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글로벌 하우스 11회 (3~6화). 오징어는 채소가 아니다.
음식 이야기가 나왔으니 우리 룸메이트들의 식성 이야기를 해볼까? 외국인들한테서 우리나라 음식이 맛있다는 칭찬을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었지만 나는 그게 예의를 차리려는 말이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외국인 룸메이트들과 생활하다 보니 외국인들, 정말 우리나라 음식을 좋아하더라.
치즈와 우유, 계란조차 먹지 않은 채식주의자 아그네스가 좋아하는 우리나라 음식은 유부초밥이었다. 유부초밥이 채식주의자에게 적합한 음식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그네스는 유부초밥을 꽤나 즐겼다. 종종 슈퍼에서 파는 인스턴트 유부초밥 재료를 사와서 밥에 비벼 먹었다.
미국 꼬맹이 휴는 한국 음식을 참 잘 먹었는데 특히 오징어덮밥을 좋아했다. 갈비라면 사족을 못 썼고, 가끔 김치볶음밥이나 파전, 김치전 같은 것을 만들어주면 너무 잘 먹었는데, 사실 생각해보면 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은 개고기였던 것 같다.
마틸다와 존이 떠난 후 루시라는 룸메이트가 들어왔는데 그녀도 아그네스처럼 채식주의자였다. 음식을 거의 먹지 않는 말라깽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고추장! 루시가 즐겨 먹는 것은 커피와 고추장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보통 땐 맨밥에 고추장을 비벼 먹고 심지어는 크래커 위에도 고추장을 발라 먹어서 500그램짜리 고추장 한 통을 사면 일주일도 안 돼서 다 먹어버렸다. 그리고 순두부찌개도 엄청 좋아했다. 그녀는 외식을 할 때마다 거의 매번 순두부찌개를 먹었다.
나중에 들어온 룸메이트인 프랑스 출신의 이사벨. 이사벨은 내가 미역국, 김치전, 된장찌개를 할 때마다 배워야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늘상 그녀가 만드는 것들은 케이크와 쿠키, 스파게티 등 서양요리뿐이었다. 이사벨은 진짜로 한국 음식을 좋아해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외국인 친구들과 고깃집에 들러 갈비를 구워 먹었고, 주말에는 나 몰래 한국요리 강좌를 수강했다. 한국에서 처음 휴가를 받아 영국 집에 갔을 때 그녀가 어머니에게 선물한 것은 영어로 된 한국 요리책이었다. 그 책 보고 한국 음식을 해달라고 말이다. 결국 그녀의 어머니가 만들어주지 못하자 남자 친구와 한국 음식점에 가서 사먹었다고 한다.
독일 처녀 잉게는 군밤을 사 가지고 와서 혼자 조심스레 까먹곤 했다. 스웨덴인 아나는 슈퍼에서 노란 단무지를 사다가 뭘 먹든지 단무지와 함께 먹었다.
외국인 친구들은 뭐 하나 맛있는 것을 발견하면 그게 무조건 한국에서 제일 맛있다고 생각하는지 한 달 정도 그것만 먹는다.
아그네스는 ‘오징어 땅콩’ 과자가 한국에서 제일 맛있다고 한다.
“아그네스, You are a strict vegetarian. Aren’t you? 오징어 is not vegetable.”
내가 아무리 오징어는 채소가 아니라고 말해도 그녀는 무시하고 한동안 ‘오징어 땅콩’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다 나중에 ‘고소미’를 발견하고는 호주에 갈 때 ‘고소미’를 가방 안에 꽉 채워가지고 갔다.
루시는 어디서 빨갛게 무친 콩나물무침을 먹어보고 며칠 동안 반찬가게에 들러 콩나물무침만 사 나른 적이 있다. 외국인 여자가 겁도 없이 콩나물무침만 한 접시 놓고 서툰 젓가락질을 하고 있는 광경이란. 이사벨은 그 모습을 보더니 “아, 나도 저거 먹어봤는데 굉장히 맛있었어!”란다.
이사벨에게 가장 맛있는 한국 반찬은 고추부각이다. 어릴 때 엄마가 해주던 마른 고추튀김이 그리워 백화점에서 사 왔는데 이사벨은 거의 쇼크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Oh! Wow! 내가 한국에서 먹어본 것 중에 제일 맛있는 반찬이야. 근데 이걸 어디서 샀어? 나 일 년 가까이 한국에 살았지만 단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어.”
“그래? 백화점 반찬 코너에서 파는데.”
반찬가게나 백화점 반찬 코너에서 살 수 있다고 알려줬더니 이사벨은 그날로 백화점마다 돌아다녔나 보다. 하지만 고추부각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새봄, 그거 이름이 뭐야? 한국말로 적어줘.”
나는 종이에 이렇게 적어주었다.
‘고추부각을 어디에서 살 수 있어요? 고추튀김 마른반찬입니다.’
이사벨은 그날 고추부각을 잔뜩 사 와서 냉장고에 넣어두고는 꿀단지 모시듯 하며 조금씩 꺼내먹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최고 인기의 반찬은 단연 김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김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거기에 갈비, 닭갈비, 한정식, 부대찌개, 잡채 등이 그들이 가장 맛있다고 말하며 자주 먹는 한국 음식들이다.
글로벌 하우스 11회 (3~7화). 아, 골때리는 국제 철딱서니 커플
존과 마틸다는 돈 때문에 참 많이도 싸웠다. 한번은 마틸다가 심하게 아팠는데 존은 그 아픈 마틸다와 아침부터 큰소리를 내면서 싸우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내가 “존! 제발 마틸다가 건강해지면 싸워!”라고 소리쳤다.
마틸다는 울면서 그녀 특유의 신파 버전으로 호소하기 시작했다.
“새봄, 너 봤지. 존은 정말 참을성 없고 돈밖에 모르고 이기적이야. 난 정말 이렇게 아프고 힘든데…흐흐흑….”
그러면 존이 마틸다를 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다 네 탓이야! 네가 한국으로 오자고 했잖아. 한국에 오면 네가 방값을 낸다고 했잖아. 그럼, 영어 강사라도 해서 벌어야 하는 거 아냐?”
난 경악했다. 존이란 인간에 대해서는 기대도 안 했지만 해도 해도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 그만해! 아픈 사람에게 그게 무슨 말이야! 너희들 약혼한 사이 아니야? 왜 이렇게 이기적이야? 마틸다가 아프니 네가 좀 일해서 벌어! 한국에 영어 강사 자리는 널리고 널렸어!”
“하지만 난 영어 가르치려고 한국에 온 게 아니야. 난 아티스트라고.”
“우선 마틸다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봐. 아픈 게 제일 심각한 거잖아.”
“하지만 우린 돈이 없어.”
나는 화가 났지만 보다 못해 말했다.
“방값 안 받을 테니까 그 돈으로 병원에 가!”
아픈 사람이 병원도 못 가고 앓고 있는 건 정말 내가 불편해서 두고 볼 수 없다. 두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대꾸했다.
“어떻게 그래?”
“누구라도 이 상황이면 그럴 거야. 어서 병원에 가봐.”
하지만 그냘 저녁 난 방값을 병원비로 대신하라고 한 말을 뼈아프게 후회했다. 아침에 돈 때문에 악을 쓰며 싸우던 존과 마틸다는 그날 저녁 동대문에서 쇼핑을 하고 돌아온 것이다.
“새봄, 이 겨울 점퍼 어때? 이건 존 거구, 이 블라우스는 내 거야. 운동화도 샀어. 예쁘지?”
물론 병원은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달 동안 나는 그들이 일자리를 구해 돈을 벌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들은 언제나 게으름을 피우며 길거리 쇼핑으로 시간을 때웠다.
한번은 티켓 가격이 5만 원이나 하는 <난타> 공연을 보고 와서 “새봄, 정말 재밌더라. 넌 한국에 살면서 왜 그런 것도 아직 안 봤어?” 하질 않나. 새벽까지 거실에서 영화를 보면서 다른 룸메이트들의 잠을 방해하질 않나. 정말 곱게 봐주려고 해도 봐줄 수가 없었다.
그들과 함께 지낸 지 한 달, 아그네스는 더 이상 그들을 못 봐주겠다고 인상을 썼다. 나는 존과 마틸다를 불러서 조용히 말했다.
“존, 이제 한 달이 지났어. 그동안 일자리 좀 알아봤니? 마틸다는 몸 좀 나아졌고?”
“노래 부르는 일을 찾아보긴 했는데 페이도 적고 일자리가 별로 없어. 영어 강사 자리는 많지만 하루에 8시간이나 일해야 하고.”
“하지만 모두 그렇게 일해.”
그러자 그들은 대뜸 나에게 물었다.
“뭐야? 방세를 달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나는 그들의 태도에 당황했다. 아픈 마틸다를 위해 태어나서 생전 처음 닭죽을 끓여주었고, 싸울 때마다 달래주고, 존의 일을 알아보기 위해 인력 사이트에 유료로 가입까지 해가며 정보를 알려주고, 일주일에 몇 번씩 데리고 다니며 카페에 오디션을 보게 해 주었는데 말이다. 나의 그런 수고에 대해 고마움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그들의 반응에 충격을 받아 한동안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그래… 이제 마틸다도 아프지 않고, 너도 한 달 동안이나 한국에서 일자리를 알아봤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처음과는 다를 테니까 앞으로는 방세를 내도록 해.”
존은 눈을 내리깔고 내게 말했다.
“알았어. 방세는 주겠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네가 내 엄마도 아니잖아!”
난 그 말에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아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 그리고 그동안 밀린 방세는 분납해서 내. 이제 일을 하면 그 정도는 벌 수 있을 테니까. 그럼 이만.”
나는 그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배신감으로 한동안 열 받아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한 달 동안 내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시간을 배려한 대가가 겨우 이것인가 하는 허탈한 심정이었다. 불쌍해서 참 많이 도와줬지만 내 친절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 뒤로 나는 마틸다의 눈물에 속지 않았다. 내가 방세를 내라고 하자 마틸다는 다시 아픈 시늉을 하며 병원에 가봐야 되는데도 도와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너희 부모님이 그렇게 부자인데,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해. 부모님한테 부탁해 봐.”
나는 쌀쌀하게 대답했다.
“난 독립적인 성격이라 부모님한테 손을 벌릴 수 없어.”
마틸다는 그렇게 말했다. 참나, 부모님한테는 독립적인데 왜 나한텐 자꾸 의지하려 하는지 모르겠다. 결국 밀린 방세는 포기하고 그들을 내보냈다. 애초에 아픈 그녀에게 방세를 받을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아쉬운 것도 별로 없었다.
그들과 함께 사는 동안 정말 내 생활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아그네스의 말을 빌리자면 ‘드라마 퀸 & 킹’이 떠나고서야 좀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의 그 지겨운 수다와 싸움 덕분에 내 귀가 뚫려버렸다는 것이다. 아침마다 지겹도록 싸우는 소리를 듣고 마틸다가 내 옆에 앉아 쉴 새 없이 하소연하는 것을 매일 ‘리스닝’ 하다 보니 어느 순간 그렇게 된 것이다.
집을 구하려고 처음 마틸다가 우리 집에 전화를 걸었을 때 놀랍게도 영어가 한국말처럼 들리기 시작했었다. “이 사람 영어로 말한 거 맞아? 뭐야? 나 이 영어를 거의 다 알아들었네?” 그때가 아그네스와 생활한 지 한 달이 되었을 때쯤이었다. 그러고 나서 마틸다 커플의 수다를 통해 실력이 급상승한 것이다.
그즈음 대학 친구 하나가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결혼 하기 전에 외국 한번 나가는 게 소원이라고 벼르고 벼르다 떠난 것이다. 그때 친구가 보낸 첫 메일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런던이 너무 신기하고 좋아. 그래도 가장 신기한 건 바로 너야. 어쩜 영어가 그렇게 빨리 늘 수 있는 거지? 메일로 비결 보내줘.”
영국이라곤 구경조차 못한 나에게 영어 잘하는 비결을 알려달라니 황당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그 정도로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했다고나 할까.
게다가 존의 음악을 라이브로 감상하며 집 근처 공원에서, 명동의 야외 공연장에서, 종로의 밀레니엄 공연장에서 그가 공연할 때마다 즉석 통역 역할도 하지 않았던가. 그 커플이 떠난 지금 내게는 그들과의 추억이 특별하고 즐거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떠났기 때문에 그런 추억에 젖어들 수 있는 거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