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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걸은 길의 대략적인 약도입니다.
이 길 활성화를 위한 송파구청 자문회의 때 몇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거의 지켜진 게 없더군요.
특히 풍납토성 미래지구(풍납백제문화공원)가 노선에서 빠져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스무 분의 회원님들과 럭셔리한 천호역에서 모여 한성백제 시간 속으로 걸었습니다.
거울 속 분들까지 합하면 40명? ^^
이곳은 첫번째 답사지인 풍납토성의 경당지구입니다.
2009년 풍납토성 안의 경당연립 재개발을 위해 사전 발굴조사를 하다가 대규모 유적이 발견되어
큰 소동이 났었던 곳이지요.
풍납토성은 한때 그 존재조차 확실치 않았으나 현재는 '한국의 폼페이 유적'이라는
거창한 수식어까지 붙은 한성백제의 가장 유력한 궁궐터로 떠올랐답니다.
기원전 1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은 총 거리 4km 정도이지만 지금은 서벽 등이 유실되어 2.7km가 남아있습니다.
천년 넘게 잊혀져오던 풍납토성이 자기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입니다.
당시 총 4번의 큰 비가 내렸었는데 그중 두 번의 집중호우로 풍납토성 서벽이 유실됩니다.
이때 서벽만 유실 된 것이 아니라 평균 3~4m 땅 속에 박혀 있던 한성백제의 유물들이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그때 나온 유물들이 청동초두와 금귀걸이, 허리띠, 원형무늬 수막새 등인데 하나 같이 화려하고
비중이 큰 것들이었답니다.
하지만 그때 나온 유물의 상당량은 역시나 일본으로 반출된 것으로 파악됩니다.
아무튼 그런 결과로 일본학자 야유카이 후사노산은 1933년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의 하남 위례성은
이곳 풍납토성이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방을 맞지만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대표 원로인 고 이병도 박사는 풍납토성은
방어가 어려운 평지형이므로 왕성으로 보기 어렵다며 지금의 하남시 춘궁동 일대에 있는
이성산성을 한성백제의 왕도인 하남 위례성으로 지목합니다.
1963년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최초로 전국의 사적지를 지정하게 되는데
이때 풍납토성도 사적 제11호로 지정됩니다. 하지만 이때 지정된 지역은
성벽 뿐이었고, 성 내부와 외곽은 개발에 무방비로 노출되게 됩니다.
1964년 서울대학교 김원룡 교수팀이 해방 이후 최초로 풍남토성 안의 유물 포함층
8군데를 시굴조사하게 되는데, 그때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1.기원전 1세기경 최초 축조되었을 것이다.
2.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3만 대군에 밀려 개로왕이 죽고 웅진으로 천도가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3.단순한 방어용 토성이 아니라 다수의 주민이 거주했고, 반민반군적 읍성으로 보인다.
4.이 성에 살았던 백제인들은 최소한 서기 200년쯤에는 기와집에 거주했다.
하지만 이병도 박사의 이성산성의 하남 위례성 설 때문인지
김원룡 박사 팀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이곳이 한성백제의 왕도였다고는 주장하지 못합니다.
그후로 한동안 풍납토성은 다시 세간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갔고 그 와중에
1981년 독일 바덴바덴의 IOC총회에서 "셰울~~"이 외쳐지게 되지요.
88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정부는 몽촌토성 일대를 거대한 올림픽 지구로 개발하기로 하였고,
몽촌토성을 1982년 7월 22일 사적 297호로 지정합니다.
몽촌토성의 사적지정이 풍납토성보다 18년이나 뒤늦게 그것도 올림픽지구로
개발되는 단계에서 지정된 것은 당시 사적으로서의 몽촌토성 중요도를
간접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몽촌토성은 이후 1984년과 1985년 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토성의 구조가 밝혀졌고,
다양한 토기와 철기유물 500여점이 발굴됩니다.
그리고 몽촌토성의 하남 위례성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몽촌토성의 백제왕도설은
공원으로 예쁘게 꾸며진 몽촌토성이 하남 위례성이길 바라는 마음이 더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1997년 풍납토성에서 한성백제 유적발굴 역사의
전환기를 맞는 작지만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 일어납니다.
1997년 1월 선문대학교 학술조사단이 풍납토성의 지표조사와 실측조사를 하다가
1월 4일 이형구 교수가 지금의 현대리버빌아파트 터파기 현장의 공사가림막을 뚫고
들어가 터파기 공사로 파해쳐진 지하에 다량의 백제토기 파편이 박혀 있는 것을 목도합니다.
(당시에는 공사현장에서 유물이 발견되면 굴삭기로 묻어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합니다.
유물이 발견되면 공사가 중단되고 발굴을 반드시 해야 하므로 쉬쉬하며 묻어버리는 것이지요.
지금도 이런 일이 있다고는 하는데 그때만큼은 아니겠지요)
이 교수팀은 곧바로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 제보하였고, 공사는 중단되고 긴급 발굴이 진행됩니다. 이때 상당히 많은 토기류와 기와파편 등의 유물이 발굴되었고, 그 결과로
풍납토성 안쪽과 토성 가까운 외곽까지도 매우 중요한 유적지임을 당국은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토성 안쪽에서 건축행위를 할 때는 공사에 앞서 반드시 문화재 조사를
거치도록 하고, 특히 터파기 공사에는 고고학 전문가가 입회할 것을 강제하는 행정조치를 하게 됩니다.
이 행정조치의 영향으로 1999년부터 2년간 경당연립 재개발을 추진하던
경당연립주택조합과 시공사가 한신대학교 박물관에 재개발 전 1차 발굴조사를 의뢰하게 됩니다.
약 2천평에 해당하는 넓이에 1차 발굴조사를 하는데 말입니다.
여기서 수천 점의 유물과 우물터가 나오는데, 결정적으로 제사를 지내던 신전터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터가 제사 공물로 받쳐진 것으로 추정되는 10마리 이상의 말머리뼈가 발견됩니다.
여기에 귀족들이 사용하던 토기와 엄청난 유물들이 함께 쏟아져나옵니다.
이로 인해 재개발이 늦어지자 2000년 5월 13일 경당지구 재건축 일부주민이 굴삭기를 동원하여
유적을 무단으로 파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사건은 보름 뒤 열린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 경당지구 2천평 전체에 대한 사적지정 예고를 하게 됩니다.
(사적지정이 예고되면 거의 지정까지 간다고 하네요)
재개발이 무산되자 한신대학교 박물관 측은 발굴비용 조차 받지 못했다는데,
이후 못받은 발굴비용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경당지구는 2010년 경당역사공원으로 개장되어 우리가 이렇게 만날 수 있답니다.
그리고 경당역사공원 옆에 자리한 미래마을 재개발지구도 초대형 건물터와 주거지가
발굴되면서 사적으로 지정예고되어 수년 간 발굴을 거치고 2015년 지금의
풍납백제문화공원으로 단장을 하여 우리 앞에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경당지구와 달리 근래에 개장된 공원이라 발굴유적에 대한 것들이 나름 생동감 있게 나열되어 있습니다.
굴립식 건물이 있었을 곳입니다.
주춧돌이 있어서 대형 창고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건물터 사진은 제가 찍지 못했군요.
해설하랴 사진 찍으랴 길 안내하랴 나름 바빴답니다. ^^;
다시 토성 쪽으로 나와 걷기 편한 토성 산책길을 걷습니다.
정부는 풍납토성 안쪽을 장기적으로 모두 매입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서벽 쪽에 자리한 삼표레미콘 이전과 관련하여 송파구와 삼표레미콘이 소송중이예요
위 사진 왼쪽 아파트 307동에 걸린 플랜카드는 이 소송의 2차 판결에서 송파구가
승소한 것을 축하하는 내용이었습니다.
.
삼표레미콘은 옛 한전부지에 추진중인 현대본사 건축에 참여할 수 있는 호재를 더욱 굳건히 하고 싶어
지금의 자리를 고수하고 싶고, 송파구와 서울시는 2020년 풍납토성 세계유산 등재 추진을 위해
삼표레미콘을 이전시키고 그곳을 발굴 복원하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사실 입장을 바꾸어놓고 생각하면 어느 누구의 손을 들어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풍납토성 안에 사는 주민의 이야기를 들으면
"유적지 발굴도 좋지만 그로 인해 여간 불안한게 아니다"라고 말한답니다.
아무튼 정부는 이곳의 땅이 나오는대로 하나씩 매입하는 듯 하더군요.
현재 서울시는 우선적으로 5137억원의 예산을 들여 토지를 최대한 매입하겠다는 입장입니다.
100년이 걸리든 천년이 걸리든 천천히 순리대로 해 나아가는 게 좋겠네요.
199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풍납토성의 성벽축조방식을 조사하기 위해 동벽 남쪽 2개소를 절개합니다.
지금 보시는 사진이 당시의 절개 단면도입니다.
풍납토성은 나무로 박스 같은 형태를 만들고 그 안에 뻘흙과 모래, 나무껍질, 나뭇잎 등을
시루떡 얹듯 켜켜이 쌓고 나무박스를 블럭 쌓듯이 올려서 만든 판축토성으로 밝혀졌습니다.
판축공법이 얼마나 대단한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성벽절개 조사 후 다시 굴삭기로
토성을 복구하여 단단히 다져놓은 지 1년 반 만에 조사했던 부분이 다시 무너져 내렸답니다.
한성백제 당시 쌓은 토성은 무려 2천년을 버티었는데 말이지요.
당시 조사했던 토성단면은 한성백제박물관에 1:1 형태로 그대로 재현되어 있어 이해하기가 아주 편합니다.
갑자기 다음에 걸을 때는 이번과 거꾸로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느낌이 다를 것 같아요.
그리고 찾아간 몽촌토성.
이름하여 꿈마을성이지요.
몽글몽글한 곡선이 참으로 아름다운 꿈 같은 흙성입니다.
몽촌토성 일대가 올림픽공원으로 개발되지 않았다면 이곳도 주택가로 바뀌어 버렸을 지 모르겠어요.
이곳은 1992년 개관한 몽촌역사관입니다. 한성백제의 다양한 유물을 전시하던 곳인데,
몇 년 전에 한성백제박물관이 열리면서 지금은 어린이대상 박물관으로 용도변경되어 있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곳이 한성백제박물관보다 한성백제 해설하기에는 더 용이하더라고요.
입구에 있는 서울 일대의 미니어쳐를 통해 당시 한성백제의 영역이 지금의
우면산 자락인 서초구까지 뻗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해설로만 말씀 드린 이성산성의 위치도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리고 몽촌토성 위를 걷습니다.
개발의 중심 속에 이런 길이 남아 있다니 말 그대로 꿈마을을 걷는 듯합니다.
제2롯데월드 건물을 볼 때마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샤우론의 눈이 걸려 있던 그 탑이 생각나요.
저만 그런가요? ^^
비어 있어서 채울 수 있다는 것, 좋은 것 같아요.
사계절 언제라도 좋고, 한 밤중에도 걷기가 참 좋은 길입니다.
봄바람 벚꽃 날리는 계절에 밤벚꽃 놀이를 여기서 하고 싶네요.
올림픽공원의 숨은 명소인 자작나무숲을 찾아서...
인제 자작나무숲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만남 그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자작나무입니다.
한성백제박물관입니다.
한성백제박물관은 풍납토성의 절개면을 1:1로 재현한 공간이 매우 특색 있습니다.
마침 영산강 유역의 고대문화를 만날 수 있는
영산강 옹관문화 특별전이 열리고 있네요.
그곳 영산강 반남면 신촌리 고분군에서 발굴된 금동관입니다.
백제의 땅이기도 했고, 마한의 땅이기도 했을 영산강 유역의 고대문명사회가 손에 잡히는 듯 합니다.
박물관 2층의 포토존에서 일기일회님이 코뿔소와 승부를 내고 계시네요. ^^
비류와 온조가 어머니 소서노를 모시고 남쪽으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러 떠나는 장면입니다.
이날 설명드린 바와 같이 백제의 건국설화는 총 세 가지가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중 두 가지인 1.온조설화와 2.비류설화는 삼국사기(1145년)에 나오는데
삼국사기 편찬자들도 두 가지를 다 기록하고 무엇이 맞는지는 모르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3.구태설화라고 하여 중국의 수나라 역사서인 수서(621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온조설화: 주몽이 졸본부여왕 둘째딸과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고, 졸본부여왕이 죽자
왕위를 물려받는다. 이후 이전 북부여에서 태어난 주몽의 큰 아들 유리가 찾아와 태자로 임명한다.
이에 나중 일이 두려워 비류와 온조는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가니 백성 가운데 따르는 자가 많았다.
북한산에 올라 지세를 살펴 온조는 강 남쪽의 위레성에 도읍하고, 10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았으며
나라 이름을 십제라고 하였다.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자리를 잡은 미추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수 없었는데, 위례에 돌아와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마침내 부끄러워 후회하다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나중에 백성들이
올때 즐거이 따라왔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 또한 그 핏줄이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로 삼았다.
2.비류설화: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으로 그의 아버지인 우태는 북부여의 왕인 해부루의 손자다.
어머니인 소서노는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이다. 소서노가 우태와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를 차례로 낳는다.
하지만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아들들을 데리고 졸본으로 돌아온다. 이후 주몽이 부여에서
본인이 용납되지 않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고구려라 불렀다.
소서노는 주몽과 재혼하여 왕비가 되었는데, 소서노가 국가의 기틀을 열고 다지는 데 자못 내조가
컸으므로 소서노를 총애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아들처럼 대햐였다.
하지만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나았던 아들 유리(유유)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고 왕위를 잇게 했다.
이때 비류가 아우인 온조에게 이르기를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가며 도와 대업을 이루니 그 노고가 많았다. 그런데 대왕이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유(유리)의 것이 되었으니 우리가 이곳에서는 한낫 혹과 같아서 답답할뿐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여
아우와 어머니를 모시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살았다.
3.구태설화: 백제의 선조는 고려국(고구려)에서 나왔다. 그 나라 왕의 시녀 한 명이 갑자기
임신하여 왕이 죽이려하자 시녀가 "마치 달결처럼 생긴 물건이 내게 와서 감응하더니 임신했다"고
고하였다. 왕이 풀어주었더니 나중에 사내아이를 나았는데, 뒷간에 버렸으나 오래도록 죽지 않자
신기하다고 생각해 기르라고 명령한다. 그 이름을 동명이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자라고 나서
고려왕이 미워하자 동명은 두려워하더니 도망해 엄수에 이르렀는데, 부여사람들이 모두
그를 받들었다.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라는 자가 있어 어질고 신의가 있었는데, 처음으로 대방이란
나라의 옛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가 딸을 시집보냈으며, 점차 번성하더니 동이의 강한 나라가 되었다.
처음에 백 개의 집이 바다를 건넜다 하여 백제라고 불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백제 건국 설화는 1번과 2번 설화를 적당히 섞은 것입니다.
온조설화에는 소서노가 나오지 않고, 비류설화에서는 온조와 비류가 우태의 아들로 나옵니다.
이 즈음에서 일본의 역사서는 백제 시조를 어떻게 기록 했는지 살펴보죠.
일본의 역사서 속일본기(697년)에는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대왕은 하백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하여 태어났다.
무릇 백제의 태조 도모대왕은 태양신이 몸에 내려온 분으로 부여에 머물며 나라를 세웠다.]
속일본기에서는 백제의 시조로 도모(都慕)를 들고 있는데,
설화의 내용은 고구려 주몽(동명성왕) 설화와 매우 흡사합니다.
도모라는 발음도 동명왕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합니다. .
하지만 일본의 성씨 기원을 기록한 고문서 신성찬씨록(815년)에는 추모왕을 명확히 별도로
표기하고 있고 두 인물이 동일인이 아님을 이야기 합니다.
결과적으로 부여를 건국한 것은 동명왕이고,
고구려를 건국한 것은 동명성왕이며,
(일본기록에 의하면) 백제를 건국한 것은 동명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부여계통의 국가에서 동명왕은 공통되게
시조에게 붙이는 호칭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합니다.
1970년대 들어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분석한 학자들이
우태, 비류, 주몽, 온조, 근초고계로 나누어 왕실 혈통의 교대 가능성까지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적극 받아들여 온조왕대를
초기로 하여 BC18년을 건국 시기로 봅니다.
말이 길어졌습니다만 아무튼 백제의 시조가 누구인지 진실은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와 중국 역사서, 일본 역사서가 제각각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특히 중국과 일본의 역사서는 삼국사기보다
200년에서 500년 앞서 쓰여진 것이므로 어떤면에서
더 신빙성을 가질 수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다양한 백제식 무덤양식입니다.
왼쪽부터 땅을 파고 널을 얹고 돌과 흙을 쌓는 움무덤이고
두번째가 여러 개의 관을 시기에 따라 매장하는 흙무지 무덤입니다.
중앙의 석촌동 고분군에서 볼 수 있는 돌무지무덤이고, 오른쪽이
웅진과 사비에서 볼 수 있는 돌덧널무덤과 돌방무덤입니다.
왼쪽이 돌덧널무덤이고, 오른쪽이 돌방무덤입니다.
백제의 왕릉은 입구가 있는 돌방무덤이 많아서 도굴에 특히 취약했다고 하네요.
해상무역왕국이었던 한성백제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3층 전시실입니다.
6세기 전반에 양나라 당시 각 나라의 사신들을 그린 양직공도를 바탕으로 만든 움직이는 양직공도입니다.
왼쪽에서 두번째가 일본 사신이고, 네번째가 백제의 사신 그림입니다.
행색의 차이가 그 나라 문화수준의 격을 보여주지 않을까요?
위의 것은 양직공도 모사본이고,
아래의 것은 당염립본왕회도로 양직공도를 다시 그린 모사본으로 진품은 대만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지요.
실물크기의 모사본이 전시되어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당염립본왕회도에는 백제, 신라, 고구려 사신이 모두 그려져 있다는 점입니다.
당식의 복식을 연구하는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는 셈이지요.
왼쪽에서 두번째가 신라의 사신으로 가장 꽃미남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신라의 화랑이 사신으로 온 것이 아닌가 싶군요. 화랑을 뽑을 때 외모도 보았다던데... ^^;
왼쪽에서 네번째가 고구려의 사신입니다.
백제 사신은 한참 앞쪽에 있어서 이 사진에는 나오지 않는군요.
상설전시이므로 이때 못보셨다면 다시 가서 보시면 좋겠습니다.
인원이 많아서 박물관 내에서 제가 함께 다니면서 설명드리기에는 어려움이 좀 있었습니다. ^^
피젼님이 추천해주셔서 정말 맛나게 먹었던 동경 돈까스입니다.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다시 가보고 싶네요. ^^
동경돈까스까지 한참을 걸어갔기에 발견할 수 있었던 정말 멋진 메타세쿼이어길입니다.
다음에도 한성백제길을 걷는다면 이 루트를 경유해야겠어요. ^^
방이동 고분군입니다.
이미 샅샅이 도굴 된 상태이지만 1970년대 발굴조사할 때만해도 신라 토기 파편들이
출토되어 신라시대 무덤으로 보다가 한성백제 지역이 매우 넓게 퍼져 있었다는 증거가
곳곳에서 나오면서 백제시대 고분군이라는 주장이 커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신라보다는 한성백제 쪽으로 힘을 실어주는 편이 더 영향력 있겠지요. ^^
이 아름다운 곡선이 죽음의 공간임에도 우리의 맘을 편안하게 합니다.
방이동고분군에서 40분 정도를 걸어서 도착한 석촌동 고분군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총인 이곳 3호분은 동서 길이가 50m에 달합니다.
당시 이정도 무덤을 쓸 수 있는 왕이라면 무덤 축조시기와 맞물려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이미 도굴된지 오래 되었고, 그 이후에도 고분 위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사는 등 훼손이 심해 그 증거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덧붙임) 이 장대한 무덤을 두고 한성백제의 마지막 왕이 개로왕이 바둑으로 이간계를 편
고구려의 첩자 도림(승려)의 꾐에 빠져 궁궐을 호화롭게 고쳐짓고, 홍수 방지용 대규모
둑을 쌓고, 가매장 상태였던 아버지 비유왕의 무덤을 크게 짓는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일 때 쌓았던 비유왕의 무덤일지 모른다는 설도 있답니다.
당시 비유왕이 가매장 상태였던 것은 비유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 정적들을
개로왕이 아직 정리하지 못하여서입니다.
즉, 고구려가 아차산성을 점령하여 코 앞까지 와 있는 상태인데도 비유왕의 무덤을
크게 조성했다는 것은 내부 권력투쟁을 부추키는 자중지란의 계책이라고 할만합니다.
그리고 석촌호수를 한 바퀴 돌아...
이 석촌호수는 과거 광진교부터 몽촌토성 서쪽을 거쳐 잠실야구장 부근까지
흐르는 한강의 샛강 혹은 본류였다지요?
근래 들어 송파구 쪽에 생긴 싱크홀들이 대부분이 이 물길 언저리라고 하네요,.
결과적으로 석촌호수는 1969년 한강본류의 정비개발을 하면서
매립을 하다가 남은 큰 둠벙이라고 할까요?
이날의 마지막 목적지인 삼전도비입니다.
공식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이지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던 인조가
청태종 앞에 머리를 조아렸던 수난의 역사를 기록한 비석입니다.
비석 앞면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은 만주글자, 뒷면은 한자가 각각
새겨져 있습니다. 17세기 세 나라의 언어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하네요.
당시 문장가들은 비문 짓기를 꺼렸으나 부제학 이경석이 불가피한 상황임을 알고
비문을 지었고, 도총관 오준이 글을 썼다고 하네요. 그 역시도 저는 용기라고 봅니다.
이 비는 굴욕적인 내용이므로 몇 번을 땅에 묻혔다가 다시 나오곤 합니다.
결과적으로 1963년 홍수로 땅에 묻혔던 비석이 드러난 후 사적으로 지정되어
2010년에 원래 위치와 가장 가까운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어찌된 일인지 이 비석이 땅에 묻혔다 다시 나오는 과정이 기록마다 다르네요.
생각보다 긴 시간을 걸었던 날이었습니다.
함께 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시 좋은 길에서 의미있는 시간으로 즐겁게 뵙겠습니다. ^^
첫댓글 3호고분이 백제 최전성기를 만든 근초고왕이일수있다고 하니 뭔가 새로운것을 안것같아 기쁘네요, 하루종일 함께하며 즐거웠습니다
자주 뵈어서 좋네요. ^^ 화이팅!!
바쁘신 중에 시간을 쪼개어 쓰신 후기
잘 읽었습니다
백제문화를 재조명 해보며
새로운 것을 알게 된 것에 감사드립니다~♡
나중에 백제부흥군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임존성 여행까지 다녀와야 백제는 마무리가 될 듯 하네요.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유물을 잘 보는 방법은 '유심히' '세심히' 그리고 '열심히' 관찰하는 것이라고 큐레이터가 말하더군요.
거기에 저는 '자주 보는 것'이라고 덧붙이고 싶습니다.
발견이님 후기를 통해 그 말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근무로 참석하지 못해 아쉽고 궁금했는데 자세한 설명을 통해 더 많이 배우고 공부하고 갑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또 이 후기를 통해 친구가 보고 싶기도 하네요~~ㅎ)
자주가서 보실 수 있길 바랄께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못뵈어서 서운했어요
@일기일회 저두요~~ㅎ