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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축복에 의해 뒤바뀐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장자권이 주는 복음적 의미
(부제 : 야곱이 손을 엇바꾸어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한 사건의 구속사적 의미)
성경 : 창세기 48:1-22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 요셉이 그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아버지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그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이 글은 목회자들의 설교와 성경연구를 돕기 위해 일반적이고 기초적인 내용들은 생략하였기에 일반 신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천국가는 방주 대표 김석숭목사-)
온 세상에 임한 기근으로 인해 온 가족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떠나 아들 요셉이 총리가 되어 다스리는 애굽 땅으로 이주해 가서 살던 야곱은 이제 147세의 나이가 되었다.
자신의 죽을 날이 가까웠음을 안 야곱은 요셉을 불러서 자신을 애굽에 장사하지 말고 조상들의 묘지가 있는 가나안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열두 아들을 불러 축복했다(창 49장). 열두 아들에 대한 야곱의 축복은 훗날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열두 지파를 통해서 그대로 다 성취되었다.
야곱은 147세의 나이로 애굽 땅에서 죽었고, 요셉은 야곱의 유언대로 아브라함과 이삭이 묻힌 가나안 땅의 마므레 앞 막벨라 굴에 야곱을 장사하였다(창 50:13).
그런데 야곱이 죽기 전에 한 일이 또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오늘 성경 본문에 기록된 요셉의 두 아들을 향한 장자권 축복 사건이다.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장자)와 에브라임(차자)은 요셉이 애굽에서 결혼하여 낳은 아들들이다.
야곱은 죽기 직전에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요셉을 불러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삼았다. 자기 손자를 양자로 입양한 셈이다.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 곧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엇바꾸어 축복하는 이상한 축복을 하였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빼앗아 자기 아들로 삼은 것도 이상한데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의 순서를 바꾸어 축복한 것이다.
다시말해서 야곱의 축복으로 인해 형과 동생이 뒤바뀐 것이다.
야곱의 축복으로 인해 그 후로는 족보에 형 므낫세는 차자로 기록되고, 동생 에브라임이 장자(맏아들)로 기록이 되는 것이다.
야곱의 축복은 곧 믿음의 사람들의 대를 잇는 장자권(상속권) 축복을 의미한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눈이 어두워서 실수한 줄로 알고 아버지여, 장자와 차자가 바뀌었으니 오른손을 므낫세의 머리에 얹고 축복해 달라고 말했다.
당시에 오른손을 얹음은 곧 장자의 축복을 의미한다.
그러나 야곱은 나도 안다, 나도 안다를 반복하며 자기 뜻대로 손을 엇바꾸어 X자로 축복하였다.
결국 야곱의 축복에 의해 요셉의 두 아들은 야곱의 아들이 되었으며, 또한 장자와 차자의 순서가 바뀌어 동생 에브라임이 장자권자(상속자)가 되었다.
야곱의 축복이 중요한 이유는 야곱의 12아들이 출애굽 사건 후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는 12지파가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에브라임 지파가 가나안 땅 중에서도 중심지인 세겜 땅을 차지하였고, 훗날 솔로몬 왕이 죽은 후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리될 때 에브라임 지파가 북이스라엘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지파가 되었으며, 이후 에브라임은 곧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손을 엇바꾸어 축복한 사건은 해석이 어려운 난제다.
야곱이 두 손자를 자기 아들로 삼았다?
형보다 동생에게 장자권 축복을 하였다?
야곱에 의해 요셉의 두 아들의 장자권이 바뀌었다?
야곱의 열두 아들에서 요셉은 빠지고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들어갔다?
야곱의 아들이 열세 명이 되었다?
야곱의 이상한 장자권 축복 사건은 사실 성경의 여러 난제들 중 하나다.
야곱으로 인해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엇바뀐 축복 사건은 목회자들이 설교의 주제로 삼기가 어려울 정도로 난해한 이야기다.
그래서 요셉의 두 아들에 대한 야곱의 장자권 축복 사건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마다 그 해석이나 견해가 다양하다.
147세로 나이 많은 야곱의 실수인가? 아니면 차별적 사랑에 의한 의도적인 행동인가?
더 나아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특별한 목적을 가진 행동인가?에 대한 여러 논쟁이 있다.
성경은 야곱이 죽을 때에 한 행동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분명하고 확실한 믿음에서 나온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
히브리서 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따라서 야곱의 축복 행위를 나이로 인한 단순한 실수나 개인적 의도에 의한 것으로 보아선 안된다.
야곱이 비록 나이 늙어 눈은 보이지 않았으나 분명히 죽는 그 순간까지 지팡이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하였으며 또한 믿음으로 자신의 열두 아들과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한 것이다.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여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애굽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인 아스낫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창 41:45).
혈통을 중시하는 히브리인(유대인)에게 있어서 그들의 믿음의 조상 요셉이 이방인과 결혼하였다는 사실과 요셉의 두 아들에게 이방인의 피가 섞었다는 것은 훗날 이스라엘 지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논란의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고 축복함으로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동일한 상속 권한을 부여받게 한 것이다.
야곱의 축복은 훗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에게 가나안 땅을 분배하게 하심으로 그대로 성취되었다(신 34:1-3, 수 16장-17장).
따라서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에게 행한 축복은 단순한 개인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특별계시적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성경에는 야곱의 장자권 축복 뿐만 아니라 수많은 기적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한 탄생과 부활과 승천 등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이성과 지식으로는 쉽게 믿어지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많다.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성경의 난제들 곧 소위 성경에 감추어진 비밀들을 해석하고 설교함에 있어서 대부분은 다음의 셋 중 하나다.
첫째는 인간의 이성과 지식으로 이해하려 하지 말고 무조건 성경에 기록된대로 믿고, 주의 종들이 가르치는 대로 믿으라는 문자주의적이고 초보적인 해석과 적용이 있다.
둘째는 목회자 자신의 지식과 역사적 자료들과 신학적, 과학적 온갖 지식들을 동원하여 신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지식중심의 지나친 확대해석과 적용이 있다.
셋째는 은사주의나 종말주의 등에 치우친 잘못된 해석과 이단들과 사이비 교주들이 지나치게 풍유적(알레고리)이고 영적으로 해석하는 자기 편향적인 해석이 있다.
세 종류 모두 성경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난 잘못된 방법이며 사도 바울과 종교개혁자들이 가르친 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거리가 멀다.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해석하라.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삼고, 또한 장자와 차자를 바꾸어 축복한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가?
성경에 대한 다양한 해석 방식들이 있듯이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바꾸어 축복한 사건 역시 신학자와 목회자 마다의 다양한 관점이 있고 또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야곱 자신이 아버지 이삭이 눈이 어두운 상태에서 형 에서에게 줄 장자권 축복을 가로챈 사건을 떠올리거나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주어지는 장자의 축복(상속)이 소중함을 각인 시키는 사건으로 해석한다.
신앙적으로는 믿음의 사람들을 비롯하여 오늘날 우리의 신앙과 삶에 이르기까지 축복과 저주, 성공과 실패가 뒤바뀌는 인생역전의 모델과 거울로 적용하기도 한다.
신학적으로는 야곱의 장자권 축복 행위를 성경에 기록된 손을 얹고 축복하는 최초의 안수 행위로 본다. 나아가 율법 아래서 안수를 통한 죄의 전가 및 치유 또는 성령의 능력이나 은사의 전달 및 주의 종을 통한 축복기도의 근거로 삼기도 한다.
더 나아가 야곱의 장자권 축복 행위를 근거로 일부 은사주의자들은 특별한 축복과 안수기도의 능력을 주장하거나, 부모가 자녀들에게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지혜와 복을 주신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한 해석이나 적용은 성경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난 문자적 신앙이며, 주의 종들이 영적 어린아이 신앙이나 초보 신자들을 자기 뜻대로 부리는 수단으로 이용하거나 심지어는 이단들과 거짓 종들의 미혹의 도구로 악용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일부 목회자들 중에는 창세기에 기록된 장자권 싸움과 축복을 통해서 형제들의 장자권(상속권, 서열)이 바뀐 것을 문자 그대로 육적인 상속분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야곱의 장자권 축복 사건을 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깨달아야 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해석한다는 것이란 성경의 모든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구원역사로 보고 해석하고 적용함을 의미한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 곧 하나님의 의도에 맞게 해석하는 것이다. 물론 완전한 해석은 없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비롯하여 야곱과 요셉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는 이미 사도 바울과 종교개혁자들이 그 구체적인 해석 방법을 다 제시해 주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아담이 오실 자(메시야)의 모형이듯이(롬 5:14),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 등도 모두 장차 오실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예표적 인물이다.
동시에 아담 이야기나 야곱 이야기나 요셉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한 목적은 범죄하여 타락한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역사를 증거하고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과 종교개혁자들과 개혁주의 신학에 의하면 성경66권의 주제와 목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를 증거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24:44-45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디모데후서 3:15-17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
고린도후서 3:14-16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마틴 루터(Martin Luther) :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다. 성경을 따면 그리스도의 피가 나온다.”
*존 칼빈(John Calvin) : “성경은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위한 목적으로 읽어야 한다. 누구든지 이것을 외면하면, 평생 학문에 힘써도, 결코 진리를 알지 못할 것이다.”
*서철원박사(전 총신대 신대원장) : “구약은 그 전체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가르치고 있다. 전혀 그리스도가 언급되지 않는 부분들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기록되었고 그리스도 때문에 기록되었다. 다 그리스도 출현의 준비이다. 전 구약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구원이다. 그리스도 없이 구약을 읽으면 율법을 구원의 길로 삼는 율법주의만 나온다.”(교의신학서론)
성경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구약성경은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고, 신약성경은 오신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의 역사라면, 요한계시록은 다시 오실 예수님에 관해 증거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야곱 이야기도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깨달아야 한다.
야곱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구원의 복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로 해석되고 깨달아 믿어야 한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의 아들로 삼고 또한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바꾸어 장자권 축복을 한 사건도 본질적으로는 오실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역사를 위한 것이다.
다시말해서 단순히 야곱의 가정사나 요셉의 두 아들의 장자권이 바뀌는 사건으로만 보지 말고 넓은 의미에서,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보아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세기에 대한 구속사적 이해가 필요하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향해 손을 엇바꾸어 축복한 사건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창세기 전체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창세기는 성경66권 전체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의 서론(시작)에 해당한다.
창세기에는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타락이 기록되어 있고, 동시에 메시야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약속과 소망이 계시되어 있다.
창세기에 기록된 모든 이야기들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역사의 진리가 감추어져 있다(골 1:26-27).
창세기를 바로 이해하는 열쇠 중 하나는 바로 믿음의 사람들의 대(代)를 잇는 족보(계보) 이야기다.
창세기는 믿음의 사람들의 일생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의 중심 인물은 아담, 아벨, 셋,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 요셉이다.
창세기에 기록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가 장차 오실 메시야의 조상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예표다.
동시에 믿음의 사람들을 둘러싼 모든 이야기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주제가 있다면 바로 형제들간의 장자권(상속권) 싸움이다.
믿음의 사람들의 가정을 보라.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싸웠다.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이 노아의 축복과 저주로 인해 두 종류로 나뉘었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이 싸웠다.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이 싸웠다.
야곱의 10명의 아들들이 11번째 아들 요셉을 죽이려했다.
그 모든 싸움의 배경에는 바로 장자권 축복이 있는 것이다.
그 장자권 축복을 쟁취한 자들이 믿음의 사람들의 대를 이어 족보에 그 이름이 기록되었고, 그 믿음의 대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 땅에 탄생하신 것이다(마 1장).
창세기에 기록된 믿음의 여인들 이야기의 중심에도 장자권이 있다.
믿음의 여인들의 공통점은 바로 장자권자(상속자)를 낳았다는 것이다.
사라가 낳은 이삭, 리브가가 낳고 양육한 야곱, 레아가 낳은 유다, 라헬이 낳은 요셉이 바로 대표적인 장자권자들이다.
사라와 하갈, 레아와 라헬 등 두 여인들의 싸움은 바로 서로 먼저 장자권자를 낳거나 또는 자기가 낳은 아들을 상속자로 만들기 위한 싸움인 것이다(갈 4장).
결국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와 관련하여 가장 강조되는 것은 바로 믿음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형제싸움 곧 장자권 싸움이다.
구약시대의 장자권은 한 부족의 족장권(권세)이요 제사장권이요 기업의 상속권이다.
구약시대 믿음의 사람들의 장자권은 곧 메시야가 오시는 길(족보)이다.
구약시대의 장자권은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권이요 천국 축복의 모형이다.
그러므로 야곱의 장자권 축복을 단순히 육적인 상속분쟁으로 보거나 인생의 운명이 바뀌고 역전되는 교훈으로 보아선 안된다.
히브리서 12:22-24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총회)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성경은 구원받은 자들의 천국에서의 모임을 장자들의 총회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엇바꾸어 축복한 사건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적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야곱이 ‘나도 안다, 나도 안다’고 하면서 손을 바꾸어서 오른손을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장자 므낫세의 머리에 얹어 축복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절대주권 아래 미래에 될 일을 위한 계시적이고 예언적인 행동인 것이다.
그러한 야곱의 계시적 행위를 오늘날에 목사의 안수기도나 부모의 자녀에 대한 축복기도로 해석 및 적용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잘못된 문자적 해석임과 동시에 성경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이요 더 나아가 성도들의 신앙을 영적 어린아이 취급하는 것이 됨은 물론 신자들로 하여금 거짓 종들의 안수행위에 미혹당하게 할 위험성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야곱과 요셉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은 장차 오실 메시야를 위한 것이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삼고, 손을 엇바꾸어 축복한 사건은 마치 이사야 선지자나 에스겔 선지지자 등의 예언과도 같은 의미의 특별계시적 예언이다.
하나님의 신(성령)이 야곱을 감동시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게 하였고,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들을 성령으로 감동시켜서 기록하게 하심과도 같다(딤후 3:16, 벧후 1:21).
야곱이 살던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기록된 성경이 없던 시대요 또한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이다.
종교개혁자들에 의하면 성경66권이 완성되기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꿈과 환상과 기적과 천사와 선지자들 들을 통하여 자기의 뜻을 계시해 주셨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끝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책인 성경66권이 완성된 후에는 그 모든 특별계시의 방법들이 사라지고, 끝났고, 중단되었다.
따라서 야곱의 장자권 축복 행위 역시 특별계시적 차원에서 이해함은 물로 초림 예수님의 구원역사의 성취로 그 모든 역할과 사명은 끝났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야곱의 안수를 통한 축복기도 행위를 신약시대에 그대로 따라서 행하는 것은 성경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난 것이며, 기독교 2천년 역사 속에서 모든 이단들과 사이비 종교들이 교회와 신자들을 미혹한 방법임을 알아야 한다.
만일 오늘날에 어떤 목사가 자녀나 신자들에게 안수기도를 하면서 자신이 선포한대로 그대로 다 이루어진다고 말하거나 그대로 믿는 신자들이 있다면 스스로 자기 믿음을 점검하고 시험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를 계속해서 하다가는 성경대로 믿고 행하고도 버림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고후 13:5).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향해서 손을 엇바꾸어 축복한 장자권 축복 사건은 바로 창세기 안에서 믿음의 사람들의 장자권 대를 잇는 역사의 연속이며, 성경이 없던 시대에 하나님의 특별계시적 행위를 통해서 야곱의 후손 곧 이스라엘의 역사를 미리 계시해 주고 예언하기 위한 것으로서 실제로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그대로 성취되었다.
나아가 야곱의 축복은 궁극적으로는 오실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를 증거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일부 목회자들 중에는 야곱이 손을 엇바꾸어 X자로 축복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비유하기도 한다. 물론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역사가 뒤바뀌었다.
성경에 대한 온갖 잘못된 해석이 난무하는 시대에 야곱의 손을 엇바꾼 X자 축복을 십자가의 모형으로 보는 노력은 그 자체만으로 매우 귀하다.
그러나 구약성경에는 이방인 구원과 십자가 사건을 암시하는 사건들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리고 그것들만으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고 가르치기에 충분하다.
야곱의 X자 축복을 십자가의 모형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많은 지혜가 필요하다.
사도 바울과 종교개혁자들의 구속사적 성경해석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고, 성경 전체에 대한 종합적 지식이 없이, 앞뒤 설명 없이, 단순하게 무조건적으로 X를 십자가로 말하면 일종의 풍유적(알레고리) 해석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역대급 지식문명의 시대인 오늘날에 글을 모르는 시골 농부가 서울에 와서 봤더니 빌딩 건물마다 †가 간판이 붙어 있어서 '서울 사람들은 다 교회를 다니는구나'라고 생각했다면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다. 사실 그중 대부분은 병원 마크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이단들이 성경에 대한 아전인수격, 또는 자기 편향적인 지나친 영적 해석을 통해서 많은 신자들을 미혹하였고 지금도 그러한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교회는 교회 건물과 십자가 모양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애쓰지 말고, 그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를 함에 있어서도 온갖 인간의 지식을 동원하여 많은 말을 하려 하지 말고 정확하고 분명하며 순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다시말해서 야곱의 손을 엇바꾸어 축복한 사건을 십자가 사건의 모형으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본래 의도를 벗어날 위험성이 크며, 혹 그러한 새롭고 특별한 해석으로 신자들에게 잠시 감동을 줄지라도 그것이 성령의 참된 감동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문제는 성경에 대한 지나친 문자주의적 또는 지나친 영적 해석들은 대부분 성경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특별한 공동체나 개인 중심의 특이하고 이단적인 신앙형태로 발전할 위험이 크다는 것이 지난 기독교 2천년 교회 역사의 교훈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울러 오늘날 일부 유식하며 유명한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잘못된 문자주의와 은사주의와 종말주의와 지식주의의 영향 아래 많은 책들과 온갖 종류의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만들어 신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며 끊임없이 공부하게 하는 것과 관련하여 사도 바울의 경고를 상기시킨다.
고린도후서 2:17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디모데후서 3:6-7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본래 인간의 지적 호기심은 만족이 없고 끝이 없다.
오늘날 인류역사상 가장 발달한 지식문명 아래서, 청소년들로부터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 500년 전 중세시대 사람들에 비교해 볼 때 수백, 수천배의 지식을 소유하고 있고 자랑한다.
그러나 여전히 불만족스럽고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 인간의 지적 욕구다.
문제는 교회와 목회자들이 과거 못다 이룬 학문탐구에 대한 미련과 세상의 흐름을 따라 똑같이 신자들에게 끊임없는 성경공부를 강요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개인적 욕심과 물질적 이익을 챙긴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 신자들은 그러한 모든 유혹들로부터 자유해야 하며 또한 자신을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은 그 성경을 읽고 암송하며 끊임없이 공부하라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는 믿음은 성경에 대한 문자적 지식이나 자기 열심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과 마틴 루터와 존 칼빈 등에 의하면 오직 성경을 통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세주되심을 믿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고 천국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성경의 목적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해석하되 오직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구속사적 해석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구속사적 성경해석의 원리는 이미 개혁주의 신학을 통해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되 하나님의 의도대로, 개혁주의 신학의 틀 안에서, 올바른 해석과 설교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나아가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대해서도 이미 성경을 통해서 다 경고하였다.
다음은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경고하신 바 신약시대 주의 종들이 성경을 바로 해석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하게 하기 위해 주신 말씀이요 명령이다.
♣올바른 성경해석을 위한 주의사항
(목회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절대명령임)
①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지 말라.
갈라디아서 1: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②복음을 혼잡하게 하지 말고 순전한 복음을 전하라.
고린도후서 2:17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③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고린도전서 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④사람의 말과 지혜로 전하지 말라.
고린도전서 2:1-8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⑤교묘하게, 사사로이, 억지로 해석하지 말라.
베드로후서 1:16, 20-2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니라”
베드로후서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⑥신자들을 영적 어린아이 신앙이나 초보가 되게 하지 말라.
히브리서 5:11-14 “...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히브리서 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도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
마태복음 24:19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⑦‘오직 성경’ 외에 다른 것을 더하거나 빼지 말라.
요한계시록 22:18-19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성경의 이러한 경고는 신약시대의 모든 주의 종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주의 사항으로서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하지 않도록 경계하고 경고하기 위함이다.
위의 주의 사항은 주의 종들에게 선택적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대명령이다. 만일 이를 어길 시에는 거짓 종들이 받는 벌에 처해진다(마 7:21-23, 마 24:51).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뒤바꿔서 축복한 사건은 우선적으로 창세기의 믿음의 사람들과 관련된 장자권 싸움과 장자권 축복 속에 담긴 메시야에 대한 언약과 소망을 배경으로 이해해야 한다.
나아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계속된 마귀 사탄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구속사를 성취하기 위한 특별계시적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성경에 기록한 목적은 신약시대에 세상 모든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대로, 성경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증거하고, 믿는 자들로 하여금 구원과 천국의 축복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삼고 장자와 차자를 바꾸어 축복한 사건은 창세기의 중심 주제인 믿음의 사람들의 장자권 싸움과 축복의 연속이요 강조이며 마침이다.
한편 에브라임이 야곱을 통해 장자의 축복을 받았으나 오히려 가장 먼저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갔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윗 왕 때의 통일왕국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의 사후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뉘게 된다.
북이스라엘 10지파의 중심세력이 된 에브라임 지파는 우상숭배하며 하나님을 배반함은 물로 남유다를 괴롭히고 대적하여 전쟁을 벌이는 악한 세력으로 쓰임받다가 결국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 앗수르(앗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당한다.
그러므로 야곱을 통해 장자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멸망한 이야기를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안수기도나 자녀에 대한 축복기도로 적용함은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이다.
분명한 것은 야곱의 축복행위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적 섭리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야곱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성취다(창 12:1-3, 창 17:4-8).
갈라디아서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야곱의 축복행위는 창세기에 기록된 믿음의 사람들의 장자권 축복의 연속이며 또한 마침이다.
야곱의 축복행위를 통해 깨달아야 할 것은 창세기의 믿음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장자권 축복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과 그 장자권 축복의 본질적 의미와 목적을 바로 아는 것이다.
야곱의 장자권 축복행위의 본질적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함이다.
창세기의 장자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으로서 오실 메시야의 길이며, 장자(맏아들)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창세기의 장자권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천국축복의 모형이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장자권을 쟁취하려고 목숨걸고 싸우고, 마귀 사탄은 장자들을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유혹하고 무너뜨리는 것이다.
창세기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의 장자들 곧 먼저 맏아들로 태어난 자들의 공통점은 다 장자권 싸움에서 패하고 하나님을 떠나간다는 것이다. 그러한 역사는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계속된다.
아담의 장자 가인이 하나님을 떠나갔다. 아브라함의 장자로 태어난 이스라엘이 쫓겨났다. 이삭의 장자로 태어난 쌍둥이 형 에서가 동생 야곱에게 장자권 축복을 빼앗기고 하나님을 떠나갔다. 야곱의 장자로 태어난 르우벤이 간음죄로 인해 장자권을 상실했다(대상 5:1). 다윗의 맏아들 암논이 이복동생인 누이 다말을 사랑하여 강제로 동침한 결과 다말의 오라비 압살롬에 의해 죽임당했다(삼하 3:2, 삼하 13장).
구약시대의 육적 장자권자들이 무너지는 역사의 배경에는 바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메시야를 보내심으로 온 인류를 죄와 사망의 형벌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를 막고, 끊으려 하며, 훼방하려는 마귀 사탄의 역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이 승리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유다와 다윗의 자손으로 유대 땅에 탄생하셨다(마 1장).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그 이름이 기록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가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는 길(족보)을 예비한 사람들이다.
또한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삼아 두 아들의 몫을 준 것은 요셉의 장자권이 유다 보다 더 나은 장자권이란 역대기 저자의 기록에 대한 증거로 보기도 하다(대상 5:1-2).
그러나 요셉은 야곱에게 두 아들을 빼앗기고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요셉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 번째로 태어났고 분명히 야곱으로부터 유다 보다 더 많은 분량의 축복을 받았으나 훗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요셉 지파는 없다(창 49:22-26).
야곱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순서를 바꾸어 장자권 축복을 하였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12지파에서 요셉과 레위가 빠지고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들어갔다?
신약시대 끝인 요한계시록에서는 단과 에브라임이 빠지고 요셉과 레위 지파가 들어갔다(계 7:8)?
메시야의 육적 조상인 유다보다 요셉의 장자권이 더 나은 장자권이다(대상 5:2)?
(이 모든 의문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많은 연구와 노력과 지혜가 필요하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아들로 삼고, 장자와 차자를 바꾸어 축복한 사건을 해석, 설교함에 있어서 지혜가 필요하다. 그것은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임과 같다.
야곱의 장자권 축복 사건은 초보 신자들이나 영적 어린아이 신앙은 이해하기 힘들다.
야곱의 일생과 장자권에 관한 이야기는 구약성경 중에서도 단단한 음식이다(히 5:11-14).
야곱은 장자권 축복과 관련하여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인물이다.
야곱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오늘날에 문자적으로 그대로 적용하면 거의 이단적 신앙이 된다.
그런데 실제로 많은 경우에 신자들의 가정과 삶에 단순하게 그대로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야곱의 장자권 축복 사건을 지나치게 영적으로 확대해석해서도 안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로 깨달을 때 복음이 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없이 적용되도록 보편적이고 우주적이어야 한다.
다시말해서 복음을 지나치게 어렵고 복잡하고 혼잡하게 가르쳐선 안된다는 것이다.
신자들을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기초를 잘 가르친 후에 신앙의 성장과 영적 성숙 곧 장성한 신앙을 목적으로 지혜롭게 가르쳐야 한다.
존 칼빈에 의하면 신자들이 구원받는 믿음을 얻고, 그 믿음에서 자라가는 것은 목사의 설교를 통한 설득이나 리더쉽이나 쇼맨쉽에서 나오는 감동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내적 교사가 되시는 성령의 조명과 감동하심에 의한 역사다.
주의 종들은 성경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되 지혜롭게 전해야 한다.
구약 성경의 메시야 언약을 기초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가르쳐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기초로 재림복음(요한계시록)을 가르쳐야 한다.
무엇보다도 때(시대)에 맞는 복음(양식)을 가르치고 먹여야 한다(마 24:45, 계 10:10-11).
이는 성경 전체에 대한 진리를 해석하고 깨달음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오늘날 주의 종들이 성경을 바로 해석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하고, 신자들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를 바로 깨달아 믿도록 가르쳐야 하는 이유와 목적은 마지막 때에 부름받은 주의 종들에게는 주님이 맡겨주신 신자들(하나님의 자녀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하고 슬기로운 신부 신앙으로 양육하고, 또한 각종 이단과 거짓 종들의 미혹으로부터 신자들의 신앙을 지켜야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마 24:3-5, 마 25:1-13, 고후 11:1-3).
끝으로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의 진리를 바로 깨달아야 할 이유와 목적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성경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가 감추어져 있다(골 1:27-27).
사도 바울에 의하면 구약성경은 다 예수 그리스도로 보고 해석해야 한다(고후 3:14-16).
사도 바울은 구약성경을 통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을 전했다(고전 2:1-2).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약시대에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통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소유하고, 그 지식에서 자라가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까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야 할 것을 당부했다(빌 3:8, 엡 4:13-15).
사도 바울처럼 오직 성경을 통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전하자.
오직 성경을 통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날마다 자라가자.
(추신 : 필자의 지혜가 부족하여 설명이 충분하지 못함을 이해바란다. 더 훌륭한 해석은 이 시대의 훌륭한 신학자들과 후배 목회자들의 몫이다. 그리고 성령님은 말씀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에게 지혜를 주신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출처]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뒤바꾼 야곱의 장자권 축복|작성자 예수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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