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2:26-32 죄인을 감싸야 하나, 처단해야 하나?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러 시내 산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예상했던 시간보다 길어졌다. 모세의 강력한 지도력에 의존했던 이스라엘은 1달 넘게 보이지 않는 모세의 공백에 그만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이스라엘은 불안과 초조함과 답답함을 빠르게 해소하고 안정감을 줄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만져야만 불안과 초조함이 없어질 것 같아서 자기들을 인도할 신을 형상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임시 리더를 맡고 있던 아론에게 달려가 그들의 요구사항을 말했다.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1)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경배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수단에 불과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달래 줄 수 있다면, 자신들의 비위만 맞춰준다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조바심과 불안감이 들면 어떻게 하길 원하실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그의 도우심을 받으라(시 42:5)고 하셨고, 하나님은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 두려워하지 말라(창 15:1)고 하셨고,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시니 두려워하지 말라(신 7:21) 하셨고, 네가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할 것이니 강하고 담대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수 1:9)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모세의 부재로 불안을 느낀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찾으면 된다. 아론에게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길,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달라고 요청하면 된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찾지 않았다기보다 하나님을 찾을 만큼의 믿음[힘]이 없었다. 그들이 불안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자기들을 인도해 줄 우상이었다.
여러분은 불안하고 초조할 때 제일 먼저 찾는 것이 무엇인가? 악한 감정? 음식? 자녀? 수다 떨 상대자? 이성? 돈? 술? 게임? 여행? 이런 것들을 찾았을 때, 불안이 사라지고 평안해지는가? 이것이 여러분의 신[우상]이다. 하나님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20:4)고 명령하셨다. 여러분(의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 또한 우상이다. 이런 강력한 우상으로 인해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위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신호다. 속히 회개하길 축복한다. 믿음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하나님보다 이것들을 먼저 찾을 수 있겠지만, 최종적으로 하나님으로 인해 이런 불안감이 해소되길 축복한다. 더 나아가 불안과 초조함이 하나님으로 해결되는 데까지 장성하길 축복한다. 여러분의 생명은 계속 행복해질 것이다.
리더 아론은 술렁거리는 민심을 수습해야 했다. 아론은 이 사태를 어떻게 대처했는가? “우리가 우상을 찾을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할 때이다. 예배할 때이다. 우리 모두 기도하게 00시에 모입시다”라고 말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아내와 자녀의 금귀고리를 가져오라(2)고 말했다. 우상을 통해 불안감에서 속히 벗어나고 싶었던 백성들의 심리를 읽어 주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계속 말해 보았자 연약한 이스라엘을 설득할 수 없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스라엘의 욕구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의 불안감을 빠르게 잠재울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아론은 생각한 것 같다. 눈으로 보고 잡힌 것이 있어야 사람은 안정을 누리는 법이다. 아론의 생각은 옳았다. 이스라엘은 생기가 돌았다. 일사천리로 금고리를 가져왔다. 아론은 그 금고리를 부은 후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다. 송아지 형상을 본 이스라엘은 흥분하며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4) 아론은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줌으로써 불안과 조바심으로 가득한 이스라엘의 민심을 빠르게 수습할 수 있었다.
아론은 흥분하는 민심을 보고 한술 더 떠서 송아지 우상 앞에 제단을 쌓고 공포했다.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5) 송아지 형상에 들뜬 이스라엘은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노래하며 뛰놀았다. 그야말로 축제였다. 불안과 초조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론의 지도력[리더십]이 돋보였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아론의 지도력에 대해 잘했다고 하셨을까? 모세라면 불안한 민심을 어떻게 수습했을까? 아론처럼 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을까? 아론과 이스라엘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첫 말씀은 “부패하였도다”(7)였다. 내 백성이라고도 하지 않고, 모세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과 거리를 두셨다. 그리고 계속 말씀을 이어가셨다.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났다.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모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8-10) 아론의 지도력에 대해 전혀 칭찬하지 않으셨다. 부패한 자로만 보셨다.
모세는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을 목격했을 때 어떻게 했는가?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공감하며 이스라엘을 감쌌는가? 아니다. ❶분노하여 손에 들고 있었던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렸다(19). 하나님의 분노를 대신했다. 송아지 형상을 불살라 부수어 가루로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저주의 물을 마시게 했다(20). “하나님은 분노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모세는 분노하고 있지?”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자신의 유익[욕심]을 위한 분노는 하나님이 미워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분노는 하나님과 결을 같이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들은 죄에 대해 이와같이 의로운 분노를 낼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 그들의 죄를 인정해 주고 덮어주어야 하는가?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영이 죽은 것이다. 하나님과 원수의 길을 가는 것이다.
❷죄에 대하여 모세는 분노로 끝내지 않고 죄를 뿌리 뽑는 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모세는 진 문에서 서서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들을 가려내었다(26). 레위 자손들이 다 모여 모세에게로 갔다(26). 이들은 우상숭배에 동참하지 않았거나 동참했더라도 속히 회개한 자들이다. 모세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킨 자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죄에 대해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들이 되자. 죄에 대해 철저히 미워하고 분노해야겠지만,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여 그에 합당한 삶을 사는 자들에겐 사랑으로 용서해야 한다. 요일 1:8,9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눅 17: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모세는 회개할 기회를 주었는데도 돌이키지 않는 자들을 죽였다. 그는 레위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명령했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27) 형제, 친구, 이웃은 오랜 세월 정을 나눈 사람들이다. 두부 자르듯이 단호하게 처단하기 어려운 상대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을 들먹거리면서 죄가 있어도 덮고, 못 본 척하며 얼렁뚱땅 넘어가려 한다. 죄에 대해 운운하면 어떤 이들은 짜증을 내기도 하고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며 사랑이 없는 옹졸한 자로 보기도 한다.
레위 자손들도 피를 나눈 형제, 우정을 나눈 친구, 나에게 잘해 주었던 이웃을 죽이는 일에 있어서 사랑과 공의 앞에서 갈등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세의 명령대로 행하여 아직도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 3,000명 가량을 죽였다(28). 3,000명은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물이었다. 이 3,000명의 희생 제물을 레위인들이 임시 제사장으로 위임받아 바친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레위인들은 제사장을 도와 하나님을 섬기는 특별한 복을 받았다(민 1:47-54).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단호해야 한다. 사랑은 죄에 대해 회개하는 자들의 몫이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의 몫이 아니다. 죄는 덮는 것이 아니라 발본색원(拔本塞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는 죄와 완전히 분리된 거룩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이름으로 죄를 덮는 것은 또 다른 죄를 양산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피로 확실하게 씻어야[회개해야] 죄에서 자유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데 주저함이 없고, 하나님 나라에 거주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은 것이다. 죄를 옹호하는 일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이다. 롬 1: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을 저버지 말자.
❸죄 문제를 다 해결한 후 모세는 다음 날 이스라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시내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 사과하며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고,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워버려서라도 용서해 줄 것을 간청했다(31,32). 모세는 이스라엘이 지은 죄에 대해 미워하고 단호했지만, 그들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백성들을 매우 사랑했다. 자신의 영혼과 바꿀 만큼.
모세를 보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중보자가 되어 주시고, 성령이 연약한 우리를 위해 대신하여 탄식하며 기도해 주시는 모습이 연상된다. 히 9: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런 모습은 모세가 아직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장면을 보지 않았고 하나님이 분노하여 이스라엘을 진멸하시겠다고 말씀하실 때도 나타났다. ⓑ모세는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기 위해 자기 백성을 출애굽시켰나 봐?”라고 애굽인들이 하나님을 조롱할 것이라고 하나님을 걱정했다(12).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이기적인 기도가 아니었다. 철저히 하나님만 빛나게 해 주고 싶고(영광), 하나님이 존엄성이 훼손될까 봐 걱정하는 기도였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밖에 없는 기도이다. ⓒ아브라함, 이삭, 이스라엘[야곱]과 약속한 맹세[말씀]를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부각시켰다(13).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허락한 온 땅을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이스라엘을 진멸하면 이 신실하신 약속을 깨는 거짓말쟁이가 된다는 것이다.
결론 - 죄인을 감싸야 하나, 처단해야 하나?
불안할 때 무엇을 찾는가? 우상, 아론은 거부했어야 했는데 동조,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 됨
죄에 대해 모세는 어떻게 했는가? 분노, 가림, 회개하는 자들은 용서 그렇지 않으면 처단, 죄를 지은 이스라엘 용서해 달라고 기도, 중보자 예수님과 대신 탄식하는 성령을 닮음. 하나님의 분노에 대해 하나님의 영광을 걱정하고 맹세를 기억하여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높이는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