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와 조조]
두 사람의 인연은 후한 영제 말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비가 낙양에 갔다가 조조와 만났고, 조조의 고향인 패국에서 함께 군사를 모았다.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었을 때 유비는 조조와 함께 참전했으나, 동탁군과의 교전에서 패배하여 휘하 부대가 와해되자 유비는 조조를 떠나 공손찬에게 의탁했다.[5] 이후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는데, 조조는 서주 대학살로 인한 민심 동요를 수습하고 헌제를 옹립하는 협천자의 명분을 통해 조정을 장악해 나갔다. 유비는 서주 대학살 당시 조조를 직접 저지하려 했고, 헌제의 밀명을 받아 조조 제거를 공모하는 등 반조조의 상징으로 자리잡으려 했으나, 거듭된 패배로 여러 제후들에게 몸을 의탁하는 처지를 면치 못했다.[6] 이 시기만 놓고 보면 개인으로서도, 세력으로서도 조조가 명백히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조조가 최대 강적이던 원소를 무너뜨리고 북중국을 통일한 뒤 형주로 남벌을 단행하면서 천하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듯 보였다. 그러나 끝내 살아남은 유비가 손권과 동맹을 맺고, 손권의 도독 주유와 함께 적벽대전에서 조조군을 대파하며 국면을 뒤집었다. 이 패배로 조조는 천하통일의 기회를 잃었고, 적벽대전은 천하가 삼분되는 분기점이 되었다. 이후 형남과 파촉을 평정한 유비는 한중 공방전에서 조조와 정면으로 맞붙어 승리를 거두었고, 그 기세를 몰아 한중왕에 등극하며 독자적인 세력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했다.
말년의 조조는 관우의 북진을 위협으로 느껴 천도를 논의할 정도였으나, 사마의의 헌책을 받아들여 손권과 연합함으로써 관우를 격파하고 형주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유비는 관우의 복수를 명분으로 오나라 원정에 나섰으나, 이릉대전에서 화공에 의해 대패하고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결국 조조와 유비의 패권 경쟁은 어느 한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막을 내렸으며, 두 사람의 후예들인 조씨 일가와 유씨 일가 모두 중국 통일의 주역이 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