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 옛날이었다. 중국(제하[諸夏]. 여기서는 진[秦] 제국 - 옮긴이 아사달. 아래 ‘옮긴이’) 진시황(성은 ‘영’이고 이름은 ‘정’이다 – 옮긴이)은 세상을 모두 자기 손아귀에 넣고 권세와 술과 노래 속에 부족함 없이 살면서도 언제고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일이 원통하였다.
막강한 군사를 거느리고 외적(원[原] 부여와, 동호[東胡] 왕국과, 한자 문화권에서는 ‘흉노’로 불린 훈나족 – 옮긴이)을 막기 위하여 만리장성을 쌓았고(사실은, 전국시대부터 있던 각 나라의 장성들을 하나로 이었을 뿐이다 – 옮긴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었으나 스스로의 힘으로도 목숨만은 연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황제의 체면에도 불구하고 괴로워하였다.
황제는 모든 신하들을 모아 놓고,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다. 누구도 그 답을 알지 못하였다. 사람이 영원토록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없기도 하거니와,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진시황에게 알려 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신하들이나 백성들(특히, 진나라에게 망한 여섯 나라의 유민들 – 옮긴이)은 모두 황제가 어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마음이었다. 그만큼 황제는 인심을 잃고 있었다.
그런데 신하 중에(가운데 – 옮긴이) ‘서벌’( 『 사기 』를 비롯한 역사 기록에는 ‘서복[徐福]’이나 ‘서불[徐市]’로 나오는 사람. ‘불[巿]’이 ‘시[市]’와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어떤 기록에는 ‘서시[徐市]’ 라는 이름으로도 나온다 – 옮긴이 )이라는 꾀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 폭군의 신하 자리에서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소인이 듣건대 저 동쪽 나라 작은 섬 제주(옛 이름은 ‘탐라’. 그리고 어떤 학설에 따르면 ‘탐라’이전에는 ‘침미다례’로 불렸다고 한다 – 옮긴이)라는 곳에 한라산이란 산(순수한 배달말로는 ‘뫼’- 옮긴이)이 있사옵고, 그 산에는 사람이 먹으면 영원토록 살 수 있는 ‘불로초’란 풀이 있다고 하옵니다. 소인이 정성을 다하여 그 풀을 캐어다가 바쳐 올리겠습니다.”
황제는 귀가 번쩍 틔었다.
“오, 네가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로구나. 만약 네가 그 불로초를 캐어 온다면, 짐이 이 나라의 땅 절반(순수한 배달말로는 ‘가봇’ - 옮긴이)을 주겠다.”
황제는 정말 서벌이 자기를 위해 불로초를 캐오려는 줄 알고 감격하며 기뻐하였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것을 캐어 오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사람이 필요하옵니다. 그러하오니, 황송하옵니다만 젊은 남자와 여자 각 오백 명씩을 같이 가게 해주십시오.”
“젊은 남자와 여자 오백이라, 그 많은 사람들은 무엇에 쓰려는고?”
“예, 한라산이라는 산은 험하기가 이를 데 없음은 물론(말할 것도 없고, - 옮긴이), 그 험한 산속 깊이깊이 숨어 있는 불로초라는 풀은 누구의 눈에나 띄는 게 아닙니다. 마음과 몸이 정결하고 흠이 없는 젊은 사람들 눈에만 띈다 하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옵니다.
서벌(서복/서불. ‘서<벌>’이라는 이름은 ‘서불’이라는 이름을 전해 들은 침미다례/탐라국 사람들이 발음을 ‘불’에서 ‘벌’로 바꾸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 옮긴이)의 이야기는 모두 거짓말이었다. 그에게는 그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었다(한 다큐멘터리의 내용에 따르면, 제하[諸夏] 현지에서 서복[서불]의 후손을 자처하는 서[徐]씨들에게 서복과 관련된 야사가 전해 내려오는데, 그 야사의 내용인즉 서복이 진 제국을 떠나기 직전에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만약 내가 떠나면 당장 달아나서 성을 바꾸고 숨어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다큐는 그것을 서복이 영정을 속이고 진 제국 밖으로 달아날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한 말로 풀이하며, 그 다큐의 내용을 인용하는 나도 그 풀이에 동의한다 – 옮긴이). 그러나 이렇게 되자 황제는 서벌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황제는 서벌이 원하는 대로, 처녀 총각 오백 명이 오랜 세월 동안 먹고 쓸 모든 물건을, 좋은 재목을 베어다가 만든 큰 배 여러 척에 실어 준 후(준 뒤 – 옮긴이), 서벌 일행을 (진[秦] 제국 밖으로 – 옮긴이) 내보내었다,
이렇게 진(秦)을 떠난 서벌 일행은 제주도(당시 이름은 침미다례. 한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제주도는 삼한백제에 정복당하는 서기 227년 이전까지는 ‘침미다례’로 불렸고, 그 뒤로는 담로계 땅 이름인 ‘탐라’로 불리게 되었다 – 옮긴이)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한라산에 올라 불로초를 캐기는커녕 산 구경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 옮긴이) 한라산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여러 아름다운 경치들을 구경하면서 섬을 한 바퀴 돌다가, 지금의 서귀포 정방 폭포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그들은 다시 동쪽(오늘날의 일본열도, 특히 구주[규슈] 섬으로 보인다 – 옮긴이)으로 떠났다. 그리고 (떠나기 전 – 옮긴이) 정방 폭포 절벽에 ‘서씨 일행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귀를 새겨 두었다.
지금도 폭포 위쪽 바위에는 그런 글 흔적이 있다고 한다. 그들 일행(서복 일행 – 옮긴이)은 동쪽으로 가서 어느 땅(앞서 말했듯이 일본열도의 규슈일 가능성이 높다 – 옮긴이)엔가 정착하여 작은 나라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불로초를 캐겠다는 것은 처음부터 진시황(영정 – 옮긴이)을 속여 그 나라(진 제국 – 옮긴이)를 떠나려 했던 서벌(서복/서불 – 옮긴이)이란 사람의 공연한 구실이었다.
- 『 제주도 이야기 1 』(현길언 지음, 강요배 그림, ㈜창비 펴냄, 2007년)에 실린 제주특별자치도(道)의 야사(野史)
▶ 옮긴이의 말 :
진 제국에서 건너온 방사(도사) 서복의 이야기가 제주특별자치도에 내려오는 까닭은, 서복이 실제로 제주특별자치도로 건너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영정의 감시에서 벗어나 제주특별자치도(침미다례)로 건너온 서복이 침미다례 사람들에게 자신이 폭군(영정)에게 사기를 친 사실과 영정이 인심을 잃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기 때문에 만들어졌을 것이고, 그가 침미다례 사람들에게 진 제국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따라서 영정이 뒤쫓아오지 못할 정도로 안전한, 침미다례보다 더 동쪽에 있는 먼 땅에 대해서 물어보았을 것이라는 사실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가 침미다례에 뿌리내리지 않고 그보다 훨씬 더 동쪽인 곳으로 떠난 사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복은 잔인한 정복전쟁과 토목공사를 일삼고 한편으로는 사치에 빠졌던 진 제국과 영정에게 실망하고 환멸을 느꼈기 때문에, 진 제국과는 다른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을 테고,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진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사느니 차라리 진 제국 바깥으로 달아나서 자유롭게 사는 게 낫다고 여겨 ‘내가 구할 수 있는 젊은 세대를 조금이라도 구하자.’는 생각으로 젊은 남녀 1천 명을 배에 싣고 달아난 건 아닌지.
그 젊은 남녀는 군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서복은 그들을 이끌고 일본열도로 갔을 때 이미 먼저 건너온 경상도/전라도의 고조선 유민들(야요이인들)에게 굽히고 들어가야 했을 것이며, 그는 규슈섬에서 작은 땅만 차지하고 고을나라를 이루어 살다가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그가 데려온 진나라 사람 1천 명은 야요이인들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며, 어쩌면 세월이 오래 흐른 뒤인 제하(諸夏)의 삼국시대에 일본열도 안에 있었던 야요이인들의 소국들 가운데 그들의 후손이 사는 소국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제시하는 것으로 글을 맺는다.
- 음력 3월 16일에, ‘어쩌면 이 시대에도 서복같이 대륙을 달아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아사달이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