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遠遠道(천리원원도)
천만리 머나먼 길에---왕방연
千萬里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여
울어 밤길 예놋다
천만리(千萬里):
서울에서 영월까지는
천만리 만큼이나 멀다는 뜻.
고운님: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된
어린 단종(端宗).
여의옵고: 이별하옵고.
내 안: 내 마음.
예놋다: 가도다.
예다’는 ‘가다’의 뜻.
行 : 녀다(가다)
왕방연 시조에 대한
한역시(漢譯詩)
懷端宗而作時調(회단종이작시조)
단종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시조
千里遠遠道(천리원원도). 천만리 머나먼 길에
美人別離秋(미인별이추). 고운 님 여의옵고
此心未所着(차심미소착). 내 마음 둘 데 없어
下馬臨川流(하다임천류). 냇가에 앉았으니
川流亦如我(천류역여아). 저 물도 내 안과 같아서
鳴咽去不休(명인거불휴). 울면서 밤길을 가더라
청령포 강 건너 나루 옆에는 단종의 유배길과 사형길에 금부도사로 왔던 왕방연의 시비가 있음.
의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단종(端宗)을 영월 청령포(淸冷浦)에 유배시킨 후 슬픔을 이기지 못해 청령포 강가에서 읊은 시조라 한다.
1452년 문종이 승하하자 단종이 13세 나이로 즉위했다.
왕이 작고하면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는데
단종에게는 대비가 없었다.
문종의 왕비가 없었던 것이다.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가 단종을 낳은 다음 날에 산욕열(産褥熱)로 죽었다.
1441년(세종 23)에 문종은 다시 세자빈을 맞지 않았다
문종의 유명을 받은 고명대신(顧命大臣) 황보 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가 주축이 되어 정사를 보살폈다.
1453년 10월 10일 밤 수양대군이 계유정란을 일으키었다.
김종서 황보인을 퇴살(推殺)시킨 뒤 안평대군은 강화도에안치했다가 사사(賜死)하였다.
이 사건으로 수양대군은 정난 1등 공신에 책봉되어 나라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1455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1456년 사육신의 단종복위 운동이 발각되었으며 1457년에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이 내려지는데 책임자가 의금부도사 왕방연이었다.
그는 사약을 받들고 노산군 앞으로 나아가려 하였으나 감히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렸다.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재촉하자 하는 수 없이 뜰에 엎드렸다.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을 때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때 단종을 곁에서 모시던 공생(貢生)이 이 일을 담당하였다.
공생 : 관가나 향교에서 심부름하던 통인과 같은 사람
羅將(나장) : 의금부에서 죄인을 문초할 때에 매질하는 일과 귀양 가는 사람을 압송하는 일을 맡던 하급 관리.
子規樓作 자규루작
端宗大王 단종대왕
月白夜蜀魄啾(월백야촉괴추) 달밝은 밤 두견새 울기에
含愁情依樓頭(함추정의누두) 시름 않고 누각에 기대니
爾啼悲我聞苦(이제비아문고) 네 울음소리 서글퍼 나 듣기 괴롭구나.
無爾聲無我愁(무이성무아추)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도 없을 것
奇語世上苦勞(기여세상고노) 이 세상 괴로운 말을 전하니
愼莫登春三月子規樓(신막등춘삼월자규루) 춘삼월에는 부디 자격루에 오르지 마오
啾(추) : 뭇소리. 새 벌레 울음소리
蜀魄(촉백) : 귀촉도. 두견이.
啼(제) : 울다.
奇(기) : 기탁(寄託)하다.
영월군 남면 광천리 국지산 밑에 청령포가 있다.
동강이 삥 둘러 흐르고 있어 배를 타지 않으면 외부와 단절된 곳이다.
단종(端宗)은 여기서 무서움에 떨며 홀로 지냈다.
1457년에 영월군 관아에 있는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겨 지냈다.
관풍헌(觀風軒) 마당 앞 좌측에는 2층 누각인 자규루(子規樓)가 있다.
자규루(子規樓)는 원래 1428년(세종 10)에 영월군수 신권근(申權近)이 창건하여 매죽루(梅竹樓)라고 부르던 건물이다.
단종이 국지산(菊芝山) 아래 청령포로 유배된 그 해 여름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자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단종은 이 관풍헌에서 지내면서 동쪽에 있는 매죽루(梅竹樓)에 자주 올라 자규시(子規詩)를 읊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자규루(子規樓)”로 이름을 고쳐 불렀다.
자규(子規)는 두견새나 진달래꽃을 이른다.
단종은 사약을 받아 마시고 피를 토하며 자규(진달래)처럼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