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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요한계시록 1:1~3
(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계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나타나는 여러 증상들은 주님이 오실 마지막 때임을 분명하게 알리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의 흐름은 수평적으로 계속되는 것도 아니고, 윤회적인 개념으로 끝도 없이 순환되는 것도 아닙니다. 처음과 끝이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대단히 흥미로운 자세로 이 시대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성도에게는 마라나타(Maranatha)의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라나타’(Μαραναθα)는 Our Lord has come,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는 뜻으로 본래는 아람어였는데 헬라어로 표기하면서 ‘우리 주여 오소서’ 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될까요? 예수님이 다시 세상에 오실 때 믿음의 성도들은 완전한 구원을 얻게 될 것이고, 만물은 새롭게 될 것이며 행한 대로 상급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실 때는 성도들에게는 최상의 기쁨과 환희의 날이 될 것이기에 세상에서 복된 성도는 주님의 때를 준비하는 분들입니다.
오늘 말씀 1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 이란 어느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만물을 회복하실 주님의 재림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아버지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이를 아들에게 보이셨으며 예수님은 천사를 통하여 요한에게 나타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계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류시스’는 ‘앞에 있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는 말입니다. 죄에 오염된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을뿐더러 그 분의 계획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당신을 알려 주셔야 우리는 그제야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앞으로 될 일에 대하여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는 것을 계시라고 하는데 오늘 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시게 되었습니다. 그 분으로 인하여 모든 역사의 수레바퀴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뤄나가는 것은 경륜(徑輪)이라고 하고 또 다른 말로는 섭리(攝理)라고 표현합니다. 이 감춰진 비밀을 알리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만물의 창조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계시 또는 자연계시라고 말합니다. (롬 1: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우주의 광대하면서 질서정연한 모습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섬세하고 치밀하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구의 사계절의 변화와 인간이 살 수 있는 조화를 이뤄 가심을 볼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 담겨 있는 양심으로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 분께 나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준비된 것이 특별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성경입니다. 이 성경을 통하여 모든 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그 분의 성품과 더불어 인간을 향한 분명한 뜻을 밝히셨습니다.
이런 계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완성이 됩니다. 완성되는 마지막 시점에서 어떤 일들이 발생하고 이를 통하여 성도는 마땅히 준비하여야 될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는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보통 계시는 3중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장차 될 일에 대한 것을 알리는 것과 이것이 성취된 것 그리고 성취된 것을 교훈삼아 장차 이뤄질 것에 대하여 어떻게 준비하여야 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계시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수년전에 러시아에서 첼로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청년이 제게 러시아 전통 목각인형인 마트로시카(matryoshka)라는 인형을 선물한 적이 있었습니다. 마트로시카는 오뚜기 모양의 인형으로 작은 인형들이 큰 인형 속에 포개져 있습니다. 저는 8개가 들어 있는 것을 받았는데 최다의 것은 20개가 들어 있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모양은 똑 같은데 크기가 다른 것이 여러 개가 들어 있는 인형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모든 만물이 있기 전에 계속 있어 왔습니다. 크기만 다를 뿐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점점 밝아지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끝자락에 와 있는 것을 천사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우리가 살펴볼 요한계시록입니다.
이 계시의 말씀이 누구에게 전해졌지요?
바로 사도 요한에게 전해졌습니다. 계시록의 저자인 요한은 스스로 고백하기를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지낼 때 예수님과 가까이에서 그 분의 숨결을 느끼며 말씀을 경청하였습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식사할 때나 앉아 있을 때는 비스듬히 눕는 자세를 취합니다. 그렇게 앉아 함께 대화를 나눕니다. 그 때마다 요한은 예수님 옆에 가까이 앉아 심장으로 전해오는 사랑을 느꼈고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갈구(渴求)하였고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육신의 모친 마리아를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요한이 대신 섬기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계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주의 말씀을 믿고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일 5:3)“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계시가 내게 전해질 때 우리는 주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4살 때 아이 없는 고모 댁에 떨어져 있다 9살 때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참 어색했습니다. 형제들도 그렇고 부모님들도 저를 대하는 것이 그렇게 살갑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말이 없으신 분이었고, 자식을 일곱이나 낳아서 그런지 애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제 어머니가 전신이 비치는 거울 앞에서 저를 오라고 하시더니 등에 업히라는 것입니다. 제 어머니의 평시의 모습이 아니라 저 역시 당황했습니다. 어머니 등에 업혀 멋쩍어 하는데 어머니는 저를 업고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을 이리저리 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머니의 따뜻한 등의 감촉과 더불어 어머니의 내면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야! 맞아 내 아들 맞고 말고”하는 음성이 제 마음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어머니의 사랑이 느껴졌고, 어색했던 모든 감정이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그 후에 어머니를 더 가깝게 누리면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자기계시입니다. 나는 그 분의 아들이 되고 어머니가 나의 어머니 됨을 확증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계시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치고 그로 인하여 나의 하나님을 발견하며 그 분의 선하신 뜻을 행함을 깨닫고 세상에서 승리하는 신앙을 갖도록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임할 때의 환경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집필할 당시의 상황은 기원 후 312년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황제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전까지 기독교는 로마 황제들의 성향에 따라 다양하고 극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박해를 받는 동안 기독교인들은 수년씩 지하 동굴에 숨어 살거나 신분을 숨기고 조용히 살아야 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의 삶은 그야말로 대환란의 한 가운데서 살아가는 삶이었습니다. 요한 자신도 밧모라는 섬에 유배(流配)를 당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시련을 겪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제국 시대에 밧모 섬은 정치적, 종교적 중범죄자들을 유배하는 감옥 인데, 한번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힘든 생지옥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이곳에 큰 채석장이 있어 죄수들이 돌을 캐는 일을 위하여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요한은 당시 96세의 노구로 낮에는 채석장에서 돌을 깨는 일에 동원되었습니다. 96세면 망치하나 들 힘도 없을 텐데, 하루 종일 돌을 깨는 막장 인생으로 전락한 요한은 얼마나 몸과 마음이 힘 들었을까요? 밧모 섬은 상당 부분이 바위로 덮여 있으며 땅의 대부분이 거칠고 피폐한 황무지입니다. 비가 오지 않아서 물이 귀한 곳으로 유명하고 수많은 독충들로 위험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이 로마황제의 핍박으로 심하게 흔들릴 때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증시켜 주시고 모든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임하고 환난 가운데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렘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부르짖으라’는 용어는 원어로 ‘카라’로 ‘부르다, 소환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환난에서 당당하게 하나님을 내 삶의 현장으로 불러들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에게 환난은 결코 저주가 아닙니다. 분명하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그 분의 선하신 뜻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어둠이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뒤엎으리라는 이사야 60장의 말씀이 그대로 재현되는 시대입니다. 땅과 하늘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휩싸이게 하는 징조가 있고, 사람들은 낙담하는 환경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런 때는 분명하게 어둠과 빛으로 나뉩니다.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빛이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막 11: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영어로 ‘Have faith in God’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며 직역을 하자면 ‘하나님 안에 있는 믿음을 가져라’입니다. 즉 하나님의 성품과 그 분의 능력, 그리고 계획안에 담겨 있어 그것을 믿고 흔들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이 계시를 믿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요, 환난 가운데에서도 빛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흔들림 없이 강하고 담대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이 어둠이 깃들어 있는 종말의 때를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계시의 말씀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들려져야 할 때입니다.
이 계시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에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3절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예언의 말씀’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는 같은 내용으로 이해를 하여야 될 것입니다. 장차 될 일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되다고 한 이유는 장차 될 일에 대하여 깨닫고 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읽는 자는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당시 글을 읽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기에 글을 읽을 능력을 가진 특별한 사람이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회중들은 그가 읽는 글을 함께 듣습니다. 그래서 읽는 자와 듣는 자들이라고 구분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문맹자가 많지 않습니다. 한글을 천시하고 중국 한문을 우대하던 이조시대 때는 문맹률이 98-99% 이상이었을 것이라고 추론하고 있는데 지금 한국인들의 99%가 한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학력도 대단히 높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 스스로가 성경을 보고 나름 해석하며 신앙을 키워나가려고 하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일반 성도들이 쉽게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입니다.
신명기 5장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여 광야의 호렙산에 올라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을 듣습니다. (신 5:22)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에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두 돌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렵고 떨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열 두 지파의 수령과 장로들이 모세 앞에 나와 우리가 여호와의 말씀을 직접 들으면 죽을까 두려우니 오직 모세 당신이 우리를 대표하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전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들의 소리를 듣고 계셨던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 말이 다 옳도다”고 말입니다. 현대에도 이 원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주의 종도 여러분도 모두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직분이 다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맡은 자가 이를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씀을 전하는 자를 ‘읽는 자’요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가 ‘듣는 자’ 곧 믿음의 성도입니다.
여기서 계시의 말씀을 읽고 듣고 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만 기록한 것을 지키는 것은 동일합니다. 어떻게 지키는 것입니까? 말씀이 마음에 담겨져 그 능력이 나타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도자 모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고 따랐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되겠습니까? 바로 여러분을 섬기는 주의 종의 모습을 보고 따르며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은 막대한 책임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지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계시의 주체이신 예수님과 늘 동행하는 모습을 보이므로 예언의 말씀을 어떻게 지키는지를 보여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벧전 5: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했습니다.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치는 것을 그의 삶의 현장에서 보이는 것입니다.
계시는 ‘감춰진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모습으로 온전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도 자신의 겉 사람을 벗어버리고 온전한 나의 모습이 드러나게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내 겉 사람을 부인하고 새사람을 입는 것이 회개입니다. 내 안에 죄를 걸러내고 예수님의 성품으로 새롭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행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자와 함께 마음을 나누고 뜻을 나는 공동체는 복이 있습니다. (갈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가 서로를 신뢰하고 격려할 때 우리는 이 어둠의 시대를 헤쳐 나가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복이란 ‘마카리오스’ 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행복하다는 어원에서 출발한 것으로 ‘일상적인 염려와 걱정들로부터 놓여 자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재림의 때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재난의 소식이 들려오고 난리와 난리가 온 사방에서 번져 나오게 될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로 온 세계가 공포에 시달리고 있지만 이것이 지나면 이보다 더한 재앙의 소식이 들려 올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복 있는 사람은 여기에 삼킨바 되지 않습니다. 조금도 염려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생명싸게로 우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때가 가까움이라’ 고 했습니다. 주님의 때가 가까울수록 계시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고 그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전혀 세상의 어지러움이 그를 낙심하지 않습니다. (고후 4:7~8)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험악한 환경이 닥치더라도 절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내 안에 생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들이고 그 예언의 말씀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번 주부터 시작하는 계시록의 말씀에 깊이 들어가 봅시다. 그러므로 진정한 복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