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군학’이 아니고, ‘안양 해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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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호에 이어서> 그럼에도 ‘노기욱’은 ‘揮里,
仇未里,群鶴里’를 한 마을로 묶어 ‘群鶴 군영구미’로 바로 결부시켰다. 그 지역이 나오는 古地圖를 보면, ‘群鶴’을 특별한 浦口 지역으로
표시하지 않고 있다. (앞서의 지적대로, 현 ‘군학’의 ‘구미영성머리’는 ‘구미’ 浦口가 아니라, ‘龜尾’ 돌출지형에 불과하다. 또 ‘군학’
마을 안쪽까지 올라가 보면, 단지 바다를 끼고 있을 뿐, 내륙형 농촌 특징이 두드러진다)
4)앞 사정과 연관되지만, ‘옛 조선 후기
地圖’ 내역도 그 유력한 반증 자료가 된다. ‘漕運倉’이 있었던 ‘안양 海倉’은 거의 모든 地圖에 표시되며, ‘船所’까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보성 群鶴’쪽은 대부분의 地圖에 어떤 浦口 표시조차 없다. <해동여지도.1777~1787>,
<청구도,1834>,<대동여지도,1861>, <장흥도호부지 지도,1871>, <전남의 옛
지도,1994> 등에도 한결같이 그러하다.
5)우리 <장흥읍지 정묘지,1747년>에서도 근거기록 여부를 검토할
수 있다. 앞서 말한대로 ‘안양 海倉’은 물론이고 ‘보성 群鶴’ 역시 원래는 長興府 관할이었다. <정묘지 장흥읍지>에도 ‘안양방
海倉’과 ‘회녕방 群鶴’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안양방 海倉’에는 ‘倉庫, 兵船, 船所, 人員’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곡(稅穀) 수송이라는 국가적 사무를 위한 ‘漕運倉’이니 ‘시설’과 ‘관리’가 없을 수가 없다. 그러나 당시 ‘회녕방 群鶴’쪽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으며, 그저 보통 마을에 불과했다. 혹자가 왜곡하는 식으로 <장흥 정묘지>에 ‘群鶴 = 군영구미’라고 기재된 내용은 전혀
없다.
6)또한 ‘논란되는 해당 지역의 口傳 傳承’ 여부도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群鶴’이 '’군영구미’라면, 거기에서
1泊을 하신 忠武公에 관한 어떤 傳說이라도 남았을 것. 그러나 ‘보성 群鶴'’ 마을에 ‘忠武公이 하룻밤 잠을 주무신 곳’이라는 口傳 전승도 전혀
없다. (이 지적을 듣고 이제 곧 보성 사람들이 그런 장소를 또 만들어낼지 모르겠다) 2008년에 ‘群鶴’ 현지를 방문하여 보니, 그들
주민들은 ‘충무공 忠자’도 못 들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보성군지>등 寶城쪽 기록에도 그런 사정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寶城人들 스스로 ‘群鶴’을 ‘군영구미’라고 불러 본 일이 없고, 그런 기록도 없다.
7)나아가 <난중일기>
내용과 해당 現場 간에 地理的 사정의 부합 여부를 따져야 한다. 忠武公이 그에 앞서 먼저 들린 ‘白沙汀’에서 ‘보성 群鶴’ 마을은 아주 가깝다.
갈 길 바쁜 忠武公께서 굳이 가까운 옆 마을 ‘群鶴’에 더 들릴 필요가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白沙汀’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群鶴’쪽에
사람을 보내거나 불러 살피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안양 海倉’은 ‘白沙汀’에서 꽤 떨어져 있는 거리이다. 또 거기에는 ‘漕運倉’이
있으니, ‘軍糧 확보’ 차원에서 필히 직접 확인해야만 하는 곳이리라. 그런데 <日記>에는 ‘당시의 시간적 공간적 거리와 상황을
시사해주는 부분’이 남아 있다. “군영구미에서 출발하여 ‘늦은 아침(晩朝)’에 ‘회녕포’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만약 ‘보성 群鶴’을
‘군영구미’ 출발지로 전제하면, 몇시간 안에 ‘장흥 회진’에 이르기는 불가능하다. 반면에 ‘안양 海倉’에서 말을 타고 가는 길이면 아침 늦게라도
‘장흥 회진’에 충분히 도착 가능하다. 제반사정을 종합해보면, ‘안양 海倉’은 당시의 상황맥락에 부합하지만 ‘보성 群鶴’은 전부
배치된다.
오늘 글의 첫 쟁점,’군영구미’ 부분에 대한 결론이다. 忠武公께서 ‘장흥 會鎭’에 오기 직전에 들린 ‘군영구미’는
‘보성 群鶴’이 아니고,’안양 海倉’이다. 그 당시에 ‘群鶴’에는 ‘軍營, 倉庫, 監色’등이 없었으며, ‘구미 浦口’ 지형도 아니었다. 반면에
‘안양 海倉’은 ‘軍營, 倉庫, 監色’등이 있었으며, ‘구미 浦口’ 지형에 해당한다.
‘장흥의 감관 색리가 창고에서 쌀 도둑질을 할
상황’이 ‘안양 海倉’은 가능하나 ‘보성 群’은 불가능하다.<난중일기>에 나오는 ‘軍營仇未’ 포구 지칭과 ‘보성 群鶴’의
‘구미영성(龜尾營城)머리’는 부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노기욱’은 ‘휘리, 구미리, 군학리’ 여러 마을을 함께 싸잡아 ‘群鶴
軍營구미’를 따로 만들어냈다. ‘노기욱, 이훈’ 등 논자들은 ‘안양 海倉’에 전적으로 무지했거나, 아니면 ‘안양 海倉’을 일부러 외면하였다.
忠武公의 水軍再建路는 ‘~백사정 ~ 안양 海倉 ~(용산,관산)~ 會鎭 회녕포'로 정리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니 <水軍再建路
표지판>의 ‘군영구미’는 ‘보성 群鶴’에서 ‘장흥 안양 海倉’으로 고쳐야 백번 옳다. 네번째 논점, 이번에 새롭게 유발된 쟁점,
‘향선(鄕船) 移動說’을 검토한다. 오늘 글의 두 번 째 쟁점이다. ‘노기욱, 이훈’ 등이 주장하는, ‘群鶴 ~회녕포(회진) 향선 移動說’을
살펴본다. 그들이 ‘군영구미’로 '’보성 群鶴’을 고집하다보니, 급기야는 ‘鄕船 移動說’로 비화되고 말았다. 그들은
<난중일기>와 그 日記를 남긴 ‘忠武公 당신'’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1)우선, 그들은 <난중일기> 原文
記錄에 충실한 해석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忠武公 당신께서 “배를 타고 회녕포(會鎭)으로 이동했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난중일기> 原文 記錄 자체에는 ‘海路’ 여정 또는 ‘鄕船’언급 자체가 없다. 그럼에도 “배를 타고 장흥 會鎭에 도착했다”고
‘노기욱, 이훈’등이 함부로 비약 단정할 수 있을 일인가? 忠武公은 평소 세심하다할 정도로 꼼꼼한, ‘자기 방어적 記錄을 남긴 남자’이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당했기에 자신의 처신 행적에 관하여 기록을 남기는 일이 체질화되었던 분이다. (<난중일기>를 다시
확인하시라, 최고지휘관에 걸맞지 않게 소심 세심한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니 ‘군학~회진 鄕船 移動’이 실제의 事實이라면 忠武公께서 그
기록을 안 남길 리 없다. 자신이 직접 승선하여 이동한 ‘鄕船의 海上義兵 신원, 동행 鄕船 규모’까지 남겨 두었을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忠武公의 행적은 <난중일기>라는 1차 史料 原文에 충실하게 해석하여야 한다. ‘배를 타고 이동했다’는 당시 기록이
없는데, 어찌 ‘배를 타고 갔다’고 훗날에 확단한다는 말인가? 참 다행스럽게도, 忠武公은 그 반박거리 하나를 <日記>에 남겨두었다.
‘白沙汀에서 말을 쉬게 하였던 일’, ‘到白沙汀 歇馬(헐마)’ 표현을 해 놓으신 것이다. 바로 ‘그 휴식을 취한 歇馬 軍馬’를 타고 忠武公은
신속하게 ‘장흥 회진’으로 이동하셨던 것이리라.
2)백번 양보하여, 鄕船이 있었을지언정 忠武公께서 먼저 승선 거부하였을 것이다.
약속된 ‘배설’의 水軍 전함이 도착을 아니 하였는데, 최고지휘관이 私船 鄕船에 쉽게 오를 수 있겠는가? 총체적 戰況 파악이 아직 안되었는데,
최고지휘관이 무모하게 漁村 鄕船에 탈 수 있다는 말인가? 최고지휘관이 鄕船 한척 덜렁 얻어 타고 이동하다가 기습을 당하거나 사고가 나면 어찌
되는가? (당시 ‘배설’이 약속을 어기고 배를 대지 아니한 까닭에는 倭船의 기습 염려도 포함될 것이다. ‘배설’이 칠천량 패전에서 도망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안쪽 바다 깊숙이 안 들어갔기 때문이다.) 또, 설령 10여척 鄕船이 왔더라도 忠武公은 “빨리 큰 바다로 빠져 나가라”고
지시했을 것이다. 항아리 병목으로 막혀있는, 득량만 內海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엔 倭軍 위치가 어디인지도 전혀 모르고,
‘피난 쓰나미’ 현상으로 위급한 시점이었다. 나중에 ‘장흥 회녕포(會鎭)'’에 가서도 “바다가 협소하다”는 이유로 사흘 만에 떠났던 것
아닌가?
3)또한 忠武公의 水軍再建 旅程에 비추어 보면, ‘보성 群鶴’에 10여척 鄕船이 모일 리도 만무하다. 忠武公은 그 전날
오후에 ‘군영구미’에 도착하여 1泊을 하고 다음날 아침에 일찍 그 곳을 떠났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맞추어 鄕船 10척이 득량만 內海 ‘보성
群鶴’에 모일 수 있다는 말인가? (10여척이 일시에 ‘군학’에 모일 정도인데도, 앞서의 ‘장흥 감색’이 감히 쌀을 훔치려
했겠는가?) 가까운 安養 출신의 ‘마하수’ 父子야 그렇다쳐도, 다른 鄕船들은 ‘회녕포’에서 기다리면 될 일 아닌가? 현실적으로 長興이나
인근 鄕船들은 ‘장흥 회진 회녕포’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또한 '’노기욱’이 ‘群鶴 군영구미’에 모였다고 제시하는 ‘鄕船
참여자’들은 차후 명단에 불과하다. 차후 後代에 작성된 2차 기록 <호남절의록>등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 나아가 그
참여자 명단 의미를 제대로 가감하여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백진남’이 장흥사람 입장에서 장흥 땅 장흥 바다에서 忠武公을 바로
만난 것이 아니다. 그는 海南 옥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海南사람이며, 단지 그 부친 ‘백광훈’이 長興 안양 출신일 뿐이다. ‘백진남’은
海南 땅에서 忠武公 이순신의 측근 참모 역할을 하면서 보좌했던 것이다.(‘백광훈, 백진남’을 두고 장흥 쪽은 장흥사람으로, 해남 쪽은
해남사람으로 취급하는 기록이 많다.)
4)그렇다면 그들 ‘노기욱, 이훈’은 왜 갑자기 ‘향선(鄕船) 移動설’을 들고 나온 것일까?
그 까닭은 ‘보성 群鶴’과 ‘장흥 會鎭’간의 시, 공간적 거리의 불일치를 그들도 눈치 챘기 때문이다. ‘群鶴’에서 출발하면
<난중일기>에 적힌 대로, 늦은 아침(晩朝)에 ‘會鎭, 회녕포’에 도착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궁여지책 편법으로 ‘鄕船 移動설’을
들고 나온 것이다. ‘群鶴’에서 뱃길이라면 불과 몇 시간 안에 ‘會鎭’에 도착할 수 있다는 논리를 찾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보성 群鶴’쪽을 ‘군영구미’로 고집하다가 유발된, 그들의 넌센스에 불과하다. 그들은 추가적으로 그 옆 浦口, ‘안양 海倉’에 유념하여 그
가능성 여부를 더 살펴보아야 옳았다. ‘안양 海倉’이라면 ‘쉬고 난 軍馬’를 부지런히 달려, 늦은 아침이면 ‘장흥 회진’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 /다음호에 계속 그럼에도 그들 주장에는 ‘안양 海倉’을 지목하여 진지하게 검토한 흔적이 전혀 안 보인다.
‘노기욱, 이훈’에게 물어본다, 도대체 水軍 再建의 뜻이 무엇인가? 軍糧과 軍器, 兵力, 兵船 등을 우선적으로 수습해야 하는 것이 水軍 再建의
첫 일 아닌가? 그런 水軍 再建길에 나선 忠武公이 ‘軍糧이 있는 안양 海倉 漕運倉’을 외면하며 지나칠 리 있겠는가? 기실 ‘배설’을
‘군영구미’로 오도록 약속한 까닭 하나도 ‘안양 海倉’의 軍糧을 확보할 의도였을 것이다.
5)<日記>原文 해석상의 작은
부분 하나를 노파심에서 조언한다. 그들은 혹 “晩朝 直會寧浦” 문구에 집착하여 ‘군학’에서 ‘회녕포’로 直行했다고 비약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때 ‘直’은 ‘다른 데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忠武公은 ‘보성 열선루’에서 ‘白沙汀’에 갈 때도 “直到 長興地
白沙汀”이라고 표현하였었다. 忠武公은 ‘안양 海倉 군영구미’에서 출발하여 다른 곳을 안 들리고 바로 “直會寧浦”했던 것이다. ‘장흥읍 장흥부사
관아, 장흥읍 벽사역’ 등으로 안 빠지고 바로 ‘장흥 회녕포’로 南行했다는 뜻이다.
이제 마무리한다. ‘보성 群鶴’을 ‘군영구미’로
간주하는 것은 객관적 事實, 史實과 상관없는 억측에 불과하다. ‘보성 群鶴’에서 향선을 타고 '’장흥 會鎭’으로 뱃길 直行을 했다는 것은 가히
코미디 수준이다. 매사에 ‘公私의 합리적 분별과 기록 정신에 투철했던 忠武公의 성격’을 그들은 몰라도 한참 모른다. 忠武公이 水軍再建 여정에
들리신 ‘군영구미’에 이미 폐진된, ‘群鶴’은 결코 해당될 수 없다. 조선시대의 ‘漕運倉’으로 운영되던 '’안양 海倉’이 가장 적격이고
<日記>내용에 합당하다. “장흥 監官 色吏가 쌀 도둑질을 하고 있더라.”는 <日記>상황에 ‘海倉’이 일치하는 것이다.
‘당시의 행군旅程, <장흥 정묘지>,地理的 사정, 관련된 地圖, 語源 고찰’ 등에 비추어봐도 그렇다.
다만, 안타깝다.
장흥사람들은 잘 알고 있듯, 간척사업으로 그 ‘안양 海倉’ 포구기능이 통째로 사라져 버렸던 것. 이른바 ‘鄕船 移動說’을 작출한 ‘노기욱’ 등은
아마 ‘안양 海倉,漕運倉’ 자체를 몰랐을 것으로 판단된다.
1914년에 ‘회녕면, 천포면, 웅치면’이 장흥군에서 보성군으로 일괄
이속되었다. 장흥의 ‘안상, 안하면’은 ‘安養面’이 되었으며, 그 무렵 안양면 소재지가 바로 ‘안양 海倉’이었다. 또한 일본의 헌병파견소가 바로
海倉里에 들어설 정도로 역사적으로 비중이 있는 포구였다. 그 ‘안양 海倉’ 浦口가 없어지고, 그 일부가 육지 마을로 남아 있는 오늘 현실인
것이다.
한 가지 첨언한다. ‘이순신 熱風’이 거센지라 ‘전공에 무관한 官給 프로젝트’라도 그 나름 열정으로 일할 수 있겠다.
出版 市場의 ‘이순신 매니아들’을 겨냥하여 오늘도 많은 책들이 부언허언하며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鄕土史 鄕土現場이 얽힌 문제라면, 外地人들은
모름지기 더 신중하게 접근하여야 한다. 現地 실정을 제대로 모르고서 자신의 눈썰미에 의지하는 外地人 전문가들이 범하는 실수가 꽤 잦다. 어느 날
책 몇 권을 읽었다고, 어느 날 현지답사 한번을 한다고 , 마치 신내림을 받듯 해결할 수는 없다. 그들은 과연 ‘반곡 정경달’과 長興의 義兵,
海上義兵들을 어느 정도로 알고 있을까? “선산부사와 함양부사를 지낸 ‘정경달’은 이순신에게 寶城하면 떠오르는 인물이다”고 말할
정도다.
“전령을 받고 ‘마하수, 백진남, 정명열, 김안방, 김성원, 문영개, 정경달’ 등이 배를 몰고 왔다”고 말할 정도이다.
‘장흥’ 개념이 없는, 그들의 몽매함과 단순함과 뻔뻔함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아울러 늘 뺏기고 밀려다니면서도 먹고사는 데만 바쁜, 이 못난
장흥후손으로서 참으로 면목이 없다.
‘반곡 정경달, 마하수 부자, 초계 변씨 12형제들’을 비롯한 여러 장흥 선조 분들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우리 고향 장흥 분들에게 제안 드려봅니다. '’안양 해창’에는 ‘水軍再建路 표지석, 안양 海倉 유래’을
무식하지 않게 품위 있게 정성껏 만들어봅시다. ‘장흥 회녕포 회진’에는 ‘三道水軍統制使 취임상징물’과 ‘상유십이 미신불사(尙有十二 微臣不死)
기념석’, ‘장흥海上義兵 추모 명단석’ 등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더 나아가, ‘장흥과 보성’ ‘장흥과 강진’에 관하여 ‘가칭
문화교류접촉사’ 세미나를 열어보면 어떨까요?<끝> <장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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