 시내를 가로질러 그늘을 드리운 것이 마치 일부러 그렇게 만든 듯하기에, 여기다 정자를 짓고 이름하여 세한정(歲寒亭)이라 하였다. 그리고 바위틈으로 솟는 물을 트니 도도(滔滔)히 흐르기에 이름하여 성심천(醒心泉)이라 하고, 그 물을 이끌어 작은 못을 만들었다. 그 못의 너비는 사방 한 길이고 깊이는 발등이 잠길 정도이며, 푸른 창포로 덮었더니 향기가 물씬 풍기고 작은 물고기를 풀어 놓으니 기운차게 노닐더라. 이에 서너 줄기 대를 심으니 그 모습이 몹시 올곧고, 물빛이 어리어 넘실대매 아름다운 자태를 볼 수 있기에 그 못을 이름하여 군자지(君子池)라 하였으며, 그 아래 정자를 짓고 또한 이름하여 차군정(此君亭)이라 하였다. 시냇물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나아갈수록 새롭고 더욱 경치가 기이하여 거의 형용할 수 없을 지경이다. 푸른 벼랑은 물러서고 드리운 물결은 쏟아져서 굉음을 울리며 부서져 내리는 모습이 마치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듯한 것을 이름하여 운문폭(雲門瀑)이라 하였다. 그리고 폭포수가 아래로 내려와 고여 온통 바위로 된 웅덩이에 물이 영롱하기 그지없고 모래와 흙이 섞이지 않아 마치 조물주의 솜씨로 빚어 낸 듯한 것을 이름하여 신청담(神淸潭)이라 하였다. 그리고 깎아지른 벼랑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치고 평평한 바위가 마치 돗자리처럼 펼쳐져 기대고 앉고 눕기에 좋을뿐더러, 그 좌우로 단풍 숲이 많고 진달래가 많으며 풀들은 곱게 깔리고 고목이 나란히 선 데다 늙은 등나무가 구불구불 휘감아 그 짙은 녹음에 햇빛이 도저히 스며들 수 없다. 이곳에 늙은 가지를 꺾고 묵은 낙엽을 쓸면 휴식할 만하기에 이름하여 지족정(止足亭)이라 하였다. 내가 본 경관은 여기서 그치니, 여기서부터 더 이상 샅샅이 보고 싶지는 않았다. 대저 사물 중 수승(殊勝)한 것은 반드시 지우(知遇)를 입게 마련이지만 더러는 지우를 입지 못하기도 한다.
만일 이 골짜기가 큰 도회나 읍 가까이에 자리하여, 지체 높은 유람객들이 밤낮으로 와서 노닐며 노래하고 웃으며 즐거움으로 삼았을 것이니 그렇다면 이 골짜기가 ‘좋은 때와 사람을 만났다(遇)’고 하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지금은 머나먼 변방 아무도 모르는 곳에 버려져, 큰 바다(瀛海)가 가로막고 도깨비(魑魅)가 사는 곳이라, 나처럼 세상에 크게 버림받은 자가 아니면 이곳에 찾아들지 않으니, 이 어찌 나를 알아주지 못한 것이라 아니하리요. 오호라, 그 만나고(遇) 만나지 못함(不遇)이란 것이 어찌 우연에서 나온 것이겠는가? 아니면 조물주가 그렇게 만든 것인가. 저 조물주란 것(造物者)은 과연 있는가.
만약 조물주가 없다고 한다면 이 빼어난 골짜기를 누가 만들었단 말이며,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골짜기가 지우를 입지 못하니, 장차 조물주의 호오(好惡, 좋음과 싫음)가 우리네 인간과 같지 않은 것이 있단 말인가. 나 또한 세상에서 지우를 입지 못한 자(뜻을 펴지 못한 자)인데 이 골짜기와 지우하였으니(좋은 경치를 만났으니), 어쩌면 서로 만나려 기다렸던 것이 아닐는지. 그렇다면 지우를 입지 못한 것이 도리어 지우를 입은 셈이 되는 것인가. 내가 말한 지우를 입었는가 입지 못하는가는 과연 조물주의 뜻과 합치되는가. 이 또한 알 수 없는 일이고 보면, 결국 (나 같은 불우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 우연으로 돌리고 말아야 할 것인가.
「소요동기(逍遙洞記)」 소요한 골짜기를 보고 적다. / 이행(李荇 1478~1534)
[丙寅歲 余竄配巨濟島 幽于高絶嶺之下 嶺俗 傳火者峴 余定今名 亦號曰高節 鷄龍迤其右 莽峴擁其左 甑山蔽于前 薈蔚蓊翳 迫遽旋繞 望不得延 氣以之堙 彷徉徊徨 顧視絶嶺 雲藏而霞辟 意若有甚異者 前行三四步得小溪 逆溪七八十步有洞 窅而邃 幽林環之 淸流瀉之 目之蔥然 耳之戛然 相贊爲勝 詭石怪木 剝以文蘚 翠羽長尾 交鳴自得 洒然若超塵穢脫形骸 而遊於物之表也 余之有意於山水者 幾十數年而未之果 卒以窮躓 噫 此足以當之乎 舊無號稱 今名其洞曰逍遙 溪曰白雲
/使是而在通都大邑之交 貴游者 朝夕登陟 歌笑以爲樂 則謂之遇也的矣 而乃淪棄湮塞於荒徼之外 瀛海之爲阻 魑魅之是居 非有大謫於世者 則不之狎也 豈非所謂不遇者歟 嗚呼 其所以遇與不遇者 抑出於偶然乎 將造物者之爲之耶 彼所謂造物者 果有之耶 /若以爲無也 則是勝也孰爲之 而以爲有也 則使是而不遇 將造物者之好惡 與人有不同者乎 余亦世之不遇人也 於是乎而遇焉 豈非所以交相待者耶 其不遇也 乃有遇歟 余之所謂遇不遇者 果與造物者合乎 是亦不可以知也 則其歸之於偶然者歟]
[주1] 속진(俗塵) : 속세의 티끌. 세상의 여러 가지 번잡(煩雜)한 일을 이르는 말.
[주2] 형해(形骸) : 생명이 없는 육체. 몸뚱이. 내용이 없는 뼈대’라는 뜻으로, 형식뿐이고 가치나 의의가 없는 것을 이르는 말.
[주3] 지우(知遇) : 지기의 인격이나 학식을 남이 알고서 잘 대우함.
● <거제시 상문동 소요동(逍遙洞) 한시(漢詩) 3편>
거제시 상문동 "소요동(逍遙洞)"은 現 문동저수지, 즉 옛 고현천 상류 골짜기와 그 갓길을 일컫는 말이다. '소요동'은 500여 년 전, 용재 이행, 충재 최숙생, 십청헌 김세필, 우암 홍언충, 강재 이려, 쌍매당 이윤 선생을 통하여 널리 알려졌다. 한시 속의 시어(詩語)로써 아름답고 여유로운 곳인 소요동(逍遙洞)은, 갑자사화에 연류 된 유배인들이 서로의 시름을 달래며,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시적 상상력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용재(容齋) 이행(李荇)의 '해도록(海島錄)'을 통해, 문동폭포(운문폭포,雲門瀑)와 더불어 지금도 전국 문인들 사이에 모르는 분이 없을 정도로 거제의 명소가 되었다. 다음 작품들은 거제 사람이면 한 번씩 읽어본 소요동 한시(漢詩)이다.
○ 다음 ‘麻’와 ‘歌’자를 통운한 칠언율시(七言律詩) <소요동(逍遙洞)>은 조선전기 문신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의 작품으로, 김세필(金世弼) 선생의 문집과 이행(李荇) 선생의 문집에 각기 수록되어 전하는데 일부 한자가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내용에서, 속세를 벗어난 듯한 깊고 고요한 골짜기를 평화롭게 표현했다.
한편 거제도라는 절해고도(絶海孤島)에 갇힌 유배객들이었지만, 그들은 소요동이라는 아름다운 계곡을 아지트 삼아 계절의 변화를 노래했다. 단순히 경치를 찬미하는 데 그치지 않고, 봄과 가을의 순환을 통해 유배 생활의 깊어짐을 탄식하면서도, 함께 고난을 겪는 벗들과의 깊은 우정, 그리고 마음의 집착을 비워내어 맑은 자연(폭포수)과 하나 되려는 사대부의 높은 정신 세계가 잘 나타나 있는 명시다.
1) 소요동(逍遙洞). / 거제도에 있는 골짜기인데 나 김세필(金世弼 1473~1533)이 거제귀양살이 할때, 이용재(이행), 최충재(최숙생)와 주고받은 시가 매우 많았지만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질 않다(洞在海島時謫巨濟與李容齋崔盎齋唱酬甚多今多不存).
愧負溪邊躑躅花(春風) 시냇가 봄바람에 한 수 지으니 철쭉꽃이 부끄러워하고
丹楓更奈九秋何 단풍도 늦가을에 접어들었으니 어찌하랴.
遊魚得計潭心靜 노니는 물고기 잠잠하니 못물이 고요하고
蒼壁無蹤雨脚斜 푸른 암벽에 빗줄기가 비켜나가 종적이 없구나.
勝事從來難屢挹(前) 즐거운 일은 원래 두 번 하기 어려운건데
故人何日許重過(有約) 다정한 친구가 어느 날에 다시 찾아주겠는가?
今朝減却靑春色(林) 오늘 아침 갑자기 푸른 빛이 가시니
雲外懸流不受遮 구름 밖의 폭포수 더욱 뚜렷이 보이네.
[각주] 용재(容齋) 이행(李荇)의 현손(손자의 손자)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 왈, "이 시는 용재집에 있다(이행의 문집). 공(김세필)의 시가 아니고 공에게 준 시(詩)이다. 다른 곳에서는 살필 수 없기에 그대로 둔다" 하였다. 제목은 <십일서사>로 되어 있다. 이날 신청담(神淸潭 문동폭포 웅덩이) 위에 구름이 걷혔으므로 사흘 동안 놀자고 약속을 하였다.[澤堂曰 此在容齋集中 非公詩 乃贈公詩 他無可考 姑存之云 題云 十日書事.是日 刪薈蔚于神淸潭之上 欲成四日之約也]
● 다음은 1506년에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의 시(詩)에 화답하여 충재(盎齋) 최숙생(崔淑生 1457~1520)이 지은, 십영(十詠) 중에 나오는 <소요동(逍遙洞)>이다. 거제시 상문동 문동폭포(雲門瀑) 입구에서 문동폭포 웅덩이 성심천(聖心泉)까지 계곡과 폭포를 여러분들과 함께 노닐다가, 이행의 시에 화답하여 쓴 ‘尤’ 운의 ‘5언 절구’이다(거제부읍지).
최숙생은 단 4구(오언절구)의 지극히 절제되고 압축된 언어로 깊은 울림과 격조 높은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대선비들이 절해고도에서 시를 주고받으며 슬픔을 맑은 영혼의 노래로 승화시킨, 조선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전가도(傳家寶) 같은 유배문학의 정수다.
2) 소요동(逍遙洞) 화답시(和答詩) / 최숙생(崔淑生 1457~1520)
問君逍遙洞 그대에게 소요동(逍遙洞)을 묻노니
逍遙幾許遊 소요동에서 몇 번이나 소요해 놀았던가.
碧山一長嘯 푸른 산에서 한 차례 긴 휘파람 부니
月白天地秋 맑은 달빛에 천지가 가을이네.
● 다음은 1506년 여름에 조선전기 문신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이 읊은 ‘馬’ 운의 오언율시(五言律詩) <소요동(逍遙洞)>이다. 우거진 수풀 속에 운문폭포의 물이 콸콸 쏟아져 시내를 흘러가니 골짜기가 시원하기 짝이 없다. 유유자적하는 이행(李荇) 선생의 심정이 마치 장자(莊子)의 소요유에 비길 만하다고 흡족해한다.
3) 소요동(逍遙洞) / 이행(李荇1478~1534)
森森喬木陰 빽빽하게 교목은 우거지고
決決淸流瀉 콸콸 맑은 시내 쏟아지누나.
道上有暍死 길에는 더위 먹어 사람 죽어도
谷中無朱夏 이 골짜기엔 더운 여름 없어라.
竹筇伴還往 대지팡이 짝하여 오고 가노니
不必朋從假 함께 할 벗이 필요치 않구나.
持玆問傲吏 이를 가지고 오리에게 묻노니
誰是逍遙者 누가 진정 소요하는 자인고?
[주] 오리(傲吏) : 오연(傲然)한 관리란 뜻, 칠원(漆園)의 관리를 지낸 장자(莊子)를 가리키는바, 장자가 관리로 있으면서도 그 뜻이 높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즉,용재 자신이 소요동에 노닐면서 자적(自適)하는 심정이 장자의 소요유에 비길 만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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