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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역사기행에서 경계해야 하는 것은 교육과 해설로 극단적인 분노와 증오를 확대재생산하는 것이다.
역사는 반드시 기억되고 지켜져야 한다. 민족과 나라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창조적으로 평화적으로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가르쳐서 잊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를 소환하여 복수와 배타, 전쟁과 단절로 이끄는 과거에 초점을 두는 교육과 해설은 지양되어야 한다. 참으로 역사 교육으로 국민들이 하나 되어 과거에 조선을 멸망시켰던 나라를 보이콧하며 국제 관계 속에서 그들을 단죄하고 보복하는 것은 통쾌할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복수가 복수를 낳고 전쟁이 전쟁을 낳아서 함께 파괴되고 죽임당하는 악순환을 보여준다.
과거를 통하여 재생산되는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찬 애국심은 대부분의 나라가 교육과 정치를 통하여 배양하여 계속 대립과 갈등, 긴장과 경계를 조장한다. 배타적 애국심으로 조선말의 위정척사를 주장하던 유학자들처럼 국민들의 사고와 의식이 경직되면 그 나라는 시대의 흐름과 외교 관계를 일방적으로 무시하며 고립을 자초하며 무모한 전쟁도 감수할 수 있게 된다.
반복적인 교육으로 사람들에게 침략국이나 인접국에 대한 적대감을 지속적으로 확대재생산하는 것은 비단 나라뿐이 아니다. 가문, 지역, 민족, 집단 등도 소속집단의 존립과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행한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두 가문의 오랜 싸움을 보여준다. 몬타규와 캐플렛 가문은 오랜 세월 동안 교육으로 가문의 사람들에게 분노와 증오를 확대 재생산시켜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서로 만나기만 하면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게 하였다.
기원전 431년에 시작된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전쟁은 무려 2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가 강력한 해군력으로 주변의 도시국가들을 제압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동맹국이었던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견제하고자 새로운 동맹을 결성하였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식민지인 포키온에서 반란이 일어난 기회를 노려 아테네에 도전 하였고 이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동맹국인 보이티아를 공격하였다. 이 작은 영토분쟁으로 시작된 펠로폰네소스전쟁의 초반은 주도권을 아테네가 잡았다. 그러나 두 나라 다 전쟁으로 피해가 막심하였기 때문에 6년 동안 휴전을 하였다. 기원전 430년에 지도자 페리클레스 잃은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대한 분노와 적대감으로 충만한 시민들의 애국적 열정과 외침에 이끌려 시칠리아 원정으로 스파르타의 동맹국을 공격하였고 결과적으로 대패를 하였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아테네의 해군을 격파하고 승승장구하여 아테네를 포위 공격하여 기원전 404년에 항복을 받았다.
아테네가 항복함으로 전쟁은 끝이 났지만 아테네 시민 4명 중 1명이 전쟁과 역병으로 목숨을 잃었다.아테네의 민주정치는 붕괴되고 스파르타의 속국이 되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식 교육과 훈련으로 패자가 된 스파르타 또한 기원전 371년 테베에게 점령을 당하였다. 그 후 스파르타지역은 마케도니아제국에 귀속되는 운명이 되고 더 이상 역사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황태자가 단독으로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하였다. 당시 보스니아의 세르비아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을 세르비아 국민으로 인식하였으며 지배자인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에 불타고 있었다. 사라예보에 총성이 울린 그 날은 마침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 왕자 라자르가 오스만제국에 희생당한 것을 기념하는 세르비아 국가 기념일이었다. 피의 보복을 원했던 세르비아의 국수적인 민족주의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황태자 부부를 저격하였다. 그들의 죽음은 오스트리아에게 눈에 가시 같은 세르비아를 공격할 빌미를 주었다. 독립 국가를 원하는 세르비아는 끊임없는 저항으로 오스트리아 남쪽 국경의 골칫거리였던 것이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세르비아왕국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유럽은 4년이 넘는 제1차 세계대전의 광란 속에 들어갔다.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편을 들었다. 독일은 벨기에 침공하고 프랑스를 향해서 진군하였다. 영국은 벨기에와 프랑스를 지원하기 위해 전쟁에 뛰어 들었다. 러시아도 동맹국인 세르비아를 지원하였다. 오스만제국은 독일과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헝가리왕국을 지원하였다. 결과적으로 1,000만 명의 군인이 사망하였으며 유럽 열강이 약해지며 미국과 일본이 세계의 열강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독일은 베르사이유조약이 정한 배상금으로 말미암아 이내 나치즘의 광기에 사로잡혀 2차 세계대전의 포문을 열게 되었다. 많은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차 세계대전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국수주의, 쇼비니즘의 발로로 포문이 열렸음이 분명하다.
현재 EU 주도국에 속하는 프랑스와 독일은 843년 베르됭조약 이전에는 프랑크 왕국에 속하였다. 샤를마뉴대제가 죽은 뒤 프랑크왕국이 서 프랑크, 중 프랑크, 동 프랑크로 삼분됨에 따라 그들은 각각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기원이 되었다.
프랑크왕국의 중심지였던 알자스로렌 지역은 독일에 속하였으나 프랑스가 전쟁을 치를 때마다 빼앗고 빼앗기는 땅이 되어 프랑스의 반독일 감정 또는 독일의 반 프랑스 감정을 부추기는 역사적인 장소가 되었다.
843년 삼국 분립 시 그 땅은 신성로마제국(독일)에 속하였다. 그러나 1618년에 일어난 30년 전쟁의 결과물인 베스트팔렌조약으로 말미암아 프랑스로 귀속되었다. 알자스로렌이 실지(失地)한 국토가 되어 독일 민족주의자들이 회복을 염원하는 뜨거운 땅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은 유럽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한 뒤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제외하고 라인연방을 결성하여 신성로마제국(독일)을 해체시켰다. 독일은 패전의 대가로 1807년 틸지트 조약을 맺어 영토의 절반을 잃었고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하며 나폴레옹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실패를 하자 독일은 유럽의 제국들과 동맹을 맺고 나폴레옹을 격퇴하여 유럽을 프랑스혁명 이전으로 돌려놓는 비인체제를 만들었다. 독일은 승리의 대가로 작센지방의 5분의 2를 얻고, 베스트팔렌 지방과 라인 강 좌안 유역의 광대한 영토를 추가로 보상받았다.
1870년에 시작된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은 1871년 5월에 프랑스 임시정부와 프랑크푸르트 조약을 맺으며 종결되었다. 독일은 스당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나폴레옹 3세를 폐위시켰으며 임시정부를 압박하여 1월 28일에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냈다. 프로이센은 이 조약으로 50억 프랑의 배상금과 함께 베스트팔렌 조약과 함께 프랑스에 넘어갔던 알자스와 로렌지방을 다시 넘겨받았다.
전쟁에 패한 프랑스는 파리 시내 모든 조각상 위에 검은 천을 덮었다. 전쟁의 패배로 낮아진 국민적 자존감과 잃어버린 두 지방 알자스와 로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에 패전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다시 알자스로렌 지역을 프랑스에 반납하였다. 프랑스와 독일은 2차 세계대전 시 적국이 되었으며 독일의 프랑스 점령으로 알자스와 로렌은 다시 독일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은 전쟁에 대한 배상으로 알자스로렌지방을 다시 프랑스에 반환하였다.
현재도 프랑스와 독일은 알자스로렌을 상기하며 애국심을 고양시키며 반국가적 정서를 고취하며 불편한 이웃으로 유럽은 물론이고 국제사회에서 서로를 견제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국가와 종교가 세뇌교육으로 양 국민 간에 서로 불신과 분노, 적개심을 가지도록 격려하며 원한과 분노를 끝없이 확대 재생산하는 나라의 대표적 케이스이다. 양국은 그 에너지로 전쟁과 폭동과 테러를 끊임없이 일으키며 국민의 안전과 평화를 위한다고 주장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쪽에는 시오니즘을 표방하는 극우 정당이 있고 한쪽에는 자치정부 집권당 파타와 과격한 이슬람 종교정당 하마스가 있다.
헤브론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성조(聖祖)로 숭배하는 아브라함과 이삭(이스마엘)과 야곱이 묻혀있는 거룩한 땅이다. 성지는 이스라엘 구역과 팔레스타인 구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양국의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 이스라엘 쪽 아브라함의 무덤에는 랍비들의 가르침을 경청하는 청소년들과 어린이들이 있고 팔레스타인 쪽 야곱의 무덤에는 역시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청소년들과 어린이들이 있다. 양쪽의 종교 지도자들이 어린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지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들의 심각한 눈빛이나 긴장된 어조로 보아 서로가 상대국에게 당한 고통과 원한을 상기시키며 후세대들의 복수의 DNA에 새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곳은 애국과 종교의 이름으로 전수되는 원한과 증오로 끝나지 않을 전쟁의 그림자가 아이들의 미래에 운명처럼 덮치는 공간이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의 역사는 1948년 5월 14일 선주민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2차 세계대전에 나치에 의해 홀로코스트를 당한 일로 세계적인 여론의 지원을 받아 팔레스타인 땅에 나라를 건국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팔레스타인 선주민들에게는 재앙이었다. 그들은 자기 조상들의 땅에서 뿌리를 뽑혀 주변국가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등으로 흩어지거나 아니면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잔류하였다. 그리하여 팔레스타인은 생존을 위해 살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처절하게 학살과 방화, 파괴를 주고받는 참혹한 복수의 땅이 되었다. 이 글을 쓰는 시간에도 제 5차 이•팔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이스라엘 건국 이래 일어난 수차례의 전쟁과 팔레스타인의 민중 봉기(인티파다)는 양국의 교육과 종교가 계속되는 전쟁과 폭동을 지지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의 종교 근본주의가 성전이라는 미명으로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된 날 주변국 이집트와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등이 이에 반기를 들고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1차 이•중동 전쟁을 일으켰으며 이스라엘 건국을 둘러싼 전쟁이다. 전쟁의 주축이 팔레스타인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팔 전쟁이라고 명명하기는 애매하지만 팔레스타인이 빌미가 되어 일어난 전쟁이기 때문에 이•팔 전쟁이라고 칭해도 무리함이 없을 것이다. 1차 전쟁은 1949년 1월 7일,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이로서 이스라엘은 영국이 위임 통치하던 서부 팔레스타인의 80%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망하였고 1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여 유대인들에 대한 아랍인들의 증오와 복수심이 커졌다.
제2차 이•중동 전쟁은 1956년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이스라엘의 선박의 통행을 금지한데서 시작되었다.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타격을 받게 된 이스라엘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이집트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압력 때문에 휴전을 한 후에 점령지에서 철수하였다.
1964년에 결성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시리아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대 이스라엘 게릴라전을 전개하자 이스라엘이 그 보복으로 시리아 전투기 6대를 격추시키고 시나이반도를 침공하였다. 이집트는 시나이반도에 대규모의 병력을 파견하였지만 참패를 하였다. ‘6일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제3차 이•중동 전쟁은1967년 6월 5일에 시작되어 6월 10일에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요르단, 시리아를 기습 공격하여 시나이반도는 물론이고 요르단 강 서안, 골란 고원을 확보하였다.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의 대승에 놀라면서 정전을 압박하였고 이스라엘은 정전에 응하였다.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 영토는 시나이 반도, 구 예루살렘지구, 요르단 강 서안지구, 가자지구, 골란공원 등의 확장으로 약 4배 정도 확대되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난민 증가로 주변국들의 적대감과 분노는 더욱 깊어졌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유대교 축제인 욤키푸르 기간에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였다. 아랍 국가들은 소련의 원조를 받아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제4차 이•중동 전쟁을 일으켰는데 이집트와 시리아는 제3차 이•팔 아랍 전쟁 때 빼앗긴 각자의 영토를 찾고자 하였다. 이집트 군은 이스라엘 공군과 전차 부대로 사나이반도의 거점들을 장악하였으나 골란고원을 공격한 시리아군은 이스라엘 군을 제압하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은 전열을 가다듬어 이집트 수도 카이로를 위협하게 되었고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근처에 이르렀다. 10월 22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정전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양측이 동의함에 따라 전쟁은 16일 만에 끝났다.
1977년 카터 대통령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캠프데이비드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스라엘은 점령지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하였으나 자국 선박의 수에즈 운하 이용권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가자 지구, 골란 고원, 요르단 강 서안, 동 예루살렘은 돌려주지 않았다.
이 협정을 기점으로 이스라엘과 주변국 간에 표면적으로 평화가 정착되었으나 전쟁 난민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그 동안 4차례의 전쟁은 팔레스타인 주변국과 이스라엘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1987년부터는 PLO와 팔레스타인 급진단체 등의 지도 아래 주민들의 봉기(인티파다)가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인티파다는 테러였으며 수천 명에 달하는 이스라엘 국민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인티파다는 침입자 이스라엘에게 저항하는 독립전쟁이다. 양쪽의 충돌은 끝없이 악순환을 반복하였다. 팔레스타인의 공격은 이스라엘군의 보복으로 이어졌고 이는 꼬리를 무는 팔레스타인의 보복을 불러왔다.
1987년 12월 팔레스타인 아랍인 거주 지역 가자에서 한 아랍인이 죽은 일로 1차 주민봉기, 인티파다가 일어나 전 아랍인 거주 지역에서 유대인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이 일어났다. 이스라엘군의 탄압으로 1,000 명 이상의 아랍인들이 죽었다. 인티파다가 빌미가 되어 PLO는 1988년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선언하였으며 1989년에 아라파트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을 하였고 같은 해에 유엔총회에서 독립국가로 인정받았다. 한편 과격단체 하마스는 제 1차 인티파다의 후 무슬림 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가 떨어져 나와 아흐메드 야신을 지도자로 하는 정치조직으로 설립되었다. 1차 인티파다는 1993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평화협정이 중재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2000년 9월에 제2차 인티파다가 일어났다. 예루살렘 이슬람교 성지 알아크사사원에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순례자 간에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아랍인 거주 지역에서 제2차 인티파다가 재개되었다, 이스라엘 군인은 인티파다를 막기 위해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을 재점령하였고 아라파트 집무실을 포위하여 연금시키는 강경한 군사정책을 취하여 팔레스타인 경찰까지 봉기에 참여하여 요르단 강 서안지구와 가자 지구는 전쟁상태가 되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기능을 상실하고 PLO의 급진세력인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전선, 하마스, 이슬람 지하드 등의 조직들이 자살폭탄테러와 요인암살을 하면서 민중봉기를 자극하였다.
이스라엘은 2002년 6월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의 공격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팔레스타인 자치기구와 경계선인 요르단 강 서안에 길이 130km의 분리장벽을 실시하였고, 예루살렘 등지에서 자살 폭탄 테러가 잇따라 발생하자 공습으로 강경하게 대처하였다. 이스라엘의 가자 공습으로 하마스의 지도자이자 반이스라엘 투쟁의 상징이었던 아메드 야신이 사망하면서 양국은 처절한 복수를 서로 반복하였다.
2004년 11월 PLO의 정신적 지도자이며 정부의 수반이었던 야세르 아라파트가 사망하고 마흐무드 압바스가 새 지도자로 선출되며 평화를 위한 희망으로 양국의 대표가 무장충돌을 중지하기로 합의를 하였다. 이스라엘 내각은 샤론 총리가 제안한 가자지구 철수 수정안을 승인하였고 2005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이집트, 요르단의 대표가 모여 2차 인티파다를 종식시키기로 약속하였으며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 수감자를 석방하고 서안지구 마을에서 철수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하마스 무장정당은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 지구 그리고 동 예루살렘에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돌려주기 전까지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맞섰다.
하마스는 2006년 1월 팔레스타인 입법부 총선에서 74석을 확보한 다수당으로서 가자 지구의 통치 정당이 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 강경 이스라엘 노선을 선두 지휘하고 있다. 드디어 하마스 무장정당은 작년 10월에 이스라엘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제 3차 인티파다가 시작되었다. 하마스가 공격을 시작한 인티파다가 제 5차 중동 전쟁으로 비화될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지금 이 시간도 전쟁은 승전을 위하여 누군가를 향해서 죽음의 포를 발사하고 있다. 생명을 으스러뜨리고 가정을 파괴하며 행복을 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무도 쉽게 어느 한 편을 악으로 규정하거나 단죄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역사의 기록은 하마스 급진무장 정당과 이스라엘 극우 정당의 치고받는 전쟁의 끝없는 파괴와 대량학살의 잔학행위를 애국과 성전으로 미화시킬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이 자기집단의 권력 유지의 방편과 자신의 소신과 존재감 확인을 위해 벌이는 전쟁, 파워 게임에 짓밟히는 민초들의 생명과 평화는 결코 역사의 자리에서 소중하게 취급되지 않으며 결코 기록되지 않는다.
2006년 1월 팔레스타인 총선 직후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 팔레스타인 사람 73%가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고, 85%는 평화협상을 지지한다고 응답했다. 이스라엘 국민 48%도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정부와 대화를 하며 공존하기를 희망하였다.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난민으로 사는 549여 만 명의 팔레스타인 국민들과 960여 만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의 질과 평화를 생각하며 속히 전쟁이 끝나고 서로 겸허히 인정하며 존중하며 함께 사는 세상, 사자들과 어린 양이 함께 뛰노는 평화 세상을 꿈꾸어 본다.
과거를 잊지 않고 현재를 이해하기 위하여 역사 탐방과 기행은 참으로 좋은 역사 학습의 장이다. 그러나 그것이 국수주적으로 기울 때 무한히 증폭되는 애국애족심과 종교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이 발로 되어 갈등과 긴장, 전쟁과 테러, 폭력이 유발될 수도 있다.
스리랑카의 자프나를 방문하였을 때 손이나 발이 없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스리랑카 내전에서 사지를 잃은 사람들이었다. 불행한 처지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용감한 타밀 반군이었음을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그들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학습 속에서 위대한 타밀 전사(戰士)로 자라고 있음을 목도하였다.
3월에 미조람에 있는 미얀마 난민캠프에 다녀왔다. 난민 아이들이 하나같이 전사(戰士)가 되어 미얀마 군인들과 싸우는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의 꿈이야말로 탄압받는 소수민족의 자녀들이 꿀 수 있는 지극히 정상적인 위대한 꿈이기에 그들의 꿈이 이루어지길 빌어주고 왔다.
우리 한반도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6•25의 상처를 가슴에 품고 70여 년 동안 서로 적성국으로 대하며 때때로 전쟁위기와 불안을 고조시키며 민족의 대 화합과 통일의 날을 향하고 있다고 믿지 않았던가? 지금 평화를 위하는 수많은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가고 오염 풍선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상황에 심정이 처연하기도 하다.
소말리아 내전, 수단 내전, 키프로스 분쟁, 보스니아 및 코소보 내전, 레바논 내전 등 세상의 수많은 내전과 분쟁에는 소중한 역사 기억이 있고 역사를 뒷받침하는 종교와 급진 진보와 극 보수를 표방하는 선동적인 지도자들이 있다. 특별히 그들은 모두 다 민족과 종교를 지키는 성스러운 사명을 맡았다고 자부하며 일꾼을 자처하며 분노와 증오를 가슴에 이식하는 과장된 역사 학습을 통하여 후세들의 전의(戰意)를 다진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의 꿈과 야망을 틀렸다고 말할 수 없으며 그런 생각을 포기하라고 강제할 수 없다. 그러기에 인류는 평화를 노래하며 꿈꾸면서도 전쟁과 내전과 폭동에 휩쓸리며 힘겹게 지옥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셋째 역사기행에서 경계해야 하는 것은 탐방국가를 비하 또는 비난하거나 국민들을 함부로 모욕하는 것이다.
4부로 계속
2024년 6월 11일 화요일 미시
우담 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