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純宗)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 제27대(1907~1910 재위)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
순종영정 김은호작
순종
순종황제
1874년(고종11년 음력 2월 8일(양력 3월 25일)-1926년 양력 4월 25일) 고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종의 장성한 유일한 적자이다.
이름은 척(拓).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 정식 시호는 순종문온무녕돈인성경효황제(純宗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 이다.
1875년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되었다.
1882년 뒤에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가 된 민씨閔氏를 세자빈으로 맞았다.
1897년 대한제국(大韓帝国) 성립하고 황태자로 개칭改称하다.
1904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를 황태자비(계비, 後妻)로 새로 맞이했다.
1907년 7월 20일 고종高宗이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이완용李完用으로 하여금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이완용이는 친일파세력의 우두머리였다.
1907년 대한제국의 제2대황제 즉위. 재위시 년호年号는 융희황제(隆煕皇帝) 라 불리었다.
손종은 황태자로 영친왕英親王 이근李垠을 책립冊立하다.
7월 24일 제3차 일한협약(第三次日韓協約)에 의해 일본은 한국통감부(韓国統監府)의 기능을 강화하고 국정을 간섭하기 시작. 입법권, 사법권을 간섭하였다.
8월 1일 재정부족 등의 이유로 한국군(韓国軍)을 강제 해산시켰으며, 이로 인하여 의병운동(義兵運動)으로 투신하는 군인들이 증가하였으며 반일의병투쟁(反日義兵闘争)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09년 한일병합(韓日併合)에 대한 움직임이 강해졌다. 이완용수상李完用首相은 이용구·송병준 등이 중심이 된 일진회(一進会)라는 친일파세력과 함께 일본정부에 한일병합에 대한 대화를 진행한다.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을 조인調印한다.
8월 29일 양국 황제의 재가로 이 조약이 발효되다.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일본의 조선총독부의 통치하(朝鮮総督府)에 들어간다.
대한제국(大韓帝国)(조선왕조(朝鮮王朝))의 소멸후(消滅後) 순종은 황제(皇帝)에서 이왕(李王)의 왕족(王族)으로 봉인(강등)되어 창덕궁(昌徳宮)에 있게된다.
1926년 4월 25일 일본의 왕공족(王公族)인 이왕(李王) 척(拓)은 52세로 창덕궁에서 서거(逝去)하였다.
1926년(大正15年) 6월 10일 국장(国葬)으로 치룸. 어능(御陵)은 유능(裕陵;京畿道南楊州市金谷洞)이다.
국장일에 6·10만세운동(6·10독립운동)이 일어났으며, 3・1独立運動보다 더 큰 운동이었다.
순종 장례식 담은 '어장의사진첩'(御葬儀寫眞帖)'에서
국장을 치르는 거리 모습(종로)
군인들의 행렬
국장 행렬
영결식장 전경. 훈련원으로 지금의 동대문운동장 자리
영결식장에 도착하는 왕실 인사들
영결식장. 제전
대여 영결식장 도착
일본칙사 참배
왕실참배
왕실인사
고관참배
왕실(상주) 분향
순종에 대한 일본 왕실의 원수훈장 수여
고관분향
참배객들
조문 화환
중랑천을 지나는 장례 행렬 모습
능에 도착한 대여
유릉에서 전을 올리는 모습
유릉 주변의 모습
왕실인사들 유릉 출발
도농리를 통과해 돌아오는 행렬
신주를 모실 준비를 하고 있다
되돌아온 행렬 환궁
윤비(순종비)
독립기념관 6.10만세운동 전시
6·10 만세운동은 조선 학생 과학 연구회를 중심으로 한 전문학교 학생들의 시위와 중등학교 학생들의 시위이다. 학생들의 만세 시위는 순종의 인산일(임금의 장례식 날)인 1926년 6월 10일에 있었다. 이날 수많은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순종이 누워 있는 대여(나라에서 쓰던 큰 상여)가 돈화문을 출발하였다. 이날 돈화문에서 홍릉에 이르는 도로 양측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들 앞에는 기마 경찰과 헌병이, 뒤에는 사복 경찰이 감시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만세 시위는 대여가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때 중앙 고등 보통학교 학생들이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고 격문을 뿌리면서 시작되었다. 대여가 관수교를 통과할 때에는 행렬 동쪽에 줄지어 있던 보성 전문학교 학생 수십 명도 격문을 뿌리며 "대한 독립 만세"를 높이 외쳤고, 그 옆에 있던 연희 전문학교 학생들도 독립 만세를 외쳤다. 두 학교 학생들의 시위는 포위한 일본 군대의 저지로 더 나가지 못했는데, 기병 의장대의 말들이 놀라 뛰는 바람에 현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이날 서울에서는 세 학교 외에도 장사동, 관립 사범학교 앞, 훈련원 부근, 동대문 부인 병원 입구, 창신동 동묘 부근, 신설동 등지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관수교 부근에서 일본 군대가 총을 쏘았다는 말이 나돌자 군중들도 만세 운동에 가담하고 지방에서도 들고 일어났다. 이날의 만세 시위로 서울에서는 학생 수백 명이 체포되었다.
6·10 만세 시위 운동은 서울에서만 있었으나 이 사실이 지방에 알려지자 곧바로 고창, 순창, 정주, 군산, 울산, 평양, 공주 등지로 퍼져 나갔고, 이어 당진, 홍성, 강경, 전주, 하동, 이원 등지로 번져 나가면서 동맹 휴교로 이어졌다. 6·10 만세 운동은 3·1 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은 항일 운동으로 이후의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6.10만세운동
6.10 만세운동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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