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31] 정수원(鄭壽源) - 소명하신 뜻길 따라 2. 음란으로 비난 받는 곳으로 가라 - 1 1 조모는 “음란으로 비난받는 교회가 있으면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유언하셨다. 1955년 6월초 이화여대의 사건이 나자 부친이 통일교회를 찾아가서 1주일간 원리강의를 듣고 오셔서 “조모가 주장하던 것보다 더 구체적이고 성서적인 면에서도 앞서 있다”라고 하시면서 ‘이상하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1955년 6월 25일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입교하였다.
2 1957년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하게 되자 나도 육군 중위로 7년간의 군생활을 제대하고 약 2개월동안 원리공부에 열중하였다. 건국대학에 다닐 때는 선생님으로부터 등록금을 받았다.
3 그때는 선생님을 가까이 모시고 생활하였는데 하루는 청년회원들이 관악산 등산길에 비를 맞으며 선생님을 모시고 가다가 다리 밑에서 인절미를 먹기도 했고, 산정에 올라가서는 선생님과 넓이뛰기를 하기도 하였다.
4 그리고 우리 집에서 김원필 선생님과 성진씨와 같이 약 3년간을 생활하였다. 그때 나의 마음은 한가롭게 학교에만 다닐 것이 아니라 일선에 나가서 개척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고 곧 충주로 개척전도의 길을 떠났다.
5 인도자로서의 첫 발걸음은 가볍지가 않았다. 감리교회에 다니던 권사 한 분과 인연이 되었는데 본의 아니게 감리교의 목사와 경쟁을 하게 되었다. 누가 정성을 더 많이 드리느냐에 따라서 그 권사의 마음을 돌릴 수 있기 때문에 그집에 가서 새벽예배를 보면서 원리말씀을 전하였다. 그는 원리 앞에 굴복을 하였다.
6 부활의 역사란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그때 확실히 체험할 수가 있었다. 특히 그 권사의 부친께서 운명하시게 되었을 때 감리교회의 목사에게 기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교회의 전도사인 나에게 기도를 요청해 왔다.
7 전도생활을 하다가도 마음이 클클할 때라든지 심령이 괴로울 때는 홀로 등산을 하면서 기도와 명상의 시간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때 나는 점심을 먹지 않고 지냈다.
8 충주에서 4km쯤 떨어진 목행(牧杏)을 개척할 때는 저녁집회를 위해서 하오 5시경에 출발하여 도착하면 식구들은 저녁식사를 마친 후이기 때문에 곧장 말씀을 전해야 했다. 2시간 정도 말씀을 하고 때로는 걸어서 돌아오곤 했지만 그래도 기쁜 나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