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장재사台庄齋舍와 이상루履霜樓
조선시대 안동대도호부 주요 문중의 재사는 부府의 서쪽인 서후면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는 풍수지리에 따른 음택과 양택의 조건이 좋은 곳으로 다수의 문중이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오김吾金의 비조鼻祖인 태사공의 묘단墓壇도 태장리에 있는데, 묘단을 수호하고 제사를 봉행하기 위하여 1750년(영조 26) 재사를 지었으나, 식수의 어려움과 질병이 겹쳐 원래 있었던 승려의 집을 철거하고 1793년(정조 17년) 다시 지었고, 1913년에 10칸을 증축하고, 1960년대에 중수하였는데, 이 터는 원래 신라의 사찰인 천태암天台庵의 구지舊址였다고 전한다. 당시 천태암의 현판은 지금도 게판揭板되어 있다.
태장제사台庄齋舍라 함은 재사 전체를 일컫는 말이며, ㅁ자형의 재사와 一자형의 이상루, ㄷ자형의 관리사로 구성되어 있다. 처마 끝에는 빛이나 비를 막기 위해 설치한 차양이 있고 간결하고 검소한 집이다. 재사에는 제수를 준비하는 유사실, 전사청, 참제원실이 있으며, 1981. 4. 25 경상북도 민속문화유산 제26호로 지정되었다.
이상루履霜樓는 『주역周易』「곤괘坤卦」 초육初六의 효사爻辭인 ‘이상履霜하면 견빙堅氷이 지至하나니라’에서 나온 말로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에 이른다’는 뜻이다. 음력 10월인 곤월(䷁, 중지곤괘)이 되면 서리가 내리고 ‘초목귀근지시草木歸根之時’로 초목이 모두 뿌리로 돌아가므로 그래서 군자가 서리를 밟고 ‘측은지심惻隱之心’ 즉 울적하고 슬퍼지는 마음이 발동하게 된다. 모든 나무 역시 뿌리로 돌아가는데, 하물며 인간이 되어서 뿌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조상을 생각하여 묘소를 찾아 제사를 지낸다. 서리를 밟고 와서 일가끼리 하룻밤 정담을 나누고 묘제를 지내는 누각을‘이상루履霜樓’라고 한다.
공자孔子는 곤괘坤卦 문언전文言傳에 초육효初六爻를 비유하길 ‘선행을 쌓은 집은 경사가 있고 불선을 한 집은 재앙이 있게 된다. 적선지가積善之家 필유여경必有餘慶, 적불선지가積不善之家 필유여앙必有餘殃이라고 하였다.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고 자식이 아비를 살해하는 끔직한 일이 하루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랫 동안 누적된 원한과 미움이 쌓여 일어난 결과이다. ‘서리를 밟으면 반드시 굳은 얼음이 오게 된다’ 는 것은 불선을 쌓으면 서리가 얼음이 되듯이 반드시 재앙을 맞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상루履霜樓는 ‘서리를 밟으면서 조상의 묘소에 성묘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후손들이 선한 일을 많이 쌓아 경사가 있게 하고, 나쁜 일은 미리 싹을 잘라 후환이 없도록 하라’는 경계의 뜻으로도 볼 수 있다.
『예기禮記』「제의祭義」편에‘상로기강霜露旣降 군자이지君子履之 필유처창지심必有悽愴之心 비기한지위야非其寒之謂也 춘우로기유春雨露旣濡 군자이지君子履之 필유출척지심必有怵惕之心 여장견지如將見之(서리와 이슬이 이미 내리면, 군자는 이것을 밟고, 반드시 서글픈 마음이 있기 마련이니, 그것은 추운 것을 말함이 아니다. 봄에 비와 이슬이 이미 적셔 주면, 군자는 이것을 밟을 때에 반드시 놀라고 슬퍼하는 마음이 있어서 장차 부모를 뵐 듯이 여긴다)’라는 구절이 있다. 돌아가신 부모를 그리워하는 자식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글이다.
『소학집주小學集註』에‘군자는 부모의 은혜를 종신토록 잊지 않는다. 그러므로 절기가 바뀌면 마음에 느끼는 정이 있어서, 봄에는 만물이 소생하니 이슬을 밟으면 마음이 출척怵惕고, 가을이 되면 만물이 쇠락하니 서리를 밟으면 그 마음이 처창悽愴하고 슬퍼져서 부모를 만날 것처럼 느끼게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묘사 축문에 ‘기서유역氣序流易 상로기강霜露旣降 첨소봉영 瞻掃封瑩 불승감모不勝感慕’라 하여 ‘계절이 바뀌고 이슬과 서리가 내려 묘소를 벌초하고 바라보니 그리워 하는 마음 이길 수가 없습니다.’라는 뜻으로 이제 추운 겨울이 시작되니 겨울을 잘 지내시고 내년 봄에 다시 찾아 뵙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