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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으로 영어 공부를 하다가 영어 선생님이 이번 주 설교 주제를 물었습니다. 보통 그런 경우가 별로 없는데 제가 회개라고 이번 주 설교 주제가 해외입니다고 답을 하면서 제 마음속에 왜 내가 회개라는 주제로 설교를 잡았을까라는 후회감이 조금 들기는 했습니다. 왜냐하면 참 사람이 자기를 돌아보고 잘못을 돌이키고 뉘우친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인 거예요. 사람의 경고를 받아도 그게 잘 되지 않는 일이고, 심지어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도 회개가 잘 되지 않아요. 근데 안 되는 걸 억지로 설교하는 일은 되게 어려운 일이기는 합니다.
어떤 목회자가 자신의 목회를 돌아보면서 은퇴할 시점에 5가지 참여라는 제목으로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잘못들을 이렇게 회개한 적이 있었어요. 설교 진행을 위해서 제가 이렇게 순서는 좀 바꿨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이렇게 그대로예요.
첫 번째, 조국의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때 아무런 기여하지 못하고 방관자로 살아온 일과 지도하던 청년들에게 행동을 촉구하지 못한 일,
두 번째 마음으로 소외되고 연약한 성도들을 돌보는 목회를 하려 했으나 그들의 눈물과 아픔에 제대로 동참하지 못한 일,
세 번째 바로 살아야 한다고 설교하면서도 죄가 그대로 행하지 못하여 언행 일치의 모범을 보이지 못한 일
네 번째 의도하지 않았으나 목회하는 동안 나 자신의 부주의한 말과 경솔한 행동으로 성도들의 마음을 섭섭하게 했던 소소한 일상의 모든 부덕.
다섯 번째, 올곧게 살아가지 못한 성도들 교회 내에 부유한 기득권층에 대하여 그들이 상처를 받을 것에 두려워해 회개를 촉구하고 제대로 예언자적인 설교를 하지 못한 일
이렇게 다섯 가지를 후회하기도 하고 이렇게 공적으로 회개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이 이후로도 후임의 문제로 인해서 몇 번이나 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래서 함부로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과연 진정한 회개일까라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저는 다섯 번째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저도 아마 천국에 갈 때가 되면 성도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지 못한 일과 그리고 제가 회개하지 못한 일이 가장 후회로 남을 것 같아요. 아직 한참의 시간, 물론 가는 시간은 우리가 아무도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냥 일반적인 사실로 봤을 때 한참의 시간이 남은 지금 이 시점에도 당신이 무엇이 후회가 됩니까라고 말하면 저는 아마 성도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지 않은 것과 나 자신이 날마다 회개하는 삶을 살지 못한 일에 대해서 제가 후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회개한 삶과 회개하지 않은 삶은 너무 본질적으로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인 거예요.
회개한 삶과 회개하지 않는 삶은 신앙의 본질적인 영역에서 너무 많은 큰 차이가 납니다. 먼저는 회개했느냐 회개하지 않았느냐가 구원을 받았느냐 구원을 받지 않았느냐를 결정하기 때문에 회개했느냐는 되게 중요한 질문인 거예요.
두 번째로 회개했느냐 회개하지 않았느냐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구원의 삶을 성도의 삶을 누리게 합니다. 그러니까 회개한 삶과 그래서 죄에서 돌이킨 삶과 회개하지 않는 삶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해서 누리는 정도가 완전히 다르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교회 안에도 많은 비밀을 숨겨놓고 하나님 나라 안에도 많은 비밀을 숨겨놨어요. 근데 이 비밀들은 회개한 사람들이 알고 깨달을 수 있는 비밀인 거예요. 회개하지 않으면 결코 알지 못할 비밀들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에는 많이 있습니다.
어떤 교역자가 목장 교회에 와서 회개하라는 설교를 죄에 대한 설교를 들을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이전 교회 성도들에게 그것을 자랑했다고 합니다.
저는 회개를 선포할 수 있고 회개의 선포 앞에 눈물로 회개할 수 있다면 교회든 성도든 영적으로 최선의 상태, 그리고 최고의 상태에 있다고 봅니다.
만약에 자기 교회가 좋다고 자랑하는데 회개하라는 메시지가 없다면 과연 그 교회가 좋은 교회일까요? 만일 자기 교회 성도들을 자랑하는데 그 성도들이 회개하라는 메시지에 회개하지 않는다면 과연 그 성도는 좋은 성도일까요?
부자일 수 있고 세상적으로 잘 나갈 수 있고, 명예와 지혜를 가진 성도일 수는 있어도 좋은 성도는 아닙니다. 좋은 교회는 회개의 선포가 있는 교회이고 좋은 성도는 회개하는 성도인 거예요.
한 청교도 설교자가 광장에 청중을 이렇게 모아놓고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뭔 줄 아십니까? 바로 죄책감입니다. 참된 행복은 이 죄책감을 벗음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고 말씀을 선포했어요.
그래서 한 젊은이가 죄책감이 과연 죄책감의 무게가 과연 몇 파운드가 됩니까? 이게 우리나라가 아니었어요. 몇 파운드가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물으면서 나는 나는 아무런 죄책감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저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요라고 다시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설교자가 이 청년을 향해서 만약에 시체 위에 400파운드의 무게를 올려놓으면 그 시체가 그 무게를 느낄까요? 느끼지 못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당연히 대답은 정해져 있죠. 그 청년이 그 무게를 못 느낍니다라고 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설교자가 맞습니다. 누군가 자기의 죄책감을 심하게 느끼고 있다면 그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인데 당신은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에 죄책감의 무게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합니다.
400파운드는 180kg 정도 되는 무게예요. 여러분 시체는 이 180톤을 올려놔도 시체는 무게를 못 느껴요. 왜냐하면 죽어 있기 때문에 그처럼 이처럼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은 죄책감의 무게를 느끼지 못해요. 왜요? 죽어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살아있어야만 죄의 무게를 느끼고 그로 인해서 고통스러워하고 결국 회개의 자리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이었고, 해결할 내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어있기 때문에 죄책감이 없는 것입니다. 죄책감이 없는 것 이게 과연 좋은 일일까요? 물론 우리 중에는 정말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아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어딘가에는 아직까지는 본 적은 없지만 어딘가에는 있을지 모르겠죠. 그러나 대부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사람인 거예요. 그래서 죽어 있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보다 회개하는 사람이 훨씬 더 위대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인 거예요. 그래서 회개하는 사람이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는 데 좀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킬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까? 내가 불순종하지 않을까?
물론 이것도 되게 중요하지만 진짜 우리가 좀 집중해야 될 것은 내가 무슨 죄를 지었을까? 에 집중하는 거죠. 내가 무엇을 해결해야 할까 내가 어떤 것을 회개해야 할까에 우리가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로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되게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되게 센 척을 하고 살아가요. 그러나 실제로는 아주 약해요. 문제는 약한데 세상에서만 약하고 그래서 세상 앞에서 무너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고집불통이라는 거예요. 겉모습으로 되게 쓴 척하고 살아가요. 근데 실은 우리는 약한 사람들인 거예요.
근데 가만히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세상에 대해서는 되게 약한 존재로 살아가요. 그런데 막상 하나님 앞에서는 고집불통으로 산 거예요. 하나님 말씀 앞에 자기를 내려놓지 않고 하나님의 경고 앞에 무릎 꿇지도 않고,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회개하지도 않는 고집불통으로 살아갑니다.
여러분 사람이 약하고 소심하면 회개 잘할 것 같죠? 그렇지 않아요 약하고 소심한 것과 회개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여러분과 제가 다 약한 사람이잖아. 연약한 사람이잖아요. 센 척해봐야 다 약한 사람들이에요. 그럼 우리는 날마다 회개하는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야 될 텐데 아니라는 거예요.
신기하게 세상에는 악한 존재로 살지만 하나님 앞에 서면 고집불통으로 산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경고 앞에 돌이키거나 잘 회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은 두려워하지만 세상을 주관하는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힘들고 어려워하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신 하나님은 내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고난은 힘들어 하지만 그 고난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불법이 난무하지만 불법을 그냥 두고 보시지 않는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는 거예요.
이게 우리의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좀 나쁘게 이야기하면 지금 재앙이 한국교회와 또 우리 민족과 전 세계에 쏟아부어지고 있어요. 온갖 종류의 재앙들이 사람들의 목요일 목을 조여오고 있습니다. 인권을 강조하는 나라에 인권이 더 없어요. 종교가 전부라고 말하는 나라의 국민들이 더 지옥 같은 삶을 살아요. 강대국이 결정하는 것들이 미개한 나라보다 더 못한 경우가 수두룩 빽빽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바로 이 땅이 불법을 용납했기 때문인 거예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 살지 않고 불법을 용납했기 때문에 이런 고통이 재앙이 이 땅 위에 이 민족 가운데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법을 회개하고 돌이키는 길은 교회가 사는 길이기도 하고, 민족이 사는 길이기도 하고, 곧 개인이 사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개인 안에 있는 불법도 몰아내야 하고, 교회 안에 있는 불법도 몰아내야 됩니다. 불법이 왜 무서운가 하냐 하면 불법은 재앙을 부르는 소리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은 그 어김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여지없이 재앙이 임했어요. 심판이 임했어요. 그러니까 곧 불법은 재앙을 부르는 소리입니다.
회개가 용서를 부르는 소리라면 회개가 축복과 은혜를 부르는 소리 나면 불법은 재앙을 부르는 소리입니다. 이 땅의 삶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려면 우리 안에 있는 불법을 제거하고 회개하는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회개가 단순히 구원의 문제만 연관되었다고 생각해요. 근데 회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능력이 있어요. 그러니까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이 회개 안에 있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30년 동안 정신과 의사에 의사에게 치료를 받고 받으러 다니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대개 이제 정신과에서는 사람들의 병의 원인을 어떻게 보냐 하면 이 사람들이 경험했던 과거에 고통들이나 충격들이 지금의 이 사람들을 괴롭힌다고 그렇게 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있는 그 상처들을 이렇게 끄집어내서 또 치료하는 것이 일반적인 정신병동에서 하는 일들이에요.
그런데 이 여자는 아무리 그렇게 정신과적으로 분석을 해도 병의 원인을 알 수 없었어요. 폴 트루니라는 상담가인데 이 사람이 기독교인이에요. 그래서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이 여인의 과거를 분석하고 해석할 수 없어서 이제 이 여인과 함께 기도를 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즉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지금까지 지은 죄를 낱낱이 예수님께 다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결박하고 있던 모든 정신병에서 벗어나게 됐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회개가 그를 결박하고 있는 모든 정신적인 문제에서 그를 벗어나게 한 거예요.
여러분 회개에는 능력이 있어요. 단순히 죄를 씻는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치료하는 능력도 있고요. 나라를 회복할 능력도 있고 교회를 회복할 능력도 있어요. 단순히 우리는 회개하십시다고 할 때 한 영역만 눈이 집중해요. 내가 뭔 죄를 지었을까 이 죄를 내가 용서받아야지 그래야 내가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 앉지 않지 여기만 생각을 가져 만약에 회개가 그렇게 우리 안에 용서도 일어나게 하지만 우리를 치료하기도 하고 나의 삶을 세상의 능력자로 살게 한다는 이 회개의 축복을 안다면 사람들이 어디에 집중할까요?
당연히 회개의 축복에 집중하겠죠. 우리 가정이 회복되려면 회개해야 되는구나, 우리 교회가 회복되려면 회개해야 되는구나, 우리나라가 회복되려면 회개해야 되는구나 라는 사실에 더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회개에는 회복의 능력이 있습니다. 영혼을 회복시키고 마음을 회복시키고 육체를 회복시킵니다. 회개는 가정을 회복시키고 회개는 교회를 회복시키고 회개는 나라를 회복시킵니다.
오늘 본문은 에베소 교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교회가 잘한 일도 하시지만 못한 일도 기억하셨어요?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예수님이 언급하실 때 보면 에베소가 잘한 교회가 잘한 일도 다 기억하고 계셨지만 에베소 교회가 못한 일도 기억하고 계셨어요. 그게 4절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 교회는 다른 초대교회에 비해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비해서 칭찬받는 것이 많은 교회였어요. 그런데 처음 사활을 잃어버렸다는 거예요. 이게 어떤 의미일까요?
이 두 가지를 연결시키면 이런 의미가 돼요. 칭찬받는 일을 열심히 하다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거죠. 그러니까 칭찬받을 게 되게 많아요. 많았어요. 다른 교회들에 비해서 그런데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거예요. 이게 잘 안 맞잖아요. 두 개를 이제 연결시켜보면 금방 이야기가 되는 이해가 되는데 칭찬받을 일을 엄청 열심히 하다가 그리고 반대로 회개할 일을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게 됐던 겁니다.
이런 의미인 거죠. 교회를 너무 사랑하다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거예요. 처음 사랑이란 어떤 걸 의미하냐 하면 순수한 사랑 신앙을 처음 가졌을 때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가 회개할 말과 해결할 행동을 한 것으로 보여져요. 그러니까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명령한 것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회개할 말과 행동을 하게 된 거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리잖아요. 그러면 회개할 말과 행동을 하게 되더라고요. 우리가 왜 그리스도의 사랑에 묶여 있어야 하냐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잃어버린 순간 회개와 말과 회개할 행동을 하게 돼요. 만약에 여러분과 저의 삶에 회개할 말이 많고 회개할 행동이 많다는 것은 처음 사랑, 순수한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인 거예요.
에베소 교회가 그랬어요. 칭찬받는 일을 열심히 하다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고, 처음 사랑을 잃어버려서 회개해야 될 말과 행동을 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처음 상활을 잃어버렸다고 예수님께 경고를 받은 것입니다.
사랑이 식으면 회개할 일을 많이 하게 됩니다. 부부 간에도 사랑이 식어지면 서로가 용서해야 될 일을 많이 하게 돼요. 성도와 목회자도 사랑이 식어지면 서로가 용서해야 될 일을 많이 하게 되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사랑이 식어져도 우리가 용서받을 일을 많이 하게 돼요.
그러니까 처음 사랑을 유지한다는 것은 용서받을 일을 많이 하지 않게 된다는 거죠. 왜 처음 사랑의 자리로 돌아가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용서받아야 될 말과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는 회개할 일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봐도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성도들이 꽤 보이기 때문인 거예요. 여러분이 처녀 때 처음 예수님을 믿었던 그 첫 사랑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해서 여러분의 시간과 물질을 기쁨으로 드렸던 그 첫 사랑, 아무리 많이 하나님께 드려도 아깝지 않고 기뻤던 그 첫사랑을 살펴보지 않아도 아마 많이 우리가 잃어버렸을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사랑은 감소해요. 사랑을 유지하기 위한 엄청난 노력이 있어야 사랑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회개 없이 교회를 유지하는 것 이게 어떤 의미냐 하면 교회가 최악이 된다는 거예요. 회개 없이 신앙생활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 신앙생활이 최악이 된다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면 우리는 지금 회개할 말과 회개할 행동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교회 안에도 회개할 말과 행동으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랑의 열정이 씻어지는 거, 사랑의 열정이 없어지는 것을 경계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식은 자리에 항상 마귀의 유혹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교회에 대한 영혼에 대한 신앙에 대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랑이 찢어진 분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분들 중에는 교회를 열심히 하다가 이상하게도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도 있을 거예요. 지금도 여전히 교회를 열심히 해요. 열심히 하다가 잘하는 걸 잘하다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거예요.
에베소교회가 그랬어요. 칭찬받는 일을 열심히 했는데 이상하게 처음 사랑이 없어져 버렸어요.
우리는 죄도 경계해야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랑이 없어지는 것도 경계해야 됩니다. 사랑에서 멀어진 삶이 행하는 것은 결국 죄이기 때문인 거죠.
죄는 우리가 경계해야 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어지는 것도 경계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죄도 결국 우리를 사망으로 이끄는 것처럼 사랑에 의해서 멀어진 삶도 죄를 짓게 만들고 결국 사망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은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5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내게 가서 내 첫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옮기리라는 말씀은 생각보다 좀 무서운 말씀이에요. 제거한다는 거죠. 회개하는 교회가 초대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고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는 거예요. 결국 회개하지 않는 교회에서 성도가 사라지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사시면서 여러분의 죄의 무게를 한번 깊이 느껴보셨습니까?
저는 여러분의 삶이 어렵지 않다. 삶이 쉽다. 죄를 짓지 않고 살아야 된다. 이걸 강조하고 싶은 말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세상에 사는 게 어렵잖아요. 직장으로 사는 게 만만치 않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고 범죄하고 살아가요. 그러니까 그래서 우리는 죄를 짓지 않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회개하는 일에 집중해야 돼요.
우리의 산업 구조나 우리의 사회 구조가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없게 만들어요. 죄를 짓게 만들어요. 저도 긴 시간은 아니지만 직장생활도 해보고 또 군에서도 이게 직업이죠. 5년간 또 군 생활도 해보고 했을 때 정말 직장인들이 죄를 짓지 않고 직장을 다니기는 정말 어렵겠구나.
그럼 우리는 어디에 집중해야 될까요?
죄를 짓지 않는 데도 주의하고 조심해야 되지만 회개하는 일에 우리가 더 집중해야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께서 제거하신다는 거예요. 교회에 있는 것도 내 삶에 있는 것도 어떤 것도 제거하신다는 거예요. 촛대를 옮긴다는 건 제거한다는 의미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장면을 내가 보지 않기 위해서 지금 여러분과 저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인 것입니다.
말씀을 좀 정리합니다. 처음 사랑이 식으면 회개할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회개는 다시 교회와 성도들을 처음 사랑으로 처음 열정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회개인 거예요. 그래서 회개하는 교회가 첫 사랑을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처음 사랑과 열정이 회복되어야 결국 교회도 회복되는 거예요.
우리가 회복된 교회를 만나고 싶잖아요. 우리 교회가 교회 부흥을 위해서 매일 새벽마다 기도해요. 회복된 교회는 우리가 언제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회개할 때 만날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기대하고 하던 그 다니고 싶은 교회 싶은 교회 여러분이 기대하던 만나고 싶은 성도들 언제 만날 수 있을까요?
회개할 때 만날 수 있는 거예요. 딴 교회를 찾아간다고 기도원을 찾아간다고 다른 나라에 간다고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라 회개할 때 그렇게 좋은 교회를 만나고 그렇게 좋은 성도들을 만나게 되는 거예요.
제가 다른 교회를 간다고 좋은 성도를 만날 수 있을까요?
물론 있을 수 있겠죠 뭐 몇 명이나 그러나 진짜 내가 만나고 싶은 성도들은 우리가 회개할 때 만날 수 있는 거예요. 회개함으로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여러분과 저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것은 죄책감이 없다는 겁니다. 죄책감이 없다는 건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의롭다는 게 아니라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거예요. 죄책감이 없다는 것을 울음으로 해석하면 정말 실수하시는 거예요. 죄책감이 없다는 것은 내가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겁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영적으로 죽은 나를 살리는 작업인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가 회복할 때 회개할 때 영적으로 죽은 교회가 살아나는 거고, 성도들이 회개할 때 영적으로 죽은 성도들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여러분을 떳떳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교회의 촛대도 가정의 촛대도 옮기신다고 하셨습니다.
가정에 촛대를 옮기면 그 가정이 없어지는 것이 많아지고, 교회의 촛대를 옮기면 그 교회에 없어지는 것이 많고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 많아지게 됩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교회의 고유의 기능을 하나님이 다 빼앗아 가지고 가시고, 내가 회개하지 않으면 가정의 고유의 기능을 다 빼앗아가요. 그래서 부부가 함께 살지만 날마다 싸워서 지옥과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회개할 때 가정의 기능이 회복되고 교회의 기능이 회복됩니다. 한번 따라하겠습니다.
회개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회개할 때 교회와 성도가 회복이 됩니다. 회개할 때 교회가 교회 역할을 하고 성도가 성도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회개는 회복의 능력이 있어서 영혼을 치료하고 육체를 치료합니다.
우리가 육체가 치료되지 않을 때 회개의 자리에 한번 나가보십시오. 죄책감의 무게를 깊게 느끼시고 회개의 자리에 나가 보시기 바랍니다. 회개의 능력이 있어서 교회가 회복된 일이, 가정이 회복된 일이 개인의 삶이 회복된 일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우리가 100일간의 회교의 기도를 계속 이어가잖아요. 여러분 한번 정말 자기를 잘 돌아보면서 내가 뭐를 돌이켜야 할까, 뭘 회개해야 될까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내가 뭐가 문제일까를 잘 살피고 저와 여러분의 죽어있던 잠자던 영혼이 깨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