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라한 계단을 오른다. 몸 하나 겨우 빠져나가지는 수직의 녹슨 계단을 부숴버릴 듯 잡고 한 발씩 내닫는다. 한참을 오르자 땀과 벗겨진 페인트 조각, 녹들이 엉켜 손바닥에 젖은 모래알들이 구르는듯하다. 얼마나 더 올라야 할까. 막막한 마음에 위를 향하지만, 어둠은 이마저도 가늠하지 못하게 한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신발을 벗어버리고 난간 한 귀퉁이에 쓱쓱 발을 문지르고 싶다. 어쩌다 공장의 굴뚝 속 같은 곳으로 들어온 건가. 한쪽 팔을 뻗어 어두운 허공을 휘저어 본다. 뭔가 잡히는 것만 같다. 반가운 마음에 더듬어 보니 차가운 양철의 느낌과 함께 또 다른 통로다. 환풍구인지 더욱 좁다. 철조망을 기어 넘는 훈련병도 지금 이런 기분은 아닐거다. 온몸으로 굴러 길을 가는 속 보이는 한 마리 애벌레가 된 자신을 본다. 자신이 삼킨 모든 것과 배설할 것들마저 훤히 보이는 부끄러운 몸통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저 끝 숭숭 뚫린 못 구멍 사이로 햇살이 샤워기 꼭지를 틀어 둔 듯 쏟아진다. 너무나 눈부셔 눈을 감는다. 기쁨에 겨워 무릎걸음으로 총총히 달려가 힘껏 밀어 본다. 하나 또 다른 길이다. 이번에는 ㄱ자로 꺾인 어려운 길이다. 울고 싶은 마음을 달래며 이번이 마지막일 거라 자신을 다독인다. 너무나 비좁은 ㄱ자 통로에 ㄱ자로 꺾인 허리를 더는 빼지 못한 채 흐느끼며 발버둥을 친다.
아주 어릴 때 동상을 앓은 적이 있다. 동상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겨울이 다가오면 발이 간지러워 벽 모서리마다 발바닥을 대고 긁어댔다. 차가운 콩 자루 속에 발을 넣고 자기도 했다. 초등학생이 되었을 적에는 고통이 심해서 송곳으로 구멍을 내면 검붉은 피와 함께 얼음알갱이가 셔벗처럼 쏟아 내리지 않을까 했다.
나이가 들수록 증상은 깊어 갔다. 계절에 상관없이 마음이 답답하거나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면 여지없이 발바닥이 간지러워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마치 답답증은 곧 간지러움이란 공식이 학습된 게 아닌가 할 정도였다. 오랜 시간 동안 정체된 문제로 힘들어할 때나,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라든지 뙤약볕 아래서 타들어 가는 윤기 잃은 노랑 머릿결을 가진 여자를 볼 때 가슴이 꽉 막혀오면서 간지럼증이 일었다.
요즘도 가끔 허튼 욕심들이 북적북적 피어오르거나 갈등과 번민이 끊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계속될 때 한 번씩 발이 간지러워진다. 조여드는, 숨이 쉬어질 것 같지 않은 밀폐된 느낌은 발의 곰지락거림과 함께 시작되어 신발을 벗어버리고 싶은 충동으로 다가온다. 그럴 때면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 신발을 벗는다.
한동안 꾸지 않던 꿈을 꾸었다. 아주 비좁은 공간을 빠져 나아가는 꿈이다. 캄캄한 터널 같기도 하고 가동을 멈춘 공장의 굴뚝 같기도 한, 때로는 낮은 통로를 두려움을 안고 간다. 몸을 뉘어야만 기어갈 수 있는 이 길을 몇 번이고 왔음을 꿈속에서도 인지한다. 때로는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내가 울고 있구나. 이것은 꿈이야 깨어야 해, 하고 자신에게 말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선에서조차 자신에게 좀 더 유리한 쪽으로 꿈을 이어간다. 솜이불의 무게감이 서서히 느껴진다. 더워진 갑갑한 발을 꺼내고 싶다.
꿈에서 깨어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어슴푸레한 벽을 응시한다. 가끔 지금 걷는 길이 진정 가고자 하는 길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헝클어진 머릿결처럼 풀리지 않는 일들, 펼쳐 놓은 것들조차 남루하여 숨고만 싶을 때가 그러하다. 진솔하게 살아야지 하면 벌거숭이처럼 부끄러움만 가득하고 갖은 수사를 동원하여 공들이면 어릿광대마냥 분장한 모양이 서글프게 도드라진다.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면 차라리 용감해지기라도 하련만……, 마음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이방인 되어 몇 달을 헤맸다.
네모난 방, 사각의 침대 위에서 몸의 흔적으로 구겨진 이불 속 두 발을 꺼내어 본다. 볼펜 한 자루를 집어 발 가운데 오목 자리를 꾹 눌러본다. 간지럼을 몰아내고 기분 좋은 아픔이 물비늘처럼 번진다.
너는 어쩌자고 이렇게 예민한 촉수를 가졌냐고 묻고 싶다. 짧은 열 개의 촉수를 꼼지락거리며 내 전부를 읽고 있는 발은 이제 꿈속까지 거닐고 있다. 가슴 가장 멀리서 나를 제일 먼저 느끼는 녀석이 영악하게도 신호를 보낸다. 서서히 배인 생활의 군내도, 덧없는 욕심도, 토해내지 못한 열정도 그에게는 들켜버린다. 녀석은 어렵게 삼켜 가라앉힌 침전물들을 분석한다. 쓰레기통 속의 찢어버린 메모지를 맞추듯 기어이 알아내어 보란 듯이 불쑥 들추어낸다.
꿈길을 헤매다 온 발을 보니 겸연쩍어진다. 끝나지 않는 바람의 무게를 고스란히 이고서 밤낮으로 걷고 있는 쉬지 못하는 두 발바닥에는 굳은살이, 박히었다. 가장 낮은 자세로 자신을 비우지 않고는 출구는 없다고, 튼튼한 사다리 하나도 준비하지 못한 채 날기만을 바라는 심보는 또 무어냐고 묻는 듯하다. 언제나 속을 들킨다는 건 썩 내키지 않는 일이어서 두 손으로 눈을 가리듯 발을 감싸 본다.
더운 열기를 찬 손으로 식힌다. 갖추지 못하고 웃자라고 있는 꿈은 날 선 욕심일 뿐이라고 이 밤 발이 내게 말하고 있다.
발이 아직 뜨겁다.
첫댓글
감사 합니다.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