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월드컵을 직접 보기 위해 독일에 갈 준비를 할 때였다. 역사의 현장에서 월드컵 응원을 하기 위해서는 좀 더 특별한 유니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대표팀이 입었던 유니폼을 구입하기 위해 고심 끝에 동대문으로 향했다. 비록 16강 진출에 실패했지만 가장 강렬한 경기력을 선보였던 당시 유니폼을 입고 독일에 가 한국 축구를 더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유니폼을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동대문운동장 부근 체육사는 대부분이 현대식으로 바뀌면서 예전 물품을 다 처분한 상황이었다. “1994년 미국월드컵 때 한국 유니폼 있어요?” 이렇게 물으면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그게 뭔데요?”
사진1 : 동대문을 이틀 동안 뒤져 찾아낸 이 유니폼이 나에게는 가장 소중하다.
독일에서 당한 김주성 유니폼의 굴욕
그렇게 첫 날 허탕을 치고 오기가 생겨 다음 날 다시 동대문으로 갔다. 그날 역시 하루 종일 “그런 유니폼은 이제 없다”는 대답만 듣고 낙담하던 순간이었다. 구석에 있는 한 허름한 체육사에 내가 원하던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대표팀 유니폼이 걸려있는 것이었다. 너무나 기쁜 마음에 달려가 주인 아주머니 앞에서 연기를 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 걸레 쪼가리 같은 건 얼마나 해요?” 내가 간절히 이 유니폼을 원한다는 걸 알면 비싸게 팔 것 같아서였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말했다. “이걸 사간다고요? 마침 버리려던 참이었는데. 한 벌에 그냥 5천 원씩 가져가요.” 그렇게 나는 1994 미국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 입었던 빨간색 유니폼과 본선에서 입었던 흰색 유니폼을 만 원 주고 샀다.
과거 조기축구회 아저씨들이 입을 법한 이 유니폼은 속된 말로 ‘짝퉁’이었다. 디자인만 당시 유니폼과 똑같았지 마킹도, 등번호도, 브랜드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좋았다. 집에 와서 유니폼을 세탁하는데 시커먼 땟물이 계속 흘렀지만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다음날 다시 당시 선수들이 유니폼 입은 사진을 뽑아 동대문에 가 마킹을 부탁했는데 체육사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 폰트 없어진지 오래입니다. 아예 폰트를 새로 만들어야 해요.” 결국 폰트를 새로 주문해 5천원 짜리 유니폼 두 벌 마킹하는데 무려 10만 원이 들었다. 태극기까지 달았다. 그렇게 나는 내가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김주성과 서정원 유니폼을 손에 넣었다. 희귀 유니폼을 입고 독일로 가 응원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찼다. 나는 밤새 이 유니폼을 만지고 입고 쳐다봤다.
당당히 이 유니폼을 입고 독일로 향했다. 당시에는 한국 응원단 70%가 등번호 7번이 새겨진 박지성 유니폼을 입고 있던 때였다. ‘J S PARK’이 써 있는 유니폼이 골대 뒤를 가득 채웠다. 나는 이 당당한 김주성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활보하는데 한 한국인 관중이 이런 말을 했다. “어머, 쟤 마킹 오타 났나봐. ‘J S PARK’이 아니라 ‘J S KIM’이야. 창피하겠다.” 내 김주성 유니폼은 졸지에 박지성 오타 유니폼이 됐다. 프랑스전 때는 1994년 미국 월드컵 스페인전에서 극적인 동점골을 넣었던 서정원의 기운을 이어받기 위해 서정원 유니폼을 입었지만 빨간색 유니폼 안 입고 흰색 유니폼 입었다고 여기저기에서 욕을 먹어야 했다. 낡은 유니폼은 아직 우리에게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K리그에도 유행이 있다?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것만 추구한다. 시즌이 지나고 기존 유니폼에서 미세하게 디자인이 바뀐 새 유니폼이 나오면 반드시 이걸 사야한다. 지난 시즌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가는 건 굉장히 유행에서 뒤처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즌에 가장 주목받는 선수의 이름을 박은 똑같은 유니폼이 넘쳐나고 이 선수가 이적하면 이 유니폼은 용도 폐기되기 쉽다. 그렇게 우리는 옷장에 지난 시즌 유니폼을 넣어두고 새로운 유니폼을 찾는다. 새로운 유니폼을 입지 못하는 건 마치 고등학생들이 유행하는 패딩 점퍼를 입지 못해 창피해 하는 것과 다름없다. 아마 올 시즌에도 새로운 유니폼을 구입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K리그 팬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새로운 유니폼을 구입해 구단 재정에 보탬을 주는 것도 좋다. 하지만 나는 지난 시즌 유니폼과 비교해 미세하게 디자인만 바꿔 내놓은 새로운 유니폼보다는 비록 낡았지만 더 의미 있는 유니폼을 입는 문화가 K리그에 형성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구단 재정에 보탬을 주는 건 꼭 유니폼이 아니어도 좋다. 꼭 구단의 재정에 힘을 실어주고 싶다면 유니폼 살 돈을 얹어 좀 더 좋은 자리의 연간 회원권을 끊거나 구단의 다른 용품을 사도 된다. 개인적으로 매 시즌 새로운 유니폼을 사야 한다는 건 K리그 팬들에게는 큰 부담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런 작은 돈이 모여 큰 돈이 되겠지만 솔직히 말해 아직은 K리그 구단에서 유니폼이나 용품 수익으로 구단 재정에 보탬을 줄 만한 곳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낡은 유니폼은 절대 유행에 뒤떨어진 촌스러운 아이템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이런 낡은 유니폼이 더 당당하고 멋지다고 생각한다. 지난 시즌 수원월드컵경기장에 가면 염기훈 이름을 새긴 유니폼이 넘쳐났다. 물론 이것도 좋지만 지금도 수원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는 고종수나 김진우 이름이 박힌 과거 일명 ‘용비늘 유니폼’이 더 폼 나지 않나. 선수가 은퇴하고 지도자가 되는 동안 함께 나이를 먹은 팬들이라면 이 유니폼이 팀에 대한 충성도를 더 높여줄 수 있다. 함께 기쁨과 슬픔을 겪었던 유니폼을 입고 내가 응원하는 팀 경기장에 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설렌다. 스틸야드에 과거 라데 유니폼이 넘쳐나고 울산에서는 김현석의 이름이 박힌 과거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등장하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가.
지난19일 열린 성남의 2012 유니폼 발표회 모습. 이 유니폼도 내년이 되면 유행에 뒤처지는 유니폼이 될 수도, 시간이 흘러 그 가치가 더 빛는 유니폼이 될 수도 있다. (사진=연합뉴스)
역사를 상징하는 낡은 유니폼
물론 이런 낡은 유니폼을 쉽게 구할 수는 없다. K리그에는 이런 문화가 형성돼 있지 않기 때문에 수요가 적다. 하지만 팬들이 의식을 바꾸면 서서히 이런 아름다운 문화가 형성될 가능성도 충분하다. 지난 시즌 유니폼을 입는 게 당장은 촌스러울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이 유니폼도 멋진 추억을 담은 유니폼이 된다. 꼭 지금 낡은 유니폼을 힘들게 구해 입으라는 말이 아니다. 지난 시즌 데얀 유니폼을 사 입은 서울 팬이라면 10년이 흐른 뒤에도 이 유니폼을 입고 당당히 서울월드컵경기장을 누빌 수 있다. 10년 뒤 이 유니폼을 보고 비웃는 이가 있다면 딱 한마디만 하면 된다. “꼬마야, 네가 데얀이 뛰는 걸 봤니? 축구 좀 더 보고 오렴.”
구단이나 연맹 차원에서도 역사를 재조명한다는 취지로 낡은 유니폼 입기 캠페인을 벌이면 좋겠다. 10년 이상 된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을 찾은 이에게는 혜택을 주는 게 어떨까. 이는 자연스레 팬들이 K리그와 구단 역사를 배우는 계기가 될 것이고 우리 스스로 역사를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구단 차원에서 과거 유니폼을 주문 제작해 판매하는 방식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가격이 무척 비싸겠지만 부산 팬이라면 과거 대우 로얄즈 시절 유니폼을 소장하고 싶은 이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설령 단 한 명뿐이라도 이런 팬들을 소중히 대하는 것이 충성도 높은 팬을 만드는 방법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전남 노상래 유니폼과 전북 다이노스 시절 김도훈 유니폼이 탐난다.
스포츠팬들은 자신이 오래된 추억의 경험자였다는 걸 무척 뿌듯해한다. 차범근이 선수로 뛰던 시절에 이를 지켜본 이는 그렇지 못한 세대에게 우월감을 갖는다. “내가 말이야 차범근이 동대문에서 네 골을 넣을 때 그 경기를 봤는데….” 물론 듣는 사람은 별로 안 궁금하다. 하지만 추억의 경험자는 내가 차범근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걸 무척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2002 한일월드컵 당시 이탈리아전을 지켜본 이들은 훗날 다음 세대에게 똑같이 이때의 추억의 자랑할 것이다. 스포츠는 언제나 추억을 먹고 산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외치던 홍수환의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등극 경기가 여전히 팬들에게 회자되고 농구대잔치 시절 스타들이 배 나온 채 경기를 치러도 흥행할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추억의 상징은 역시 낡은 유니폼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유니폼
일본은 이런 문화가 잘 형성돼 있다. 얼마 전 웹서핑을 하다가 너무나 탐나는 유니폼 하나를 발견했다. 1994 미국월드컵 당시 ‘사자머리’로 유명했던 콜롬비아 발데라마 유니폼이었는데 가격이 무려 170만 원이었지만 이미 팔리고 없었다. 호기심에 다른 유니폼도 검색해보다가 정말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우리가 절대 구할 수 없는 한국 유니폼이 일본 경매 사이트에서 판매되고 있었다. 1980년대 한국 대표팀 유니폼은 물론 천안 시절 일화 유니폼과 2002년 당시 포항 이동국 유니폼, 부천SK 골키퍼 김지운이 마킹된 유니폼과 연습용 유니폼 등이 일본 사이트에서 팔리고 있었다. K리그 구단은 1년만 지나도 유니폼 판매를 중단하는데 일본에서는 과거 한국 대표팀과 K리그 유니폼도 여전히 인기였다.
일본의 여러 경매 사이트에는 ‘도화의 비극’이라는 1993 미국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당시 일본 유니폼은 물론 일본 국가대표팀의 역대 유니폼과 1991년 가시마 앤틀러스 유니폼에서부터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과거 J리그 유니폼도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었다. 1996년 터키 국가대표 유니폼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 팔고 있는지 얼굴이라고 보고 싶을 정도로 신기했다. 앞서 설명한 K리그 유니폼 외에도 2000년대 중반부터 나온 K리그 유니폼은 마음만 먹으면 일본 경매 사이트에서 쉽게 구할 수가 있었다. 천안 일화 유니폼은 경매 시작 금액이 무려 30만 원을 호가했다.
일본이 원래 이런 마니아들의 수집 문화가 발달돼 있다고 하더라도 이건 큰 충격이었다. 우리가 구할 수도 없는 우리 유니폼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씁쓸하면서도 아쉽다. K리그 경기장에서 가장 주목받아야 할 이 유니폼들이 일본에서 팔리고 있다는 건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 우리는 이 유니폼들이 일본으로 건너갈 때까지 손을 놓고 있어야 했을까. 이제 우리는 천안 일화 유니폼을 구하려거든 비싼 엔화를 주고 다시 이를 가져와야 한다. 개인적으로 1980년대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구입해 차범근 이름을 새긴다면 속된 말로 ‘간디 작살’일 것 같지만 너무 비싸서 포기해야 했다.
일본 경매 사이트에서 팔리고 있는 1980년대 한국 국가대표팀 유니폼. 한국에도 없는 게 어떻게 일본에 가 있는 궁금할 뿐이다. (사진=일본 옥션)
우리가 잊고 있는 낡은 유니폼의 가치
무조건 새로운 게 좋은 건 아니다. 똑같은 디자인에 똑같은 선수의 이름을 박은 유니폼이 K리그에 넘쳐나는 건 별로 재미가 없다. 내가 가장 감명 깊게 보낸 시즌 유니폼에 가장 좋아했던 선수 이름을 새기고 K리그 경기장을 찾는 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팀을 배신한 선수의 유니폼을 그대로 입는 건 무리겠지만 한 팀에 헌신한 선수는 길이 우리의 마음 속에 남아 있지 않나. 세상이 변하고 사랑하는 이의 마음이 변해도 이 선수의 가치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당시 우리가 열광했던 팀의 가치도 변하지 않는다. 낡은 유니폼에는 참 많은 의미가 내포돼 있다. 유니폼은 낡으면 낡을수록 빛이 나는 법이다. 낡은 유니폼의 가치를 너무 과소평가하지 말자.
지금의 고등학생이 60년 뒤에도 지팡이를 짚은 채 낡은 이동국 유니폼을 입고 전주월드컵경기장을 찾을 때 비로소 K리그는 역사와 가치가 높아진다. 1998년 K리그 플레이오프에서 김병지가 헤딩골을 넣었을 때 유니폼은 팬들이 나눠 갖다가 몇 등분으로 찢어졌지만 이 한 조각이 1백만 원을 호가할 때 비로소 K리그는 역사와 가치가 높아진다. 나는 다가올 쿠웨이트와의 2014 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 3차 예선 경기에 20년 전 서정원 유니폼을 입고 목이 터져라 응원을 보낼 것이다. 비록 5천 원짜리 ‘짝퉁’ 유니폼이지만 나에게는 한 없이 소중한 유니폼이다.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면 새로운 유니폼을 구입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버리자. 낡은 유니폼은 해를 거듭할수록 그 가치가 더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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